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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피의 마녀 이야기(H)
기다림의 시간은 짧았다·
거의 500년 이상을 봉인된 채로 살아왔으니 한 달 남짓도 되지 않 는 이 짧은 시간은 스칼렛의 무한한 수명의 관점에서 보자면 정말 찰나 에 불과할 것이다·
고작 찰나 눈을 감았다 뜨면 지나
가버리는 그런 순간일 뿐일 텐데·
“아··· 답답해·”
매 순간이 지겹게 느껴지는 이유는 대체 뭘까· 여태까지 잘 버텨왔는데 시간의 흐름이 유난히 느리게만 느 껴진다·
여태까지는 기나긴 세월을 살면서 ‘시간의 흐름’이라는 것에 특별한 감정을 느낀 적은 없다·
그저 1년이 지나면 한 살 더 먹었 겠거니 싶었고 10년이 지나면 강산 이 바뀌었겠거니 싶었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은 이렇게나 시 간의 흐름이 고통스럽게만 느껴지는
것일까·
‘세월은 고통이다·’
스칼렛은 이 문장을 썩 명문장이라 고 생각하며 허공에 새겼다·
“하····”
처지가 한심하다·
바닥에 드러누운 채 스칼렛은 퀭 한 눈으로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며 머릿속으로 숫자를 그렸다·
하나 둘 셋····)
의도하지는 않았다·
그건 그저 본능이었다·
자꾸만 매 순간 시간을 세는 것 으
“으아악!”
머리를 마구 흔들어서 시간을 떨쳐 내려고 했으나 마녀의 뛰어난 인지 능력은 알아서 세월의 흐름을 완벽 하게 체크하고 있었다·
스칼렛은 양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 리고서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왜 이러는 거야 진짜···
안 그래도 여기에서 몇백 년이나 더 갇혀있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이 따위 일에 자꾸만 얽매여서는 안 된 다·
마녀의 뛰어난 두뇌는 옛 기억을 쉽사리 잊지 못하기 때문에 의도적 으로 기억을 구석에 봉인해두지 않 으면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자꾸만 떠오른다·
지금까지 스칼렛은 무수히 많은 기 억을 의도적으로 기억의 저편에 가 둬놓았으나 이번만큼은 그게 힘들 었다·
하기야 기억이라는 게 물리적인 것 도 아니고 손에 쥘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제아무리 마녀라고 해도 이 렇게나 자극적인 추억을 마음대로 잊을 수 있겠는가?
기억을 의도적으로 완전히 상실하 는 건 불가능하다·
기억의 상실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기억을 떠올려서 확인해 야 하기 때문이다·
여태껏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던 스칼렛으로서는 그저 당혹스러울 뿐 인 현실·
뭐든지 가능했고 뭐든 생각하는대 로 이루었던 마녀는 슬슬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에게도 불가능한 것은 얼마든 지 많으며 백유설과 함께했던 짧은 추억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영원한 고문이 되겠 지·
백유설과 함께했던 시간은 기나긴 스칼렛의 인생에서도 가장 밝고 찬 란하게 빛나는 추억으로 자리 잡았 다· 어찌나 눈부신ス] 다시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마녀왕 스칼렛·
가여운 스칼렛·
한때 피의 마녀라 불리던 그녀는 영원토록 이 기억을 잊지 못할 것이 다·
수백 년 뒤 스칼렛이 다시 세상에 나갔을 때·
백유설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그녀는 지금과 같이 눈부시게 아름 다운 세상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처음 알았다·
삶이 즐겁고 행복했다는 것을·
너무 늦게 알았다·
반 년간 내가 행복했었다는 것을·
행복했을 때 그것을 제대로 만끽하 지 못하고 시기가 지나서야 그것을 눈치채다니·
이 어찌나 미련하고 멍청한 여인이 다 있는가·
‘나 따위를··· 마녀왕이라고 계속
칭해도 좋은 걸까·’
난생 처음으로 품에 들어온 행복을 제대로 즐기지도 못하고 잃어버리다 니 이 어찌나 우스운 인생인가·
