809· [LAST STAGE] 오랜 날 오랜 밤
허공에서 최후의 빛과 어둠이 충돌했다·
내가 모아 쏘아내는 빛 ‘세계의 의지’·
그리고 그것을 막아내는 외신들의 최후의 저항· 그 짙은 어둠·
고오오오오···!
빛의 격류에 둘러싸인 채 ‘세계의 의지’를 쏟아내며 나는 이를 악물었다·
이 ‘의지’ 속에는 이곳 영계에서 나와 함께하는 결사대의 의지뿐만 아니라·
인세 최후의 결전에 나선 동료들의 의지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의지가 깃들어 있다·
모두가 자기 운명의 진정한 주인이 되기 위해·
모두가 꼭두각시 속박을 벗어나 오롯한 자유를 얻기 위해·
우리 세상을 이루는 문명의 기반을 포기하고 마법의 온기를 포기하고 내 깃발을 뒤따라 차가운 황야로 나서주었다·
나를 믿고 따라주는 이 세상 전체의 명운이 나의 깃발에 나의 손끝에 걸려 있다·
질 것 같으냐···!
“조금만 더····”
투둑 투두둑····
격렬한 전투를 버티지 못한 [옥새 반지] 위로 실금이 조금씩 벌어지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그리고 아주 조금씩 빛이··· ‘세계의 의지’가 밀려나기 시작했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이미 우리 세계로부터 모을 수 있는 의지는 모두 모은 상태· 이것이 최대 출력이다·
이것으로도 외신들의 압제를 이겨낼 수 없단 말인가?
‘누군가····’
나는 필사적으로 빌었다·
‘누군가 아주 조금이라도 좋으니··· 내게 의지를 보태준다면···!’
그때였다·
화아아아악···!
미약하지만 선명한 의지의 기류가 내 등 뒤에서부터 불어왔다·
그 기류는 ‘세계의 의지’에 합류했고 내가 내뿜는 빛이 조금씩 강해졌다· 반면 외신들의 어둠은 최후의 저항은 반비례로 조금씩 약해졌다·
나는 놀라서 새로 합류한 의지의 출처를 살폈다·
이 의지를 내게 빌려준 이들은 다름 아닌····
“···!”
저 하늘 너머의·
무수한 외신들 중 일부였다·
온통 나를 죽일 듯한 악의로 노려보는 저 사나운 눈동자 속에서 몇몇 눈동자가 나를 향해 응원의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들이 자신의 의지를 내게 보태준 것이다·
‘아·’
그리고 나는 그 시선들이·
아주 익숙하고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이 부조리하기 짝이 없는 ‘멸망유희’라는 이름의 게임 속에서·
기준을 벗어날 만큼 많은 최고등급 보상을 주고·
상황에 맞추어 꼭 필요한 도구와 세트 장비 힌트를 주고·
죽고 망하고 터지라며 악의를 퍼붓던 다른 외신들 사이에서 나를 이 세계를 조용히 선의로 지켜보던·
시스템의 한계 안에서 어떻게든 나를 도우려고 안간힘을 썼던····
이 긴 시간 동안 나를 응원해 준 바로 그 외신들이었다·
『뭐···?!』
기함한 다른 외신들이 소리쳤다·
『무슨 짓을 하는 거냐 네놈들!』
『어째서 개미의 반역을 돕는 거냐?!』
『저들의 불행이야말로 우리의 기쁨일진대! 저들의 비극이야말로 우리의 양분일진대! 어째서!』
나머지 외신들은 분노했지만·
저 소수 외신들이 의지를 빌려준 순간 승기는 갈렸다·
길항을 이루던 빛과 어둠의 충돌은 이제 점차 빛의 승기로- ‘세계의 의지’가 밀어내는 쪽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아아아아아-!”
나는 마지막 힘을 쥐어 짜내며 주먹을 앞으로 내질렀고·
번쩍-!
빛이 완전히 어둠을 밀어냈다·
‘세계의 의지’가 이계로 통하는 통로를 완전히 하얗게 물들였다·
마침내 모든 외신들이 버티지 못하고 물러섰고 다음 순간·
쿠구구구궁···!
하늘이 닫혔다·
완전히 닫힌 하늘 위에 나는 마지막 공정을 가했다·
촛농을 녹여 인감으로 편지를 봉하듯·
내게 남은 마지막 의지의 힘을 모아서 닫힌 통로 위를 봉한 뒤··· [옥새 반지]를 찍었다·
쿵-!
