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4
22· 세계수 탄신일(2)
태초의 산맥 그 한가운데에 우뚝 솟아오른 태초의 세계수 천령나무·
엘프와 요정들은 그곳에 굳건히 터 전을 잡아 ‘천령나무의 요람’이라는 국호(國號)를 내걸었다·
그런 천령나무의 요람을 두고 원작 로판 ‘공녀럽エビ의 팬층 사이에서
농담처럼 통하는 말이 하나 있었다·
‘천령나무의 요람에서 사업을 할 생각이라면 건축업과 부동산은 빼 고 해라· 그럼 무조건 성공한다·’
그 이유는 참 간단하게도 세계수 천령나무가 자신의 품에 들어온 요 정들에게 스스로 가지를 가꿔서 집 을 지어주었기 때문이었다·
즉 엘프들은 집세 걱정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대충 얼기설기 엮인 나뭇가지 둥지에서 살아간다고 생각 하면 오산이다·
“와아····”
“이게 진짜 세계수의 의지로 지어
진 도시라고···r
엘프 국가 천령나무의 요람의 수 도 ‘구름꽃요람에 도착한 직후 스 텔라의 생도들에게는 자유 시간이 잠깐 주어졌다· 패밀리어 계약식을 진행하기에 앞서 ‘세계수 탄신일’에 참여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건 핑계고·
솔직히 말해서 풀레임은 이 일정을 일종의 대학교 mt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술을 마시면서 놀지는 못하지만 친구들과 함께 구름꽃요람이라는 아 름다운 도시를 자유롭게 관광하도록
풀어놓는 건 아마도 생도의 스트레 스를 풀어주기 위한 학교의 조치일 테니까·
쏴아아아!!
저 하늘 끄트머리에 매달린 세계수 의 나뭇가지로부터 폭포가 쏟아져 내린다·
그 폭포가 두 갈래로 나뉘는 길목 에 커다란 다리가 놓여 있었고 양 옆에는 마치 아파트를 연상케 하는 대저택이 송송 돋아 있다·
원작 로판에서는 수도 구름꽃요람 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수백 그루의 거대한 나무줄기가
세상을 가득 메웠다· 그리고 모든 나무줄기에는 집이 열매처럼 맺혀 있었다·’
인간들의 도시가 평평한 바닥을 두 고서 사방향으로 넓다면 엘프들의 도시는 위아래로 넓었다·
그 때문에 그들에게는 필요 없지만 외부인을 위한 배려로 계단이 상당 히 많았는데 체력이 좋지 않은 이 들은 구름꽃요람을 관광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고 한다·
빼꼼
저 위쪽에 위치한 오두막의 창문이 열리며 엘프 꼬마 한 명이 이쪽을
내려다보았다·
스텔라 생도들에게 엘프의 도시가 신기한 구경거리인 만큼 반대 역시 도 마찬가지였다·
마법 전사라는 존재가 민간인 사이 에서 ‘영웅’ 취급을 받으며 쉽게 만 나볼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무려 세계 최고의 마법 전사 양성 아카데미의 생도들이 이렇게나 많이 모여 다니는 건 굉장히 진귀한 풍경 일 것이다·
풀레임은 환히 웃으며 꼬마들을 향 해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부끄러운 듯 후다닥 모습을 감춘다·
“귀엽네· 엘프들은 꼬맹이도 잘생 겼어·”
“맞아맞아·”
소녀들이 요란스레 소란을 떨었다· 살면서 세계수에 와볼 일이 얼마나 더 있겠는가· 설령 귀족이라고 해도 이런 기회는 흔치 않다·
“정화되는 느낌이네····”
사방이 집이며 자연이었고 요새였 다·
그야말로 환상적인 요정의 도시·
최근의 엘프들은 꽤나 인텔리한 삶 을 추구하기에 이곳에는 없는 게 없
었다·
학교를 필두로 해서 도시에 무기상 점 술집 미용실 화장품 가게 네일 아트 수공예 화원 등 다양한 상가 가 들어서 있었고 심지어 최근에는 고깃집이나 국밥 등 인간들의 먹거 리가 유행하기까지 했다·
이렇듯 엘프들이 외래 문물을 빠르 게 받아들이게 된 원인을 톡톡히 수 행한 주인공이 바로 스텔라 아카데미 의 교장 ‘엘트먼 엘트윈’이었다·
흡사 소설 속 주인공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엘트먼 엘트윈의 업적 은 참으로 위대하다·
드워프와 거래하여 물질 마법 및 연금&마공학 기술을 인간 사회에 전파하였으며 제2의 세계수를 구한 대가로 엘프들과 최초로 문명적 교 류를 시작하였고 천사들에게서 신 성 마법을 배워와 현재의 ‘치유 마 법’의 토대를 만든 자가 바로 엘트 먼 엘트윈이었다·
그 모든 일들이 대부분 백여 년 전 일어났으니 당시의 그는 정말 전성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왜 갑작스레 마법 전사 로서의 일을 그만두고 후세를 양성 하기 위한 스텔라 아카데미의 교장 직으로 들어왔는지는 아직까지도 의
문이지만
어찌 됐든 요즘 시대의 엘프들은 상당히 개방적이라는 결론이 내려졌 다·
“휘유 아가씨· 우리랑 같이 매실차 나 한잔 마시러 갈까?”
