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7· [Unknown] 멸망한 세계에서 (2)
아포칼립스 나이츠·
분명 우리가 한번 물리쳤던 이 괴물들이 다시금 이 세상에 나타났다·
하지만 어찌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곳은 세계가 끝난 뒤의 세계·
멸망을 상징하는 멸망이라는 개념을 구체화한 괴물들이 되살아나 날뛰는 정도야 놀랄 일도 아니지 않은가·
두두두두두-!
휘몰아치는 잿가루 때문에 온통 뿌연 시야 너머로 사방에서 아포칼립스 나이츠가 짓쳐들어왔다·
“원형 방진으로! 수비 태세를 취해-!”
외치며 나는 허리춤의 깃대를 뽑아 들려고 했지만- 없다·
그제야 깨닫는다·
예식용 장검 형태의 내 깃대 [■■ ■■■]는 15년 전 파괴되었다는 사실을·
“···큭!”
전용 갑옷을 전개하려 했지만 마찬가지·
절그럭 절그럭 철컥-!
한때 내 몸을 온전히 가려주었던 사슬갑옷 [■■ ■■ ■■] 역시 기나긴 싸움 동안 파손되었고 남은 사슬 파츠로는 겨우 한 손을 둘러싸는 건틀릿 정도의 형태만 만들 수 있을 뿐·
그 건틀릿이라도 움켜쥐고 가까이 다가온 아포칼립스 나이츠의 머리를 후려쳤다·
퍼억-!
내 주먹에 맞은 놈은 그대로 반쯤 머리가 날아갔지만 이윽고 다친 부위를 재생하며 좀비처럼 일어섰다·
‘망할!’
15년 전 당시에도 힘겨웠던 적이다·
그런 놈들이 저들에게 유리한 멸망기를 전장으로 두고 더더욱 강해진 상태니·
에이스 영웅들을 대부분 잃고 패잔병 무리로 전락한 우리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강한 적이다·
“크흑!”
우리 중 가장 강력한 전위 검사인 엘리제마저도 적 기병대의 맹공을 버티지 못하고 연신 뒤로 물러섰고·
나머지 생존자들은 피를 뿌리며 쓰러지거나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굴렀다·
순식간에 방진이 붕괴되었다· 나는 치를 떨었다·
‘이대로는···!’
어쩔 수 없이 나는 내 안에 깃든 용의 힘을 일깨우려 했다·
이 힘을 사용할 때마다 내가 치러야 할 대가가 있지만 지금은 그런 걸 가릴 처지가 아니다!
“대부님·”
그때 가벼운 손길이 내 어깨 위에 올라왔다·
“제게 맡기세요·”
“···!”
고오오오오-!
대기가 들끓는 소리와 함께·
어느새 하늘로 가볍게 떠오른 시드가 특유의 감정 적은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소년의 뒤에서는 마치 무지갯빛 같은 휘황찬란한 광휘가 사방으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렇다·
이렇게까지 약해지고 너덜너덜해진 우리 세계수호전선이 아직도 전멸하지 않고 연명할 수 있었던 이유·
그것은 모두 이 소년 덕분이다·
번쩍-!
시드의 등 뒤에서 셀 수 없이 많은 마법 원소가 쏟아져 나와 거대한 형태의 고리로 합쳐지기 시작했다·
마나가 선택한 자(Mana-Chosen)·
디어뮈딘에게 기초를 배우고 쥬니어에게 단련되어· 그 둘의 성취마저 뛰어넘은 천재 중의 천재·
선대 두 대마법사가 모두 죽은 지금 그 유지를 잇는 인류의 마지막 대마법사·
그것이 내 눈앞의 소년 시드다·
짝-!
시드가 두 손을 가볍게 부딪쳤다가 좌우로 뻗자 소년의 몸 주위를 빙글빙글 돌던 빛의 고리가 사방으로 번쩍이며 뻗어나갔다·
《···!》
그 빛의 고리에 적중당한 아포칼립스 나이츠들의 몸에서 일제히 검은 어둠이 핏물처럼 치솟았다·
절반이 넘는 아포칼립스 나이츠가 즉사해서 바닥에 널브러졌고 나머지 아포칼립스 나이츠들은 가까스로 몸을 추슬러 재빠르게 뒤로 돌아섰다·
두두두두두···!
