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0· [Unknown] 멸망한 세계에서 (5)
《그래 이곳은 너의 악몽 속이다·》
성큼 다가오며 크라운이 입을 열었다·
《정확히는 전 인류의 악몽이 모이고 고인··· ‘세계의 악몽’ 속이지·》
크라운의 말을 들으며 멍하고 흐릿하던 나의 의식도 차츰 선명해졌다·
마치 오랜 꿈에서 깨어나듯이·
그리고 점차 기억나기 시작했다·
내가 이 악몽의 세계 속에 들어오기 전에 있었던 일이·
***
스테이지 48이 끝나고·
시드의 첫걸음마와 첫 말을 보고·
스테이지 49를 준비하기 시작하고 며칠 뒤·
괴이한 현상이 크로스로드를 뒤덮기 시작했다·
잠든 사람 중 일부가 계속해서 잠든 채 다시는 깨어나지 않게 된 것이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어떤 강인한 전사도 잠을 자지 않을 수는 없다· 하지만 한번 잠들면 높은 확률로 의식을 잃었다·
잠들었던 이들 중 의식을 잃기 직전 잠에서 깬 한 병사가 내게 보고했다·
“꿈속에서 피리 소리를 들었습니다·”
“피리 소리?”
“네 무척 구슬프고 애달픈··· 그리고 어쩐지 섬뜩한 그런 피리 소리가····”
사람들은 계속해서 의식을 잃었다·
모두가 밤마다 두려움에 떨며 잠자리에 들었다· 꿈속에서 피리 소리를 듣지 않을까 공포에 질린 채 잠에 빠졌다·
그리고 깨어 있는 사람보다 의식을 잃은 사람이 훨씬 더 많아졌을 때 인근의 다른 도시 다른 나라에도 이 끝나지 않는 잠이 퍼져간다는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했을 때·
크로스로드 상공에 그것이 나타났다·
액체처럼 찰랑거리는 거대한 어둠의 구(求)가·
창공기사단 기사들이 상공에서 접근을 시도했으나 터럭 끝이라도 닿는 순간 즉시 의식을 잃고 추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들 또한 다시는 의식을 차리지 못했다·
전선 소속 마법사들은 오래 걸리지 않아 이 구의 정체를 밝혀냈다·
“구체화된 악몽입니다·”
“이게··· 악몽이라고?”
“예· 아마도 지금 의식을 잃은 사람들이 꾸는 악몽이 한데 모여서 이런 형태가 된 것이 아닌가 추측됩니다·”
잠든 사람들의 몸에서 구체화된 악몽이 분리되어 허공으로 방울져 솟구치고 있다·
그 모습은··· 호수왕국에 수없이 존재하는 ‘어둠 고치’들과 소름 끼치도록 닮아 있었다·
즉각 대책 회의가 열렸다·
“마법의 원리 자체는 금방 파악했습니다만 술식의 완성도와 정교함이 너무 빼어납니다· 실전된 고대의 마법을 사용한 듯한데····”
회의를 주재하는 전선 소속 마법사들에게 내가 물었다·
“그래서 파훼할 수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결론만 말씀드리자면 외부에서는 해제할 수 없습니다·”
쥬니어가 식은땀을 흘리며 설명했다·
“상공에 모인 악몽들은 말하자면 ‘결과’입니다· 우리가 해제해야 하는 것은 이 현상의 ‘원인’인데··· 그것은 저 악몽의 내핵에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원소 해체]가 안 먹힌다는 말이지?”
“그렇습니다· 웅덩이를 말린다 해도 비가 계속 오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같은 원리입니다·”
“저 현상 정신계 상태이상도 아닌 거고?”
“악몽을 꾸는 것은 사실 사람에게 있어서 자연스러운 일이니까요· 그것을 모으는 것은 또 정신계와는 다른 원리고····”
[불굴의 지휘관]으로 카운터 칠 수 있는 종류의 현상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골치가 아파서 이마를 움켜쥐는 내게 쥬니어가 말을 이었다·
“다만 외부에서의 해제는 어려워도 내부에서 내핵을 찾아낸다면 그것은 해제가 어렵지 않습니다·”
“···!”
“저 악몽의 내부로 우리 정예들을 투입할 수 있는 촉매가 있다면 내부에서부터 술식을 해제하고··· 사람들을 악몽에서 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촉매로 삼을 것인가?
잠시간 눈을 감고 고민한 끝에 나는 숨을 들이켠 뒤 말했다·
“내가 직접 들어가겠다·”
“···!”
