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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아돌레비트와 모르프(1)
[백야의 신전으로 이동합니다·]
백유설이 마지막으로 본 문구는 그 것이었다· 시간의 파수꾼을 붙잡고 서 시조의 기운을 품은 구슬을 쥔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왜 갑자기·
“···내가 이런 곳에 온 거지?”
난데없이 장소가 바뀌었는지에 대 해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다른 장소로 납치되는 일이 빈번하 다 보니 이제는 꽤 침착하게 주변을 둘러볼 수 있게 되었다·
우선 정면에는 거대한 기둥 몇 개 가 놓여져 있다· 신전이라는 말이 부끄럽게도 거창한 건축물이 존재하 지는 않았다·
온통 새하얀 공간에는 아무것도 보
이지 않았고 오로지 솟아 있는 기 둥 몇 개만이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 을 뿐·
백유설은 본능에 따라서 기둥을 향 해 걸었다· 기둥은 듬성듬성 놓여 있었는데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깨 어진 대리석 바닥과 무너진 천장의 잔해 등이 나타났다·
과거에는 건축물의 형태였으나 현 재는 무너진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젤리엘이랑 풀레임은··· 역시나 없나· 나만 불려온 모양인데·’
한참을 걸었다· 신전으로 추정되는
건물 잔해는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마치 수십··· 수백 개의 신전이 부 서지기라도 한 것처럼·
이렇게 똑같은 광경이 무한히 펼쳐 져 있다면 길을 잃게 마련이겠으나 어째서인지 백유설은 방향을 똑바로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그저 본능에 의거한 것이었 지만 의심은 전혀 들지 않았다·
확신할 수 있었다·
‘이쪽으로 향하다 보면···
나를 기다리는 무언가가 나온다·
그 확신은 곧 현실이 되었다·
“이건 ?”
백유설은 눈앞에 펼쳐진 무언가를 바라보며 눈동자를 떨었다·
새하얀 신전의 부서진 잔해가 이리 뭉치고 저리 뭉쳐서 어설프게 ‘무 언가’의 형상을 만들고 있었다·
건물의 형상인가? 아니다·
성 빌딩 저택 오두막·
그 어떤 건축물의 형상은 아니었다·
잔해물은 네 개의 다리와 한 쌍의 날개 머리와 꼬리를 어설프게 흉내 내고 있었는데··· 그것은 마치 ‘드 래곤’의 모습을 닮은 듯하였다·
백유설은 그 거대한 조형물을 천천 히 옆으로 이동하며 바라보았다·
“···뭐야 이게·”
방향에 따라 조형물의 형상이 다 르게 보였다· 어느 지점에서 멈추면 조형물이 정말로 ‘새하얀 드래곤’의 형상을 띄는 것이다· 그러나 그 드 래곤도 완벽하지 않다·
몸 곳곳이 신전의 대리석 파편으로 되어 있어서 유골이 피부 바깥으로 드러난 것처럼 보였다·
완벽하지 않은 드래곤의 형상·
그것은 대체 무얼 의미하는가·
백유설은 혼란스러웠다·
‘이게 대체 뭐지?’
왜 이런 것을 나에게 보여주는가·
천천히 드래곤 조형물의 근처를 맴 돌던 백유설은 마침내 그것의 얼굴 이 선명히 드러나는 자리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것은 꽤 익숙한 얼굴이었다·
비록 색은 반전되었으나··· ‘흑야 십삼월과 똑같은 모습이었기 때문 이다·
완성되지 못한 백색의 드래곤·
그리고 흑야십삼월·
무언가를 깨달은 백유설은 바닥을 내려다 보았다· 굴러다니는 수백만 개의 새하얀 대리석 조각들·
그중 하나를 주워서 손에 쥐어보 니 그곳에서 풍겨오는 기운이 묘하 게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품속에 넣어두었던 ‘이면 세계의 파편’이 진동하며 반응한다·
이곳에 존재하는 수많은 신전의 파 편은 모두 백유설이 살던 아이테르 월드의 것이 아니었다·
전부 각자 다른 세계에서 날아온 무수히 많은 파편들····
덜그럭!
파편 하나를 주워든 백유설은 천천 히 드래곤 형상의 조형물에 다가가 붙였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것은 딱 맞물려 떨어지더니 새하얀 비늘을 드러내었다·
“하 이런 거였나·”
백유설은 천천히 뒤로 물러나 거 대한 드래곤의 형상을 다시 한번 천 천히 훑어보았다·
십이신월이 모두 모여 소환된 ‘흑 야십삼월은 세상에 멸망을 초래한 다·
그것은 이미 어딘가에 완성되어 있
으며 아마 회공시월이 감춰두고 있 을 것이다·
언젠가 십이신월이 모두 모이면 자연스레 흑야십삼월이 소환되도 록····
반대로 눈앞의 저 백색 드래곤은 완성되지 못했다·
아마 수천 번의 세계를 거치도록 누구도 완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눈 앞의 저 파편들은··· 그 수천 번의 세상 속에서 각자 다른 세계의 백유 설들이 완성하려 노력하다가 결국은 실패해 버린 잔해물에 불과했다·
‘각기 다른 세계의 백유설들과 힘
을 합쳐 하나의 세계를 완성하라「
머릿속을 웅웅 울리는 어느 누군가 의 목소리·
‘그것이야말로 깊고 어두운 밤을 밝 혀낼 수 있는 새하얀 태양이니···
그 이름 ‘백주십삼월(白晝十三月)’·
부서져 가는 세계를 치유하고 조각 을 맞출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의 힘·
백유설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수많 은 파편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이걸 다 맞춰 야 한다는 거지?”
