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0· [LAST STAGE] 마왕과 마녀 (3)
인류의 수호수 에버블랙의 작은 나뭇가지는 지상에 심긴 즉시 영계로 뿌리를 내렸다·
즉각적으로 인류는 마력과 감응하기 시작했고 마법의 사용법을 터득했다·
사람들은 금세 이변을 눈치챘다·
하지만 그들은 이 사실에 기뻐하지 않았다·
‘우리가 마법의 권능을 얻었다는 사실이 들키면 우리는 다른 종족에게 사냥당한다·’
인간족은 태생이 노예인 종족이었다·
갑작스레 주어진 힘에 기뻐하기보다 이 힘을 가졌다는 사실이 들켰을 때의 여파를 더욱 두려워했다·
그동안 인간족을 노예로 부려온 다른 종족들이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인간족이 불미스러운 힘을 키우기 전에 죽여 없애려 할 것이 뻔했다·
사람들은 패닉에 빠졌고 이 사태를 일으킨 원흉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력을 느낄 수 있게 된 자들은 자연스럽게 마력의 근원- 인류의 수호수를 찾아낼 수 있었고 그 수호수를 심은 사람의 정체도 밝혀내게 되었다·
호숫가 마을에 사는 일생 떠돌이였던 어느 광증 걸린 여자····
여인은 붙잡혔고 사람들은 회의 끝에 어렵지 않은 결론을 내렸다·
그녀를 대표로 처형한 뒤 선처를 빌기로 한 것이다·
자신들은 현재의 삶에 만족하고 있으며 마법의 불빛 따위 필요하지 않다·
모든 것은 이 여인 홀로 저지른 독단이다· 이 여인을 우리 손으로 죽일 테니 부디 용서해 달라····
그리하여 현재·
“····”
장작더미가 쌓인 처형대에 묶인 여인은 자신을 향해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자신이 구하려 했으나 도리어 자신을 죽이려 드는 고향의 사람들을·
《보아라 가엾은 여인아·》
마왕이 읊조렸다·
《네가 베푼 은혜를 투석과 방화로 되갚는 저들을 보아라!》
“····”
《이것이 한낱 필멸자의 몸으로 신의 불꽃을 훔친 대가다· 감당할 수 없는 결과를 얻었으니 네 파멸 또한 당연한 이치일 수밖에·》
와아아아아···!
돌을 던지던 성난 군중이 여인의 아들에게 닦달했다·
아들은 눈물을 머금고 그러나 비정한 얼굴로··· 여인에게 돌을 하나 던졌다·
퍼억!
날아든 돌이 여인의 이마를 찧었다· 찢어진 상처에서 핏물이 흘러내렸다·
“····”
고개를 숙인 여인의 발아래로 불길이 일렁이며 다가왔다· 누군가가 불을 놓은 것이다·
끔찍한 열기와 함께 그녀를 규탄하는 목소리가 사방에서 쏟아졌다·
도둑· 마녀· 괴물·
괴물·
괴물····
《원망스럽지 않으냐?》
마왕이 속삭였다·
《자신들을 위해 네가 치른 희생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너를 괴물 취급하는 저들이· 원망스럽지 않느냐는 말이다·》
“····”
《이것이 네가 구하려던 자들의 본성이다· 네가 지키려던 자들의 추악한 민낯이다·》
침묵하는 여인에게 마왕이 더욱 거세게 토로했다·
《보아라 은혜도 모르고 너를 증오하는 저들의 얼굴을! 보아라 너에게 돌을 던지는 네 아들의 얼굴을!》
“····”
《자 원망해라·》
마왕의 속삭임은 번지는 불길처럼 도리없이 여인의 가슴 속으로 파고들었다·
《네 마음에 솔직하게 저들을 원망해라· 네 일생의 위업을 더럽히고 네 고결한 뜻을 짓밟는 저들을 원망해라· 네 가슴에 원망의 천불을 놓는 것이다!》
“···그러면·”
여인이 조용히 되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되죠?”
《네 마음에 따라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마왕은 이전보다 더욱더 열의 어린 목소리로 유혹했다·
《네가 이룩한 위업만큼 네가 바라는 것을 손에 넣게 해주마· 너는 세상을 태우는 화마(火魔)가 될 수도 있고 호수를 삼킨 뱀이 될 수도 있고 모든 생명을 때려죽이는 돌우박의 세례가 될 수도 있다·》
“····”
《네가 이룩한 위업은 그만큼 대단한 것이다· 이런 곳에서 이런 취급을 받으며 헛되이 스러질 만큼 작지 않다! 너는 훨씬 더 위대해져야 한다!》
투두둑!
