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5· [LAST STAGE] 운명의 주인 (3)
인간성을 살라먹는 두 가지 힘 신성화와 야수화를 모두 다루고·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무구 두 자루를 하나로 합쳐 그 능력을 온전히 끌어내고·
전신이 강림하기라도 한 것처럼 집념 어린 일보로 걸음을 내디디며 의지 서린 일격을 내찌른다·
루카스는 그야말로 세계가 선택한 주인공답게 싸웠다·
일전에 애쉬가 호언장담했던 대로 자신의 잠재력을 한계 너머까지 개화한 루카스는 틀림없이 최강의 기사였다·
그러나-
“····”
악몽의 주인으로 거듭난 ‘잠들지 못하는 호수왕녀’는 무적(Invincible)·
그녀는 세상에 구현된 악몽의 총집이며 인격화된 멸망이었다·
애초에 싸우거나 맞서 밀어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런 적장을 상대로 루카스는 자그마치 수십 합을 버텨냈다· 한낱 인간이 이룩한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전과(戰果)였다·
루카스가 든 빛의 대검이 ‘잠들지 못하는 호수왕녀’의 손에 들린 어둠의 대검을 한번 막아낼 때마다 외신들의 눈이 경악으로 부릅 뜨였다·
하지만 기적이란 결국 일시적인 것·
절대적인 전력에서 너무도 차이가 났다· 영원히 버텨낼 수는 없었다·
이 최후의 지연전도 끝이 다가왔다·
“···하아아····”
피투성이가 된 루카스의 입가로 다시금 하얀 입김이 솟았다·
현재 루카스는 움푹 찌그러진 크로스로드의 성문에 기대어 서 있었다·
직전 ‘잠들지 못하는 호수왕녀’의 일격을 받아내고 뒤로 나가떨어져 성문에 등부터 포탄처럼 내리꽂힌 것이다·
루카스의 손에는 여전히 빛의 대검 [별을 향하여]가 굳건하게 쥐어져 있었다·
하지만 나머지 모든 장비는 흉하게 파손된 채였다·
건틀릿 장화 흉갑 견갑 배갑- 갑옷 [흑린]은 부위를 막론하고 모두 너덜너덜했고 부서진 갑옷 안쪽 육체에서 피가 흥건하게 쏟아졌다·
‘한 번만 더·’
흐트러진 금발 끝에 핏물이 방울져 맺혔다가 뚝뚝 떨어졌다· 어둠의 검에 베인 몸에서 전에 느껴본 적 없는 끔찍한 고통이 내달렸다·
하지만 여전히 새파란 두 눈은 칼끝처럼 날카로운 빛을 뿌렸고 그의 의지는 조금도 손상되지 않았다·
‘한 번만 더 막아·’
루카스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저 악몽의 주인을 영원히 막아낼 수는 없으리라는 것을·
그러니까-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 계속해서····
투학-!
다음 순간 ‘잠들지 못하는 호수왕녀’가 돌진해 왔다· 그녀의 손에 들린 어둠의 검이 맹렬하게 소용돌이쳤다·
루카스는 이 격전의 와중에도 검리(劍理)를 깨우치고 있었다·
저 압도적인 어둠의 검 앞에서 어떻게 맞서야 조금이라도 더 버틸 수 있을지 그는 계속해서 체화해 냈고····
빛과 어둠의 두 자루 검이 엉키며 이번에도 적장의 공격을 버텨낼 수 있었다·
콰과과광!
루카스는 버텨냈지만 등을 기대고 있던 성문이 터져나갔다·
떨어진 성문과 함께 루카스는 요새 안쪽으로 나가떨어졌다· 루카스는 다시금 바닥에 검을 박고 빠르게 균형을 되찾으려 했지만 그러고도 한참을 밀려나야 했다·
“큭···!”
루카스는 이를 갈았다·
끝내 성벽 내부로 적장이 들어서고 만 것이다·
성문이 떨어져 부연 먼지가 이는 성벽 입구를 통해 사박 사박 하는 발소리가 울렸다·
다음 순간 먼지가 돌풍과 함께 개이며 적장- ‘잠들지 못하는 호수왕녀’의 모습이 드러났다·
적장의 사뿐한 발걸음이 요새 안쪽을 밟았다· 루카스는 이를 악물고 검을 다잡았다·
다시 한번·
한 번으로 안 되면 두 번 두 번으로 안 되면 세 번-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계속해서 포기하지 않고 시도하면 될 일이다·
그러니까 다시 한번····
“···?!”
그러나 직후· 루카스는 자신의 두 무릎이 땅에 닿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눈치챘다·
정신은 아직 버텨내고 있었으나 육체가 먼저 한계에 달한 것이다·
‘일어서!’
제멋대로 주저앉아 버린 두 다리를 주먹으로 내려치며 루카스는 이를 악물었다·
‘움직이란 말이다 망할 다리!’