어느 파편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
분조차 쉽지 않은 상태에서 대체 어 떻게 그런 짓을····
웅웅웅!!
가슴속 이면 세계의 파편이 진동하 는 것을 느낀 백유설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래 탐지기도 있겠다· 안 될 것 도 없지· 거의 완성된 채로 버려진 것도 안타까운데··· 내가 아니면 누가 또 하겠어·”
백유설은 바닥에 떨어진 거대한 신 전의 파편을 들어 올렸다·
세계의 파편을 맞추는 것을 꼭 조 형물의 조각을 맞추는 것처럼 비유
해 놓은 이 세계·
과연 이게 맞는 것일까·
잘은 모르겠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백유설은 하나씩 하나씩·
차분하게·
백주십삼월의 조각을 맞춰나갔다·
그것이 다시 살아 숨 쉬며 날아오 를 수 있도록·
* * *
쿵-!!
싸아아····
남해 이스텔란의 해류·
사시사철 거대한 파도가 몰아치는 이 지옥 같은 해역의 한가운데에 거 대한 소용돌이가 몰아치고 있었다·
십이신월 천청해오월은 바닷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고서 거칠게 머리카락 을 뒤로 넘겼다· 반쯤 잘려 나간 상 체의 윗부분은 모든 것을 치유하는 그의 신비로운 힘에 의해 서서히 회 복되고 있었으나 역부족이었다·
‘벌써 아홉 번째인가···
천청해오월이 죽음을 맞이한 횟수·
상대는 같은 십이신월 회공시월이 었다·
웅웅··· 회색빛 공간의 기류를 타 고서 회오리치는 바다에 내려선 회 공시월은 무심한 눈으로 그를 내려 다보았다·
“바퀴벌레 같은 힘이로군·”
“하 네놈이 할 소리냐·”
천청해오월을 아홉 번이나 죽였으 면서 상처 하나 입지 않고 말끔한 모습의 회공시월· 둘의 실력 차가 극심히 갈린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얌전히 내 명령을 들었다면 목숨 을 잃은 일은 없었을 텐데·”
“···네 명령은 백유설에게 종속되 라는 것 아니었나? 나는 놈을 죽여 야만 한다· 그 말을 들을 의무도 이유도 없다·”
“그래 네 선택은 잘 알겠다· 하지 만 선택은 자격이 있는 자에게 주어 지는 권리· 너에게는 힘도 없고 자 격도 없다·”
회공시월이 오른손을 움켜쥐자 남 해의 거대한 해일이 반으로 갈라지 며 하늘 높이 치솟았다·
“크윽···!!”
거꾸로 뒤집어진 남해 이스텔란의 바다· 마치 하늘에서 파도가 치는 듯한 그 기묘한 폭풍 속에서 천청해 오월은 목을 부여잡았다·
이 바다 자체가 그의 신체 일부나 다름없었기에 바다를 공격하는 것 은 곧 천청해오월을 타격하는 것이 나 마찬가지였다·
바다 전체가 신체라니 그 힘이 무 한하다는 뜻이나 다름없는 것처럼 보였으나 회공시월에게는 아무런 소 용도 없을 뿐이었다·
“타격점이 넓어서 좋군·”
무심하게 말하며 회공시월은 남해
바다를 짓이겨놓았다· 다시는 생명 체가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헤집어 하늘 높이 날려 버리니 잠시 뒤 거 센 폭풍우가 동원되며 천둥벼락이 내리치기 시작하였다·
기후 따위는 가볍게 조작하며 바다 를 비꼬아 버리는 회공시월의 말도 안 되는 힘을 보며 천청해오월은 힘 없이 고꾸라졌다· 그러나 그의 입가 에는 미소가 지워지지 않았다·
“너는··· 그 힘을 가졌으면서도 고작해야 인간 하나에게 대항하지 못하고 있구나·”
“···대항하지 못하는 게 아니다· 대업을 위해 해치지 않고 있을 뿐·
나의 모든 계획이 끝나면 놈의 목숨 을 거두어들일 것이다·”
“하·”
천청해오월은 헛웃음을 쳤다·
여태껏 수많은 9리스크의 흑마인과 십이신월이 똑같은 생각을 품고 있 었다·
‘언제든 놈을 짓밟을 수 있으나 더 큰 계획을 위해 그러지 않을 뿐 이다·’
그들은 백유설보다 강자였고 오만 했다· 승리는 당연했고 백유설은 그 저 장기말로서 자신의 체스판 위에 서 놀아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살려둔다·
그랬던 그들은 모두 어떻게 되었 지?
