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9
82· 마도시대⑵
세상의 그림자 속에 숨어서 미래 기술을 연구하는 T연구동·
백유설이 가장 깊은 연구실에서 세 계의 근간이 흔들릴지도 모르는 이 야기를 십이신월과 나누고 있을 무 렵·
T연구동에도 크나큰 폭풍이 일기
시작하였다·
“풀레임 학생 진지하게 묻는 것이 네만 혹시 졸업 후 이곳에 올 생각 은 없나?”
T연구소 이런저런 많은 연구를 하 고 있었고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 이 ‘신에너지 연구학파’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들은 순수한 마나가 아니라 다양 한 에너지를 이용하여 마법을 활용 할 수 있도록 연구하는 알테리샤 하 위의 학파였는데 냉기 열 빛 등을 마나처럼 에너지로 사용하고자 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아주 놀라운 발견을 최근 1년 안에 연달아 발표하면서 기술력 을 어마어마하게 앞당겼고 무수히 많은 논문과 결과물을 쏟아내서 학 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으나 이곳의 그 누구도 만족하고 있지 않았다·
연금술사들이 최종적으로 가장 원 하는 기술·
‘마나를 이용하지 않고도 마법을 구현하는 것’은 여전히 멀게만 느껴 졌기 대문이다·
태양과 빛을 에너지로 삼아서 다루 는 힘? 이론상으로만 어찌저찌 굴러 갈 뿐 실질적으로는 진전이 거의 없
어서 연구원들이 절망하고 있던 와 중 우연히 찾아온 세 명의 소녀는 가뭄의 단비와도 같았다·
불과 얼음을 다루는 마법사는 많 다· 하지만 이 소녀들은 무언가 더 특별한 점이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불과 얼음의 사랑을 받아서 굳이 마법으로 구현하지 않 더라도 불꽃과 얼음을 다룰 수 있던 것·
세상에 이런 마법사는 극히 드물었 는데 그들은 이론뿐만이 아니라 속 성의 본질 자체를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속성의 본질에 담긴 진리를 이해하 고 깨우쳤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그녀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어느 학계에서 든 환영받는 인재 취급을 받는다·
하물며 세계 최고의 마법학교라 불 리는 스텔라 아카데미에 재학 중이 니 그녀들보다 두세 배 이상은 더 살았을 법한 연금술사와 학자들이 반기며 지식의 공유를 원하는 이 상 황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연금술····”
풀레임은 T연구동 연금술사의 이 러한 요청이 낯설지 않았다·
1 학년 때부터 연금술에서 독보적인 성취를 거두었던 그녀는 연금성의 많은 연금술사들이 찾아와서 러브콜 을 보냈기 때문이다·
물론 그때와 지금은 완전히 느낌 이 다르다· 당시의 연금술사들은 연 금성의 말단에 불과했지만 지금 그 녀에게 권유하는 저분들은 이 연금 성에서도 가장 핵심축이라고도 할 수 있었으니까·
“오 이게 저 소녀가 제안한 의견 입니까?”
“그렇지· 빛의 열을 그대로 에너지 로 만드는 것은 비효율적이라서 고
려하지도 않았던 사항이다만 썬 크 리스탈 마법을 연계하면 다양한 속 성으로 변하는군·”
“네에··· 저는 그걸 프리즘이라고 불러요·”
“그런가? 우리는 썬 크리스탈이라 는 단어가 더 편하다만 풀레임 학 생의 조언대로 개조한다면 그 이름 을 붙이는 게 옳겠어·”
이 세계의 기술력은 조금 기이한 방향으로 발전해 있어 어느 부분은 현대 과학보다도 훨씬 우수하지만 어느 부분에서는 현대 과학에 한참 이나 못 미친다·
에너지 발전이나 통신 기술 항공 기술력을 비롯하여 양자 역학은 물 론 ‘빛’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 해 제대로 된 연구 결과도 없었다·
아마 이곳에 아인슈타인이 환생하 여 상대성 이론이라도 발표했다가는 세계가 발칵 뒤집힐지도 모르는 일 이다·
‘하지만····
풀레임은 저 멀찍이서 거대한 기계 를 연구원들과 함께 어루만지는 홍 비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연구원들에 게 무어라 말을 건네고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무언가를 깨달은 듯 연 구원들도 덩달아 눈빛을 반짝인다·
저들이 연구하는 것은 아마도 핵분 열 에너지와 핵융합 에너지·
풀레임의 눈으로 봤을 때 이런 기 술력으로는 저것을 구현하기 위하여 족히 50년은 더 필요할 것으로 보 였다· 마법사들은 마나에 관해서는 뛰어난 전문가였으나 그 외의 에너 지 분야에서는 영 젬병이었기 때문 이다·
価!■지만 만에 하나라도 저런 게 개발됐다가는···
지구에서 핵무기로 인해 어떤 참혹
한 현상이 일어났던가·
저것은 틀림없이 인류에게 크나큰 도움이 될 기술력이겠지만 그만큼 위험한 무기이기도 했다·
“왜 그렇게 멍때리고 있어?”
