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6· [Unknown] 멸망한 세계에서
스테이지 50에서 나는 패배했다·
최후의 공략은 실패했고 세계는 멸망했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났다·
멸망한 세계에서 여전히 생존자들은 연명하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나는 반역하고 있다·
이미 도래한 멸망의 운명으로부터····
***
“····”
의관을 정리하던 중 거울을 보았다·
15년간 제대로 깎지 못해 장발이 된 내 검은 머리칼 사이로 여전히 젊은 내 얼굴이 보인다·
두 용의 힘을 승계받은 뒤로 나는 더 이상 늙지 않는다·
하지만 깊게 가라앉은 피로한 두 눈에서는 숨길 수 없는 세월이 느껴진다·
어째서인지 지금의 나는·
이미 죽은 나의 아버지··· 트라하를 무척 닮은 것 같다·
“····”
잔뜩 금이 가고 더러운 얼룩이 진 거울을 뒤로하고 나섰다·
릴리의 장례식에 참가해야 했다·
***
릴리의 장례는 간소하게 치러졌다·
세계가 멸망하고 15년간 릴리는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는 몸으로도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그녀는 부족한 물자를 적합하게 배분했고 부족한 인력을 적재적소에 배치했고 부족한 온기를 자신의 화염 마법으로 보충해 주었다·
그녀가 없었다면 우리 세계수호전선의 잔당은 마지막 저항 활동마저 온전히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고 강인하게 버텨낼 것 같던 그녀는 얼마 전 병을 얻었고 그 뒤로 오래 버티지 못했다·
“이 정도면 호상(好喪)이죠·”
얼어붙은 장작더미 위에 눕혀진 릴리의 얼굴을 보며 시드가 무덤덤하게 내뱉었다·
“이런 세상에서 사지 온전하게 아껴주는 사람들의 품에서 모닥불을 쬐다가 죽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요·”
“····”
제 어미의 죽음 앞에서도 시드는 태연했다·
그것은 허세나 강한 척이 아니었다· 정말로 시드는 릴리가 이렇게 죽은 것이 다행한 일이라 여기고 있었다·
멸망한 세계에서 크고 자란 이 아이는 진실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리라·
그리고 실제로도 병사(病死)는 비교적 온전한 최후에 속했다· 앞서 쓰러진 다른 영웅들의 처참한 죽음에 비하면····
이 모양 이 꼴이 된 세계에서 사자의 안식을 온전히 지켜줄 수 있는 장례법은 역시 화장(火葬)이었다·
다른 방법은 여러 이유로 시신이 온전히 유지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은신처로 사용하던 동굴 바깥 입구 근처에서 릴리의 장례를 준비했다· 몇 없는 장작을 모으고 구하기 힘든 기름도 뿌렸다·
그때 주위를 경계하던 영웅 하나가 내게 다가와 슬쩍 입을 열었다·
“전하·”
돌아본 곳에는 감청색 머리칼에 장의사 복장을 한 여인이 서 있었다·
현재 세계수호전선에 남은 몇 안 되는 숙련된 전사 장의검사 엘리제였다·
그녀는 잃은 오른쪽 눈에 안대를 차고 잃은 왼팔 대신 마법 의수를 착용했는데 등에 멘 검관은 15년 전 그대로였다·
검관 안에는 앞서 죽은 동료들의 무기가 간직되어 있었다·
그녀가 잃은 그녀의 주인이자 나의 연인이었던 세레나데의 유품 또한· 엘리제의 검관 안에 보존되어 있을 터였고·
“전하·”
세레나데 생각에 내가 잠시 멍해진 사이 엘리제가 재차 나를 불렀다·
이미 세계가 멸망하고 에버블랙은 존재하지 않는 나라가 되었는데도·
엘리제는 나를 전하라고 불렀다· 이제 신분 따위 아무래도 좋은 세상인데도· 영원히 나의 대관식이 열릴 리 없는데도·
“이렇게 크게 불을 피우면 ‘놈들’에게 들킬 겁니다·”
“····”
“안 그래도 놈들의 포위망이 점점 좁혀져 오고 있습니다· 이번에 불을 피워 놈들이 우리 위치를 특정하게 되면 겨우 찾아낸 이곳 은신처를 버려야 합니다·”
‘놈들’의 추적을 피해 이곳 동굴로 우리 세계수호전선의 잔당이 거처를 옮긴 지 이제 겨우 일주일째였다·
오랜만에 찾은 안락한 은신처였다· 포기하기엔 아까운 곳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앞으로 더 버틴다고 해봐야 며칠 정도다· 그 뒤에는 결국 놈들에게 들키고 새로운 은신처를 찾아야 하겠지·
지난 15년간 그래왔듯이·
“다음으로 옮길 은신처 봐둔 곳이 있지?”
