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5· [Side Story] Para bellum (4)
나는 이번 방어전 마지막 스테이지에서 내가 사용할 ‘공략법’을 왕들에게 공유했다·
이 ‘공략법’을 들은 왕들은 처음에는 경악했고 다음에는 기겁했고 마지막에는 비명을 토해냈다·
“···이상입니다·”
설명을 끝낸 뒤·
나는 얼어붙은 왕들을 둘러보았다·
“질문 있으십니까?”
즉시 왕들이 고함을 내질렀다·
“애쉬 황자! 아무리 그래도 그건··· 지나치지 않소?!”
“그 방법은 우리 세상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일이오!”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정상적인 사고에서는 나올 수 없는···!”
“재고해 주시오! 아무리 그대라 해도 이 방법은 지나친-”
격렬한 반대 앞에서 나는 가만히 듣고 있었다·
사실 당연히 반대가 나올 것이라 예상했다·
내가 제시한 ‘공략법’을 사용하면 여태껏 인세의 문명을 쌓아 올린 어떤 ‘대들보’가 사라진다·
라스트 스테이지 이후 멸망을 이겨낸다 해도 세상은 과거와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으로 변할 것이다·
비단 왕들뿐만 아니라 인세를 살아가는 그 누구든 쉬이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조건이다·
하지만
“그럼 멸망을 받아들일 셈입니까?”
내가 차갑게 되묻자 즉시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좌중이 조용해졌다·
“분명 인세가 감수해야 할 손실은 뼈아픕니다· 그러나 멸망으로부터 세계를 지키는 대가로는 어쩌면 매우 값싼 손실일지도 모릅니다·”
그 무엇으로 대가를 치르든·
세계가 멸망하고 사람들이 죽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는가?
“····”
적막 속에 서로 눈치만 살피는 왕들 사이에서 나지막한 물음이 흘러나왔다·
“이 방법뿐인가?”
그곳에는 나의 아버지- 제국 황제 트라하 ‘피스메이커’ 에버블랙이·
진중하게 굳은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방법뿐입니다·”
터져 나오는 탄식 속에서 황제는 묵묵히 나를 보았다·
이윽고 그의 갈라진 입술이 열리고 피로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애쉬· 네가 세상의 구원자인지 미치광이 혁명가인지 그것을 판단하는 것은 이 자리의 우리가 아닌 후세의 사람들이겠지만····”
그의 입술이 천천히 호선을 그렸다·
“그 판단 또한 후세까지 세상이 이어져야 비로소 내릴 수 있겠지·”
천천히 몸을 일으킨 황제가 선언했다·
“우리 에버블랙 제국은 애쉬 황자가 가는 길에 함께하겠소!”
“···!”
“눈앞에 닥친 세계의 위기를 아무런 손실 없이 넘어갈 수 있을 리가 없지· 우리 모두가 포기하고 양보해야 하는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소·”
황제는 하나뿐인 팔로 자신의 가슴팍을 짚어 보였다·
“이 방법을 사용했을 때 어제와는 완전히 다른 내일이 펼쳐졌을 때 가장 큰 손해를 보는 나라가 어디일 것 같소? 바로 우리 제국이오· 하지만 상관없소· 받아들이리다·”
“····”
“우리 모두 함께 부담합시다· 함께 아파합시다·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사의 문제니까·”
다음 순간·
또 다른 누군가가 좌중에서 벌떡 일어섰다·
“우리 아리안 왕국 역시 적극 찬성하겠소!”
아리안 왕국의 국왕 밀러 아리안이었다·
한때 가장 앞장서서 세계수호전선의 가는 길을 사사건건 반대하던 이 왕의 찬성에 다른 왕들은 적잖이 놀라는 눈치였다·
“밀러···!”
“당신이?!”
“지금까지 이곳에서 함께 싸운 이들이라면 잘 알 수밖에 없잖소· 애쉬 황자의 제안이 결국 옳은 길로 이어졌다는 것을·”
밀러가 내게 씩 웃어 보였다·
“나는 마지막까지 그의 결정을 지지하리다·”
뒤이어 여러 명의 사람들이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켈리베이 베르단디 쿠일란 킹 포세이돈이었다·
각 종족의 대표·
이들은 흔들림 없는 얼굴로 나를 마주 보았다·
“우리는 애쉬 황자에게··· 이곳 세계수호전선의 앞길에 종족의 명운을 맡기기로 이미 결정했소·”
“무엇을 대가로 치르든 그것이 우리의 삶보다 우선할 수는 없으니까요·”
“어차피 여기까지 왔지 않수? 끝까지 화끈하게 가봅시다!”
“내 사람들의 목숨만 지킬 수 있다면 그 정도 대가는 감수할 수 있소·”
이어서 미하일이 발렌이 한니발이 차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버밀리온도 같은 의견이요!”
“우리 도시국가연합도!”