자괴감을 버티지 못한 스칼렛은 고 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애당초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땅 인가· 침대에 머리를 기댄 그녀는 옛 기억을 떠올렸다·
지은 죄가 참 많은 인생이었다·
인간을 초월한 그 능력으로 세상을 바꿔볼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그 저 개인의 이득을 찾아다녔다·
더 많은 재산과 더 드높은 명성·
그리고 더욱 강력한 힘·
누구라도 원했던 것을 마녀왕 스칼 렛도 똑같이 원했다·
누군가는 그녀를 일컫어 ‘신선’이 라고 부르고는 했으나 어찌 마법의 경지가 높다 하여 신선인가·
한낱 인간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 였거늘·
‘아 그렇구나·’
강한 힘을 지녔기에 약자들을 모두 무시하였다· 제발 구원해 달라고 비 는 이들은 매정하게 내쳤고 자신의 힘으로는 간단하게 해결할 수도 있 었던 수많은 분쟁과 죽음과 재앙을
귀찮다는 이유로 외면하였다·
그녀의 잘못으로 죽어간 목숨은 셀 수도 없이 많을 것이며 흐르는 핏물 로 바다를 이룰 수도 있을 것이다·
이상한 일이다·
천 년에 가까운 세월을 살면서 단 한 번도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 었다·
왜 자신이 세상의 정점에 섰으면서 도 더욱 강력해지지 못했는지 감정 을 초월하지 못했는지·
그 이유를 하나하나 알 것만 같았 다·
스칼렛은 검지손가락을 올려서 관 자놀이게 가져다 대었다·
고통스럽다·
그간 저지른 잘못과 외면하여 죽어 간 생명들이 자꾸만 떠올라서·
또 반 년간 행복했던 기억이 자꾸 만 머릿속을 지배해서·
그래서 고통스럽다·
‘이건··· 죄 많은 내게 신이 내리 는 형벌인 걸까·’
영원한 기억의 굴레 속에서 아무것 도 못한 채 살아가는 것·
그것이 신의 형벌이라면 받아들여
야 마땅하나 스칼렛은 무서웠다·
덜컥 겁이 났다·
버틸 수 없을 것만 같아서·
‘해결책은 하나뿐····’
모든 기억을 지워 버리는 것·
눈을 질끈 감고서 스칼렛은 티끌만 큼 남은 마나를 끌어올렸으나 당연 하게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무수히 많은 고통의 기억이 그녀를 괴롭히고 또 괴롭히겠지만 그만큼이 나 아름다웠던 기억 단 하나가 스칼 렛의 삶에 진정한 의미를 가져다주 었는데 이것을 어떻게 지우란 말인 가·
원하는 기억을 지우는 방법따위는 없다· 모든 것을 잊거나 모든 것을 기억하거 比
둘 중 하나·
스칼렛은 검지를 머리에 가져다 댄 채로 그렇게 고민하다가 이런 고민 을 하는 것조차도 꼴사나운 겁쟁이 같다는 생각에 덜컥 눈물이 차올랐 다·
‘나는 대체 왜····’
그만큼이나 강력한 힘을 가졌으면 서 왜 도망치는 삶을 살아왔는가·
그리고 왜 또다시 도망치려 하는 가·
이 세상에는 그녀보다 강한 인간은 없으나 그녀보다 의지가 강력했던 인간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래·
나 따위는 겁쟁이에 아무것도 아 닌 존재였다· 마법의 재능 하나를 타고났다고 하여 위대한 사람이 되 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을 깨닫고 나자 오히려 속이 후련해져서 스칼렛은 팔을 떨어뜨 렸다·
“하아아····”
속에서부터 깊은 한숨이 새어 나오 며 눈에 차올랐던 눈물이 주륵 흘
러 내렸다·
형벌을 감내하자·
한 번의 달콤한 행복을 맛보았으니 까 더 이상 많은 것을 바라지 말 자·
죄 많은 삶을 살았으니까·
더 이상 그런 행복을 가질 수 없 다고 하여도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 를 버티고 또 버티며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포기하는 거야·’
모든 것을 놓자고 생각한 스칼렛은 눈을 질끈 감고서 다리 사이로 얼굴 을 파묻었다·
‘차라리 꿈속으로 도망치자·’
그곳에서는 영원히 같은 시간을 반 복할 수도 있지 않을까·
재수가 없다면 고통스러운 기억이 떠오르겠지만 혹여나 운이 좋다면·
행복했던 그때의 기억을 다시 한번 느낄 수도 있지 않을까·
“왜 그러고 울고 있어?”
그리 생각하며 눈을 감고서 어떻게 든 꿈속으로 도망치려 하는데 환청 이 들려왔다·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다·
순간적으로 ‘희망’이라는 단어가 눈 앞에 어른거렸으나 스칼렛은 초인적 인 정신력으로 생각을 붙들어 맸다·
‘속으면 안 돼·’
안다· 알고 있다·
이건 백유설의 목소리가 아니다·
이곳까지 인간이 찾아올 수 있을 리가 없다· 세상의 법칙에서 벗어난 인외의 능력을 지닌 마녀 사냥꾼도 이곳에 도달한 적은 없지 않던가?