길거리에서 헌팅하는 엘프·
“싸다 싸! 엘프가 직접 가꾼 세계수 렐릭 볼 지팡이가 단돈 삼만구천팔백 크레딧! 삼만구천팔백 크레딧!”
노점상 깔아놓고 장사하는 엘프·
“뭐 인마?! 내가 먼저 했어 안 했 어!”
“이 아저씨가 진짜!”
대낮부터 취해서 싸우는 엘프 등·
정말 많은 현대적인 엘프들이 공존 하는 도시가 바로 천령나무의 요람 이었다·
게다가 ‘세계수 탄신일’까지 겹쳐 서 그런지 도시는 거의 축제 분위기 였는데 스텔라의 생도들을 포함해 서 외부인과 이종족이 상당히 많아 서 굉장히 북적거렸다·
“풀레임 우리 저거 먹어볼래? 꼬 치 같은 걸 파는데·”
“어 음····”
풀레임은 저게 뭔지 알고 있다· 원 작 로판에서 그 향기로운 냄새에 이 끌려 에이젤이 피 같은 한 줌의 돈 을 지출하여 구매했으나 나무껍질 을 씹는 듯한 질감에 절망하였더라 는··· 그런 묘사가 있었다·
“난 별로···
“그래? 그럼 우리끼리 먹자!”
“에이젤 너도 먹을래?”
“흐음··· 그러죠 뭐·”
친구들이 꼬치 상인 엘프에게 우르 르 몰려가는 모습을 보며 그녀는 잠 시 고민했다·
그냥 알려줄까?’
이내 그만두었다· 맛이 없든 어쨌 든 먹어보는 것도 다 경험이니까· 그 래야 훗날 ‘나 그때 먹어봤는데 진짜 별로더라’라고 말할 자격이 있을 터 다·
멍하니 뒷짐을 진 채 구름꽃요람의 거리를 구경하던 풀레임은 저 멀리 에서 익숙한 뒤통수를 발견하였다· 백유설이 노점상에 쭈그려 앉아서 딱 봐도 싸구려처럼 보이는 잡동사 니를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 었다·
‘혼자네?’
그는 매번 혼자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잘 알기는 했지만 요 즘 들어서 어쩐지 자꾸만 참견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말을 걸기 위해 다가가려는 데 그녀의 앞으로 사람 한 명이 스 쳐 지나갔고·
휘잉-
“···엥?”
다시 시야가 확보되었을 땐 백유 설이 이미 모습을 감춘 뒤였다·
매번 그랬듯 귀신처럼·
그리고 그 인파 사이로 다른 소년
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찬란한 금색 빛 후광을 반짝이며 미소 짓는 제레미 스칼벤·
“풀레임 안녕·”
순식간에 풀레임의 표정이 구겨지 기 시작하였다· 제레미는 느긋하게 풀레임에게 다가와 눈을 마주하였 다·
“뭔데?,,
“나한테는 아까의 그 얼굴을 보여 주지 않는구나?”
“뭔 얼굴·”
그녀는 이 상황이 매우 불편했다· 제레미와 엮이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멀뚱멀뚱·
제레미는 풀레임에게서 다섯 발자 국 떨어진 채 싱글벙글 웃으며 그 저 바라보기만 했다·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즐겁다는 듯이
“뭔데· 빨리 용건이나 말해·”
“아·,,
그러자 그는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잠시 골똘히 고민하더니 황급히 말 했다·
“오늘 날씨가 좋지?”