“어 응?”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어깨를 흠칫 떤 풀레임은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덧 볼일을 끝마친 것인지 식은 땀을 살짝 훔치며 백유설이 나오고 있었다· 연구원들은 어느 사이엔가 풀레임이 가진 현대 지식의 일부를 듣고서 입이 마르도록 저들끼리 토 론을 하기 시작하였다·
“아니 그냥 조금···
“아· 저거 때문에 그래?”
“응··· 뭐 그런 셈이지· 너는 저 게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아?”
“몰라·”
애당초 이 세계는 판타지 기반일 텐데 뜬금없이 핵기술이라니·
“아마 개발에 실패하겠지·”
아이디어는 좋았으나 결국 저들은 포기할 것이다·
지구의 핵기술은 오랜 시간 원자를 연구하던 과학자들에 의해 탄생했으 며 또한 그 에너지를 필요로 하여
비약적으로 발전하였으나 아이테르 월드에는 그런 것이 필요치 않다·
저들에게는 핵기술보다는 차라리 태양열 발전을 비롯한 자연의 에너 지를 이용하는 기술이 시급하다·
“또 개발된다고 하더라도 문제없 어· 지구의 인류는 핵무기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방어할 수단을 전혀 만 들지 못했지만··· 여기는 그런 것 에는 철저한 마법이 발전해 있잖아·”
“마법이 핵무기를 막을 수 있을 까?”
풀레임의 지식으로는 상상이 잘 가 지 않았다·
“글쎄··· 되지 않을까· 홍비연이 가끔 자랑하던 건데 아돌레비트의 수도에는 전방위 보호막이 펼쳐져 있어서 9클래스급 마법도 방어해 낸 다고 했어· 미래에는 그것보다도 더 대단한 방어 마법이 탄생할 테니 충 분하겠지·”
“그걸 어떻게 알아?”
“알테리샤 학회장이 만들 테니까·”
만약 자신이 만든 기술이 무기로 악용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면 그녀는 결코 세상에 그것을 공 개하지 않는다· 이미 아이템을 악용 하고 있는 악인들에 의해 그런 것은
치가 떨린다고 했다·
“핵무기를 방어할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기술력이 생기면 그때 발표 하겠지· 어떤 돼지처럼 핵무기 따위 로 배짱부리며 깝치지 못하도록·”
백유설은 북한의 누군가를 떠올리 며 농담조로 말했다· 풀레임이 21세 기 현대의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알 고 있었기 때문이다·
“돼지? 무슨 돼지?”
하지만 풀레임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백유설은 아예 그 사람의 이름을 말할까 하다가 무언가 이상 해서 입을 다물었다·
“너··· 한국에서 살다 온 거 맞지?”
“으응 맞아·”
위화감·
단순한 것이었으나 백유설은 그 낌새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풀레임의 손을 잡아끌어서 연 구소의 구석으로 향했다· 따라오려 던 스칼렛을 저지해서 잠시 기다려 달라고 말한 뒤 휴게실로 들어가 문 을 걸어 잠근 백유설은 그녀의 어깨 를 양손으로 짚었다·
“지금부터 내 질문에 그 어떤 거 짓도 없이 대답해 줘· 알겠지?”
“가 갑자기 왜 이래? 남사시럽게·”
“장난치는 거 아니야·”
풀레임은 숨결이 닿을 정도로 얼굴 을 가까이 가져온 백유설을 바라보 며 침을 꿀꺽 삼켰다· 장난이고 자 시고 그와 눈을 똑바로 마주보는 것조차 무언가 묘한 느낌이 들었다·
결국 시선을 피한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백유설의 손을 떼어낸 뒤 괜시리 머리카락을 넘겼다·
“뭐 뭔데 그렇게 뜸 들여?”
백유설은 잠시 질문을 고민했다·
아무 질문이나 다 한다고 해서 모
두 대답할 수는 없다· 풀레임이 하 기 싫어서가 아니라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네가 마지막으로 한국에 살 때가 몇 년도였는지 기억해?”
“당연하지· 21세기였어·”
“21세기 말고· 정확한 년도·”
“그거야 뭐 이천십··· 어라·”
뭐 그런 걸 물어보냐는 듯 대답하 려던 풀레임은 잠시 머뭇거렸다·
“왜 왜 기억이··· 안 나지? 원래 는 알고 있었는데?”
“대답을 못 하는 게 아니라 기억
이 안 난다는 거야?”
“으응 잠깐만 오래돼서 그런가 봐· 내가 여기 태어난 지도 벌써 19년이 나 지났으니까··· 2010년인가?”
대답을 하면서도 아리송하다는 듯 한 표정의 풀레임· 연홍춘삼월의 가 호까지 사용해서 확인해 본 결과 그 녀는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정말로 기억이 안 나는 것이다·
“2005년이던가··· 2007년?”
