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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아돌레비트와 모르프(5)
홍비연의 여왕 대관식은 성황리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녀는 여왕으 로서 즉위하는 즉시 홍시화라는 어 둠의 싹을 잘라내는 데에 성공하면 서 자신의 위세를 입증하였고 입지 를 더욱 견고하게 다질 수 있었다·
이제 그녀가 여왕의 자질에 걸맞단
사실을 의심하는 자는 한 명도 없었 으며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홍시화 파벌의 사람들은 모조리 사라지게 되었다·
··서리궁전 지하·
불의 옥·
가장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자들에 게만 형벌을 내린다는 이곳은 사시사 철 뜨거운 열기로 가득해 1년 이상 버티는 범죄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사실상의 사형 선고·
이곳에 갇힌 범죄자는 죽어서도 나 올 수 없으며 그 시체는 언젠가 뜨 겁게 달궈져 불타 재가 되어버린다·
최근 1년간 불의 옥에 수감된 범 죄자가 없는 것을 생각하면 이곳은 오롯이 홍시화 혼자만의 장소였다·
철커덩!
불의 옥에 수감된 홍시화는 뒤쪽으 로 꽁꽁 묶여 버린 양팔을 꼼지락댔 으나 부질없는 짓이었다·
이제는 티끌만큼도 남지 않았던 마 나 써클은 완전히 폐했으며 발목의 힘줄을 절단당하여 감히 걸어서 탈 옥하는 것도 불가능·
“후후··· 고향처럼 친숙한 장소네·”
애당초 탈옥할 생각 따위는 없었던 홍시화는 벽에 등을 기대었다·
치이이익···!!
등의 살갗이 타들어 가며 고기 익 은 내가 풍겼으나 홍시화는 고통스 럽다는 표정 하나 짓지 않았다· 이 미 그보다도 더한 심장이 불타는 고통이 가슴을 옥죄고 있는데 고작 피부가 불타는 고통쯤이야·
다만 그보다도 더욱 아픈 게 하나 있다면·
마지막 가는 순간 흘로 외로이 떠 나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언니·’
눈을 감으니 그녀의 얼굴이 떠올 랐다· 우리 중에서 가장 특출난 재
능을 타고났다는 죄로 누구보다 어 린 나이에 저주로 인해 불타 죽어버 린 아름다운 소녀·
꿈도 많고 열정도 넘쳤던 언니의 죽음에 충격을 받았던 그때 그날의 기억이 지금의 홍시화를 만들었을지 도 모르겠다·
나는 그렇게 되지 않겠다·
그리고 나의 후손이 저렇게 되도 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
그녀는 수갑을 절그럭거리며 콧노 래를 불렀다·
어릴 적 언니와 함께 부르던 노래 였다· 꽃밭 사이를 뛰놀며 부르던
추억 속의 아늑한 콧노래····
불꽃의 기운을 한껏 받아들인 탓에 이제는 제정신을 유지하는 것도 힘 들어야 정상이거늘 이상하게도 홍 시화는 어느 때보다도 정신이 멀쩡 했다·
평생을 고통스럽게 하였던 심장의 저주마저도 그녀의 죽음을 예상하고 있는 것일까 지금만큼은 얌전히 굴 고 있었다·
‘그래 이거면 충분한 거야· 이것으 로 모든 것을 끝낼 수 있다면····’
언니와 함께 부르던 콧노래를 훙얼 거리며 홍시화는 그렇게 눈을 감았
다· 끈질기게도 살아왔던 삶을 증명 하려는 것인ス】 그녀의 신체는 죽음 을 맞이한 뒤에도 쉽사리 재가 되지 않았다· 하나의 불꽃 송이가 되어 활활 피어올랐다·
타닥 타다닥···
홍시화의 불꽃이 끈질기게도 사그 라지지 않은 채 그렇게 며칠 내내 불타는 와중·
철커덩!
불의 옥이 열리며 홍비연이 들어 와 그것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증오스러운 언니· 마지막으로 할 일이 있어·”
* * *
모르프란 숲은 12년 전 그날의 사 건 이후로 아돌레비트 왕가가 도맡 아서 관리를 하고 있었다·
숲이 혹마력으로 심하게 오염되어 매년 정화의식을 치러야 한다는 이 유였으나 실상은 달랐다·
“···이곳인가요?”
에이젤이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홍 비연은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프란 숲 대제단·
흑마력도 아니고 마수도 아니다·
이곳에 잠들어 있는 이의 정체는 흑마타락을 하여 죽음을 맞이했다고 알려진 ‘아이작 모르프’으] 육신·
“정말··· 할 수 있을까요?”
