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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각성⑷
사실 회공시월을 상대로 배짱을 부리기는 했으나 제대로 싸움을 시 작한다면 아마도 승리할 수 없을 것 이다·
그러나 백유설은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 있었다·
회공시월· 그는 막강한 힘을 지니
고 있음에도 항상 누군가를 살상하 거나 피해를 입히지 않는다·
설령 피해를 입힌다고 하더라도 스 칼렛을 봉인해 두는 정도거나 혹은 루드릭을 행동불능 상태로 만드는 정도가 고작일 뿐 절대 다시 일어서 지 못할 정도로 만들지는 않는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토아 레그론이 가져온 이면 세계의 조각 파편이 정말로 탐났다면 토아 레그론이 만전의 상태일 때 쳐들어 왔어도 좋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그는 더욱 많은 양의 이 면 세계를 손에 넣을 수 있었으니
까·
그런데 굳이 전투가 벌어지고 모 두가 지쳤을 때를 노려 찾아와 답지 않게 ‘몰래’ 손을 뻗어서 이면 세계 의 파편을 가로채고 도망치려고 했 다·
이유가 있다·
회공시월이 세계의 흐름에 관여하 지 못하는 어떠한 사정·
백유설은 그 이유를 어렴풋이 눈치 채고 있었다·
‘놈은 역사에 관여하지 못해·’
저토록이나 막강한 힘을 지녔음에 도 불구하고 회공시월은 직접적으로
나서지 못한다·
왜일까·
거기서 백유설은 십이신월에게 걸 려 있던 하나의 제약을 떠올렸다·
‘결코 세계사에 관여하지 말 것·’
회공시월은 자유로이 움직이며 활 동하는 터에 그 제약이 없는 것처럼 보였으나 사실 아니었다·
어떤 편법을 써서 세상 바깥으로 나와서도 힘을 사용하고는 있었지 만 그것에도 한계는 틀림없이 존재 한다·
‘오늘 그 기준을 알아내야겠어·,
회공시월은 결코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죽일 수 없다·
루드릭 스칼렛 홍비연·
한 명 한 명이 모두 세계적 역사 에 아주 크나큰 영향을 끼치는 인물 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예상이 맞았는지 회공시월 은 표정을 싸늘하게 물들인 채 신 체를 완전히 수복한 뒤에도 쉽사리 공격을 해오지 않았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뒤에서 아돌레비트의 함선이 이곳
을 지켜보고 있으니까·’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곳이라면 죽 이지 않는 선에서 싸울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렇게나 보는 눈이 많다 면?
회공시월이 다른 누구도 아닌 홍비 연 공주를 공격하는 장면이 세계 사 람들의 눈에 목격된다면?
*···너에게 시조 마법사가 걸어둔 제약이 발휘될 거야·’
그러니까 즉·
이 사태를 요약하자면·
“내가 너를 일방적으로 팰 수 있다 는 뜻이 되겠지·”
“···백유설·”
회공시월은 진심으로 기분이 나쁘 다는 둣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당장 공간을 접어서 달아나고 싶었 지만 이제는 그것도 쉽지 않다·
공간이동에 간섭할 수 있는 루드릭 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는 것은 물론 백유설마저도 공간을 베 어낼 수 있었으니까·
여기서 회공시월이 할 수 있는 선 택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도망칠 수도 싸울 수도 없으니·
“내놔· 이면 세계의 파편·”
백유설이 요구하는 바를 들어주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시조 마법사의 제약을 어 긴다면 싸우는 게 가능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뒤에 찾아올 후폭풍을 회공시월로서는 감당할 수 없었다·
‘제약을 어기는 순간 시조 마법사 의 봉인진이 발동된다·’
아마 저 넷 중에 한 명 정도는 죽 일 수 있겠지만 손실이 너무 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운명의 날이 다가올 터인데 자칫 잘못하다가는 그때까지 움직일 수 없는 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알고 있군· 십이신월에게 그리고 나에게 걸려 있는 제약에 대해서·’
어느 정도나?
그것까지는 모른다·
하지만 다른 십이신월과 지내면서 자신에게 걸려 있는 제약까지 분석 하고 계산했을 것이라고는 판단할 수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백유설이니까·
그것을 해냈다고 하더라도 이상할 건 없었다·
···사실 백유설은 회공시월의 제 약이 어느 순간에 어떻게 발동되는 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 제약이 걸리는 지는 알고 있다·
‘시조 마법사의 제약을 어기면 어 떻게 되느냐고?’
