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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흑마전쟁(8)
혹마도왕과 혹마신교주·
두 명의 왕이 최후의 격돌을 벌였 다는 사실은 아직 세계에 널리 알려 지지는 않았으나 세상의 정점에 서 있는 자들에게는 이미 그 소식이 빠 르게 퍼져 나가고 있었다·
빙백산맥 서쪽 뿌리 끝·
기요틴 고원의 가르탁 요새·
···아니·
기요틴 고원이었던’과 가르탁 요 새’였던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게 더 맞는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마치 대륙이 기요틴에 잘려 나간 것처럼 보인다고 하여 ‘기요틴’이라 는 이름이 붙은 이 고원은 오늘부로 명칭을 바꿔야 할지도 모르겠다·
”허 참 어처구니가 없는 광경이로 군····”
마법사 협회의 총회장이자 9클래스 의 대마도사 아류문 블르슌은 눈앞 에 펼쳐진 대참사에 말을 잇지 못하
였다·
한때는 드높은 요새가 지어져 있던 자리는 이제 크레이터가 움푹 패여 있었는데 뜨거운 열기가 이제 막 식기 시작하여 김이 피어오르고 있 었다·
”오래 살고 볼 일이로군· 흑마인이 서로에게 이빨을 드러내고 싸우는 일은 한두 번이 아니다만 두 명의 왕이 공멸해 버리는 일은 누구도 예 상하지 못했겠지·”
마찬가지로 9클래스의 대마도사 사엘 리의 말에 아류문은 고개를 슬 며시 돌렸다·
사엘 리는 90대 노인의 모습으로 서 누가 보아도 신선의 풍채를 띠 고 있었다· 백색의 로브와 기다란 고깔모자 길게 늘어뜨린 수염까지·
실제로도 오랜 세월을 살아온 사엘 리였으나·
“저보다 어리지 않으십니까? 오래 살다니요· 그 정도면 아직 젊습니다·”
사엘 리는 아류문보다 어리다·
단 하루 차이로 말이다·
“헛소리는 됐고 병력을 흩어놓을 준비나 하게나· 흑마도왕과 흑마신
교가 사라졌으니 전쟁을 위해 모였 던 병력은 홑어질 것이고 스스로가 왕을 자처하기 위한 새로운 세력이 나타날 것이다·”
“이미 전선은 복구해 뒀습니다· 잃 어버린 땅을 되찾는 게 급선무라고 생각합니다·”
“그때는 늦다· 흑마인이 세력을 갖 지 못한 채 갈피도 못잡고서 갈팡질 팡하는 지금 놈들은 제아무리 강력 한 힘을 지녔다 한들 오합지졸에 불 과하다·”
“뭐··· 저도 마음 같아서는 그러 고 싶습니다만·”
세상은 그리 쉽게 굴러가지 않는 다· 아류문도 마음 같아서는 흑마인 을 모조리 소탕해 버리고 싶었으나 지금은 시민들에게 평화를 가져다 주는 게 급선무였다·
이미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고향 과 가족을 잃어버렸다· 갈 곳 없는 그들에게 삶과 희망을 되찾아주는 것이 세상을 수호하는 마법전사로서 의 의무·
마법전사는 증오하는 혹마인에게 복수하고자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그래··· 자네에게 협회장의 자리 를 맡겼으니 그 뜻대로 하는 게 옳
겠지· 다만 명심하는 게 좋을 것이 다· 이게 결코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흑마인과 흑마신교주가 소멸했다고 해서 모든 사태가 정리되었다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저 둘의 죽음은 클라이맥스 에 도달하기 직전 긴장감이 최고조 로 달한 바로 그 순간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리도 고요한 걸 까·
“아 참· 그렇지· 그 소년에게는 연 락해 보았나?”
“소년이라면··· 백유설을 말하시 는 겁니까?”
