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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흑마전쟁(4)
스칼렛과의 대화를 끝낸 뒤 백유 설은 고민해야만 했다·
회공시월이 내게 흑마도왕의 권능 을 왜 주려고 하는가·
그리고··· 회공시월은 정말로 흑 마도왕의 죽음을 유도할 수 있는가·
스텔라 아카데미 내에는 학생들이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서 산책이라도 하라며 예쁘게도 꾸며놓은 정원이 많았다· 가끔 사념이 들 때면 백유 설은 이곳을 거닐고는 하는데 그럴 때마다 ‘멸망한 아이테르 월드의 백 유설’이 떠올랐다·
게임의 엔딩을 본 세계의 백유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대략 7년 쯤 뒤의 백유설 말이다·
그곳의 백유설은 지금의 백유설보 다 훨씬 더 강력하고 완성된 힘을 갖추고 있었으나 세상을 구하지는 못했다·
그곳의 백유설은 멸망해 버린 뒤 유일하게 살아남은 스텔라 아카데미 를 거닐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때때로 백유설은 화사하고 아름답 게 피어 있는 현실의 스텔라를 거닐 며 그때를 떠올려야만 했다·
왜냐하면 현실이 너무나도 행복했 으니까· 자꾸만 머릿속에 낙인을 박 지 않으면 미래의 참사를 잊어버릴 것만 같았으니까·
-고민이 많아 보이는군·
은세십일월의 형상이 눈앞에 어른 거렸다· 그는 반투명한 형체로 나타 나 백유설의 옆을 따라서 걸었다·
“예· 회공시월의 의도를 전혀 읽을 수 없어요·”
-그래 보이는군· 다만··· 아주 예 측할 수 없는 건 아니다·
“그런가요?”
같은 십이신월 중에서도 가장 현명 한 은세십일월이 저리 말하니 믿음 이 갔다·
-추측이기는 하다만··· 아주 오 래 전 흑마도왕이 가졌다는 ‘모든 마법을 흡수하는 권능’은 시조 마법 사께서 가지고 계셨다고 하였지·
“시조 마법사···
-다만 우리가 태어났을 적부터 이 미 시조 마법사께서는 그러한 권능 을 잃어버리셨다· 이유가 무엇이라 고 생각하는가?
“모종의 이유로 몸에서 권능을 떼 어 냈겠군요·”
-그래· 내 추측도 그러하다· 우리가 창조되기 전까지만 해도 마법을 부리 는 권능으로 세상을 지배하셨던 분이 갑작스레 권능을 떼어내셨다면····
“···십이신월을 창조하는 데에 그 권능이 필요했다는 말입니까?”
-그래· 권능을 희생하여 떼어낼 수 밖에 없었던 것이겠지·
“하지만 어째서죠? 굳이 그럴 이 유가 있었는지··· 전혀 이해가 가 지 않는데요·”
-자세한 이유는 나도 알 수 없다· 추측이라고 하지 않았더냐· 다만 아 예 알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이건 오래전부터 생각해 오던 것인데··· 회공시월이 어째서 우리보다 더 많 은 정보를 가지고 움직인다고 생각 하느냐?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었다·
그저 회공시월이기에 당연히 그런 지식을 갖추고 있을 줄로만 알았다·
-나는 ‘별의 서고’가 그 원인이라
고 보고 있다·
“별의 서고···
다른 말로 [콘스텔라티오 프로젝 트]라고 부르는 그것은 세계의 모든 정보를 기록한다고 알려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접촉하는 게 불가능하다·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말이다·
-무슨 수를 쓴 것인지는 모르겠다 만 회공시월은 틀림없이 별의 서고 를 열람하고 있을 게다· 덕분에 우리 보다도 더 많은 지식을 알고 있겠지·
정말로 그렇다면 납득이 안 가는 것도 아니다·
회공시월은 때때로 이 세계의 것 보다도 더 많은 지식을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이를테면 ‘다른 세계’의 사건이라 든지···
-물론 그가 볼 수 있는 별의 서고 는 한계가 있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그의 계획이 이렇게까지 뒤틀렸겠나·
“저도 그렇게는 생각합니다만···
별의 서고에서 대체 무엇을 보았기 에 백유설에게 흑마도왕의 권능을 부여하려고 하는가?
이런 추측을 하려면 위에서부터 거꾸로 내려오는 게 맞았다·
‘회공시월의 목표는 아이테르 대륙 의 멸망·’
‘그러기 위해 십이신월의 힘을 모 으고 있었어·’
‘십이신월이 모두 모이면 신비로운 현상이 일어난다고 했지···
‘이를테면 흑색의 용이 나타난다 든지·’
‘하지만 십이신월을 단순히 한 자 리에 모으는 것은 쉬운 일이야· 그 런다고 해서 신비로운 현상이 일어 날까?’