“끝까지 따르겠습니다!”
파도가 일듯이·
나와 직접 어깨를 맞대고 함께 싸워온 모든 왕들이 차례로 자리에서 일어서 내 ‘공략법’에 대한 지지를 표명해 주었다·
마지막까지 망설이던 왕들 또한 지금까지 세계수호전선에 남은 만큼 나를 믿고 따르는 이들이었다·
다만 내가 제시한 방법이 너무 과격해서 쉽사리 동조할 수 없었던 것이겠지·
하지만 결국 이들도 눈을 질끈 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나만 약속해 주시오 애쉬 황자·”
한손으로 이마를 감싸 쥐고 마지막까지 자리에 앉아 있던 왕·
세상에서 가장 작은 독립국 상아탑을 이끄는 디어뮈딘이 내게 간절하게 청했다·
“이 세상에서 ‘그것’이 사라져도··· 우리가 잘 살아갈 수 있으리라고· 그대가 그렇게 만들겠다고· 약속해 주시오·”
“약속하겠습니다·”
나는 싱긋 웃으며 답했다·
“우리는 괜찮을 겁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그것’이 없는 세상에서 살아봤기에·
그리고 그 세상도 충분히 아름답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나는 확신을 담아 말했고 마지막으로 디어뮈딘까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상아탑 또한 세계수호전선과 명운을 함께하리다·”
나를 둘러싸고 일어선 모든 왕들을 둘러본 뒤·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운 결정을 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멸망은 가깝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로 단결한다·
“한데 모인 이 뜻으로 내일로 가는 길을··· 열어갑시다·”
미래는 명확히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괜찮을 것이다·
우리는 가지고 있으니까·
내일로 나아가기 위해 어제의 모든 것을 버릴 용기를·
***
회의가 파하고 모든 왕들이 퇴장한 뒤·
“애쉬·”
회장에 혼자 남은 내게 황제가 다가왔다·
“아바마마·”
간단하게 예를 차리는 나에게 황제는 씩 웃어 보였다·
“이번 일 독단으로 처리할 수 있으면서도 굳이 동의를 구한 이유가 있느냐?”
황제의 말대로였다·
사실 굳이 미리 말하고 동의를 구할 필요는 없었다· 내가 알아서 모두 처리하고 후에 통보하는 식으로 해도 문제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편이 더 안전했을 것이다· 전투는 코앞이고 혹여나 동의하지 않고 전선을 이탈하는 세력이 있다면 또 골치가 아팠을 테니까·
하지만····
“당장 멸망을 이겨내는 것만이 목적이라면 그래도 좋겠지만 제 진짜 목적에는··· 이번 전투 뒤의 세계를 온전하게 꾸려가는 것까지 포함되니까요·”
세상은 엔딩을 내고 끝나지 않는다· 끊임없이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라스트 스테이지 이후 세상은 완전히 변할 것이다· 그곳에서 살아갈 사람들에게 미리 동의를 구하고 또 함께 대책을 마련해야지 않겠는가·
“저 혼자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가 함께 걸어가야 할 곳인걸요· 비록 제가 모두를 대표하는 왕관을 썼다 해도 말입니다·”
“····”
황제는 속을 알 수 없는 새카만 시선으로 나를 살피다가 이윽고 하나뿐인 눈을 꾹 감았다·
“뭐 전부 이 최후의 전투를 잘 치러낸 뒤의 이야기겠지만 말이다· 그렇지?”
“하하· 그렇습니다·”
“이 아비는 이런 몸이 되어버려서 더 이상 전투를 도울 수 없어 안타깝구나· 다른 이들 모두 전투를 준비하고 있건만 혼자 후방에서 시간이나 죽이고 있으니····”
탄식하는 황제에게 나는 엄한 목소리로 고했다·
“아니요· 아닙니다 아바마마·”
“응?”
“이번 최종결전에서도 아바마마께서는 힘을 좀 써주셔야겠습니다·”
황제는 의아하다는 듯 자신의 몸을 가리켜 보였다· 한쪽 눈과 한쪽 팔과 한쪽 다리가 없는 몸을·
“짐은 이런 상태인데?”
“몸은 쇠했어도 마음은 여전히 정정하시지 않습니까?”
“하하 마음은 정정한 정도가 아니라 여느 젊은이들 못지않지!”
“그러면 충분합니다· 저와 함께 가주십시오 아바마마·”
여전히 의아해하는 황제 앞에서 나는 씩 웃었다·
“아버지처럼 몸은 성치 못하지만 마음만은 타오르고 있는 다른 용사들 또한 준비하고 있습니다· 함께 가주십시오·”
내 말에 황제는 가타부타 더 묻지 않고 대신 호탕하게 한번 웃어젖혔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좋다 어디 한번 가보자꾸나· 마지막 결전의 땅 그 끝까지···!”
