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6· [LAST STAGE] 영계대결전
이 초월적인 사악(邪惡) 앞에서 바이올렛이 전의를 상실한 그때·
갈기갈기 찢겨 터져나가는 지즈의 날개 뒤편으로 두 기의 그리폰 라이더가 나타났다·
바이올렛과 킹 포세이돈을 전장으로 이동시켜 준 바로 그 두 기였다·
쐐애애액!
두 그리폰 라이더는 괴수의 피와 살점이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이 지옥도 안으로 한 치도 망설이지 않고 강하했다·
약속대로 먼저 이 지옥 안으로 들어선 아군을 귀환시키기 위해서·
‘잠들지 못하는 호수왕녀’가 천천히 손을 들어 그중 한 그리폰 라이더를 겨냥했고····
《목 없이도 춤추고!》
바로 그때 지즈의 시체 속에서 듀라한 군단장이 튀어나왔다·
《눈물 없이도 노래하리!》
연달아 밴시 군단장이 찢어진 드레스 자락을 휘날리며 등장했다·
《목 잃은 자들은 나와 함께 싸우자!》
《목만 남은 자들아! 함께 통곡을!》
그러자·
쿵-!
목을 잃고 죽어 있던 괴수의 시체들이 일제히 진형을 이루며 일어섰고 목만 남은 괴수의 시체들이 일제히 입을 열어 곡소리를 흘리기 시작했다·
《착한 척은 여기까지····》
《이 전장은 우리 괴수들의 것이다!》
목 잃은 자들의 군대를 이끌며 목만 남은 성가대를 이끌며 두 괴수 군단장은 새카만 사기(邪氣) 속에서 붉은 시선을 흘렸다·
《나머지는 썩 꺼져-!》
각자의 군대를 이끌고 두 괴수 군단장이 ‘잠들지 못하는 호수왕녀’를 향해 돌진했다·
한때 세상을 멸망시키고자 사람이기를 포기하고 괴물이 되었던 그들은·
세상의 멸망에 맞서 괴물 중의 괴물에게 돌진하고 있었다·
“아····”
이 모습을 멍하니 보는 바이올렛의 뒷덜미를 다가온 그리폰 라이더가 낚아챘다·
타앗!
바이올렛은 그리폰 라이더의 등 뒤에 매달린 채 킹 포세이돈이 있는 쪽으로 날아갔다·
“인어왕님!”
바이올렛이 다급하게 외쳤다·
“같이 도망쳐요 어서!”
“후후····”
하지만 킹 포세이돈은 손을 내저어 탑승을 거부했다·
“내 질겼던 목숨도 여기까지인 것 같군·”
킹 포세이돈의 배 중앙에는 커다란 이빨이 하나 박힌 채 부러져 있었다· 레비아탄의 이빨이었다·
전투 중에 이런 극심한 부상을 당했는데도 인어왕은 권능으로 출혈을 억제해 버텨낸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에 달했는지 배와 등으로 핏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나도 시간을 끌 테니 얼른 가보게·”
“하지만!”
“살 사람은 살아야 해· 그래야 이 전장에 희망이 생겨·”
그리폰 라이더의 손을 밀어낸 킹 포세이돈은 삼지창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바이올렛을 향해 흐릿하게 웃어 보였다·
“나를 구하러 달려와 줘서 고마웠네·”
“왕님···!”
“자네들 같은 젊은이를 위해 죽을 수 있다면 그 자체로 다행이야·”
콰과과과광!
폭음이 울렸다·
멀잖은 곳에서 ‘잠들지 못하는 호수왕녀’와 두 괴수 군단장이 충돌했고 왕녀의 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두 괴수 군단장이 현장에서 징집한 괴수의 군대는 궤멸해 가고 있었다·
서로 시선을 교환한 두 그리폰 라이더는 이랴! 소리를 내며 그리폰을 다시 상승시켰다·
바이올렛은 킹 포세이돈과 두 군단장을 향해 한번 손을 뻗었다가 이윽고 눈을 질끈 감았다·
“···후·”
멀어지는 아군을 응시하던 킹 포세이돈은 옆으로 손을 뻗었다·
“이봐 크라켄·”
그곳에는 모든 촉수가 풍선처럼 터져나간 크라켄의 몸통이 힘겹게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고작 이 정도로 끝난 건 아니겠지?”