에이젤이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홍 비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1년에 한 번 재봉인을 해야만 할 정도로 너희 아버지의 기운은 매년 되살아나고 있어· 언제든 살아나실 준비가 되었다는 증거라고 생각해·”
“···그렇군요·”
현재 그들은 제사복을 정갈하게 차
려입고 있었는데 일전에 왔을 때와 는 살짝 바뀐 옷차림이었다·
그때는 신성 연방의 특별한 인챈트 를 하여 흑마 방호력을 막기 위함이 었다면 이번에는 순수한 영혼 의식 을 치르기 위해 완전히 깔끔하고 정 화된 복장을 착용했을 뿐·
그 어떤 위협으로부터 신체를 보호 하기 위한 마법적 장치는 하나도 없 었다·
게다가 의식을 치르기 위한 멤버도 상당히 바뀌어 있었다· 당시에는 열 둘의 의식술사 여섯의 결계술사 셋 의 사념술사와 대마법사가 있었지만 지금은 오로지 7클래스 이상으로 구
성된 대마법사 집단 50명이 모여서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지금부터 네 아버지의 신체를 감 싸고 있는 한기를 녹일 거야· 하지 만 저 얼음의 고치로부터 빠져나온 다고 해서 네 아버지가 살아나는 것은 아니야· 알고 있지? 아직 영 혼은 되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
백유설이 아이작의 영혼을 빼내어 다른 세계 어딘가로 ‘수레바퀴를 태워 보내는 것으로 그의 죽음은 유예되었다· 이 세상 그 자체가 아 이작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아이작은 죽었음에도 여전 히 살아있다·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 한 육신이 매년 강력한 한기를 내뿜 는 저 모습이야말로 바로 그 증거·
“의식을 준비하겠습니다·”
아돌레비트의 마법사들이 손을 들 어 올리スト 홍비연이 그에 맞춰 지 팡이를 하늘 높이 뻗었다·
분명히 벌건 대낮이었거늘 갑작스 레 세상이 점점이 어두워지며 불꽃 들이 점점이 피어오르기 시작하였다·
에이젤은 눈을 감고 아이작이 잠 든 대제단의 앞에 무릎을 꿇고 양손 을 모았다· 특별흐] 마법을 사용하는
것은 아니었다· 마법적이고 과학적 인 무언가 의식을 치르려는 것도 아 니었다·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것 이라고는 그저 존재하는지 아는지 조차 모를 신에게 비는 것뿐·
’···백유설· 어딘가에서 보고 있다 면 부디 내게 축복을 내려주세요·’
수개월이 흘렀다·
봄의 어느 날 백유설이 실종되었 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는 정말이 지 심장이 떨어지는 줄로만 알았다·
그와 함께 여행을 떠났던 별구름 상회의 젤리엘은 아무런 말도 언급 하지 않았고 풀레임은 그저 멍하니
일주일 정도 틀어박혀서 아무런 이 야기도 전달하지 않았다·
그러다 나중에 교장 선생님과 이 야기를 나누더니 조금은 기운을 차 린 것 같았지만··· 지금도 여전히 풀레임은 예전 같지 않은 모습을 보 였다·
‘백유설 실종·’
고작 한 사람이 사라졌을 뿐인데도 많은 것들이 변했다· 그를 사랑하던 이들은 모든 의욕을 잃어버린 채 주 저앉기도 했고 울부짖기도 했다·
하염없이 그가 돌아오기만을 바라며 하늘을 쳐다보는 이들도 생겨났다·
변한 것은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하늘 저 높이·
이유도 모르고 원인도 모르는 채 나타난 저··· 거대한 ‘검은색 구 체’가 마법 세계에 많은 영향을 끼 쳤다·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지도 그 안에 어떤 것들이 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 주위를 비행정들이 빙빙 돌며 분석하고는 있지만 수개월이 지난 지금도 아무것도 밝혀낼 수 없었다·
백유설의 실종과 검은색 거대 구체 의 등장·
이 세상에는 도대체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홍비연과 에이젤을 비롯한 몇몇 이 들이 절망하여 주저앉지 않을 수 있 었던 것은 그들에게 숨돌릴 틈도 없 이 달려가야만 하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고통받 으며 살아가는 이들을 도우며 살아 가는 젤리엘· 여왕이 되고자 그 꿈을 펼치는 홍비연과 아비지의 오명을 벗기고 되살리기 위한 에이젤····
“지금쯤 네 아버지에 대한 인식은 모두 바뀌고 있을 거야·”
“···네·”
“세계 최악의 악당이었던 자가 사 실은 세상을 구한 영웅이라는데 그 이미지 전환만큼이나 충격적인 일은 없거든·”
“그렇겠죠·”
“지금 네가 가문을 세우고 모르프 대공가로서 모르프란 숲과 모르프 공국을 돌려받겠노라 선언하면 아 돌레비트에서 지원해 줄 거야· 나 홍비연이 전폭 지지하겠다고·”
에이젤은 홍비연을 바라보았다· 그 녀는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어서 홍비연을 주춤 하게 만들었다·
“감사해요··· 당신 같은 친구를 둘 수 있어서 저는 아버지에게 행 복한 삶을 살아왔다고 당당하게 말 할 수 있을 거예요·”
“···그게 아니잖아·”
홍비연은 주먹을 꽉 쥐더니 저 하 늘을 가리켰다·
“백유설은 사라졌고 풀레임 그 멍 청한 평민 여자는 구석에 틀어박혔 어· 그런데 그런데도··· 너마저도 떠나려는 거야?”
