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9· [LAST STAGE] 마왕과 마녀 (2)
두 번째 삶에서 여인은 폐인처럼 지냈다·
첫 번째 삶과 현재 사이의 괴리를 견뎌내지 못했다· 그녀는 망가져 버렸다·
하지만 그녀의 남편과 아들은 그녀를 정성껏 돌봤다·
남편과 아들의 헌신과 노력으로 여인은 조금씩 회복되었고 말년에 이르러서는 다시 한번 평화로운 삶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녀는 다시금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숨을 거뒀다·
“고마워요 여보· 고마워요 아들아· 두 사람이 있어서 나는 정말 축복받은 삶을····”
찰칵· 찰칵· 찰칵·
그리고 또 한 번의 회귀가 이루어졌다·
“····”
다시 그날이다·
어느 여름· 아버지가 손목을 긋고 자살한 그 오두막·
여인은 떨리는 눈으로 오두막 안쪽을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남긴 산더미 같은 기록과 메모를 피하지 않고 응시했다·
그녀는 깨달았다·
조상으로부터 아버지로부터 내려온 저 과업이··· 이 저주와 마찬가지로 피할 수 없는 것임을·
어차피 시간은 끝없다· 삶은 무한하다·
그녀는 아버지의 시체를 내버려 두고 오두막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저주와 함께 내려온 조상의 과업을 마주했다·
***
여인은 명석하지 못했고 연구는 불친절했다·
아버지와 조상이 남긴 연구를 정리하고 이해하는 데에만 세 번째 삶을 모두 사용해야 했다·
그러나 소득은 분명히 있었다· 적어도 지금까지의 연구는 그럭저럭 이해할 수 있게 되었기에·
“외신들은 생과 사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강제로 벌리고 그 사이의 틈을 통해 이 세상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틈이 바로 생과 사의 중간지점· 피안의 저편·
‘영계’·
외신들은 이 인공적인 공간에 자신들이 선택한 종족의 나무를 심고 뿌리를 내리게 했다·
“이 나무는 영계에 뿌리를 이승에 줄기를 내리고 있는데 영계로부터 받아들인 외부의 힘을 이승으로 전달하게 한다····”
이것이 마법의 원리·
그리고 특정 종족만이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이유·
이 부분에서 여인은 의문이 생겼다·
“그렇다면 어째서 외신들은 특정 종족에게만 종족의 나무를··· 수호수를 내린 거지?”
대답이 뒤에서 들려왔다·
《‘종족전쟁’이라는 멸망유희 중이거든·》
“···?!”
기겁한 여인이 돌아보자 마왕이 서 있었다· 늘 그렇듯 그는 비릿한 조소를 머금고 있었다·
《여기까지 온 것을 축하한다· 그 아둔한 머리를 가지고 잘도 따라잡았군·》
마왕이 조롱했으나 여인은 대꾸하는 대신 궁금한 점을 물었다·
“종족전쟁? 멸망유희? 그게 뭐죠?”
《이 세계는 외신들의 놀이터로 선택되었다·》
마왕은 흔쾌히 설명해 주었다·
《그래서 영계라는 공간을 만들어 내고 그 공간을 기반으로 이 세계에 간섭하기 시작했지· 다양한 방식으로 이 세계를 가지고 놀게 되었는데 그중 한 유희의 형태가 ‘종족전쟁’이다·》
“····”
《외신들이 각자 마음에 드는 종족에게 힘과 축복 그리고 마법의 은혜를 내려주고··· 그렇게 선택된 종족들이 서로 싸우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모습을 지켜보는 거지·》
여인이 떨떠름하게 물었다·
“그런 게··· 재밌나요?”
《재밌지· 생각해 봐라· 여기 개미들로 가득한 언덕이 있다고 치자· 여러 개미 군단이 대립하고 있는데 그중 네가 한 개미 군단을 골랐다·》
“····”
《네가 응원하고 힘을 보태는 그 개미 군단이 처절한 전투 끝에 언덕의 패권을 차지하는 것을 생생하게 지켜볼 수 있단 말이다· 이만큼 재밌는 유희도 드물지·》
초월적인 존재들의 유희 앞에서 문자 그대로 이 세계의 존재들은 한 마리의 개미나 다름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떨던 여인이 물었다·
“내 삶을 반복시키는 것도 그런 유희 중 하나인가요?”
《이제 좀 머리가 굴러가나 보군· 정확하다·》
마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종족 단위의 국가 단위의 세계 단위의 비극도 분명 지켜보는 재미가 있지만 참된 비극의 맛은 개인의 멸망을 가까이에서 지켜볼 때 나오는 법·》
“····”
《너 또한 그런 비극의 대상 중 하나다· 네 조상이 대대손손 너희의 운명을 엮어 팔았으니·》
키득거리는 마왕의 그림자 같은 형체를·
찬찬히 살핀 여인이 조심스레 물었다·
“당신은··· 정확히 뭔가요?”