“내가 촉매가 되겠다·”
당연히 부하들의 반발이 쏟아졌지만 나는 확신이 들었다·
저 거대한 악몽에 삼켜지지 않고 온전히 자아를 유지한 채로 내부에서 아군을 불러들이는 촉매 역할을 할 수 있는 것·
그건 나뿐이었다·
이런 류의 시련에 가장 익숙한 것이 나였으니까·
‘무엇보다··· 시간이 없다·’
이미 전선에 소속된 이들 대부분이 쓰러졌고 이 괴현상은 대륙 남부 전체에 퍼졌다· 조금만 더 시간이 흐르면 대륙 전체를 집어삼킬 기세였다·
지상이 악몽의 파도에 휩쓸리기 전에 나 자신을 믿고 뛰어들어야 했다·
결국 내 투입이 확정된 직후 머뭇거리던 영웅 하나가 물었다·
“저어 전하· 그런데··· 설혹 전하께서 임무에 성공하셔도 저희가 실패할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요?”
환영술사 바이올렛이었다·
나는 가만히 그녀를 마주 보았다·
“저희 모두 버티지 못하고 잠들어서 악몽에 삼켜질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럼 전하께서 저 안에서 촉매 역할을 하신다 해도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되지 않을지···?”
“아니야 바이올렛·”
나는 웃으며 회의실에 모인 영웅들을 돌아보았다·
“너희는 버텨낼 거야 반드시· 나는 알 수 있어·”
나는 주위를 둘러싼 나의 사람들을 그 얼굴을 한 번씩 살폈다·
아직까지 악몽에 잠기지 않고 서서 또렷한 눈으로 나를 보는 나의 용사들을·
이것은 근거 없는 믿음이 아니었다·
나는 이들이 악몽에 굴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다녀올게·”
다른 누구도 아닌 동료들을 믿고서·
나는 내 사람들의 악몽 속으로 기꺼이 투신하기로 했다·
“내가 부르면 구해주러 와야 한다?”
***
그리하여 다시 지금·
어느 악몽의 끝자락에서 나는 죽어가는 열여섯 살의 시드를 품에 끌어안은 채 바로 앞에 선 크라운을 마주하고 있다·
“후····”
하얀 입김을 토해내며 나는 점차 의식이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15년의 악몽을 벗어나 본래의 나로 자아가 깨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동안 크라운이 피리로 괴수들을 조종할 수 있었던 원리·
그것은 그가 마왕으로부터 ‘악몽’의 지배 권한을 넘겨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현재 마왕 대리로서 악몽에 대한 모든 권한이 증폭된 상태인 그는 자신의 권능을 모조리 발휘·
인세의 사람들이 꾸는 악몽에까지 지배 권한을 발휘하여 강제로 의식을 납치하고 악몽을 수집한 것이다·
‘이번 방어전에서 우리가 상대해야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악몽’ 그 자체·’
그것도 나의 사람들이 꾸는 악몽이었다·
《이곳은 세계의 악몽·》
크라운이 담담하게 내뱉었다·
《전 인류가 두려워하는 것의 총집체다· 그리고 지금 너의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세계의 멸망이지·》
눈앞에 멸망이 다가온 시대·
온갖 신화 속 괴수들이 인세를 침공하고 끝나지 않는 밤이 오고 전 세계에서 모은 정예 병력의 전멸 소식이 곳곳으로 퍼져나가는 지금·
사람들이 멸망을 두려워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애쉬 너는 인세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을 대표하는 자다·》
“····”
《네가 가진 기억 중에서 가장 끔찍하고 괴로운 ‘최악의 미래’를··· 현재 너의 상황에 맞추어 세계의 모두가 겪는 악몽으로 구현한 것이다·》
즉 이 멸망한 세계는·
과거의 내가 실제로 겪은 최악의 회차가 세계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악몽으로 재현된 것이라는 말인가·
나는 내 품에서 죽어가는 시드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
단순한 꿈속의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기억하지 못하는 어느 세계선에서·
사람들은 멸망 후에 이렇게 힘겹고 비참한 삶을 이어갔고·
이런 세계에서 나고 자란 어느 어린 소년은 이렇게 가엾고 슬픈 최후를 맞았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이 악몽 속에서 실패하고 죽으면 다시 처음부터··· 이 멸망 후의 세계를 반복시킨 건가?”
《그렇다· 네가 좌절하고 포기하고 스스로 항복을 선언할 때까지· 너의 마음이 부서지는 그 순간까지· 이 세계는 무한히 반복된다· 그리고 이번은-》
“아니 몇 번째 반복인지 말하지 마·”
나는 쓰게 웃으며 크라운을 노려보았다·
“어차피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싸울 테니까·”
《···네가 대표하는 사람 모두의 악몽을 이 세계가 자체가 꾸는 악몽을 네가 진정으로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가면 속에서 크라운이 눈을 가늘게 떴다·
나는 알고 있다·
이것은 그의 여동생이··· 무명이 겪었던 고난과 닮아 있다는 것을·
그렇기에 가슴을 당당히 펴고 이리 답했다·
“그러기 위해서 여기에 있다 크라운·”
《····》
마주 쓰게 웃은 크라운이 품에서 피리를 꺼내들었다·
《네가 아무리 애쓴들 네 세계는 구원받지 못해 절대로· 너는 그저 영원억겁 이 지옥을 헤맬 뿐이다·》
“그렇다면 나는 영원억겁 싸우겠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것이 내 사명이라면 그리할 뿐이다·”
두두두두···!