풀레임은 2010년 이하의 년도를 더듬거리며 말했다·
‘내가 이 세계에 왔을 때가 2021 년이었고 아이테르 월드 온라인의 출시일이 2011 년이었어· 시기상으로 는 대충 비슷해·’
풀레임은 아이테르 월드 온라인의 존재에 대해 전혀 모른다· 그녀는 원작 로판을 기억하고 있을 뿐 그 이후에 뭐가 더 있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
아니 애당초 모르는 게 당연하다·
그녀를 중심으로 게임이 출시된 것 이니 풀레임이 기억하고 있는 것만 큼 커다란 모순은 없다·
즉 풀레임은 2010년 이전에 이
세계에 전생되었고 게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여전히 위화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마치 누군가가 ‘백유설이 풀레임을 추궁했을 때 이렇게 납득할 것’이 라며 정답을 미리 정해둔 것처럼 들 어맞지 않던가?
차라리 풀레임이 정확한 날짜를 기 억했다면 모를까 그것도 아닌 애매 모호한 상태여서 더욱 의심이 들었다·
“다른 걸 물어볼게· 네가 이곳에 오기 전에 북한은 어떤 곳이었어?”
“어 응? 북한···r
“그래· 북한· 한반도의 북쪽을 차지 하고 있는 사회주의 국가·”
“북한 알지· 북한이 그러니까····”
풀레임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 는 것처럼 보였다· 식은땀이 뺨에 맺힐 정도로 머리를 쥐어짜 내려는 것 같았으나·
“···모르겠어·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아· 나를 시험하는 거야?”
“아니· 시험이 아니야· 그럼··· 미 국은 기억나겠지?”
“다 당연흐]■지! 그것도 모르면 지 구 사람이라고 말하지도 못해·”
그 외에도 백유설은 몇 가지의 질 문을 던졌다· 미국이 쓰는 언어라던 가 화폐의 단위 등 지구 사람이라 면 알 수밖에 없는 지식들·
몇몇은 제대로 된 대답을 내놓았으 나 몇몇은 그렇지 못했다·
“중국? 지금은 여러 국가로 분리되 지 않았던가? 러시아는··· 처음 들 어봐· 소련은 아는데· 21세기가 맞 냐고? 당연하지! 2002년 월드컵의 그 열기를 누가 잊겠어· 아 그때 일어난 참사에 대해서는 슬퍼해야 한다고 생각해·”
이상하다· 정말 이상하다·
그녀가 기억하는 지구의 역사가 백 유설의 기억과는 묘하게 다르다·
그렇다면 풀레임의 기억이 진실인 가? 그녀가 진실이며 나의 기억이 어딘가 잘못된 것일까?
혹은 그것도 아니라면·
평행 지구에서 온 것일까?
’···그런 건 아니야· 그렇다기에 는 역사가 너무 뒤죽박죽이고 위화 감이 상당해· 21세기라면서 소련이 20세기의 열차를 사용한다느니 하 는 이상한 소리나 하고 있고 중국 을 춘추전국시대로 기억하고 있어·’
마치 역사 속 여러 사건을 어거지 로 기워서 그녀의 머릿속에 박아놓 았다고 보면 좋을까·
뭐든 간에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그녀가 진짜 지구 출신이든 아니든 이제 와서 새삼 달라질 것은 없었으 나 스스로가 모르는 사이에··· 기 억에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니까·
그 범인은 굳이 추측하지 않아도 뻔히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시조 마법人卜··· 그 사람이 풀레 임을 이곳에 데려와 놓고 기억을 조작한 거야·’
스스로가 ‘백유설과 똑같은 21세기
지구에서 왔다’라고 믿게끔 만드는 것이다·
“왜 왜 그래? 나 진짜로 무서워지 려고 그래· 제대로 말 좀 해줘·”
지금 당장 그녀에게 이 사실을 말 하는 게 좋을까?
아니· 그건 나중의 일이다·
백유설은 그녀에게 당장 부담을 지 울 자신이 없었다·
그보다도 자신의 머릿속이 너무나 도 복잡한 나머지 그녀에게 무어라 말을 할 새가 없던 것도 있었다·
‘시조 마법사가 만약 풀레임을 이 곳에 데려왔다면 이유가 무엇일까·’
그건 단 하나뿐이었다·
‘결국은 풀레임이 흑야십삼월 부 활의 최종 키워드가 될 것이라는 뜻 이겠지····
하지만 백유설은 모르고 있었다·
굳이 그가 입 밖으로 내뱉지 않더 라도 행동과 눈짓 말투만으로도 무 언가를 알아낼 수 있는 귀신같은 눈 치가 여자에게는 있다는 사실을·
*···내 기억의 뭔가가 백유설과 다르기라도 한 건가?’
거기까지 생각하자 풀레임은 가슴 이 쿵 내려앉았다·
그것은 차마 생각하기도 싫은 끔 찍한 상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