“아니· 존나 우중충한데·”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같이 밥 먹지 않을래? 내가 전망 좋은 곳 알아봤어·”
“배부르니까 혼자 처먹어·”
“간단한 산책은 어때?·”
“싫어·”
“저쪽에 애완 카페 있던데·”
“난 귀여운 거 안 좋아해·”
철벽 방어·
“그럼···
제레미가 무어라 더 말을 하려는 그때 누군가가 앞을 가로막았다·
붉은색이 감도는 흑색 머리칼에 자 줏빛 눈동자를 가진 날카롭지만 지 적인 인상의 소년·
“···해원량?”
“황태자· 그쯤 해두지· 네 행동이 상당히 무례하고 강압적이란 사실 은 인지하고 있나?”
“하하 갑자기 무슨 소리야· •••끼어 들지 말고 그냥 조용히 사라져주면
안 될까?”
제레미가 그리 웃으며 말하면 보 통의 사람들은 알아서 시선을 내리 깔고 피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것도 통하는 사람한테만 통하는 법· 마법계의 정점에 서 있 는 만월탑의 후계자에게는 별로 의 미가 없는 행동이었다·
파직!
두 소년이 눈싸움을 시작하자 그 사이에서 풀레임만 안절부절하였다·
‘아오 씨 이 미친놈들 왜 이래?’
초등학생 때나 보던 유치한 로맨스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장면이라니·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기 이전에 황 당했다·
‘내가 얘네 꼬신 적 있나? 아무리 생각해도 없는데?’
해원량은 진짜 그냥 평범하게 남녀 사이 친구처럼 지냈다·
제레미는 말 걸어올 때마다 쌍욕 퍼부으면서 꺼지라고 욕한 게 전부 였고·
모르겠다· 애초에 연애에 관련해서 는 완전히 쥐약인 풀레임이다·
연애를 판타지 소설로 배웠는데 어 떻게 하란 말인가·
아오 돌겠네 진짜!’
풀레임이 머리를 쥐어뜯는 와중 제레미가 먼저 움직였다·
“응· 안 그래도 이번에는 돌아가 볼 생각이었어· ···배운 대로 해보 려고 했는데 잘 안 되네·”
제레미는 그리 말하며 빙그레 웃은 뒤 그대로 인파 속으로 걸어 들어 갔다·
“후우····”
드디어 한시름 놓았다는 생각에 안 도의 숨을 내쉰 그녀는 해원량의 등 짝을 퍽! 후렸다·
“야! 너 뭔 생각으로 걔랑 싸워? 아무리 만월거탑이라도 스칼벤이랑 척져서 좋을 게 없잖아?”
“···풀레임·”
해원량은 착잡하게 가라앉은 눈빛 으로 풀레임을 돌아보았다· 그에 그 녀는 큼지막한 눈동자를 껌뻑거렸 다·
“어 어어· 왜케 부담시럽게 쳐다보 냐·”
“황태자는 위험하다· 갖고 싶은 게 있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지려고 들겠지· 그리고 너는 황태 자가 ‘가장 갖고 싶은 물건’이 되어
버렸다·”
“아니 뭐···「
그놈 위험한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천상의 천사라는 믿는 구석이 있었기에 문제는 없다·
그러나 그 사실은 비밀이었고 누 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기에 입술을 꾹 다물고 있자 해원량이 무심히 지 나가듯 툭 물었다·
“···혹시 그놈을 믿는 건가?”
“뭐? 그놈?”
“아니 미안하다· 실언했군·”
해원량은 인상을 찌푸리고서 자신
의 머리를 부여잡았다·
“뭐야 두통 있어?”
“···최근에 조금 생기긴 했다만 생 활에 지장은 없다·”
“이리 와봐· 내가 그런 거 전문인 거 알잖아·”
마음 같아서는 풀레임에게 치료해 달라고 하고 싶다· 하지만 이건 신 체적인 문제가 아니라 정신적인 문 제임을 자각하고 있는 해원량이었기 에 그럴 수 없었다·
“···다음에 부탁하지·”
식은땀을 살짝 홀리고 호흡도 거 칠어진 게 분명 뭔가 문제가 있긴
있는 것 같으나 해원량은 풀레임의 팔을 끝끝내 뿌리치고서 서둘러 자 리를 빠져나갔다·
“어 야! 기다려!”