그러나 부들거리며 떨리는 두 다리가 힘겹게 다시 일어서기도 전에 적장은 다시금 가까워지고 있었다·
루카스가 무너진 자세로라도 검을 휘두르기 위해 두 손에 힘을 준 순간-
탓!
누군가가 그의 앞에 달려와 섰다·
반짝이는 백금발 눈부신 백색의 갑옷 그리고 방패와 기병창·
에반젤린이었다·
“함께!”
루카스가 무어라 하기도 전에 에반젤린이 당차게 말했다·
“혼자 감당하지 마요· 함께 견뎌내 줄게요 그러니까····”
돌아본 에반젤린이 눈부시게 웃었다·
“함께 이겨내요···!”
최선두에 서서 방패를 세운 에반젤린의 좌우로·
크로스로드에 소속된 모든 방패전사가 그리고 방패 든 병사들이 달려와····
단 몇 초 만에 한데 방패를 뭉치고 서서 완벽한 방진을 형성했다·
‘잠들지 못하는 호수왕녀’와 루카스가 격전을 벌이는 동안 나머지 괴수들은 전역을 이탈했다· 그 주인의 전투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
하지만 괴수전선의 사람들은 루카스를 도와 싸우기 위해 작전을 수립했고 뛰어들었다·
“···!”
루카스는 자신의 앞에 생겨난 ‘방패’를 보며 퍼뜩 현재 상황을 깨달았다·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에반젤린의 어깨 위에 조심스럽게 올렸다·
화아악···!
그의 몸에 휘감겨 있던 황금빛 오오라가 에반젤린에게 번졌다·
기다렸다는 듯 에반젤린은 자신의 방패를 바닥에 힘차게 찍으며 마지막 마력을 모조리 쥐어짜 그녀의 궁극을 발휘했다·
[최후의 요새]·
방진을 이루어 선 모든 사람들 앞에 황금빛 마력의 방패가 맺혔고 이윽고 한데 합쳐졌다·
완성된 거대한 황금색 방패 위로 쇄도해 온 ‘잠들지 못하는 호수왕녀’의 검격이 내리꽂혔다·
쾅-!
어둠의 검은 소리를 내지 않았으나 그 검에 직격당한 방패는 파괴되며 비명을 토했다·
최선두에서 직접 공격을 받아낸 에반젤린의 방패가 산산이 터져나갔다· 방패뿐만이 아니라 에반젤린의 왼팔 전체가 갈가리 찢기며 사방으로 핏물을 튀겼다·
에반젤린의 방패만이 아니었다· 한데 뭉치고 선 모든 이들의 방패가 동시에 파괴당했다·
그러나- 그뿐·
본래라면 맞서는 것만으로도 영혼이 증발하고 죽어 마땅한 강렬한 어둠의 일격이었으나·
죽음을 불사한 인간들의 용기는 합당한 기적을 일으켰다·
수많은 사람이 단 한 가지 일념으로 공명하여 하나의 방패를 완성하고 그 방패에 어둠과 대적하는 빛이 담겼다·
그리하여 방패는 파괴되었으나 사람은 버텨냈다·
아니 버티는 정도로 끝나지 않았다·
“내 도시에····”
[최후의 요새]는 적의 공격을 받아내 저장한 뒤 적에게 되돌려주는 방어술·
모두가 한데 받아낸 적장의 공격은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이들의 방패에 한가득 저장되었고·
“내 사람에게···!”
밀물이 썰물로 바뀌듯 다시 후열에서 전열로 한데 몰려들어 쏟아져-
“함부로 손대지 마요 언니-!”
에반젤린의 창끝에서 터져 나왔다·
전에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최대규모의 [대미지 세이브]-
그리고
[대미지 페이백]!
투하아아악!
에반젤린의 오른팔이 갈가리 찢기며 창이 산산이 터져나갔다· 그 창끝에 소용돌이치며 모여든 어둠의 힘이 그대로 ‘잠들지 못하는 호수왕녀’를 향해 쏘아졌다·
에반젤린 혼자였다면 막아내지도 저장하지도 되돌리지도 못할 힘이었으나·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이 한데 공명하여 뜻을 모았기에 가능했던 거짓말 같은 반격이었다·
《···!》
자신이 가한 공격을 그대로 되받은 ‘잠들지 못하는 호수왕녀’가 뒤로 밀려났다·
그녀 자신의 공격이 강력했던 만큼 온전히 되돌려받은 반격 또한 막강했다· 그녀는 전에 없이 수십 걸음이나 뒤로 물러서야 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다시금 요새 밖으로·
요새 안으로 침범해 들어왔던 것이 거짓말처럼 한참을 물러서야 했다·
《····》
이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외신들은 경악했고 그 꼭두각시인 ‘잠들지 못하는 호수왕녀’가 삐걱거리며 태세를 정비하는 사이·
“토르켈-!”