‘흠 그냥··· 멈춰 버린다·’
‘인형처럼 말이지· 말도 행동도 생각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 려·’
‘그래서 우리는 지금껏 세상에 함 부로 나설 수 없던 게야·’
십이신월들이 직접 해준 이야기니 까 거짓은 없다·
회공시월은 틀림없이 저 제약을 두려워하고 있다·
그에 백유설은 확신을 가지고서 행 동할 수 있었다·
“네가 여기서 이면 세계의 파편을 얌전히 놓고 간다면 너에게도 좋은 조건을 하나 걸어줄게·”
“조건이라고 했나?”
”그래· 거래를 하자는 거지· 너도
여기서 그냥 파편만 빼앗기고 가는 건 속상하잖아·”
딱히 부정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서 조건을 들을 생각이 있는 모양·
백유설은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이번에 네가 얌전히 그걸 물러나 준다면··· 이다음 너와 내가 또다 시 조우하여 이런 대치상황이 되었 을 때 나도 한 번 얌전히 물러나 줄게·”
그에 회공시월은 입술을 비틀었다·
백유설의 조건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만약 너와 내가 다시 만난 그 순 간 내가 너의 연인의 목숨을 노리 고 있더라도 얌전히 물러나겠나?”
회공시월이 홍비연에게 턱짓을 하 며 그리 말하자 그녀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십이신월에게 지목돼서가 아니라 그의 단어 선정이 상당히 민 감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이 되더라도····”
힐끔 홍비연의 옆모습을 바라본 백 유설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녀가 뺨을 살짝 붉게 물들인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가 난 것일까· 설령 그렇다고 해
도 이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이 이 렇게 대답해야만 했다·
“조건이니까· 나는 얌전히 물러나 겠다· 너와 나의 약조에 계약서가 별달리 필요하지는 않겠지?”
“필요없다· 우리의 약속은 언령이 되어 새겨졌다· 다음에 같은 상황이 온다면 너는 얌전히 물러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회공시월은 이면 세계의 파편을 백 유설에게 천천히 날려보냈다·
그것을 받아든 백유설은 양손으로 꽉 쥐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했다· 다음에 다시 만났을 때 라고 했어 나는 분명히·”
“···그래·”
백유설에게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것은 확실했지만 제아무리 회공시월 이라도 그것까지는 알 수 없었다·
‘어차피 만나는 시기와 장소는 내 가 컨트롤할 수 있다·’
공간을 자유자재로 이동하는 회공 시월이었기에 자신이 원하는 타이밍 이 아니라면 굳이 모습을 드러내지 만 않으면 된다·
그렇게 한다면 백유설의 힘이 가장 중요한 순간에 그를 그 자리에서
퇴장시키는 것도 가능할 터·
“너는 오늘의 약속을 후회하게 될 거다·”
회공시월이 그렇게 회색빛 공간으 로 모습을 감추자 스칼렛은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후우우! 정말 긴장돼서 죽는 줄 알았네· 내 원래 힘이 돌아와도 저 놈 상대하는 건 절대 질색이라구·”
“나도 마찬가지다· 일전에 크게 당 한 적이 있어서 다시 싸우고 싶지 는 않았다· 백유설· 너는 회공시월이 우리를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알 고 있었나?”
루드릭의 질문에 백유설은 뺨을 긁 적이며 홍비연의 눈치를 살폈다·
아까부터 고개를 돌리고 있어서 표 정을 볼 수가 없었다·
무언가 기분이 좋지 않아진 것은 분명한데 이유를 알 수 없다·
“예 뭐··· 알고 있었죠·”
“그럼 그 약속은 대체 뭐지? 정말 자네의 힘이 필요한 순간에 회공시 월이 등장한다면 모든 게 망가질 수도 있다· 그래도 괜찮은가?”
“그럴 일이 없으니 괜찮습니다·”
“그럴 일이 없다고? 자네는 스스로
를 너무 과소평가하는군·”
그런 의미가 아니에요·”
백유설은 더 이상 설명할 수가 없 다는 의미로 고개를 저었다·
“계획이 있습니다·”
“···어떤 계획인지는 잘 모르겠지 만 부디 예상한대로 모든 게 홀러 갔으면 좋겠군·”
루드릭과 백유설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스칼렛은 서둘러 걷혀 버린 뇌 운의 틈새 속으로 날아갔다·
“토아! 너 괜찮은 거야?”