“그래·”
“마땅히 연락을 넣지는 않았습니 다· 어차피 그 소년이라면 우리의 소식이 없더라도 이 사태에 대해 전 부 알고 있을 테니까요·”
“아니 그 문제가 아니라네·”
사엘 리는 하늘 위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웬 거대한 갑옷의 파 편 같은 것들이 둥실 떠다니고 있었 는데 새하얀 결계가 원형으로 둘러 져 있어서 그 어떤 마법사도 쉬이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사엘 리와 아류문조차 마 법진을 역산하려고 시도했으나 너무 나도 고차원적인 마법이라는 것을 깨 닫고서 잠시 포기했을 정도였으니까·
“자네는 저 마법진을 보고서 무슨 생각이 들었나?”
“글쎄요· 너무 어려워서 까마득하다 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래도 시 간을 들여서 학자들을 모으고 연구 한다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겁니다·”
“글쎄· 나는 조금 회의적이라네·”
“무슨 소립니까?”
아류문은 세계의 최정점에 도달해 있는 9클래스의 마도사이다· 비록
이론보다는 실전으로 단련된 그였으 나 두뇌 속에는 온갖 수많은 9클래 스의 마법 지식이 편린처럼 떠다니 고 있었다·
남들은 하나라도 갖고 싶어서 안달 난 최고의 지식을 조각처럼 수많은 지식으로 모아서 갖추고 있으니 아 류문이 자신 있어 하는 것도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마법전사 출신인 아류문과 는 달리 마도학자 출신의 사엘 리 는 그보다 더욱 방대하고 깊은 지식 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기에 알 수 있었다·
“저건··· 우리의 지식으로는 해석 할 수 없다네·”
사엘 리는 대현자로서 여태까지 그의 조언이 빗나간 적은 단 한 번 도 없다· 마법 세계의 사회와 질서 그리고 균형을 완벽히 유지하는 데 에 그의 공헌이 없었더라면 여전히 세상은 마법 지식 쟁탈전으로 인해 혼란스러웠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마법계의 영웅이자 세계 제일의 지 식을 지녔다고 알려진 사엘 리가·
저런 말을 하다니 아류문으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째서 그런 말을 하십니까? 세상 에 우리가 이해 못 할 마법은 없습 니다· 현존하는 마법이라면 긴 시간 이 들지언정····”
“자네·”
아류문이 무어라 말하려 했으나 사 엘 리는 그것을 끊었다·
“자네는 알고 있나? 저 우주 저편 에 무어가 있을지· 이 지구는 왜 탄 생했으며 인간에게는 왜 두 개의 눈과 두 개의 귀가 달려 있는지· 왜 이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는 1초 에 30만km를 넘기지 못하며 원소는
어째서 다론 원소와 결합하는지· 그 모든 지식에 대해 완벽히 이해하고 있는가?”
“그건···
아류문은 당황하여 입술을 닫았다·
그랬다·
마법전사로서 살아왔고 협회장으 로서 이제는 마법보다 정치에 더욱 힘을 기울여왔기에·
여태 잊고 살았다·
한때 젊은 시절·
우매함의 봉우리에 빠져 살았던 시 절이 있었다· 내가 아는 지식이 세
상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시절· 그 오만함은 지식을 깨달으면 깨달을 수록 절망감으로 뒤바뀌어갔다·
어렸을 땐 참으로 좋았다·
하나를 알면 열을 알았고 열을 알 면 백을 알았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하나를 알면 열 가지 의문이 생겼 으며 그 열 가지 의문에서 백 가지 의 미스터리가 파생된다·
그것들은 아마도 아류문이 평생을 들여도 파헤치지 못할 미지의 영역·
“저 또한 그런 것이라네· 우리의 지식으로는 파헤칠 수 없어·”
“그 무슨 어째서 그렇게 단정을 짓는 겁니까···r
설마하니 사엘 리가 저토록 약한 소리를 할 줄은 몰라서 아류문이 당 황하여 묻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자네는 저 결계에서 마나가 느껴 지는가?”