뒤에서 풀레임이 자신을 허겁지겁 쫓아오는 게 느껴졌으나 멈춰 설 수는 없다·
,젠장····’
증세가 점점 심해졌다· 곧 괜찮아 질 것이라고 생각했거늘· 그렇다고 병원 생활을 할 수는 없었다· 정신 과에 다니기 시작하면 학업에 투자 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 것이고 증세가 심각하면 강제로 학교를 쉬
어야 할 수도 있었으니까·
‘어떻게든 방학까지만 버티는 거 다···
그때 진료를 받아도 무방하다· 그 는 이쪽 분야로 아주 능통한 의사를 한 사람 알고 있었으니까·
비척비척 사람들의 시선에 잘 띄지 않을 만한 골목으로 이동한 해원량 은 벽에 기댄 채 땀에 흠뻑 젖은 셔츠를 부여잡았다·
점점 상태가 호전되고 있었다·
이렇듯 한 번씩 머릿속을 거대한 벌레가 누비는 듯한 끔찍한 고통에
휩싸이고는 했지만 참고 또 견뎌내 면 어떻게든 가라앉는다·
‘이 정도면 어떻게든 패밀리어 계 약식을 진행할 수는 있겠···
“어머 이게 누굽니까·”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익숙한 목소리는 아니다· 다만 몇 번인가 마주하면서 들어봤을 뿐·
해원량은 천천히 고개만을 비스듬 이 돌려서 상대를 확인하였다·
“···메이젠 티렌 교수님?”
흑색의 로브로 얼굴을 반쯤 가린
채 어둠 속에 모습을 가리고 있었 지만 그 모습은 똑똑히 알아볼 수 있었다·
“제 ‘씨아들이 어디로 갔나 했더 니··· 여기에 하나가 있었군요? 후 후 운이 아주 좋습니다·”
“무슨··· 소리십니까?”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답니다·”
아·
그제야 해원량은 깨달았다·
이자가 내 머리를 끊임없이 갉아먹 는 고통의 원흉이구나·
‘위험하다·’
그러나 그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한 발자구 두 발자국
그녀가 다가왔으나 다리가 바닥에 뿌리를 내린 둣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마침 잘 됐군요· 이렇게나 ‘침식 도’가 진행되어 있을 줄이야····”
완전히 정지해 버린 해원량을 보며 메이젠은 입꼬리를 슬며시 올렸다·
운이 좋다· 정말 이렇게까지 좋을 수는 없을 것이다· 마치 자신을 위 한 무대가 꾸며지는 것 같지 않은 가?
소름 끼칠 정도로 황홀한 행복감을 만끽하며 그녀는 멍하니 동공이 풀려 버린 해원량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자아 저항하지 마세요·”
그렇게·
메이젠이 자신의 머리에 손을 뻗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당신은 이미 감정의 노예가 되었 으니까요·’
해원량의 정신이 암전되었다·
* * *
천령나무의 요람은 비록 국가이나 인간이나 드워프 국가와는 다른 양 상을 띠고 있었다·
엘프 중에서도 가장 세계수와 높은 친화도를 가진 이들을 일컬어 ‘하이 엘프’라 부르며 그들은 엘프 사회 에서 귀족과 비슷한 취급을 받는다·
그런 하이 엘프 중에서도 세계수와 가장 가까이에 닿아 있는 자에게 부 여되는 칭호 ‘왕(王)’·
엘프의 왕은 백성을 지배하지 않으 며 정치하지도 않는다·
가장 높은 곳에서 군림할 뿐·
왕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모든
엘프의 활력이 되어주었으며 세계 수와 요정들을 이어주었고 이 땅에 생명을 내려주는 근원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정치와 외교를 아예 하지 않을 수는 없는 시대였기 에 그 부분에서는 ‘장로회’가 도맡 아서 하기는 했는데····
-폐하· 이번 탄신일에도 모습을 드 러내지 않으면 장로회에서 일을 단 단히 치를 것 같습니다·
*’하아····”
엘프의 왕이자 세계수의 버팀목 꽃서린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왕에게 권력 따위는 없다· 실질적
인 발언권과 권력은 모두 장로회가 가지고 있었기어L
엘프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욕심 많고 음침한 그 장로회 늙은이 들이 부리는 잔꾀는 꽃서린으로서도 참으로 곤란하기 그지없었다·
一아마도··· 이번 일을 트집 잡아서 ‘신령수의 정원’으로 통하는 문의 관리권을 빼앗을 속셈이겠지요· 그 곳은 오로지 세계수를 지탱하는 폐 하께서만 입장할 수 있는 곳일 터인 데 감히···!