서둘러 찾은 토아 레그론의 상태는
아까보다도 훨씬 좋지 않아 보였다·
신체가 거의 백색에 가깝게 물들어 있었는데 이는 단순히 피부가 창백 해졌다고 설명하는 것도 불가능했 다·
‘영혼탈색···!’
육체가 망가진 것은 물론 영혼마 저도 크게 상처를 입은 대마법사에 게만 나타나는 현상·
저렇게나 영혼에 상처를 입으면 단 순히 죽는 것보다도 더욱 끔찍한 일 을 겪게 될지도 모른다·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저승에 가는 것도 불가능할 테고 만약 환생이란
게 있다면 그것도 힘들 것이다·
저승이든 환생이든 있는지 없는지 도 알 수 없었지만 영혼의 상처가 몹시 좋지 않다는 것은 알았기에 스 칼렛의 표정이 창백하게 물들었다·
“너 너 대체 왜···
“스승···님····”
토아 레그론은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고서 그토록 보고 싶었던 스칼렛 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시선도 잠시 무언가를 바 라보는 것조차 불가능했던 토아 레 그론은 그대로 눈을 감았다·
“스승님께도 꼭 보여드리고 싶었
는데··· 아쉽게 됐····”
그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끝내 스승님께 하고 싶었던 말마저 도 끝마치지 못한 채 토아 레그론의 팔에서 힘이 풀리고 말았다·
“어째서 스스로의 영혼마저도 상처 입히면서까지 싸웠느냔 말이다···
스칼렛은 마지막 물음을 그에게 던 졌으나 토아 레그론은 더 이상 대 답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잔뜩 혼내줄 생각이었다·
자신의 힘이 닿지 않는다면 루드릭 과 백유설의 힘을 빌려서라도·
여차하면 직접 이 손으로 그를 죽 일 생각까지도 하고 있었다·
그는 배반자였으니까·
마법계에서 등을 돌리고 감히 이 면 세계로부터 힘을 빌려오는 흑마 법을 사용하였으니까·
그 대가로 도대체 얼마나 많은 수 의 인간을 희생했을까·
그래서 스칼렛은 토아 레그론을 만 나서 꼭 물어보고 싶었다·
‘왜 그렇게까지 했느냐·’
이제는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스칼렛은 공허한 눈으로 회백색 가
루가 되어 흩어지는 토아 레그론의 시신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다른 세계에 영혼을 팔아버린 자는 죽음 뒤에 시신을 이 세계에 남기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그저 원자 단위로 쪼개져서 어딘 가로 흩어져 사라질 뿐·
“아마도·”
뒤따라온 백유설의 목소리였다·
“스칼렛 너를 위해서였겠지·”
“흑마법을 익힌 이유도 자신의 영 혼마저도 내걸었던 이유도· 모두 스
승이었던 너를 지키기 위해서였어·”
“···멍청한 놈· 나는 거기까지 바 라지도 않았는데· 내 몸은 나도 지 킬 수 있었는데·”
그리 말하면서도 스칼렛은 자괴감 이 들었다· 봉인에서 풀려난 이후에 도 별달리 노력하지 않았기에 힘을 거의 되찾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아마도 다른 이들이 바라보기에 마 녀왕의 타이틀을 가진 스칼렛이 힘 을 잃은 지금이 목숨을 노리기에 가 장 적절하다고 생각하겠지·
그녀는 어렴풋이 그것을 알고 있었 음에도 안일했다·
이제는 자신을 지켜주는 사람들과 요람이 있었기에 그곳에 마음을 기 대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나를 지키고자 이면 세계에 영 혼마저 팔아버리는 제자가 나오기 전까지는 계속 그렇게 안일하게 생 각했을 것이다·
‘이대로는 안 돼·’
만약 이렇게 계속 있다가는 또다 시 소중한 사람을 잃어버리게 될지 도 모른다·
스칼렛은 주먹을 꽉 쥐고서 일어섰 다·
···한시라도 빨리 원래의 나로
돌아가야 해·’
최전성기 시절·
세상의 모든 마법사를 공포에 몰아 넣어 세계를 정말로 지배하기 직전 까지 갔던 유일한 인물 마녀의 왕 스칼렛으로·
다시 돌아갈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