“엇···广
그제야 뒤늦게 저 거대한 결계로부 터 느껴지던 이질감을 깨달았다·
분명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거대한 결계가 저 커다란 갑주를 뒤덮고 있 는데 어째서 마나의 파장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가?
“마법진 또한 어떠한가· 자네는 저 런 마법진을 본 적이 있나?”
“···없습니다·”
보통의 마법진은 선과 선이 모든 구간에 연결되어 마나 회로가 작동 하여 마나를 흐르게끔 하여 현상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저 마법진은 그러한 법칙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었다·
마법회로와 마법회로 사이에 거리 가 있어서 마력은 서로 연결되어 있 지도 않았는데 대체 어떻게 저토록 이나 튼튼한 결계가 가동되고 있다 는 말인가?
내 저런 비슷한 마법을 한 번 본 적이 있지·”
“저런 마법이 또 있단 말입니까?”
사엘 리의 말에 아류문은 잠시 희 망을 품었으나·
“그래· ‘점멸’이라는 마법이지· 당최 정체도 모르고 어떻게 발동되는 건 지 원리도 모르지만 어째서인지 사 용처는 마법계에 널리 퍼져 있 는··· 아주 독특한 자살 마법이다·”
**···이런·”
점멸 마법· 어렸을 적부터 너무나 도 당연하게 알게 되는 기초 마법 중 하나였다·
요즘에는 위험하다며 안 그러는 추 세였으나 아류문과 사엘 리가 어린 시절에는 대부분의 초급 마법서에 점멸 주문이 기재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흔한 마법이고 간단한 주 문 한 번에 발동이 되는데도 불구하 고 누구도 원리를 알지 못한다·
초급 마법임에도 불구하고 훗날 아류문이 그것을 ‘금지 마법’으로 지정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방향을 지정하지도 못하고 거리를 조절하지도 못한다·
그저 삼십육계 방향으로 랜덤하게
튀어 나가 어디론가 처박히고 마는 그런 쓰레기 마법이 대체 왜 존재하 는가?
예전에 잠시 의문을 품었으나 금세 잊어버렸던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설마 당신은 저 마법이 점멸 마법 과 유사하다고 말하고 싶은 겁니까?”
“모르지· 하지만 이해할 수 없다는 점에서 공통점은 충분히 있다네· 마 치 공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듯한 마 나의 운용··· 점멸과 참으로 유사 하지·”
아류문은 백유설을 떠올렸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점멸을 이해하 고 제어하는 마법사이자 역사에 남 을 큼지막한 사건을 제멋대로 제어 하고 세계적인 인사들을 쥐락펴락하 는 정체를 도무지 알 수 없는 소년·
“그 아이라면 저 마법진을 해석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글쎄··· 사실 너무 무책임한 말 로 들릴 수 있겠지만 도무지 가망 이 보이지 않으니 마지막 희망이라 도 걸어봐야 하지 않겠나?”