“···모두가 너와 똑같이 생각했 다 회공시월· 한때 같은 십이신월이 었으며 동료였던 남자로서 마지막 충고를 하지· 나를 죽이고 내 힘을 놈에게 넘기더라도 결코 오만하지 말라· 너 또한 그 소년의 손에 죽음 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헛소리를·”
회공시월은 주먹에 힘을 주었다·
천청해오월의 몸에서 힘이 서서히 빠져나가며 바닷속으로 깊게 가라 앉기 시작하였다· 시체는 수거하지 않는다· 이미 천청해오월의 힘이나 다름없는 새파란 구슬이 그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이제 마지막이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십이신월을 해 쳐야만 할 정도로 그날이 한 걸음 더 다가오고 있었다·
회공시월은 천청해오월의 힘이담 긴 정수를 바닷속에 풍덩! 빠뜨렸다·
자신이 직접 건네지 않아도 저것 은 ‘운명적으로’ 파도를 타고 해류
를 흘러 기적처럼 백유설에게 도달 할 것이다· 온 세상의 운명이 이 세계의 법칙이 그것을 바라고 있었 으니까
회공시월의 예측은 틀리지 않았다·
그날 이후 수 개월의 시간이 지났 다·
스텔라 3학년 생도들이 여름방학을 지나 졸업 준비를 하기 시작하여 정 신없는 세월을 보내는 동안·
천청해오월의 정수는 이스텔란의 바 다를 흐르고 흘러 어느 육지에 도달 했다· 육지의 원시인은 그것의 가치 를 알아보지 못하고 대충 바구니에
담아두었으나 우연히 그곳을 지나던 모험가에 의해 비상한 가치가 있음을 밝혀져 도시로 옮겨지려 한다·
그러던 도중 용병 강도를 만나 피 살당하고 마는 모험가· 용병들은 정 수의 가치를 모르나 보석이라고 생 각하여 지하 경매장에 내다 팔았으 나 오히려 보석상들은 그것의 가치 를 전혀 알지 못하여 싸구려 취급을 한다·
경매장에서 마도구점으로 액세서 리 세공점으로 어느 나라의 귀부인 에게 들어갔다가 선물로서 어느 나 라의 공주님에게 들어가기까지 수개 월의 시간으로는 충분했다·
“이게 뭐라고?”
“몇 개월 전 바다에서 발견된 보 석이랍니다·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건강해지고 신체가 치유되는 특별한 기운이 담겨 있어서 ‘기적의 보석’ 이라고 불리고 있죠·”
은색 머리칼을 예쁘게 땋아 올린 채 붉은색의 화려한 드레스를 차려 입은 어느 나라의 공주님·
홍비연 아돌레비트는 흥미로운 눈 으로 푸른색 정수를 바라보았다·
”공주님· 시간이 되었습니다·”
“이 보석을 어떻게 착용할 수는 없 을까?”
“보석에 대한 욕심은 1년 전에 버 리신 것 같더라니 갑자기 그런 걸 착용하시게요? 공주님 드레스에는 하나도 안 어울려요·”
“흐응 그렇겠지?”
아쉬운 심정으로 보석함에 정수를 집어넣은 홍비연은 자리에서 일어났 다·
“밖에서 에이젤 아가씨가 기다리고 계십니다·”
“알고 있어· 걔는 왜 이렇게 빨리 나왔대? 드레스는 입은 거 맞아?”
“사람 하나 조지는 자리에 드레스 를 차려입을 필요는 없다고 하시더
군요·”
치장실을 열고 나서니 정말로 에 이젤은 드레스 따위 입지 않은 채 옛 시절에 사라졌을 하늘색의 ‘모르 프 제복’을 정갈하게 입고 있었다·
그렇다·
오늘은 홍비연의 왕위 즉위식이スト 드디어 홍시화를 완전히 공주의 자 리에서 끌어내리는 결전의 날이었 다·
“···눈빛 한번 살벌하네· 나까지 죽이려고 들겠어 아주?”
”당신을 해칠 이유는 없어요·”
에이젤은 살며시 웃으며 말했다·
“저를 돕는 소중한 친구이니까요·”
“어쭈 이제는 아돌레비트한테 친 구라는 소리가 잘도 나온다?”
“아돌레비트라고 해서 모두가 사 악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으니까요·”
“···징그러운 소리 하기는·”
“바로 가요·”
“아니 기다려·”
홍비연은 일부러 부채를 촤락! 펼 치고서 여유를 부렸다·
“주인공은 원래 늦게 등장하는 법 이니까·”
순간 어이가 없어진 에이젤은 황당
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장에 중요 한 과업을 코앞에 두고서도 저런 여 유라니· 게다가 준비를 일찌감치 끝 냈으면서도 일부러 지각을 하겠다는 심보는 대체 뭔지 그녀로서는 이해 할 수 없었으나 그저 웃을 뿐이었다·
이제는 저런 홍비연의 성격도 익숙 해졌으니까·
“그래요·”
여태까지 수많은 시간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고작 몇 분쯤 더 기 다리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주인공은 늦게 등장하는 법이니 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