절망을 인정하여 받아들였을 때의 고통보다 희망을 가진 뒤에 맛보는 절망은 더욱 고통스러운 법이다·
나를 이곳에 가둔 그 존재는 내가 어떻게 해야 더욱 아프게 고통받는 지 잘 알고 있다·
이제야 형벌을 인정하고 고통을 감 내하려 하니까 어설프게 희망 따위 를 맛보게 하여 더욱 힘들게 하려는 것이다·
그따위 수작질에 속지 않는다·
“시끄러워·”
“시끄럽다니 너무하네·”
“너는··· 내 간절한 염원이 만들 어낸 환청이야···· 나를 괴롭게 하 려고 했겠지만 소용없어· 나는 나 느··”
스칼렛은 여전히 무릎 사이에 머리 를 파묻은 채 나오지도 않는 단어 를 억지로 게워냈다·
“나는 마녀왕이니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래 당연하다·
마녀왕의 굳건한 의지를 고작 환청 따위가 깨부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스칼렛은 애써 고개를 들지 않은 채 기다렸다·
‘기다려? 내가 뭘····-
슬슬 대답이 돌아올 때가 되었음에
도 목소리는 다시 들리지 않는다·
역시나 환청·
그렇게 생각하려는데·
“스칼렛」
“너는 대화를 주고받는 최신식 시 스템까지 갖춘 환청을 들어본 적 있 어?”
“··어?”
다시 심장이 뛴다·
이 말투 저질스러운 비유 얄미운 목소리 톤까지·
모두 백유설이다·
“난 들어본 적 없는데 역시 대단 하신 마녀왕은 그런 것도 알고 있나 보지?”
틀림없는 백유설이다·
정신을 차렸을 때 스칼렛은 이미 고개를 들어 올린 뒤였다·
그러나 백유설은 보이지 않았다·
그 자리에 백유설이 없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눈앞에 흐릿해서·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감당이 안 될 정도로 눈에 가득 차올라 있
어서 그래서 백유설을 볼 수가 없 었다·
하지만 그 형체는 또렷하게도 백 유설이 었다·
그는 특유의 건들거리는 걸음걸이 로 스칼렛에게 다가와 손을 뻗었다·
눈물을 닦아낸 것인지 시야가 확 트이며 백유설의 얼굴이 코앞에 나 타났다·
“너 너··· 어떻게····”
“이야 좋은 곳 人}■네· 인테리어가 아주 깔끔해· 깔끔해서 아무것도 없 어· 먼지는 안 쌓여서 청소하긴 편 하겠다· 이건 뭐야? 이케야에서 사
온 탁자야?”
뭐라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다·
그¹^ 그저····
머리가 정지된 것처럼 아무런 사고 를 할 수가 없었다·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항상 스스로가 똑똑하다고 생각해 왔던 스칼렛이었기에 바보들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아가나 간혹 궁 금했던 적이 있다·
지금이 딱 그런 기분이다·
바보는 이런 기분이구나·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도 할 수
가 없고·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도 모르겠 고·
그래서 스칼렛은·
진짜 바보가 되었다·
“하··· 하하하···」
바보처럼 웃었다·
눈물을 주륵 흘리며 스칼렛이 그렇 게 웃기 시작하자 백유설은 이상한 사람 쳐다보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 보았다·
“왜 그래? 엉덩이에 털 난다?”
”나는····”
“밖에서 볼 때보다는 나이가 조금 있는 것 같네? 그래도 고등학생처럼 생겨서 스텔라에 다시 다니는 건 문 제 없겠어·”
“스 스텔라···r
“그래· 스텔라· 지금 무단결석 며칠 째야 도대체?”
“스텔라에 다시 다닌다니 그런 게····”
다시는 갈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백유설은 아주 태연자약하게도 그녀 의 손을 잡아서 일으켜 세웠다·
거의 반쯤 그의 품에 안긴 채 스 칼렛이 멍한 눈으로 백유설을 올려
다보고 있자 그는 언제나 그랬듯 당당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언제까지 여기에 처박혀 있으려 고? 지긋지긋한 학교로 돌아가야지·”
백유설의 그 말에도 스칼렛이 하염 없이 바보처럼 눈물 흘리며 그렇게 웃고 있자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왜 그렇게 좋아해? 재미없을걸?”
“···알아·”
“지겨운 수업 또 들어야 되고 교 수들이 저번처럼 지랄해도 네 성깔 죽이고 지내야 돼·”
“알고 있어···
“조막만 한 애쉐끼들이 깝죽거려도 꾹 눌러 참아야 돼서 빡칠걸?”
“당연하지···
“게다가 외출도 쉽게 못 한다? 여 학생 기숙사 교감이 특히나 통금에 민감하잖아·”
다 알고 있다·
그런데·
“그게 뭐가 문제야···r
스칼렛은 백유설의 옷자락을 꾹 쥐 었다· 다시는 놓치지 않을 기세로·
그러고선 여태까지 꾹꾹 눌러 담 아왔던 말을 마침내 그에게 전했다·
“네가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