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2· [LAST STAGE] 공동전선 (3)
격전이 이어졌다·
하늘에서 외신들의 손이 일제히 주먹을 쥐더니 지상으로 단숨에 떨어졌다·
뒤이어 손들은 서로가 서로를 움켜쥐고 회전하며 마치 검이나 채찍처럼 지상을 내려찍었다·
외신들의 손은 갖가지 방법과 물량공세로 우리의 공중요새를 무너뜨리려 했다·
점점 거세어지는 외신들의 공세 앞에서 우리는 고전했지만·
여전히 버텨내고 있었다·
외신들의 공세가 늘어나는 만큼 우리 측 방어 전력도 늘어갔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원군이 속속 합류한 것이다·
쿵-!
자신들의 수호수를 불태우러 갔던 4대 이종족의 종족신들이 우리 방어선에 합류했다· 거대한 거인들은 무형의 포효를 토해내며 외신들과 맞서 싸웠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
영계 곳곳에서 다른 무수한 종족의 종족신들이 속속 나타나 우리 편에 함께 서기 시작했다·
까마득한 과거·
외신들은 이 세계를 무대로 또 다른 멸망유희- ‘종족전쟁’을 진행했다고 한다·
자신들이 선택한 종족을 위해 수호수를 심고 각 종족이 서로의 수호수를 불태우려는 전쟁을 부추겨···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모습을 지켜보며 즐긴 것이다·
그때 장난감으로 사용되었으나 패배하고 수호수가 불타버린 무수한 종족이 있었다· 그들의 종족신은 이곳 영계의 모래 아래에 파묻혀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곳 영계를 뒤흔드는 최후이자 최초의 반역에 이르러·
자신들을 장난감으로 사용하고 저버린 저 하늘 위의 존재들을 향해 그들도 이빨을 드러낸 것이다·
환히 빛나며 휘날리는 나의 깃발 아래에 잠들어 있던 모든 종족신이 깨어나 연합했다· 거인들은 각자의 몸에 남은 마지막 여력을 불태우며 전투에 가담했다·
“····”
나는 이곳 영계에서 그야말로 신화적인 전투를 벌이는 세계수호전선의 모습을 문득 살폈다·
4대 이종족의 종족신이 이끄는 전원이 종족신으로 이뤄진 군대·
세계 최후의 붉은 용과 그 뜻을 이어받은 세 딸·
인류 최강의 기사와 인류 최고의 마법사·
평생 영계에서 싸워온 황제와 그 친위대·
그리고 그들 모두를 지휘하는 나·
나는 깃발을 휘둘렀다· 그러자 즉시 내 뜻을 알아챈 모든 이들이 일사불란하게 진형을 바꾸며 외신들의 공격을 막아냈다·
“싸웁시다!”
우리는 우리의 세계에 가해지는 모든 압제에 저항한다·
우리는 장난감이 아니니까·
피스가 아니라 플레이어니까·
내 운명의 오롯한 주인이니까!
“포기하지 말고 싸워-!”
끝없이 이어지는 전투를 최적의 효율로 지휘하며 나는 목이 터져라 외쳤다·
그렇게 무아지경으로 얼마나 전투가 이어졌을까·
문득 공기가 일변했다·
섬뜩한 예감을 느낀 나는 퍼뜩 하늘을 보았다·
“···!”
우리를 응시하는 외신들의 눈동자·
그중 일부가 요사스러운 자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뭘 하려는 거지?’
우리를 일격에 짓눌러 죽이려던 ‘깜빡임’이 아니었다·
눈동자들이 쏘아내는 자줏빛 시선이 서로 엉키며 허공에 어지러운 문양과 술식을 전개했다· 무수한 눈동자들이 동시에 하늘에 그림을 그리자 순식간에 도식(圖式)이 완성되었다·
“크윽?!”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리고 속이 울렁거렸다·
환술 아니 그보다는 저주에 가까운··· 상위 존재의 정신 공격·
직접 공격이 계속해서 무마되자 외신들이 공격 수단을 우회한 것이다· 우리의 정신을 파괴하는 쪽으로···!
나는 다급하게 시선을 피했으나 이미 완성된 환술은 영계 전체를 뒤덮고 내부의 모든 존재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내 [불굴의 지휘관]이 일대 전체에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지만 이 환술을 펼치는 술자의 수가 너무 많고 격이 너무 높았다·
나는 내 정신방벽이 순식간에 녹아내리고 증발하는 것을 느꼈다·
‘내가 막아야 해!’
그리고 내 정신방벽이 모두 마모되는 순간 지금 가까스로 버티고 있는 결사대의 모두가 저 환술에 당하고 말 것이다·
‘어떻게든 버텨야···!’
눈앞이 하얗게 타오른다·
하지만 나는 비명을 참고 전력으로 저항했다·
여기서 무너질 것 같으냐?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여기서···!