킹 포세이돈은 자신의 마지막 힘을 끌어내어 삼지창 끝과 고향 바다를 연결한 뒤 창끝으로 해수(海水)를 뿜어내며··· 그 끝을 크라켄의 몸에 꽂았다·
《···!》
바닷물이 몸 안에 가득 차오르며 회광반조가 깃들듯 크라켄은 힘을 회복했다·
“바다의 분노를 보여주자고 형제·”
쿠오오오오-!
터져나간 몸을 찰나의 순간 바닷물로 가득 채우고·
최후의 포효를 내지르며 크라켄이 몸을 일으켜 ‘잠들지 못하는 호수왕녀’에게 달려들었다·
그 위에서 삼지창을 쥐고 아래로 뛰어내리며 킹 포세이돈은 가진 모든 힘을 다해 적장에게 창을 내질렀다·
그 좌우로 듀라한 군단장과 밴시 군단장이 함께 포효하며 달려들었다·
《····》
마지막까지 저항하는 어리석은 이들을 ‘잠들지 못하는 호수왕녀’는 감정 없는 눈으로 지그시 응시할 뿐이었다·
***
“····”
‘블루 펄’로 귀환하는 그리폰 라이더의 뒷좌석·
바이올렛은 멍한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임무는 성공했다·
초거대괴수를 이용해 지상은 초토화되었고 하늘은 깨끗이 일소되었다· 당초의 목적이었던 괴수의 진격 지연은 훌륭하게 달성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의미가 있긴 한 것일까?
바이올렛은 멀어지는 전장을 그리고 그 가운데에 선 적장을 응시했다·
갈라진 하늘에서 쏟아진 외신들의 무수한 시선이 마치 새카만 어둠의 줄처럼 선명하게 ‘잠들지 못하는 호수왕녀’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런 모습으로 왕녀는 어둠의 검을 들고 너울너울 죽음의 검무를 추었다·
자신이 쓰러뜨린 목숨들 앞에서 산처럼 쌓인 아군과 적군의 주검들 위에서 하염없이····
정말로 운명의 실에 묶여 춤추는 인형처럼·
***
호수왕국·
제10구역· 왕성·
《이미 괴수는 통제할 수 없다·》
나와의 동맹을 수락한 뒤·
마왕이 문득 말했다·
《플레이어· 내가 너의 계획에 협력한다 해도 인세를 멸망시키려는 괴수의 진격은 이미 멈출 수 없다·》
“····”
《이 멸망유희의 룰은 너와 나 양측의 합의로 짜였으나 이 유희를 구성하고 체계로 만들어 낸 것은 결국 외신들의 의지다·》
마왕은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이 호수 아래에서 보일 리 없는 하늘 방향을·
《그들은 멸망을 보고 싶어 한다· 그저 순연히 개미집에 물을 붓고 지켜보듯 한 세계의 파멸을 지켜보며 즐거워하는 존재들이다·》
“····”
《‘잠들지 못하는 호수왕녀’는 이러한 외신들의 대행자다· 그녀는 이 세상을 지켜보는 외신 즉 관조자들의 의지와 직접 연결되어 움직이는 꼭두각시다·》
그러니까·
이미 괴수 최후의 대공세는 그 권한이 마왕에게서 외신에게로 넘어가 있는 상태라는 말이다·
이 마지막 유희를 즐기기 위해 외신들이 직접 꼭두각시로 내세워 조종하고 있는 것이 바로 악몽의 총집체- ‘잠들지 못하는 호수왕녀’고·
《나 또한 천 년 전 그 사람을 괴물로 취급하고 토벌한 너희 인간을 증오하지만··· 멸망유희 최후의 대공세는 별개다· 이것은 내 증오나 이번 동맹과는 별개로 멈출 수 있는 일이 아니다·》
“····”
《너와 내가 여기서 동맹을 맺는다 해도· 외신들의 의지에 의해 괴수 침공은 계속해서 이뤄질 것이다· 그리고 외신들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너의 세상을 파멸시키려 들겠지·》
나는 피식 웃었다·