어딘지 모르게 분노한 듯한 그 목
소리에도 에이젤은 쓰게 웃을 뿐 대답할 수 없었다·
“이게 제 여행의 종착지예요· 제가 아니면 누가 할 수 있겠어요?”
“···돌아오지 못하면? 너 거기가 어딘지도 모르잖아· 백유설이 ‘새벽 의 수레바퀴’를 돌려보낸 그 알 수 없는 세계가 어떤 곳인ス 1 어떤 게 존재하는지! 아무것도 모르잖아!”
백유설도 모른다고 했다· 그곳에 대해서는 자신조차 알 수 있는 게 없었다고·
“하지만 하나만큼은 해줄 수 있다 고 했었죠·”
에이젤은 자신의 팔에 걸려 있는 금색 빛 팔찌를 찰랑거렸다·
“그분이 선물해 준 팔찌가··· 저 를 새벽의 수레바퀴로 아니 아버지 에게로 인도해 줄 거예요·”
말릴 수 없다· 애당초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래도 말하지 않 을 수가 없었다·
홍비연은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주먹을 꽉 쥐고 있다가 이내 마음 을 놓고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좋아· 그럼 약속하자· 언젠가 돌아왔을 때 그때 다시 모
르프 가문을 재건하겠다고· 내가 그 래도 여왕으로서 품격이 있지 평민 따위랑 친구 먹을 수는 없잖아? 최 소한 대공가 정도는 되어야 내 위 상도 좀 살아난다고·”
그녀의 배려심 넘치는 말에 에이젤 은 순간 눈물을 흘릴 뻔했다· 왈칵 쏟아질 뻔한 눈물을 참기 위해 고개 를 숙인 에이젤은 힘겹게 대답했다·
“···물론이죠·”
“그래 시작하자·”
홍비연의 지팡이에서 불꽃이 피어 오르자 대마법사들이 동시에 주문 을 영창하기 시작하였다·
대제단이 서서히 열리며 그 안에 서부터 한기가 피어오른다· 뼈와 살 을 모두 얼려 버릴 것 같은 차디찬 한기였으나 불꽃을 가슴에 품은 홍 비연에게는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 했다·
화르륵!!
왼손에 ‘홍시화의 불꽃’을 피어올 린 홍비연은 씁쓸하게 아이작을 바 라보았다· 결국 자신이 나락으로 떨 어뜨린 사내로 인해 그녀는 죽음을 맞이했으며 죽어서도 저승으로 편 히 떠나지 못한 채 자신의 죄를 속 죄해야만 하는 홍시화의 운명·
‘고달프구나 인생이란·’
홍시화의 불꽃을 아이작 모르프의 육신에 슬며시 놓아버리자 차디찬 한기가 서서히 갈라지기 시작하였다·
‘생명이 돌아온다·’
하지만 아직 영혼은 없다·
홍비연이 뒤로 천천히 물러나자 대 마법사들도 거리를 벌렸다· 이제 대 제단 위에는 에이젤 모르프 그녀만 이 홀로 선 채로 아버지의 곁을 지 키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부터 저 대제단은 아버지를 봉 인해 두는 감옥이 아니라 에이젤을 아버지에게 안내해 주는 하나의 나
룻배가 되어 알 수 없는 세상을 표 류할 것이다·
언제가 될지 모른다·
몇 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에이젤은··· 그 미지의 영역을 향해·
한 걸음 발을 내디뎠다·
“다녀올게요 나의 소중한 친구·”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본 에이젤이 그리 인사하자 홍비연은 저도 모르 게 손을 뻗고 말았다·
번쩍!
“아····”
하지만 에이젤은 이미 다른 세계 너머로 자취를 감춘 뒤였기에 붙잡 을 수 없었다·
홍비연은 주먹을 꽉 쥔 채로 몸을 파르르 떨었다·
’···모두가 떠나는 건 싫어·’
그러니·
이제 그만 돌아와 주지 않을래?
홍비연은 닿을지조차 알 수 없는 한 소년을 향해 말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