불길의 열기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어떤 사악한 힘이 개입했기 때문인지·
처형대에 여인을 묶었던 줄이 저절로 풀렸다· 일순 자유로워진 여인은 비틀거리며 처형대에서 풀려났다·
《자아·》
마왕이 내민 손이 그녀의 앞에 있었다·
《내 손을 잡아라·》
“····”
《오직 나만이 너의 여정을 알고 있다· 오직 나만이 너의 희생을 알고 있다· 오직 나만이! 너의 고결한 의지와 창대한 위업을 알고 있다·》
“····”
《내가 너를 인정하겠다 필멸자· 그러니 나와 함께 가자!》
마왕은 차갑고 고요한 호수 위에 떠 있었다·
여인은 고개를 돌려 반대편을 보았다· 번져오는 불길과 쏟아지는 돌팔매 그리고 노려보는 사람들의 증오가 보였다·
“····”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명확했다·
천천히 여인은 자신의 등을 다시금 처형대에 붙였다· 밧줄이 떨어지고 속박은 사라졌으나 그녀는 자신의 의지로 그곳에 매달렸다·
“아니요·”
당혹해하는 마왕에게 여인은 읊조렸다·
“저는 괴물로 죽겠습니다·”
《뭐····》
“저들의 마음을 이해합니다· 저는 저의 종족에게 구원의 불빛을 뿌렸다고 생각했지만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갑자기 옷에 불똥이 튄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여인의 몸을 타고 불길이 올라왔다·
“그래도 괜찮아요· 모두가 언젠가는 알아줄 테니·”
《····》
“지금은 뜨거울지라도 그 불씨를 다루는 법을 익혔을 때··· 새로운 삶의 시대가 열리리라는 것을·”
제 살을 태우는 연기 속에서 잿더미가 되어가는 여인을 보며 마왕이 포효했다·
《그래서 이렇게 죽겠다고?!》
“····”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채 마녀로 화형당하고 괴물로 돌팔매 당해··· 이토록 비참하게 죽겠다는 말이냐?!》
“괜찮아요·”
여인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누군가에게 인정받으려 한 일이 아니니까·”
스스로 해내고자 마음먹은 일이 있었고 그것을 해냈을 뿐이다·
위명(偉名)도 오명(汚名)도 애초에 신경 쓰지 않았으니·
그렇기에 여인은 부끄러움 없이 당당하게 심지어 조금 행복하기까지 한 심정으로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윽고 솟구치는 불꽃과 쏟아지는 돌 사이에서 여인의 몸이 완전히 허물어졌다·
《····》
그 최후를 마왕은 가만히 들여다볼 뿐이었다·
***
찰칵·
···또다시·
찰칵· 찰칵· 찰칵·
자비 없이·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찰칵-
회색 마력이 회전하며 무기질적인 기계 소리를 내었다·
***
여인은 눈을 떴다·
또다시 그 젊은 여름날· 호숫가의 오두막이었다·
“···아?”
여인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회귀했다· 또다시 이곳 이때로 돌아왔다·
삶은 끝나지 않는다·
삶이··· 끝나질 않는다·
“아 아아아아·”
의미 없는 목소리가 힘없이 그녀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아아 아아아 아아아···?”
《끝났다고 생각했나?》
그림자처럼 드리운 마왕이 그녀를 조소하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라던 목표를 이루고 배은망덕한 자들을 용서하기까지 했으니 이제 이 지옥이 끝날 줄 알았나?》
“····”
《아니다 어리석은 자여· 이것은 그런 평화로운 저주가 아니다·》
마왕의 차가운 조롱이 여인의 귓가에 메아리쳤다·
《네가 무엇을 해내든 얼마나 실패하든 상관없다· 너의 회귀는 그저 끝없이 반복될 뿐이다·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그제야 여인은 진실로 이해했다·
이것이 왜 축복이 아니라 저주인지·
끝없는 시간이란 이토록- 잔혹하고 무기질적인 폭력이라는 사실을·
《앞선 내 제안을 따랐다면 회귀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겠으나 네가 거절했으니··· 이 회귀를 끝내는 또 다른 방법을 알려주마· 심지어 이 방법은 아주 쉽다·》
충격에 빠져 덜덜 떠는 여인에게 마왕이 속삭였다·
《이 모든 비극의 차례를 너의 자식에게 넘기는 것에 동의해라· 그러면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것을 허락해 주마·》
“···!”
《너희 일족의 저주는 일인전승· 혈족계승· 한 시간선에 한 명에게만 ‘고인다’· 즉 너의 자식에게 전가하면 너는 벗어날 수 있다·》
그제야 여인은 알 수 있었다·
아버지가 이 저주를 벗어난 방법을·
“제 아버지도··· 그렇게 스스로를 끝낸 건가요···?”