사엘 리는 그리 말한 뒤 잠시간 묵묵히 하늘 위에 걸린 거대한 결계 를 바라보다가 돌아갔다·
아류문은 한참이나 결계를 바라보 며 사념에 빠졌으나 결국 자신의 능력으로는 해석이 불가능할 것이라 는 생각이 결론에 도달했다·
‘···세상은 여전히 알 수 없는 것 투성이로군·’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 * *
백유설이 마법협회장 아류문 블르 슌의 비서관으로부터 직접 연락을 전해 들은 것은 그로부터 고작 하루
가 지난 날이었다·
토요일 오전부터 마유성과의 약속 을 이행하기 위해 부지런히 마법서 와 직박구리 안경을 대조하여 안전 한 방법을 찾는 와중 찾아온 손님은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당장에 머릿속이 터질 것처럼 복잡 하게 사건사고가 쌓여 있는데 또다 른 사건이란 이제 지긋지긋했으니까·
그러나 비밀스러운 독대룸에서 건 네들은 이야기는 상당히 충격스러운 것들이었으니·
“백유설 마도사께서는 당연히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이틀 전 흑마
도왕과 흑마신교주가 전쟁을 벌이다 궤멸하였습니다·”
전혀 몰랐다·
“두 명의 왕 모두 사망이 확정되었 으며 남은 9리스크의 흑마인들은 각자의 세력을 데리고서 잠적했지 요· 아마도 차기 왕이 되기 위해 세 력을 아끼는 모양입니다·”
“지금 가서 모조리 족치면 편할 것 같은데····”
“협회장께서는 흑마인에 대한 복수 보다도 먼저 시민들의 평화와 희망 을 우선시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 다·”
,,아·,,
거기까지는 생각 못했다·
새삼 그의 생각이 깊다고 생각하며 납득했다· 협회장이라는 자리에 괜 히 오른 게 아니겠지·
“거기에··· 문제가 하나 더 있습 니다·”
집사장은 파일철을 꺼내서 펼쳤다· 그 안에는 길로틴 고원 상공에 부유 하고 있는 거대한 갑주와 그것을 둘 러싸고 있는 새하얀 결계가 있었다·
“이건···
,,전쟁 후 흑마도왕이 소멸한 뒤
나타난 것입니다· 저것의 정체가 무 엇인지 아무도 알지 못하지요· 대현 자 사엘 리께서도 고개를 저으셨습 니다· 심지어··· 이 마법진 알아보 시겠습니까?”
눈을 가늘게 떠서 바라본다·
애당초 기초 마법 지식도 얕은 백 유설이었으나 이제는 스텔라에서 오 랜 시간 지내며 공부를 해왔기 때문 에 무언가 다르다는 점을 캐치했다·
“마법회로가···
“예 정확히 맞히셨습니다· 역시 단 번에 이해하시는군요· 하여 협회장
께서 명예 마도사 백유설께 이 마법 진의 해석을 의뢰하고 싶다고 하였 습니다·”
“예? 제가요?”
“바로 그렇습니다· 세계 유일무이 하게 점멸 마법을 완벽히 이해하고 깨우친 당신이라면 틀림없이 저 마 법을 알아보실 거라고 하였지요·”
전혀 아니다·
점멸 마법을 완벽히 이해하지도 깨우치지도 못했다· 이제야 은세십 일월의 가호를 다루기 시작하여 조 금씩 알아나가는 중인데 말이다·
一 저건···
그러나 사진을 본 십이신월들의 반 응이 이상했다·
-틀림없다· 저 마법진·
-그래 천 년만에 봐서 가물가물했 지만 확실해·
···뭡니까?’
백유설은 눈살을 찌푸렸다·
맞은편 의자에 앉아있는 집사장은 과연 알기나 할까
지금 이 조그마한 테이블 위에 십 이신월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사진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음 갑자기 오한이···
청동십이월의 반투명한 몸체에 관 통당한 집사장이 몸을 으스스 떠는 것을 본 백유설은 고개를 돌려 은세 십일월에게 물었다·
‘대체 뭐 때문에 그러는 겁니까?’
은세십일월은 묵묵히 사진을 바라 보더니 마침내 결론을 내린 듯 고 개를 끄덕였다·
-저건 천 년 전에 유실된 마법진 이다· 사용자가 한 명밖에 없었으니 당연하겠지·
‘천 년 전이라면···?’
-그래· 시조 마법사· 그의 마법진 이 확실하다·
백유설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집사장은 그보다도 더욱 깜짝 놀라 의자를 뒤로 나자빠뜨리 고 말았다·
“가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안경을 고쳐 쓰며 중얼거리는 집사 장의 말은 이제 귀에 들려오지도 않 았다· 그의 눈에는 오로지 사진 속 의 마법진밖에 보이지 않았다·
두근 두근!
심장 뛰는 소리가 모두에게 들릴 정도로 거세게 요동친다·
백유설은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서 차분히 입술을 떼었다·
“제가 직접 가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