멀리서 괴수들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가 있는 빙원을 둘러싸고 무수한 괴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영원히 반복되는 악몽 속에서 가엾은 내 동생처럼····》
크라운이 피리를 불었다·
《네가 구하려던 사람들의 악몽까지 모두 껴안고 짓눌려 압사당하도록 해라···!》
삐이이익···!
길고 구슬픈 소리와 함께 사방에서 무한한 숫자의 괴수들이 그리고 ‘잠들지 못하는 호수왕녀’가 나를 향해 전진해 왔다·
나는 이 거대한 괴수의 해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제 나는 알 수 있었다·
‘이것은 나의 두려움이다·’
나의 잘못된 선택으로 나를 따르는 모든 이들이 고통 속에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했던· 그런 나의 두려움이 불러온 악몽이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두렵다·
나의 깃발에 걸린 의미를 나의 어깨에 짊어진 목숨의 수를 잘 아는 만큼 내가 내디뎌야 하는 길이 두렵다·
하지만 또 나는 알고 있다·
이런 세계에서마저 나의 길이 틀리지 않았다고 믿어준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나에게 후회하지 말라고 말해준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그러니까-
나는 나의 공략을 계속한다·
나는 나의 길을 걷는다·
나는 나답게 싸운다·
《이곳은 너의 악몽이지만 괴수가 승리한 세계이기도 하다!》
무한한 괴수에게 둘러싸인 나를 조소하며 크라운이 외쳤다·
《매번 항상 너는 잘난 듯 지껄였지만 언제나 패배했다! 이번에도 달라지는 건 없어!》
“아니·”
확신을 담아 대답해주었다·
“이번은 다르다·”
나는 발치에 있던 것을 가볍게 차서 뚜껑을 열었다·
그것은 이 세계의 엘리제가 건네주고 시드가 여기까지 이고 온·
내 동료들의 유품을 모은 함·
검관이었다·
철컹-!
열린 검관 안에는 산산조각 난 부서진 무기뿐이었다·
이것이고 저것이고 모조리 부서져서 도저히 사용할 수 없는 상태였다· 어찌나 완전히 파손되었는지 정확한 이름마저 기억이 안 날 정도였다·
나는 그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완전히 박살이 난 마총이었다· 총신 자체가 사라지고 남은 것은 방아쇠와 손잡이뿐인 흉한 생김새였다·
하지만 이것의 손잡이를 쥐자·
“···!”
이 총과 함께 벌였던 사투가 선명하게 떠오르며 의식이 맑아졌다·
그리고 기억나지 않던 장비의 이름이 명확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래 이 마총의 이름은 [■■ ■]····
아니·
“···[블랙 퀸]·”
내가 장비의 온전한 이름을 내뱉은 순간·
챠르르륵···!
철컥! 철컥! 철컥!
허공에서 빛의 입자가 모여들며 부서져 있던 마총이 복구되었다·
방아쇠만 남았던 손잡이 위로 기다란 총신이 돋아나고 아름다운 장식들이 연이어 피어났다·
그리고 허공에서 [블랙 퀸]이 완전히 복구된 직후
번쩍!
빛의 입자가 한층 더 거세게 모여들더니 사람의 형상을 이루며- 그 마총을 낚아챘다·
갈색 곱슬머리를 뒤에서 묶은 별처럼 빛나는 갈색 눈을 가진 청년·
괴수전선 최강의 저격수이자 영원한 나의 방아쇠·
데미안이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황자님?”
방긋 웃어 보이는 데미안의 옆으로·
번쩍! 번쩍! 번쩍-!
다른 부서진 장비들 또한 차례로 허공에 떠올라 눈부시게 빛나며 복구되었고 그 주인이 장비를 착용하며 이 악몽 속에 구원군으로 나타났다·
붉은 지팡이를 든 마법사 은색 망토를 두른 권법가 월계관이 결합된 투구를 쓴 방패기사·
망치와 끌을 쥔 드워프 단검과 활을 쥔 엘프 검은 깃털 로브를 입은 노인····
눈부신 빛무리 속에서 내 동료들이 끝없이 나타나 내 주위를 호위하듯 둥글게 섰다·
나는 조용히 속삭였다·
“어서 와·”
자신의 두려움을 마주해낸 이들·
가장 끔찍한 악몽을 이미 극복한 이들·
이들을 나의 전선에서는 이렇게 부른다-
“···나이트메어 슬레이어·”
어두운 밤하늘을 찢어발기며 세계의 악몽 속으로-
결코 두려움에 굴하지 않는 나의 악몽 살해자들이 차례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