적들이 후퇴한다·
멀어지는 놈들을 살피던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마워 시드야· 네 덕에 살았구나·”
“···또 많이 죽었지만요·”
내 옆에 내려선 시드는 바닥에 널브러진 동료들을 살피며 무덤덤하게 중얼거렸다·
놈들의 기습 시간은 짧았지만 시드가 마법을 펼쳐 물리치기까지 그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우리 측에 큰 피해를 남겼다·
살아남은 이들이 쓰러져 죽은 동료의 시체를 한데 모았다·
불을 붙이고 쏟아지는 잿가루 속에서 목숨들이 또 다른 재로 변하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가시죠 전하·”
검관을 고쳐 맨 엘리제가 턱짓했다·
“새 은신처는 멉니다· 적들이 또 덮쳐오기 전에 부지런히 걸어야 합니다·”
만연한 죽음을 뒤로하고 우리는 다시 묵묵히 전진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엘리제가 우리를 안내한 곳은 폐허가 된 도시였다·
계속해서 지축이 뒤틀리고 대지는 분해와 재조립을 반복하고 있기에 이곳이 멸망 전에 정확히 대륙 어디의 어떤 도시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하룻밤 잿가루의 폭우를 피할 수 있음에 감사할 뿐·
“제가 봐둔 은신처는 반나절을 더 걸어야 도착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일단 여기서 묵고 내일 마저 이동하시지요·”
우리는 폐허가 된 건물 중 한 곳에 짐을 풀고 숙영을 준비했다·
불침번을 정하고 폐허 안에서 사람들이 하나둘 기절하듯 곯아떨어졌다·
늘 하던 대로 건물 입구에 걸터앉은 나는 내일의 일을 생각하려 했으나 지독한 피로가 그런 사고를 방해했다·
피곤했다·
절로 눈이 감겼다·
***
《악몽은 자주 꾸나 애쉬?》
감미로운 하지만 두 번 다시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가 앞에서 들려온다·
“····”
나는 앞을 노려보았다·
나는 테이블에 앉아있고 그 앞자리에 앉은 것은 흡혈왕·
셀렌디온이다·
새빨간 눈을 서글서글하게 번뜩이며 한 손에는 술잔을 빙빙 돌리는 채· 놈은 나를 향해 웃고 있다·
《악몽은 그 인간의 내면 가장 깊은 곳의 공포를 들춰내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실체화시켜서 보여 주는 게다·》
알고 있다·
이것은 오래전의 기억이다·
스테이지 5·
혈족 군단과의 결전 중 ‘사령관회담’으로 놈과 나누었던 대화· 그중 일부다·
《그런데 한 번 상상해 보아라· 그 악몽이 만약 꿈에서 그치지 않고 현실로 나온다면?》
셀렌디온은 자신의 손에 들린 술잔을 지그시 응시했다·
《명확한 실체를 가지고 살아 숨 쉬는 괴물로서 피안(彼岸)으로부터 기어 나온다면· 그 괴물이 네 눈앞에 서서 너를 들여다본다면· 어떤 기분이겠나?》
이것은 의미 따위 없는 공허한 선문답이다·
《자 어린 인간이여· 다시 한번 묻도록 하지·》
알고 있음에도 나도 모르게 놈의 말에 빠져들었다·
《악몽은 자주 꾸나? 네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이지?》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
그것은····
《너무 끔찍한 일이 아니기를 바라지·》
셀렌디온은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스테이지 5 당시의 크로스로드가 익숙한 성벽이 굳건하게 세워져 있다·
《그게 무엇이든 너무 깊이 들여다보면 현실이 될 테니까·》
그리고 그 성벽 위에는·
오래전 나와 함께 싸웠던 그리운 동료들의 모습이 있다·
그중 누군가가 무어라 외치고 있다·
나를 향해 필사적으로 손을 뻗으면서·
내게 자신의 목소리가 닿기를 애타게 바라는 듯이····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데·
입 모양이 읽혔다·
“주군-!”
***
“대부님·”
퍼뜩 눈을 떴다·
또다시 오래전 과거의 그리운 진창을 벗어나 메마른 현실로 굴러떨어진다·
멸망한 세계 속 잿가루가 쏟아지는 폐허·
이곳이 지금 나의 현실이다·
“대부님· 식사하세요·”
내 옆에는 어느새 다가온 시드가 고기가 꿰인 꼬치를 앞으로 내밀고 있다·
방금 구워낸 듯한 열기와 함께 역한 향이 훅 끼쳤다· 나는 손을 내저었다·
“아니야· 입맛이 없어서····”
“···그럼 이거 제가 먹어도 돼요? 마법을 썼더니 배가 고파서·”
“그래· 네가 좋다면야·”
그러자 시드는 내 몫의 고기 꼬치를 조용히 뜯어 먹기 시작했다·
저 꼬치는 쥐고기로 만들어졌다·
맛도 없고 향도 역하며 영양가도 별로 없지만 이런 시대에 우리가 먹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식량이다·
“먹을 만하니?”
“아뇨 맛없어요·”
오물거리며 금세 쥐고기 꼬치구이를 다 먹어 치운 시드가 중얼거렸다·
“그래도 사람끼리 안 잡아먹어도 되는 게 어디예요·”
“····”
삭막하고 시니컬한 목소리와는 달리 기름 묻은 손가락을 핥는 시드의 얼굴은 여전히 어리다·
이런 시대에 태어나 강제로 애어른이 되어야 했던 이 아이를 가만히 보다가··· 문득 물었다·
“시드야 너 솜사탕 기억하니?”
“네?”
시드가 고개를 갸웃했다·
“솜사탕? 그게 뭐예요?”