***
금세 시간이 흘러·
라스트 스테이지 전날·
도시 전체에서 출정을 앞둔 만찬이 열렸다·
최후의 방어전을 앞두고 모인 영웅들이 술과 요리를 나눴다·
병영의 병사들을 비롯해 생산조합의 사람들까지 각자의 자리에서 싸우는 모든 이들에게 내가 직접 술과 음식을 대접했다·
나는 술잔을 들고 돌아다니며 일일이 건배하고 모두에게 건투를 빌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영주님·”
느닷없이 에이더가 튀어 나왔다·
도시의 중앙 광장에서였다· 나는 이제 놀라지도 않고 녀석을 마주 보았다·
“에이더·”
“후후· 마침내 여기까지 오셨군요오·”
“우리가 다들 고생한 결과지·”
에이더는 그동안의 모습과는 달리 아주 낡은 예복을 입은 상태였다·
나는 그의 손에 술잔을 하나 들려준 뒤 내 품에 챙겨두었던 것을 건네주었다·
“받아·”
무명의 영혼 조각이었다·
던전 내부에 남아 있던 그녀의 마지막 조각들은 반짝이며 허공을 맴돌다 에이더의 손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소중하게 그것을 자신의 품속에 챙긴 에이더가 배시시 웃었다·
“저도 제 나름의 준비를 끝냈습니다아·”
“····”
“이제 크게 한 방 먹여주는 일만 남았군요·”
따악!
에이더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내 목에 걸려 있던 [반역자의 목걸이]가 한번 반짝였다·
“짐작하고 계셨겠지만 그 목걸이를 통해 사용하신 ‘업적 포인트’는 사실··· 그동안 우리가 쌓아온 카르마(Karma)를 소모하는 개념입니다·”
끝없이 반복된 멸망유희·
이곳에 인간 측 플레이어로 참가한 에이더 그리고 그 대행자인 나· 우리 둘이 회귀를 반복하며 쌓인 업(業)을 태워 권능으로 발현한 것이다·
나는 쓰게 웃었다·
“뭐 업적 포인트라는 설명이 아주 틀린 건 아니었네·”
“마력으로 실체화된 요새를 세우신다든가 그 외에도 여러 기적과 같은 권능을 발휘하실 때 그동안 누적된 이 카르마를 소모해 보조해 왔습니다·”
에이더는 빙긋 웃었다·
“지금 그 리미터를 해제했습니다·”
“····”
“진짜 마지막이니까요· 더는 잔고를 아낄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선대 플레이어이자 선대 용사이자 선지자이자 영주 보좌관이자 디렉터이자····
나와 함께 세계를 상대로 한 음모를 꾸민 공범 녀석은 그렇게 말했다·
“마지막 한 점까지 불태우고 오세요· 후회 없이·”
“너도다 에이더·”
이제 미운 정이 들어버린 이 망할 요괴 디렉터에게 나는 진심을 다해 빌어주었다·
“후회 없이 마주하고 오자· 이 기나긴 게임의 피날레를····”
우리는 서로 술잔을 마주쳤다·
챙- 하는 맑은 유리 울리는 소리가 났다·
***
모든 영웅들과 한 번씩 담소를 나누고·
밤이 깊고 새벽이 밝아오는 만찬이 끝나갈 무렵·
“세레나데·”
불 꺼진 연회장의 구석에서 혼자 창가에 서서 바깥을 보는 세레나데의 뒤로 나는 다가섰다·
돌아본 세레나데는 급히 눈가를 닦아내더니 환하게 웃었다·
“전하·”
“괜찮아?”
“그럼요· 이제 눈물로 배웅하는 건 그만두려고요· 이제 전하의 귀환을 의심하지 않아요·”
“····”
“다녀오세요 전하· 저는 여기에서 웃으며 기다리고 있을 테니·”
잠시 망설인 뒤·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전하’ 말고 예전처럼 불러줄 수 있어?”
“네?”
“그때처럼 말이야· 황도에서처럼 우리가 파혼하기 전처럼····”
금세 내 말뜻을 눈치챈 세레나데는 뺨을 붉히며 미소하더니 내게 한 걸음 다가서서····
내 귓가에 미풍처럼 속삭였다·
“···무사히 다녀오세요 낭군님·”
말없이 웃은 나는 그녀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
달빛 속에서 입을 맞춘 뒤 내가 몸을 뒤로 물리려는데·
세레나데의 긴 손가락이 내 소매를 낚아챘다·
“오늘밤은·”
이제껏 본 모습 중에서 가장 빨개진 얼굴을 아래로 푹 숙인 채 세레나데가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늘밤은 그냥 보내기 싫은데요·”
“····”
“오늘밤은··· 함께 보내고 싶어요·”
나는 대답 대신 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꽉 끌어안고··· 한 번 더 입을 맞췄다·
***
다음날·
기나긴 여정의 끝에·
스테이지 50 최후의 결전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