“괜찮으니 기사로서 본분을 다하 도록 하세요· 정치에 관여할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감히 주제를 넘어선 소 리를 했군요· 송구합니다·
“아니에요· 마음만으로도 큰 도움 이 되고 있으니까요· 그냥··· 이런 더럽고 추잡한 내정 싸움에 끌어들 이는 게 미안해서 그래요·”
-알겠습니다·
기사의 목소리가 사라지 スト 꽃서린 은 몸을 일으켰다·
고작해야 햇볕 한 줌 간신히 들어 올 법한 이 어두운 암실(暗室) 내부 는 이상하리만치 밝았다·
마치 꽃서린이라는 인물 자체에서 빛이 나는 것처럼·
“치장··· 해야겠지·”
이번 탄신일은 빠질 수 없다· 엘프 의 왕으로서 도리가 아니다·
게다가 이번에는 외출하는 김에 처리할 일이 더 있었다·
스텔라 생도들이 패밀리어 계약식 을 끝마칠 때까지 백색의 궁전에서 자리를 지켜야만 했으며 그 뒤로는 자신의 오랜 친우 ‘잎하¹r이 잠든 정원에 방문해 볼 생각이었다·
“하아·”
우려가 섞인 한숨을 내쉬며 꽃서린 은 스르륵 옷을 벗었다·
무성 (無性)·
사랑의 감정을 겪지 못한 엘프에게 는 성별이 없다· 그녀 또한 여성체 지만 2차 성징이 오지 않아 여성이 가지는 신체적 특징이 거의 없었다·
문득 그녀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 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신이 내려준 미(美)의 결정체·
수려하였으며 미려하였고 가려하 였으며 모려했다· 누군가는 자신을 향해 황홀하다 하였고 누군가는 청 아하다고 하였으며 누군가는 광휘 하다고 감탄했으나·
그녀에게는 이러한 외모 따위 그
저 족쇄에 불과했다·
타인과 얼굴을 맞대고 식사를 해본 적이 언제였던가·
타인과 눈을 마주치고서 대화를 나 눠본 게 대체 언제였던가·
길거리를 자유롭게 누볐던 시절·
누구나 자신을 좋아하지는 않았으 나 누구나 좋아할 수 있었던 시절·
마음껏 자유를 만끽하였던 바로 그 시절이·
대체 언제였더란 말인가·
이제는 망각의 저편으로 녹아내려 희미해진 추억을 희석되지 않도록
붙잡는 것이 고작이었다·
본디 어두운 감정이란 물감과 같아 서 맑은 물속에 떨어지는 순간 순 식간에 전체를 물들여 버린다· 꽃서 린은 자신의 가슴에 물감 한 방울이 흔들리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건 우울증일까 외로움일까·
•···정신 차리スト· 탄신일에도 이 러고 있을 수는 없어·’
꽃서린은 애써 마음을 가다듬었다· 세계수와 교감하는 능력을 지닌 그 녀가 우울을 느끼면 엘프의 숲 전 체가 우울해진다·
자신에 의해 감정이 좌지우지되는
숲을 위해서라도 애써 밝은 모습을 유지해야만 했다·
,옷은···
저주를 받은 이후부터는 항상 똑같 은 의복만을 차려입었다·
살결이 조금도 드러나지 않도록 꽁 꽁 감싸는 새하얀 드레스·
말이 드레스지 사실상 거대한 봉투 를 뒤집어썼다고 봐도 무방했다·
거기에 더해 가면을 쓰고 면사포 를 걸쳤다· 이럼에도 불안했다·
마지막 외출 때 이렇게까지 온몸 을 꽁꽁 틀어막았음에도 ‘상사병’을 시름시름 앓게 된 피해자들이 속출
했었으니까·
아무리 몸을 가리고 에워싸도 세 상에 1시간 노출돼서는 안 된다·
그것을 명심하며 그녀는 눈을 감 고서 기도했다·
‘부디 이번에는 아무 일 없이 무 사히 지나갈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