‘반드시 버텨낸···!’
다음 순간 외신들의 시선이 자줏빛에서 핏빛으로 물들며-
쩌어어어억!
내게 가해지는 정신적 압력이 몇 배로 불어났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임계점이 삽시간에 코앞으로 닥쳐왔다·
더는 버틸 수 없음을 직감한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고····
-찰칵·
어째서인지 익숙한· 그리고 조금 그리운·
양산 펴지는 소리가 옆에서 들렸다·
동시에 내게 가해지던 압력이 일제히 사라졌다·
‘어?’
나는 놀라서 옆을 보았다·
어느새 내 옆에 다가와서 선 누군가가 내 머리 위에 양산을 씌워준 상태였다· 양산에 가려 상대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양산의 색은 눈부시고 자신만만하고 뻔뻔하게도- 핑크색이었다·
부드럽고 달콤한 향이 확 끼쳤다·
놀라서 눈만 깜빡이는 내게 양산을 씌워준 누군가가··· 웃음을 참는 듯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안녕 자기?》
가볍고 발랄하고 엉뚱한 이 목소리·
나도 모르게 멍하니 중얼거렸다·
“살로메···?”
그러자 양산 저편에서 그녀가 웃었다·
《정답!》
핑그르르 휘둘러진 핑크색 양산이 마치 부채처럼 정신 공격을 모조리 밀어냈다·
일대의 하늘이 순식간에 맑아지며 두통과 메스꺼움이 사라졌고 나는 단숨에 호흡을 되찾았다·
숨을 정리한 내가 옆을 돌아보자-
《애쉬!》
그녀- 살로메가 폴짝 뛰어올라 제멋대로 내 품에 안겼다·
《짜잔! 너를 구하러 내가 왔어!》
“살로메 너···!”
본래라면 피하거나 패대기를 쳐버려야 마땅하겠으나·
이 예상치 못한 재회가 반가워서· 또 그녀가 내게 준 도움의 손길이 고마워서·
나는 그녀가 제멋대로 나를 포옹하고 내 가슴팍에 뺨을 비비는 것을 내버려 두었다·
“너 살아 있었구나! 정말 다행이다····”
《헤헷·》
살로메는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윤기 있는 핑크색 머리칼· 그 사이로 돋아난 뿔· 강아지처럼 마구 좌우로 움직이는 꼬리·
그리고 어디 피서지에서 실컷 태닝이라도 했는지 건강한 갈색으로 탄 피부에 그런 태닝한 피부가 훤히 드러나는 민소매 셔츠에 짧은 반바지 그 위에 걸친 후드점퍼에 캡모자 그리고 슬리퍼····
“···?”
잠깐·
잠깐잠깐잠깐·
예전 모습 그대로가 아니잖아·
그보다 세계관을 몇 개는 건너뛰어 버린 것 같은 꼬락서니지 않냐?!
“이 이런 망측한! 썩 떨어져!”
은글슬쩍 내 목에 팔을 휘감으려는 이 서큐버스를 나는 다급하게 떼어냈다· 잠들어 있던 내면의 유교보이가 비명을 질렀다· 남녀칠세부동석 맙소사!
나는 살로메를 향해 삿대질했다·
“너 너···! 그 모습은 뭐야?!”
《아앙? 이 서큐버스 누님의 헬시섹시한 버전을 감당하기에는 아직 준비가 덜 된 거니 소년?》
음흉하게 미소한 살로메는 제자리에서 한 바퀴 빙글 돌더니 외쳤다·
《소개할게! ‘너만의 핑크빛 태양’ 줄여서····》
줄여서?
《‘핑태양’ 버전 살로메님이시다!》
“미 미친····”
정신 공격이 아닌데도 어지러워졌다· 나는 이마를 감싸 쥐었다·
아무리 봐도 지구권 문화의 옷차림에 지구권 문화의 드립을 사용하고 있다· 예전에 이 녀석이 내 기억 정확히는 고전덕후의 기억을 훔쳐보긴 했는데 그것 때문인가?
이 자식 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때 레이븐을 흡수하고 나서 이곳 영계로 몸을 피할 수 있었어· 레이븐은 악의 자체만 남아 있었지만 뭐 악의도 마음이니까··· 마음을 먹이로 삼는 내게는 힘이나 다름없었지·》
살로메는 본래부터 영계를 도피처로 사용해 왔다· 그래서 예전에 영계에 표류하던 나를 구해주기도 했던 거고·
그때 레이븐을 물리친 뒤에도 어떻게 영계로 도피하는 데에 성공했나 보다·
《어우 그런데 레이븐 이 녀석 악의가 보통 지독해야지· 정신체인 내 영혼까지도 감염시켜서 계속 나를 썩히려 들더라구· 고생깨나 했지·》
직후 살로메는 짧은 셔츠 아래로 보이는 자신의 배를 팡팡 두들겨 보였다·
《하지만 내가 누구야? 서큐버스 퀸! 몽마의 딸! 우주제일 팜 파탈! 살로메 님이란 말씀이야· 내가 먹어 치우지 못할 마음은 없지! 결국 좀 오래 걸렸지만 레이븐의 악의와 역병의 정수도 모조리 소화했고····》
직후 살로메는 조금 우울한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이렇게 핑태양이 되어버렸어····》
“대체 핑태양이 뭔데···?”