‘그릇이 필요하다·’
‘십이신월의 힘을 한데 그러모아서 매개체가 될 그릇·’
백유설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매개체 혹은 그릇으로 떠오르는 이 들은 홍비연이나 풀레임 같은 큼지막 한 운명을 타고난 여주인공들이었다·
그러나 회공시월이 자신에게 권능 을 부여하려는 모습에서 그 생각을 벗어던져야만 했다·
*···나를 그릇으로 삼으려는 것일 지도 모르겠군·’
‘여태 회공시월이 힘들게 모았던 십 이신월의 대부분을 내가 회유했으니 스스로 모으는 것은 포기한 거야·’
‘원래대로였다면 흑마도왕의 권능 은 본인이 가지려고 했겠지·’
‘하지만 그게 안 되니 스칼렛에게 찾아가면서까지 내게 권능을 부여하 려고 한 것이고·’
사실상 백유설의 추리는 추리가 아 니었다· 여태까지 긁어 모았던 정보 를 한데 모아서 정리한 게 끝이었다·
어지럽게 늘어진 방에서 물건을 찾 는 게 힘든 것처럼 생각을 깔끔하 게 정리하자 백유설은 회공시월의 목적을 알아낼 수 있었다·
“나를 통해서 흑야십삼월을 소환하 려고 한다···r
-그것도 일리가 있는 말이군·
은세십일월은 걱정된다는 듯 표정 을 어둡게 물들였다·
여태 백유설은 지나치게 많은 십 이신월을 모았다·
여덟 명의 십이신월이 그에게 가호 를 내렸으며 한 명의 십이신월의 힘을 흡수했다·
이제 남은 십이신월은 다홍추구월 과 천청해오월 회공시월뿐·
이제 그들마저 백유설이 손에 넣는 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흑야십삼월이 소환되는가?
멸망해 버린 그때 그 세계처럼?
그렇다면 백유설은 모든 것을 포기 하고 스스로 죽기라도 해야 하는가?
아니· 그렇게 해봐야 회공시월이 다시 십이신월을 끌어모을 뿐이었 다·
‘멸망이 앞당겨지는 이유를 이제 야 제대로 알 것 같아·’
운명의 흐름이 뒤틀려서가 아니었 다· 정말로 단순한 문제였다·
‘내가 십이신월을 너무 빨리 모아 서였어·’
처음 스텔라에 입학한 순간부터 백
유설의 목표는 하나뿐이었다·
모든 십이신월을 모으는 것·
그것만이 유일하게 멸망에서 벗어 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면?
오히려 멸망을 앞당기는 일이었다 면?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노력해왔던 모든 것들이 사실은 세계를 더 빠르 게 멸망하는 길로 이끌었다면?
우뚝·
그의 걸음이 멈췄다·
*···만약 내가 실패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세계가 실패 해왔고 무수히 많은 또 다른 백유 설들을 묻어버린 채 소멸되었다·
몇몇은 운 좋게 이면 세계로서 이 곳에 소환되고는 했지만··· 그뿐·
영영 소멸되는 것이 멸망한 세계의 운명이었다·
‘내가 실패하면 다음 세계에서 또 다시 다른 백유설이 새로운 시작을 하는 건가···?
그렇다면·
지금도 현실에서 누군가가 나를 게 임 속 캐릭터라고 생각하여 조종하
고 있을 수도 있는가?
그렇지 않으리란 법이 없었다·
지금껏 죽어 나간 캐릭터 백유설이 만 명이고 지금의 자신이 1만 1번 째 캐릭터 백유설이 아니라고 어떻 게 확신하는가?
캐릭터인 줄 알았던 백유설들이 살 아 숨 쉬고 생각하며 움직이는 것을 몸소 몸으로 느꼈는데 말이다!
즉 이번 세계가 실패하면·
또다시 다음 세계의 그리고 또다 시 다음 세계의 백유설이 도전할 수 도 있다는 뜻이었다·
이번 세계 백유설의 죽음은 10001
번째 캐릭터 백유설의 실패였을 뿐 그들에게는 그저 지나간 과거에 불 과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동정하지도 않는다·
슬퍼하지도 않는다·
지금의 백유설이 과거의 백유설들 에게 그러하듯이·
-왜 그러나?