《그렇다· 네 아비뿐만이 아니라 너의 모든 조상들이· 결국 무한한 시간 앞에 굴복했지· 그리고 후대로 이 저주를 ‘밀어내는’ 것에 동의했다· 그렇게 끝없이 계속된 것이다·》
“····”
《고결한 대의를 내세웠지만 결국 자신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후대로 저주를 전가한! 그것이 네 조상이며 네 아비이며 또한 인간이다· 그리고 너 또한 그리되겠지·》
자신의 삶이 무엇을 이루든 무의미함을·
그리고 선대 조상들이 자신의 평화를 위해 후대를 배신하고 도망쳤음을·
깨닫고 떠는 여인에게 마왕이 짐짓 친절하게 내뱉었다·
《자 여기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후세에게 영원히 이어질 이 저주를 물려주거나· 세상을 원망으로 뒤덮는 진짜 괴물이 되거나·》
“····”
《첫 번째 선택지는 네 조상들의 전철을 밟는 것이고 두 번째 선택지는 전에 없던 새로운 결말이다· 어느 쪽을 택하든 너를 존중하여 네 뜻대로 행하게 해주마·》
이 무한하고 무가치한 회귀의 저주를 벗어나기 위해 여인의 앞에 두 가지 길이 놓였다·
제 자식을 죽이거나· 타인과 세상을 죽이거나·
《자아 선택해라!》
마왕이 두 팔을 벌리고 광소했다·
《네가 사랑하는 아이에게 너의 모든 후대에게··· 너와 너의 선대가 쌓아 올린 저주를 모조리 퍼부어 주겠느냐?》
여인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것이 싫다면 앞선 내 제안대로 네가 이룩한 위업과 맞바꾸어 세상을 파괴하는 원망이 되겠느냐?》
“····”
《어느 쪽이냐 자아! 선택해라!》
긴 침묵이 흐르고·
천천히 여인은 무릎을 일으켰다·
그리고 여인의 선택을 기다리는 마왕을 지나쳐··· 오두막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마왕의 얼굴이 의아해졌다·
《···뭐하는 거냐?》
“보면 모르나요?”
휘청거리며 그러나 멈추지 않고·
여인은 마을의 바깥으로··· 세상을 향해 다시금 여정을 시작하고 있었다·
“다시 불을 지피러 가요·”
《···?!》
“다시 한번 인류를 위한 나무를 만들고··· 다시 한번 불빛을 되찾아 오겠어요·”
마왕의 얼굴에 진실한 당혹이 스쳤다·
《그리하면 선택은?》
“하지 않아요·”
《뭐?》
“나의 자식에게도 나의 세상에게도 저주를 내리지 않겠어요·”
그저·
반복되는 세상 위에·
한 그루 나무를 심을 뿐·
기함한 마왕이 소리쳤다·
《아직도 모르겠느냐? 그래서는 네가 어떤 위업을 이루든 어떤 여정을 치르든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
“····”
《너는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다· 후대에 저주를 전가하거나 너 자신이 괴물이 되지 않는 이상! 회귀는 무한하다!》
“아니요·”
여인이 쓰게 웃으며 마왕을 돌아보았다·
“세 번째 방법이 있잖아요·”
《뭐···?》
“이 저주는 내가 안고 죽겠어요·”
여인은 자신의 가슴팍 위에 손을 올렸다·
“내 영혼이 부서지면· 그러면 저주는 내 대에서 끊길 테니까· 그렇죠?”
《네 영혼이 견디지 못할 때까지 회귀를 반복하겠다고···?》
경악한 마왕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앞으로 몇 번의 삶을 더 반복해야 하는지 나조차도 모른다! 그야말로 억겁의 세월이 네 앞에 놓여 있다!》
“····”
《진정으로 네가 버텨낼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거냐? 이미 네 마음은 한번 꺾이지 않았느냐! 무의미하다 무의미하다 무의미하다! 스스로 잘 알면서도···!》
마왕이 무어라 외치든 무시하고서·
여인은 묵묵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러지 마라·》
도리어 마왕의 목소리에 다급함이 서렸다·
《지금이라도 포기하면 네 영혼은 저승으로 갈 수 있다· 하지만 영혼이 부서지면 너는 이 우주에서 영원히 소멸한다! 환생도 내세도 그 무엇도 없이!》
“····”
《내 말이 안 들리는 거냐? 이젠 귀마저 멀어버렸느냐?》
멀어지는 여인의 등에 대고 마왕이 절규했다·
《네 앞에는 어떤 구원도 없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