내가 묻자 망설이던 엘리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릴리의 장례를 허투루 치를 수는 없어· 예정보다 은신처를 조금 빨리 옮기게 되더라도 릴리를 제대로 보내주자·”
“···알겠습니다·”
물러서는 엘리제의 눈에는 흐릿한 슬픔이 분명히 감돌고 있었다·
이미 수많은 동료의 죽음을 지켜보고 그 무기를 수습해 온 그녀지만 릴리의 죽음은 그녀에게도 아픈 것인 모양이다·
이 시대의 장례식은 정말 별것 없었다· 이미 멸망한 세상에서 내세의 축복 따위 빌어서 무엇할 것인가·
그저 조용히 애도하고 불을 붙일 뿐·
‘···예전에는 사제가 내세를 축복하고 병사들이 하늘에 공포탄을 쏘고 내가 시구를 읊곤 했었는데·’
멸망 전 세계의 장례식을 문득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시구를 읊어본 적이 언제였더라·
멸망 이후 너무 많은 사람이 죽고 제대로 된 장례도 치르지 못하게 되면서 나는 사자를 위해 시를 읊는 일을 그만두었다·
릴리를 아꼈던 만큼 한 구절이라도 내뱉고 싶었지만·
“····”
이제는 변변한 시구조차 제대로 떠오르질 않았다· 나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모두의 애도가 끝나고 불을 붙일 시간이 왔다·
가만히 내 옆에서 무감정한 표정으로 서 있던 시드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릴리의 아래에 깔린 장작에 마법적인 불이 붙었다·
우리는 화염에 휩싸여 타오르는 릴리를 마지막까지 지켜보았다·
그녀는 18년 전 내가 전진기지에서 처음으로 검은 거미 군단을 상대할 때부터 내 동료였다·
그 시절을 함께했던 루카스도 데미안도 이미 죽거나 실종된 지금·
마지막 원로 영웅인 릴리의 퇴장은 내 속을 울렁이게 만들었다·
맹렬한 마법의 불길이 오래지 않아 사그라들었고 릴리가 누워 있던 자리에는 뼛가루만이 남았다·
시드가 한번 더 가볍게 손을 휘젓자 바람이 몰아치며 그 뼛가루마저도 흩어져 사라지게 했다·
이것이 멸망기의 장례식이었고 내가 지난 15년간 본 장례 중에서 가장 깔끔한 마무리였다·
그도 그럴 것이·
찍찍····
찍찍찍찍찍·
멸망 이후 이 세계에는 저 ‘놈들’이 들끓게 되었으니까·
어느새 은신처 동굴 입구 주위에 쥐떼가 몰려들어 있었다· 마치 파도처럼 움직이는 놈들은 멀리서 우리를 둘러싼 채 시뻘건 눈을 번뜩였다·
멸망한 세계에서 대체 저 쥐떼가 무엇을 먹고 저만한 숫자를 유지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놈들이 내 영웅들의 시신을 내버려 두지 않는다는 점이다·
고인을 모독하지 않기 위해서는 화장 후 뼛가루마저 날려 보내는 것이 최선이다· 적어도 릴리의 죽음은 저놈들에게 더럽혀지지는 않을 것이다·
‘···호상이라·’
이제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릴리를 생각하며 나는 길게 숨을 삼켰다·
‘호상이라····’
멀찍이서 파도처럼 일렁이는 쥐떼가 슬금슬금 거리를 좁혀오는 게 느껴졌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이동하자· 다음 은신처로·”
쥐떼가 불어나기 시작하면 감당할 수 없다·
하지만 쥐떼보다 더 두려운 것은 ‘그 다음’의 적이 오는 것이다·
쥐떼는 진짜 적들의 눈과 코와 귀에 불과하다· 진짜 적이 부리는 척후에 불과하다·
진짜 적이 오기 전에 우리는 도망쳐야 한다·
생존자들은 이미 모두 짐을 꾸린 상태였다· 사실 딱히 대단한 짐이랄 것조차 남지 않은 시대였다·
우리는 길잡이인 엘리제의 인도를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다· 우리를 포위한 쥐떼가 일제히 흩어지며 길을 내주었다·
여전히 우리에게 새빨간 시선을 고정해 둔 채로·
쥐떼를 애써 무시하며 우리는 하얀 잿가루가 비처럼 떨어지는 얼어붙은 세상 속으로 나아갔다·
멀리서 검은 폭풍이 다가오고 있었다·
***
다음 은신처로 향하는 길·
로브나 망토 따위를 머리끝까지 올려 쓴 채 우리는 끝없이 쏟아지는 잿가루를 맞으며 걷고 있다·
거의 눈앞이 똑바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센 잿가루의 폭우였지만 우리는 태연했다· 사실 이 정도로는 악천후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평범한 날씨였다·
그런 시대였으니까·
“후회하세요?”