“바로 그래서야 마왕·”
《···뭐?》
“이 최후의 괴수 대공세에 외신들이 직접 개입했기에 그들이 직접 무명을 꼭두각시로 부리며 가지고 놀고 있기에····”
나는 품에서 검은 가시나무 지팡이 에버블랙을 꺼냈다·
“바로 그 점에서 우리 쪽에 승산이 생긴다·”
마왕이 당황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지켜보면 알게 될 거야· 자 그보다 얼른 가자·”
나는 에버블랙을 허공에 죽 그었다·
그러자 공간이 갈라지며 마법의 통로가 생성되었다· 영계로 향하는 문이었다·
그 앞에 선 나는 안쪽을 가리키며 씩 웃었다·
“우리의 싸움··· ‘영계대결전’으로 말이지!”
이제 두 가지 전투가 동시에 진행된다·
인세에서 끝없는 괴수를 막아내는 전투 괴수대침공·
영계에서 외신을 상대로 반역하는 전투 영계대결전·
동시에 치러질 최후의 두 전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서로가 승리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도움이 필요하다·
‘양쪽 모두 힘겨운 싸움이 되겠지· 하지만·’
해낼 수 있다·
나는 나의 사람들을 믿는다·
그리고 나의 사람들이 믿는 나를 믿는다·
나는 앞장서 영계로 통하는 문 안으로 뛰어들었다· 마왕이 다급하게 그런 나를 쫓아왔다·
그리고····
***
[Now Loading···텔레포트 중입니다·]
[Tip –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제나 길은 있습니다·]
정말로 오랜만에 보는 팁창이 눈앞에 아른거리더니·
이윽고 지직거리며 사라졌다·
마지막 힘을 쥐어짜 나에게 메시지를 보내준 디렉터 녀석에게 속으로 웃어 보이며 나는 생각했다·
가자·
우리 앞에 놓인 엔딩으로의 길로·
***
첨벙···!
격류에 휩쓸리는 듯한 감각이 온몸을 감싼 직후 나는 영계의 상공에 진입했다·
내 뒤를 바짝 쫓아 함께 통로를 빠져나온 마왕은 고개를 돌려 옆을 보았다·
《이것은····》
오로라로 뒤덮인 영계의 하늘 끝에서부터 저 멀리 새하얀 땅 아래까지 길게 드리운 가시나무·
상흑수 에버블랙의 줄기이자 뿌리였다·
《····》
마왕이 무언가 복잡한 생각에 잠기려는 듯한 그때였다·
기이이이잉!
느닷없는 거센 기계음과 함께 우리 옆으로 거대한 비공함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전력(戰力)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잖아?”
나는 히죽 웃으며 비공함을 가리켰다·
“소개하지· 나의 배 ‘라 만차’· 그리고····”
비공함의 갑판 위에는 손등에 마법진을 떠올린 채 운전 중인 나의 아버지· 트라하 ‘피스메이커’ 에버블랙·
그리고 그 뒤에 도열한 다섯 명의 기사-
황제친위대 ‘글로리 나이츠’가 결연한 표정으로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인세의 황제와 그 친위대다·”
황제도 글로리 나이츠도 인세에서는 더 이상 싸울 수 없는 몸이다·
하지만 이곳 영계에서는 육체가 아닌 영체의 모습으로 움직이게 된다· 다시 말해서 육체의 손상이 자연적으로 회복된 상태다·
그리고 황제와 글로리 나이츠는 전원이 제국 북부전선- 바로 이곳 영계의 이신전선에서 끝없는 싸움을 해온 이들·
말하자면 영계 전투의 스페셜리스트라 할 수 있다·
세계수호전선의 영웅 중에 이들보다 더 영계대결전에 걸맞은 전사는 없다·
탁!