《나는 ‘중개자’다·》
뜻밖에 마왕은 시원스레 대답했다·
《한때 저 외신들처럼 ‘관조자’였으나 이 비극으로 가득 찬 무대가 너무도 좋은 나머지 직접 무대 위로 뛰어내린 성좌·》
“····”
《이 모든 비극을 무대 바깥으로 중개하는 그런 하릴없는 악(惡)·》
모든 말을 이해할 순 없었지만 여인은 어렴풋이 느꼈다·
《그러니 부디 내게 재밌는 비극을 보여다오· 참신하고 처절한 너만의 비극을 말이다·》
강대하고 사악하고 초월적이지만·
눈앞의 존재가 어째서인지 불쌍하다고·
이런 비극들에서만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이들이····
어째서인지 측은하고 가엾다고·
***
네 번째 삶이 지나고 다섯 번째 삶에 이르러서 여인은 조상의 연구를 모두 통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마지막에 도출한 연구 결과를 이론적으로 확립할 수 있었다·
“4대 종족의 나무 수호수로부터 줄기를 훔쳐 와서 그것을 서로 접목(接木)하면····”
광증에 물든 아버지의 필적으로부터 또렷하고 정갈한 여인의 필적으로까지·
완전히 정리된 마법 이론으로부터 내린 결론을 그녀는 소리 내어 읽었다·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은 수호수를 만들 수 있어· 그리고 이 수호수의 주인을 우리 인간으로 등록하면 돼····”
이것이 최초로 ‘회귀의 저주’를 받은 조상이 하려 했던 일이었다·
너무도 작고 한미하여 외신들의 간택을 받지 못한 종족 인간족이 현재의 노예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마법의 불꽃을 훔쳐 오는 방법뿐이었던 것이다·
《그게 가능할 것 같으냐?》
뒤에서 핀잔이 들려왔다·
어느새 나타난 마왕이 그녀의 연구를 어깨 너머로 들여다보고 있었다·
《각 종족의 수호수는 엄중한 경계 아래 보호받고 있다· 그들 종족의 명운을 짊어진 국보이기도 하거니와 이 놀이터에 방문한 모든 외신들이 지켜보는 종족전쟁의 핵심 기물이기도 하니까·》
“····”
《그런 나무의 줄기를 대체 너처럼 평범한 인간이 어떻게 훔쳐 온다는 말이냐?》
여인은 쓰게 웃으며 책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할 수 있어요· 나에게는 끝없는 시간이 있으니까·”
《너는 반드시 부서지고 꺾일 것이다· 뭐 그 또한 지켜보는 즐거움이····》
“그리고 무엇보다·”
마왕의 말을 자르며 여인이 선언했다·
“이제 내가 이 일을 하고 싶으니까·”
그녀는 본래 삶에 불만이 없었다·
작은 마을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조용히 살아가는 것에 만족했다·
하지만 조상으로부터 이어진 연구를 물려받고 이 세상의 진짜 모습에 대해 알아갈수록····
그녀는 진실에 눈을 뜨게 되었다·
평화롭고 행복해 보였던 이 마을의 삶이 사실은 다른 종족에게 노예로 관리받는 삶이었다는 사실을·
수탈을 학대를 가축과 같은 취급을 태어났을 때부터 당해왔기에 이상하다 여기지 못했을 뿐·
한번 깨어나고 나자 모든 것이 달라 보였다·
가을마다 빼앗아 가는 곡식과 다른 나라의 전쟁마다 징집되어 끌려 나가는 젊은이들과 계절마다 찾아와 때리고 부수는 지배자들의 패악질을····
그녀는 더 이상 눈 뜨고 지켜보지 않기로 했다·
“어려운 건 잘 모르지만··· 이건 확실해요·”
짐을 꾸리며 그녀는 다짐하듯 말했다·
“나의 아이에게는 노예의 삶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요·”
《···!》
“가야겠어요· 두드리다 보면 길이야 열리지 않겠어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과업이 아니라 오롯한 자신의 의지로·
망설이지 않고 움직이는 여인의 뒷모습을·
《····》
응시하던 마왕의 표정이 조금 변했다·
여인은 짐을 챙긴 뒤 집을 나섰다·
그때였다·
“엄마?”
잠에서 깬 아들이 부스스한 눈을 비비며 여인을 따라 나섰다·
“어디 가?”
“····”
복잡한 눈으로 어린 아들을 보던 여인은 이윽고 아들의 앞에 쪼그려 앉아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미안해 아들·”
“응···?”