문득 옆에서 그런 질문이 날아왔다·
돌아보자 시드였다· 작은 소년은 발이 푹푹 빠지는 잿가루의 언덕을 태연하게 거슬러 오르고 있었다·
내가 되물었다·
“후회라니? 네 엄마 장례 치른 거? 그래서 은신처 버리고 떠나는 거?”
“아니요·”
푹 덮어쓴 소년의 로브 사이로 빤한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15년 전 마지막 방어전의 그날 그런 선택을 하신 거요·”
“····”
“결국 대부님의 그 선택이 이 세상을 이렇게 만들었잖아요· 후회···하시나요?”
나는 잠시 멍해졌다·
15년 전의 내 선택이 무엇이었는지 기억이 불분명해서였다·
‘그때 스테이지 50에 이르러서 나는····’
‘잠들지 못하는 호수왕녀’를 죽이는 대신 그녀를 살리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서 마왕을 따로 만나서····
지끈!
잘 떠오르지 않는 선택의 순간 대신 공략 실패 이후 닥쳐온 처참한 결과에 대한 기억이 해일처럼 눈앞을 뒤덮었다·
불타는 크로스로드·
끝내 밀고 들어오는 최종보스 ‘잠들지 못하는 호수왕녀’·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무한한··· 정말이지 끝이 없는 괴수의 무리·
녹아내리는 성벽 함께 증발하는 그 위의 병사들·
“····”
나는 마지막까지 ‘잠들지 못하는 호수왕녀’와 대화를 시도했다·
그것이 진엔딩으로 향할 수 있는 유일한 공략의 길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최종보스는 무참하게 검을 휘두를 뿐이었다·
이때 세레나데가 나를 밀쳐내고 대신 ‘잠들지 못하는 호수왕녀’의 검을 맞았고 내 품에서 숨을 거뒀다·
루카스는 ‘잠들지 못하는 호수왕녀’로부터 나를 탈출시키기 위해 홀로 적장을 막아섰다· 그리고 우리 모두를 크로스로드 밖으로 보낼 때까지 혈투를 이어갔다·
그 최후는 알지 못한다·
“····”
토르켈은 마지막까지 성문 앞을 지키다 전사했다·
쿠일란 켈리베이 베르단디 롬펠러 남매는 종족신의 가호와 함께 최후까지 저항선을 유지했으나 끝없는 괴수의 파도 앞에서 결국 무너졌다·
수많은 병사와 왕들이 옥쇄(玉碎)하며 시간을 끌었다·
나를 살리기 위해서·
내가 이끄는 패잔병 무리를 크로스로드 바깥까지 호위한 뒤 에반젤린은 마지막에 뒤돌아서서 다시 크로스로드에 뛰어들었다·
크로스 가문의 후계다운 최후를 맞겠다며·
루카스를 혼자 두고 싶지 않다며·
악마와 괴물로 들끓는 자신의 고향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 최후는 알지 못한다·
“····”
이날 세계수호전선은 궤멸했다·
그리고 세계는 멸망을 시작했다·
‘잠들지 못하는 호수왕녀’가 이끄는 끝없는 괴수 무리가 이 세상 모든 땅과 바다와 하늘을 불태웠다·
세계수호전선 최후의 잔당인 우리는 어떻게든 저항군을 조직해 대항하려 했으나 놈들은 무한했고 우리는 최정예를 모두 잃은 뒤였다·
힘겹게 살아남은 이들도 이후 이어진 15년간의 도피 생활 중에 하나둘 목숨을 잃었다·
그리하여 지금이다·
대지는 얼어붙고 하늘은 불타는· 이미 멸망해 버린 세계에서·
우리는 죽지 못해 살고 있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 역전의 수를 찾아··· 이 지옥을 헤매고 있다·
“엄마한테 들었어요·”
침묵하는 내게 시드가 다시금 물었다·
“그날 최후의 전투 전에 그 괴물을 죽일 기회가 있었다고· 하지만 대부님께서는 전쟁이 아닌 대화를 선택하셨고 결국 세계가 이렇게 되었다고·”
“····”
“후회하시나요?”
빤한 소년의 시선 앞에서 나는 숨이 막혔다·
“만약 그날의 선택을 되돌릴 수 있다면··· 되돌리실 건가요?”
“····”
대답이 쉽게 나오질 않았다·
그때였다·
“전하!”
일행의 선두에서 길잡이를 하던 엘리제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적입니다!”
두두두두····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울리더니 삽시간에 가까워졌다·
생존자 전원이 다급하게 무기를 뽑아 들었다· 엘리제가 목이 터져라 외쳤다·
“아포칼립스 나이츠입니다-!”
고함이 울리는 것과 동시에 잿가루 폭우를 헤치고 사방에서 망토를 펄럭이는 기병대가 달려들었다·
역병·
기근·
전쟁·
죽음·
멸망 후에 지긋지긋하게 우리를 괴롭혀 온 적들이 먹구름처럼 우리를 덮치며 무기를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