《구체적으로는 레이븐의 형질을 좀 이식받았다고 해야 하려나· 이제 나는 어떤 감정이든 손쉽게 전염시킬 수 있고 어떤 악의든 고스란히 먹어 치울 수 있어·》
뒤이어 살로메가 다급하게 내 어깨를 움켜쥐더니 손을 덜덜 떨며 말했다·
《아니 솔직히 말할게· 악의가 제일 맛있어· 제발 악의 좀 먹게 해줄래···?》
이 자식 이거 완전히 맛이 갔잖아!
《어쨌든 이 과정에서 나는 기존의 규격을 부수고 다음 단계의 존재로 거듭날 수 있었어·》
“그래· 뭔가··· 좀 많이 거듭나버린 거 같긴 하네····”
《이제 나는 ‘마음’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조금 대단한 존재가 되어버렸다고나 할까···?》
뒤이어 살로메는 브이 자로 만든 손을 커다란 눈 옆에 대더니 찡긋 윙크하며 소리쳤다·
《전설로만 전해지던 최강의 몽마! 서큐버스 엠프레스(Succubus Empress)가 된 거얏-!》
“···아니 핑태양이잖아·”
어떻게 봐도 그냥 핑크머리 태닝 양아치라고·
《아아 아무튼 이거 꼭 해보고 싶었다니까! 최후의 결전 마지막에 합류해서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옛 동료!》
살로메는 최후의 결전이 벌어지는 이곳 영계의 풍경을 가볍게 한번 둘러보더니 내게 생긋 미소했다·
《어때 애쉬! 너도 내가 와서 기쁘지? 안심했지? 감동했지?》
“···응·”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고마워 살로메· 살아 있어줘서· 그리고 나를 도우러 와줘서·”
《····》
내가 솔직하게 인정하자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보던 살로메는 이윽고·
《나야말로 고마워 애쉬·》
살짝 상기된 뺨으로 배시시 웃었다·
《여기까지 와줘서· 여기까지 너의 마음을 잃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싸워줘서·》
조금 전까지 지었던 자신만만하고 유혹적인 미소가 아니라 어쩐지 멋쩍고 어설픈 그 미소는·
지금까지 본 살로메의 그 어떤 표정보다도 더 인간적으로 보였다·
“····”
《····》
그나저나 갑자기 급 훈훈하게 분위기 턴해보려 해도 얘랑 나 사이엔 안 어울린다···· 단숨에 공기 어색해진 것 좀 봐····
《크흠! 아무튼 그렇게 됐으니!》
양산을 빙글 돌려 어깨 위에 올린 살로메가 혀끝으로 입술을 핥았다·
《저 부리부리한 눈알 친구들의 정신 공격은 내게 맡겨· 전부 처리해 줄게·》
“괜찮겠어? 내 정신방벽이 녹아내릴 정도로 강력했는데·”
《그럼· 한결같은 악의로 꽉 차서 득실거리는 게 정말이지····》
살로메의 핑크색 두 눈이 위험천만하게 번뜩였다·
《전~부 내 특식이잖아!》
그러더니 땅을 차고 단숨에 하늘로 솟아올라서-
외신들이 쏟아내는 자줏빛 정신 공격을 모조리 흡수해 버렸다·
같은 자줏빛으로 달아오른 살로메의 뿔을 통해 외신들의 정신 공격이 모조리 빨려 들어가 사라졌다· 살로메는 눈부신 핑크색 섬광을 뿜어내며 음하하하 건방지게 웃어댔다·
“···하여간·”
여전히 어처구니가 없지만 늘 고마운 나의 원군을 쓰게 웃으며 살폈다·
외신들은 계속해서 더욱 강한 깜빡임으로 손끝으로 저주로 우리를 공격했지만 우리는 굳건히 버텨내고 있었다·
그리고-
“···!”
무언가를 감지한 나는 다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쿠구구궁····
우리 요새 옆에 버티고 서 있던 검은 가시나무 에버블랙이····
마치 스스로 움직이듯 주위에 거대한 균열을 벌리며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
현실 인세·
크로스로드 본성 앞·
괴수대침공에 맞선 최후의 방어선·
그 상공에서 마지막까지 하늘을 날며 싸우던 비공함 블루 펄이-
쿠과과과광!
괴수로 가득 차 부글거리는 전장 한가운데로 추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