‘세계수호전선’의 무상징이 하늘에 찍히는 것과 동시에 완전히 부서진 [옥새 반지]가 금빛 조각이 되어 흩뿌려졌다·
하늘이 완전히 닫히고 통로는 폐쇄되었다·
닫힌 하늘 너머로 외신들이 뒤늦게 쏟아낸 무수한 손길이 마구 내려 찍혔다· 유리창 같은 장벽 너머로 분노에 찬 주먹과 손바닥이 휘둘러졌다· 그러나 더는 소용없는 일이다·
『···!』
『···!』
『···!』
저 하늘 멀리 외신들의 격노 어린 포효가 울려 퍼진다·
들끓는 분노와 허탈함 그리고 일말의 경탄이 담긴 그 시선들 사이에····
조금 전 나를 도왔던 아니·
그동안 이 기나긴 디펜스 게임을 하는 내내 나를 도왔던 시선들이 있었다·
그 오랜 날 오랜 밤을 나와 함께해 준 그 시선들이·
“····”
룰을 깨고 룰의 위에 서서 편견 없이 세상을 보려 노력했지만·
사실 여전히 나는 알 속에 틀어박혀 있었나 보다·
알 밖의 세상은 모두 악의로 가득하다고 생각했다· 누구 하나 내 편은 없고 모두가 내 적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고마워·”
어느 곳에도 선의는 있었다·
가장 끔찍한 적이라 여겼던 상대에게조차 나를 돕고 위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 사실이 눈물 나도록 기뻤다·
“정말 고마워····”
내가 살아가는 지금까지의 그 모든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고 응원해 준 모든 이들에게·
나는 진심을 담아 그렇게 말했다·
“고마워요· 나를 포기하지 않고 지켜봐 줘서·”
그들이 나에게 무어라 속삭였다·
통로가 막힌 탓일까· 더 이상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분명히 느낄 수 있다·
그동안 다른 외신들은 악의로 이렇게 속삭였다· 나의 게임 오버를 소망하며 이렇게 빌었다·
죽고 망하고 터지라고·
하지만 나를 응원해 주는 이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살아라·
자라나라·
피어나라·
희망하라·
사랑하라·
기뻐하라·
새싹을 움트게 하라·
몸을 던져 삶을 두려워 마라!
“····”
눈물을 닦아내고·
그들에게 환하게 미소해 보인 다음·
나는 나머지 외신 전체를 마주하고 섰다·
적의와 분노와 경탄과 애틋함이 뒤섞인 그들 모두의 시선을· 당당히 마주하며-
“···다음에 서로가 이 문을 두드릴 때는·”
나는 힘주어 말했다·
“어느 한쪽을 더 낮은 존재로 내려다보는 게 아니라 동등한 눈높이로 대해 주기를·”
나는 싱긋 웃었다·
“그만큼 서로 성숙해져서 서로를 존중할 수 있기를·”
언젠가 그런 날이 온다면·
기쁜 마음으로 문을 열고 서로 눈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눌 순간이 오겠지·
“서로가 서로를 위해 대화하는 순간이 오기를 진심으로 빌겠습니다·”
우리는 오늘 서로 죽음으로 맞섰으나·
마냥 적의로 다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나눌 수 있음을 또한 증명했기에·
언젠가는 같은 방향을 보고 나란히 서는 날이 올 수 있으리라·
그리 믿으며 나는 내 목에 손을 올렸다·
튜토리얼 스테이지 때부터 내 목에 차여 있던 초커 형태의 목걸이가 잡혔다·
‘반역자의 목걸이’·
나는 그 목걸이를··· 나의 스트리밍 장비를 시원하게 풀어 벗었다·
그리고 3년 만에 훤히 드러난 목을 한번 쓸어낸 뒤·
“후!”
깊게 숨을 들이쉬고·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고 고개를 조아리고 최대한의 마음을 담아··· 하늘을 향해 예를 표했다·
그것은 춤이 끝난 뒤의 인사였다·
긴 연극의 막을 내리며 고별을 알리는 배우처럼·
마음을 다한 인사를 끝낸 뒤 다시 허리를 세우고·
나를 바라보는 점차 흐릿해지는 그 수많은 시선들을 향해 속삭였다·
“Thank you for playing·”
플레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의 긴 모험을 함께····
하늘 위로 오로라가 커튼처럼 번졌다·
나는 영계의 하늘이 완전히 오로라로 뒤덮이고 마지막 외신의 시선마저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그곳에 서 있었다·
“····”
긴 극의 끝에 선 배우처럼 눈시울을 붉힌 채 몇 번이고 눈가를 쓸어낸 다음·
이윽고 천천히 뒤돌아섰다·
무대는 끝났다·
이제 삶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
영계 밑바닥·
에버블랙의 뿌리 아래·
《····》
처참하게 부서진 마왕은 그곳에 쓰러져 있었다·
영혼 그 자체가 너덜너덜하게 터져나간 채 마왕은 죽어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최후가 임박했음을 느꼈다·
쿵! 쿠구구구궁!