뒤로 쓰러지며 에반젤린이 남은 힘을 쥐어짜 소리쳤다·
“가요-!”
《···!》
‘잠들지 못하는 호수왕녀’가 다급하게 고개를 위로 들자 하늘에서 커다란 덩치의 중갑 기사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리폰 라이더와 함께 하늘에서 대기하다가 정확한 타이밍에 뛰어내린 괴수전선 최강의 탱커- 토르켈이었다·
‘잠들지 못하는 호수왕녀’가 날카롭게 손을 내뻗었다· 그러자 어둠의 힘이 채찍처럼 휘감기며 토르켈의 전신을 난자했다·
토르켈이 들고 있던 방패는 물론이고 전신의 갑옷까지 모조리 터져나갔다·
하지만 토르켈은 이미 그 자신의 궁극인 [인간은 패배하기 위해 태어나지 않는다]를 사용한 상태·
고통은 느끼지만 타격은 입지 않는다·
그리고 토르켈은 고통만으로 멈춰 세울 수 있는 남자가 아니었다·
덥석!
전사의 강인한 손길이 적장의 몸을 붙잡았다· 그대로 토르켈은 ‘잠들지 못하는 호수왕녀’를 붙들고 늘어졌다·
알고 있다·
‘잠들지 못하는 호수왕녀’도 토르켈 본인도 이 자리의 모두가 알고 있다· 토르켈의 힘으로는 적장을 저지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토르켈은 이 역할을 자처했다·
자신이 버텨낼 수 있는 고작 10분의 시간 동안 적장에게 약간의 빈틈이라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무적의 괴수에게 티끌만큼의 허점이라도 드러낼 수 있다면·
이 뒤에 이어질 동료들의 반격에 아주 조금의 도움이라도 된다면!
시도할 가치는 충분한 것이다·
그렇게 토르켈이 적장에게 떨어져 붙드는 것과 동시에 성벽 위에서 대기하고 있던 쥬니어가 앞으로 지팡이를 세웠다·
쩡-!
하늘에 헤일로가 떠오르며 일대 공간이 모자이크처럼 쪼개졌다·
[원소 해체]·
그것도 수십 번을 중복 영창해 한 번의 마법으로 응축한 [원소 해체]였다·
그동안 쥬니어는 [원소 해체]가 듣지 않는 적에게는 여러 번 마법을 덧대어 사용하는 식으로 강제로 효과를 보아 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발상을 바꾸었다·
단 한 번의 [원소 해체]를 극한까지 파고들어 보기로 한 것이다·
지금껏 다다른 적 없는 음(陰)을 깎고 공(空)을 넘고 허(虛)의 영역마저 초월한-
무(無)의 영역으로·
그리고 이론뿐이던 공식을 지금 증명하는 데에 성공했다·
부족한 인세의 마력 대신 강제로 지팡이의 마력핵을 폭주시켜 마법을 완성했다·
결국 임계를 넘긴 지팡이 [로드 오브 크림슨]이 버티지 못하고 폭발했다· 하지만 그것마저 계산 안이었다·
“····”
쥬니어는 직감했다·
이것이 자신의 마법사 인생 최후의 궁극마법 행사라는 것을·
하지만 어째서인지 아쉽다기보다는····
후련했다·
“하늘이여 보아라!”
자신의 궁극을 완성하며 쥬니어가 환하게 웃었다·
“우리가 여기에 있다-!”
쩌저저저적-!
믿을 수 없는 크기로 불어난 헤일로가 일대 상공을 덮고 그 아래 공간이 모조리 깨어졌다·
거칠게 피를 토해낸 쥬니어가 쓰러졌다· 하지만 그녀의 궁극마법은 틀림없이 효과가 있었다·
《···?!》
‘잠들지 못하는 호수왕녀’를 무적으로 만들어 주던 불가침(不可侵)의 장막이 걷혀나갔다·
하필이면 영계와 인세 사이의 연결이 약해져 마력이 희박해지는 이때·
‘잠들지 못하는 호수왕녀’의 본질을 이루는 저주와 악몽 어둠 역시 이계의 힘· 즉 마력으로 자아낸 것이었기에· 그녀의 존재는 분명히 흔들리고 있었고····
그 빈틈에 쥬니어의 궁극마법이 제대로 작렬한 것이다·
“····”
로제타와 제니스 두 사제에게 부축과 치료를 동시에 받으며 루카스는 자리에 바로 섰다·
주위를 살피자 어느새 이 요새의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황금빛 오오라가 차례로 번지고 있었다·
그들 모두가 같은 뜻을 품고 같은 깃발을 따르기에 생겨난 또 다른 기적이었다·
“···다시 한번·”
루카스가 작게 중얼거렸고
“다시 한번-!”
사람들이 뛰쳐나갔다·
다시 한번 적장을 막기 위해·
한 번이라도 더 세계를 지키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