은세십일월이 걱정스럽다는 듯 물 었으나 들리지 않는다·
‘이번 세계의 내가 실패함으로써 다음의 백유설은 그 경험을 토대로
실패하지 않을 거야· 더 완벽한 경 험치를 쌓았으니 다른 좋은 계획을 세우게 되겠지···
만약 그렇다면·
‘내가 실패하면 내 세계는 어떻게 되는 거지···?(
지금까지 자신이 해오던 모든 계획 이 잘못된 것이었다고 생각한 백유 설이 자꾸만 그릇된 방향으로 나아 가려고 하자 허공에서 연홍춘삼월이 나타나더니 다가와서 그를 껴안았다·
-진정하세요 백유설· 답지 않아요·
백유설의 안색이 창백하다는 사실
을 눈치 챈 연홍춘삼월은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온화한 감정을 다스리는 연홍춘삼 월의 직접적인 포옹은 마음을 안정 시키는 데에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백유설은 눈을 질끈 감고서 근처의 벤치에 앉았다·
-자네 잘못 생각하고 있군·
«··
혼란한 백유설을 향해 은세십일월 이 말했다·
-전에도 말했지 않은가· 십이신월 을 모두 모으는 게 꼭 재앙이 되는 것만은 아니라고·
“예··· 저도 십이신월을 제가 직 접 모으면 옳은 방향으로 그 힘을 사용할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 러나 그건 확신이 아니었죠·”
-그것도 맞는 말이지·
“그런데 지금 보십시오· 회공시월이 저를 그릇으로 만들려 하고 있지 않 습니까? 그건··· 십이신월의 힘을 옳 은 방향으로 쓸 수 없는 것을 회공 시월이 알고 있으니 그런 것 아니겠 습니까? 모든 십이신월이 모이면 반 드시 멸망이 초래할 수밖에 없어서· 그래서 회공시월은 제게 권능을 부 여하고 그릇으로 삼으려는 겁니다·”
그의 주장에 은세십일월은 고개를 저었다·
-그걸 어떻게 확신하지?
“그야 회공시월은 별의 서고를···
-아까도 말했지 않는가· 그는 별의 서고를 모두 열람할 수 없는 것 같 다고· 회공시월은 많은 세계를 보았 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세계에서 십이신월이 모두 모였을 때 좋지 않 은 결과가 나타났겠지·
“그게 제가 하고 싶은 말···
-하지만 아직 모르지 않는가·
은세십일월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
했다·
-그가 보고 있는 모든 세계는 멸 망한 세계라네· 자네가 실패해 버린 그런 세계· 멸망해 버린 곳에서는··· 십이신월의 힘으로 흑야십삼월이 탄 생하는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렇다·
별의 서고에 기록된 모든 세계는 멸망해 버린 세계다·
그 세계들은 모두 실패했고 흑야 십삼월이 소환되었을 것이다·
흑야십삼월의 소환이란 곧 실패를 뜻하는데·
-그들은 실패했고 방법을 알지 못 했다· 하지만 지금의 자네는 어떻 지? 십이신월을 스스로 이렇게까지 모은 사람이 과연 다른 세계에 또 존재한다고 생각하나?
“···아니요· 없을 겁니다·”
게임 속 백유설이 모은 십이신월은 고작해야 서너 명· 그마저도 가호를 제대로 받지도 못했다·
즉 다른 세계 속에서 십이신월을 모두 모은 장본인은 회공시월이다·
그가 모았으니 흑야십삼월이 나타 나는 것이겠지만····
만약 백유설이 모은다면?
그것까지는 회공시월이 알 수도 없 다는 의미였다·
-역으로 이용하게· 회공시월의 계 획에 휘말려서 그가 가진 남은 가 호까지 모조리 자네의 몸에 받아들 이는 거야·
확실하지 않았다· 세계를 걸고 하 는 도박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이것밖에 남은 방 법이 없었다·
“마유성을 죽일 수는 없어요·”
-꼭 마유성 소년을 죽여야만 권능
이 자네에게 가는 건 아니지·
“그럼····”
-소년의 자격을 잃게 만들고 자네 의 자격을 정당하게 만들면 된다·
즉 마유성이 흑마력을 완전히 포 기함으로써 흑마도왕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아예 제로가 된다면?
그건 곧 흑마도왕에게 있어서 마유 성의 죽음이나 마찬가지였다·
회공시월의 의도에 완전히 부합하 는 계획!
하지만 마유성의 절반을 떼어내는 짓을 갑작스레 할 수는 없었다·
“조금만 더··· 생각을 해봐야 될 것 같습니다·”
-그래· 하지만 시간이 없다는 사실 을 명심하게·
회공시월과 연홍춘삼월이 모습을 흐릿하게 만들어 사라진 뒤에도 백 유설은 그 자리에 남아서 한참을 고 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리고 마침내 백유설은 결단 을 내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