그때였다·
영계 전체가 거센 진동과 함께 붕괴하기 시작했다· 애쉬가 이계와 통하는 문을 완전히 봉하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반역의 성공과 함께 외신들이 이 세계에 간섭하기 위해 만들어낸 인위적인 공간- 이곳 영계는 자연스럽게 소멸하는 수순이었다·
《····》
부서진 에버블랙의 조각들이 마왕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마왕은 흐린 눈으로 무너지는 세계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때였다·
사박· 사박·
흐릿한 발소리가 들렸다·
힘겹게 고개를 돌린 마왕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쳤다·
“····”
그곳에는 한 여인이·
너무도 낯익으면서도 너무도 낯선· 그런 그리운 여인이 무감정한 얼굴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걸로 만족하나요?”
한때 여신이라 불렸던 하지만 이제는 평범한 존재가 된 여인이 물었다·
“당신의 목숨을 모두 바쳐가면서까지 이렇게 하나의 세계를 부순 것으로··· 만족하나요?”
《물론·》
마왕의 하얀 균열 같은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걸렸다·
《이 이상 만족스러울 수가 없다·》
여인의 몸에는 더 이상 신성한 광휘도 초월적 거룩함도 남지 않았고·
몸에 휘감겨 있던 가시나무도 꺼지지 않던 불길도 돌팔매질에 입은 상처도 모두 사라진 상태였다·
그저 평범한 하나의 영혼이 되었을 뿐·
《결국 성공하지 않았나·》
마왕은 부서진 손을 들어 여인을 가리켰다·
《너는 나에게 타락한 거야····》
여인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바보 같은 사람·”
쿵 쿠구구구궁···!
다시금 세상이 무너지는 소리를 냈다·
영계를 이루는 지반이 꺼지고 하늘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얀 백사장이 분수처럼 치솟고 투명한 바다가 높이 출렁이며 해변을 휩쓸었다·
마법의 빛을 잃은 검은 가시나무가 산산이 터져나가며 비처럼 쏟아졌다·
그 비를 맞으며 여인은 쓰러진 마왕의 옆에 다가와 가만히 앉았다·
두 사람은 나란히 멸망하는 세상을 바라보았다·
《이제 너는 어떻게 되지?》
“저승으로 가겠지요·”
여인은 담담히 답했다·
“그리고 다시 태어나고 다시 죽으며 그렇게 윤회하며 무수한 삶을 살아갈 거예요·”
《그렇군····》
“그리고 당신은·”
여인은 마왕의 부서진 얼굴을 살피며 속삭였다·
“애초에 이 세계의 영혼이 아니니 아마도 이대로 소멸하겠지요·”
《····》
“만에 하나 소멸하지 않고 그 영혼이 이곳에서 윤회한다 해도 당신은 너무도 많은 악행을 저지른 탓에··· 그 죗값을 모두 치르려면 영원에 가까운 시간이 걸릴 테고요·”
《소멸한다 해도 상관없다· 영원히 벌을 받는다 해도 상관없다·》
마왕이 다시금 웃었다·
《나는 내 삶의 목적을 찾았고 그것을 이뤘다· 그걸로 족해·》
“····”
잠깐의 침묵 뒤·
“만약 당신이 소멸하지 않고 만약 당신이 영원에 가까운 시간 동안 모든 죗값을 치른다면·”
여인은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그 먼 미래에 만약 우리가 다시 만나는 순간이 온다면· 그때는··· 웃으며 인사해 줄게요·”
멍하니 그런 여인을 응시하던 마왕이 물었다·
《그건 동정인가?》
“아니요·”
여인이 얼핏 웃었다·
“그냥 약속이에요·”
마왕도 얼핏 웃었다·
《그런 건가·》
“그런 거예요·”
무너지는 세상 아래 여인은 손을 뻗어 마왕의 그림자 같은 손을 잡았다·
오랜 악연의 끝에서 두 사람은 그렇게 한참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런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빛을 잃은 가시나무가 끝없이 쏟아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