“설탕을 녹여 실로 만들어서 그걸 감아서 구름처럼 만든 다음에 먹는 사탕이야·”
“설탕? 구름? 사탕···?”
처음 듣는 단어의 향연에 시드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먹는 거 맞죠? 무슨 맛이에요 그건?”
“달콤해· 아주·”
“달콤한 맛····”
시드는 짧은 인생 동안 몇 번 맛보지 못한 그 맛에 대한 기억을 돌이키려는 듯 미간을 좁혔다·
“무슨 맛인지 알았는데 어떤 거였더라····”
“····”
나는 속으로 말을 삼켰다·
‘네가 태어나고 처음 맞은 새해 첫날· 네 엄마가 네 입에 솜사탕을 떼어 넣어주었단다·’
너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나도 이제 잘 기억해 낼 수 없지만····
이 흉한 세계에도 한때는 그런 아름다운 순간이 있었어·
“언젠가 먹어보고 싶네요 솜사탕·”
이윽고 단맛을 떠올려 내기를 포기한 시드가 중얼거렸다·
나는 피식 웃었다·
“그러게· 꼭··· 그러면 좋겠다·”
헛된 이야기 같지만·
그래도 모르잖는가· 살아 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
정말로·
어떤 일이 일어나기는 할까·
그때였다·
“전하·”
엘리제가 다가왔다·
폐허 건물 안쪽에서 부상자들을 돌보던 그녀는 피곤하고 지친 모습이었다·
“아까의 전투로 다친 이들이 많은데 약과 붕대가 바닥났습니다·”
“···결국 바닥났나·”
“이대로는 오늘 밤을 버티지 못하고 많이 죽을 겁니다·”
마지막 치유사제였던 로제타가 죽은 지도 벌써 3년이 지났다·
그 이후 우리는 늘 부족한 약과 더러운 붕대로 부상을 치료하고 있었는데 그마저도 바닥난 것이다·
“때마침 이곳이 폐허이긴 해도 도시였던 듯하니 한 바퀴 돌며 수색을 해보려 합니다· 운이 좋으면 의약품 외에도 쓸만한 것을 건질 수 있을 테니까요·”
“나도 가지·”
엘리제 혼자 고생시킬 수는 없어서 나도 따라가기로 했다·
그러자 시드도 급히 손가락을 로브 자락에 문지르며 우리를 뒤따랐다·
“저도 갈게요! 처음 오는 도시니까 구경하고 싶어요·”
“···그래· 같이 가자·”
오랜 시간 방치된 폐허 도시 안에 어떤 위협이 숨어 있을지는 모르지만·
나 엘리제 시드 이렇게 3인방은 현재 세계수호전선에 남은 이들 중 가장 강한 전력이다· 문제가 있다면 부숴버릴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영웅과 병사들에게 불침번과 경계를 맡긴 뒤 우리는 숙영지를 빠져나와 폐허가 된 도시 안으로 진입했다·
***
멸망한 세계에서 물자를 찾아 폐허나 구조물 따위를 수색할 때·
맞닥뜨릴 수 있는 위협은 온갖 종류가 있다·
낡은 건물의 붕괴 위협부터 시작해서 흉포한 야생 짐승 유령이나 마귀 따위의 온갖 괴수는 물론이고·
앞서 우리를 포위하고 빈틈을 노리던 쥐떼 불시에 살아 있는 인간을 사냥하는 아포칼립스 나이츠 그리고 또····
하지만 그 무엇보다 더 위험한 것은·
“···불빛입니다·”
다른 생존자 그룹·
바로 사람이다·
“저쪽 건물 안에 화톳불이 보입니다· 이 도시에 머무는 다른 생존자들이 있는 모양입니다·”
“···좋지 않군·”
솔직한 심정이다·
사람을 만나는 것은 좋지 않다·
멸망한 세계에서는 사실 판단하기가 편하다· 만나는 모든 존재가 내 목숨을 노리는 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도 경계하고 모조리 죽이면 그만이다·
하지만 무작정 적대할 수 없는 회색 영역에 있는 것이 바로 사람이다·
사람이기에 덮어두고 죽일 수가 없다· 어쩌면 우리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르고 나아가서는 한편이 될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이렇게 변해버린 세계에서는 아주 높은 확률로·
사람은 우리의 적이다·
우리의 믿음을 산 뒤 우리를 속이고 우리의 뒤를 칠 수 있는 유일한 존재· 그것이 사람이다·
형태만 사람일 뿐인 괴물·
“어찌하시겠습니까? 우회할까요?”
“아니·”
나는 한숨을 뱉었다·
“그래도 접촉해 봐야지· 약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나는 불빛이 어른거리는 건물 쪽으로 앞장섰다·
서로 시선을 교환한 엘리제와 시드도 나를 조심스레 따랐다·
멈추지 않고 걷는 내 뇌리에 문득 조금 전 꿈에서 들었던 셀렌디온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 악몽은 자주 꾸나? 네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이지?
“····”
나는 고개를 거세게 털었다·
그리고 적인지 아군인지 모를 모닥불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