나와 마왕이 갑판 위에 올라섰다·
황제와 글로리 나이츠 모두가 내 뒤에 선 마왕을 기가 막힌다는 눈으로 보았다·
“애쉬· 정말로 그 마왕과 동맹한다는 미친 계획을 실행에 옮길 셈이냐?”
본인이 다 듣고 있는데도 거침없이 질러버리시는 게 역시 황제 폐하시로군·
하지만 정작 마왕 역시 이 계획이 미쳤다는 것에는 동의하는지 딱히 불쾌해하지 않고 나를 물끄러미 보기만 했다·
그래서 나는 상쾌하게 답했다·
“네!”
“미친놈····”
황제는 피식 웃더니 손을 들어 라 만차를 몰았다·
“이래야 내 아들이지·”
허공을 유영한 배가 단숨에 아래로- 에버블랙의 뿌리 끝 부근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동안 글로리 나이츠에게 말을 붙였다·
“글로리 나이츠· 위험한 전장으로 다시 데려와 미안하군·”
“아닙니다 전하·”
가장 앞에 선 헤카테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최후의 전투에 함께할 수 있어 기쁩니다·”
“이러려고 여러분을 전선에 남긴 건 아니었는데 말이야····”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인 나는 다시금 당부했다·
“이곳에서는 예전처럼 싸울 수 있겠지만 불사의 저주는 사라진 상태야· 목숨은 하나뿐이라는 사실 항상 잊지 말도록·”
“명심하겠습니다·”
헤카테가 멋쩍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전장이 아닌 다른 곳에서 하고 싶은 일을··· 찾고 싶으니까요· 그러니 최대한 죽지 않겠습니다·”
“····”
나라에 전장에 황제에게 목숨을 바친 이 뒤틀린 애국자들이· 살아남아서 진정 하고 싶은 일을 찾을 수 있기를·
내가 비는 동안 라 만차는 어느새 뿌리 아래의 하얀 백사장에 도달했다·
그리고 투명한 물이 밀려오는 이 바닷가에는 네 명의 거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난쟁이 요정 수인 인어····
4대 이종족의 종족신 4대 이신이었다·
“···정말 저들과 동맹해서 함께 싸우는 겁니까?”
“그래·”
헤카테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이신들이 내세운 아바타- 켈리베이 베르단디 쿠일란 롬펠러 남매를 통해 이번 영계대결전에 대한 이야기도 끝마친 상태다·
저들 4대 이신 또한 우리와 함께 싸워줄 것이다·
“서로 죽일 듯 싸우던 이들을 또 동맹으로 엮어내시다니 정말····”
헤카테가 나를 흘깃 보았다·
“전하께서는 비범하십니다·”
“내가 좀 미친놈 소리 자주 듣긴 해·”
조금 전에도 황제에게 들은 것 같고 말이지·
쿵···!
라 만차가 해변에 착륙했다·
나는 배의 선수 쪽으로 가서 섰다· 해변에서 걸어 나온 4대 이신이 배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들을 등지고 뒤돌아서서 나는 갑판에 선 황제와 글로리 나이츠 그리고 마왕을 향해 말했다·
“좋습니다· 그럼 당장 함께할 인원은 모두 모인 듯하니··· 이번 ‘영계대결전’의 작전 개요를 한 번 더 설명하겠습니다·”
숨을 가다듬고·
나는 말했다·
“일단 모든 종족의 수호수를! 모조리 불태웁니다!”
····
잠깐 정적·
가만히 듣고 있던 황제가 나지막한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역시··· 내 아들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