“하지만 언젠가는 너도 엄마를 이해하게 될 거야·”
하고 싶은 말을 모두 속에 밀어 넣고·
여인은 애써 웃었다·
“분명 그럴 거야·”
그리고 여인은 여정을 떠났다·
마법의 불꽃을 훔치기 위한 머나먼 길이었다·
***
여인은 수없이 실패했다·
나무에 접근하다가 화살을 맞았다· 줄기에 손을 댔다가 함정에 걸렸다· 창에 찔리고 고문당하고 목이 베이고 개 먹이로 던져졌다·
찰칵· 찰칵· 찰칵·
수백 번의 삶이 반복되었다·
여인은 방식을 바꾸었다· 해당 종족의 환심을 사서 수호수에 접근하는 방식을 취해보기로 했다·
노예종족으로 천대받는 인간에게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찰칵· 찰칵· 찰칵·
또 수백 번의 삶이 반복되었다·
이제 각 종족의 수호수 줄기를 한 번씩 손에 넣는 데에는 성공했다·
그러나 한 번의 삶 동안 해낼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었다·
회귀 시점으로부터 생이 끝나는 순간까지 각 종족의 수호수 줄기를 모두 하나씩 가져오기 위해 경로를 최적화했다·
게다가 가져오고도 추적당하지 않거나 또는 추적대를 따돌리는 방법까지 확립해 두어야 했으니·
여정은 험난했고 지난했고 끝없이 지연되었다·
찰칵· 찰칵· 찰칵·
다시 수백 번의 삶이·
아니 수천 번? 아니면 수만 번인가?
늘 써내려 가던 일지를 기록하는 일도 어느새 잊고 여인은 어느새 몸에 새겨진 경험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 자신도 알 수 없는 기이한 열망이 속에서 타오르며 그녀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싸울 수 있도록 해 주었다·
《····》
언제나 그녀를 뒤에서 비웃던 마왕도·
그녀가 불굴의 의지로 조금씩 나아가자 점차 얼굴에서 조롱의 빛을 거두어 갔다· 그리고 여인의 여정을 진지하게 지켜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평범한 인간의 몸으로·
셀 수 없이 많은 시도 끝에····
마침내 그녀는 네 그루 수호수의 줄기를 모두 손에 넣는 데에 성공했다·
머리가 폭삭 세고 등을 제대로 펼 수 없을 만큼 나이가 든 상태였지만·
비단 육신뿐만 아니라 그 영혼마저도 금이 쩍쩍 가버릴 만큼 노쇠한 상태였지만·
끝내 이뤄냈다·
“····”
여인은 감회에 젖은 눈으로 자신의 손 안에 모인 네 그루 줄기를 바라보았다·
에버그린 에버블루 에버레드 에버골드····
요정의 상록수 인어의 산호초 수인의 단풍 난쟁이의 황금가지·
이제 폐가가 된 호숫가 오두막으로 돌아온 그녀는 이 네 그루 줄기를 서로 접목하여 새로운 나무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론은 모두 완벽하게 정립된 상태였다· 끝없이 삶을 반복하며 수없이 머릿속으로 검증한 일이었다·
그리고
번쩍···!
성공했다·
서로 접목한 네 그루 줄기는 한 줄기의 나무로 변모했고 여인은 자신의 손에 들린 투명한 빛깔의 묘목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축하한다·》
어느새 나타난 마왕이 웬일로 온건한 목소리를 냈다·
《설마 정말로 여기까지 도달하다니··· 인정하지· 너는 대단한 위업을 이룩했다·》
“····”
《자 꿈꿔오던 일을 마무리해라·》
여인은 어느 종족의 빛도 띠지 않은 이 나무에 천천히 자신의 념(念)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소원했다·
“···저의 종족에게도 마법의 불빛을····”
그러자 어떤 특색도 없던 투명한 나뭇가지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내부에서부터 흑색이 차오르더니 뾰족한 가시가 돋아났다· 가시는 여인의 손을 찌르고 그 피를 삼켰다·
“아···!”
완성된 인간의 수호수를 살피며 여인은 탄식을 토해냈다·
이것이 상흑수 에버블랙의 첫 탄생이었다·
뾰족한 가시나무를 품에 끌어안으며 여인은 눈물을 쏟아냈다·
“해냈어 해냈다고요 아버지····”
조상으로부터 이어진 과업을 완수했다·
이제 인류는 마법의 불빛을 손에 넣는다· 더 이상 노예로 살아갈 필요가 없다·
여정의 끝에 서서 여인은 기쁘게 웃었다·
***
그러나·
늘 그렇듯 세상은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마녀!”
“너 때문에 우리는 다 죽은 목숨이야!”
“저 여자를 처형해라! 우리의 결백을 보여야 한다!”
자신이 나고 자란 마을의 중앙·
처형대에 묶인 채 여인은 황망하게 주위를 살폈다·
자신의 발아래에 쌓인 장작더미를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마을 사람들을·
그리고····
“····”
성난 군중 속에서 참담한 얼굴로 자신을 보는 늙은 아들의 모습을·
마주하며 여인은 몸을 떨었다·
어째서·
어째서 이렇게 된 거지···?
《수없이 말하지 않았나·》
그런 여인의 뒤에 선 마왕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너의 삶은 비극일 수밖에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