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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피의 마녀 이야기(4)
참으로 다사다난한 하루였다·
당장 남의 일에 끼어들 만한 여력 도 없고 정신력도 없는데 어쩌다 보 니 수인족과 마녀 사냥꾼 그리고 카질리스크라는 상위 괴수와 엮이고 말았다·
테리폰 소드에서 뻗어져 나온 광선
검에서 카질리스크의 푸른색 피가 뚝뚝 흐른다· 직박구리 안경은 저 피 에 맹독이 돌고 있다고 경고하고 있 지만 백유설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저 저기····”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아까까지만 해도 백유설에게 큰소리를 뻥뻥 치던 수인족 수장이 덜덜 떨리는 눈동자로 말했다·
“구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 니다····”
감사 인사를 들으려고 한 것은 아 니었다· 애당초 눈앞에서 사람이 죽 어가는데 어떠한 목표를 가지고 움
직이지는 않는다·
그냥 백유설에게는 저들을 구할 능력이 있었으니까·
그게 가능하다는 사실만으로 망설 일 이유는 없었다·
백유설은 대답하지 않고서 조용히 그들을 응시하였다·
구해진 것과는 별개로 저들 사이에 서 상당한 동요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자신들이 죽이려고 했던 마녀가··· 사실은 수인족들에 게는 악몽과도 같았던 괴수 카질리 스크를 50년 가까이 봉인해 뒀다는
사실을 알아버리고 말았으니까·
50년간 원망하고 증오해왔던 スト가 사실은 자신들을 구원하기 위해 숲 에서 내쫓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가 어려웠다·
심지어 저들은 방금 직전까지 은인 에게 폭언을 퍼붓지 않았던가·
그러고서는 또다시 마녀의 사람에 게 구원받고 말았으니 도대체 어떻 게 해야만 이 은혜를 갚을 것이며 어떻게 해야만 마녀에게 저지른 죄 를 갚을 것인가·
그런 건 백유설에게 아무래도 좋았 으므로 테리폰의 마력검을 집어넣은
뒤 뒤돌아 시클렌을 바라보았다·
예상대로 대저택이 불에 활활 타든 말든 마녀에게는 상처 하나 입히지 못했는지 멀쩡한 모습이었다·
그녀에게 다가가자 시클렌이 흥미 롭다는 눈으로 말했다·
“재미있네· 여타의 마법사와는 느 낌이 상당히 다른걸· 그런데도 마법 사라는 걸까나?”
“마법사 행세를 조금 하고 있죠·”
“행세?”
백유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제가 마법사라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그럼?”
“마법사보다는····”
그는 하태령이 자칭했던 호칭을 떠 올리며 말했다·
“검사··· 검사라고 지칭하는 게 옳지 않을까 싶네요·”
“검사라···· 확실히 대마법시대인 요새는 낯설어·”
“애당초 검사가 낯설지 않았던 시 절이 있었나요?”
“하 그건 그렇긴 하지· 마법사의 시대가 저물었던 적은 없으니까·”
시클렌은 피식 웃음 지으며 백유설 의 뒤쪽 저 멀리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수인족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시클렌에게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은 건지 이쪽을 힐끗힐끗 바 라보고 있었는데 그녀는 미련 없이 몸을 휙 돌렸다·
“뭐 하고 있어· 어차피 집도 불탔 겠다 당분간은 같이 움직이ス 1· 네가 찾는 마녀가 있다고 했지? 마녀 사 냥꾼의 능력이 아직은 남아 있으니 까 내가 도움이 될 거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백유설 역시도 수인족들이 신경 쓰
였기에 은근슬쩍 말을 꺼냈다·
“저들과 대화는 안 해봐도 괜찮겠 습니까?”
“나야 괜찮지· 저놈들이 괜찮지 않 다는 게 문제겠지만· 사과할 기회도 없이 내가 훌쩍 사라져 버리는 게 저 놈들에게 내리는 가장 큰 형벌이야·”
“그런가요?”
“그래· 사과라는 건 마음의 짐을 덜게 만들거든· 이제 저들은 평생토 록 영원흐】 나라는 사람이라는 마음 의 짐을 짊어지고 살아야 할 거야· 아주 고통스러운 나날이겠지·”
인간으로서 감정이 있는 존재에게 내리는 가장 큰 형벌 죄책감·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고 잊혀지며 그 무게 또한 옅어지겠지만··· 자 신들이 은인에게 크나큰 죄악을 저 질렀다는 사실은 심장과 영혼에 새 겨져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그야말로 마녀 사냥꾼답지 않은 형 벌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좋아요· 지금 바로 출발하죠·”
시간이 없는 건 백유설도 매한가지였 기에 즉시 짐을 챙겨서 자리를 떴다·
그 자리에 덩그러니 남게 된 수인 족들만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사라
진 시클렌을 그릴 뿐이었다·
“푸헉!”
달리는 마차 속에서 백유설의 이 야기를 듣게 된 시클렌이 물을 뿜고 말았다· 반대편에 앉아있던 피날렛 은 졸지에 물분수를 맞게 되었으나 분위기가 워낙 심각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네가 찾는 마녀가 다른 그 누구도 아니고····”
“예· 마녀왕 스칼렛이요·”
“이런 미친놈· 내가 생각보다도 더 한 놈을 만났군·”
시클렌은 자신의 헝클어진 머리를 손톱으로 벅벅 긁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마녀왕이라 니···
“마녀왕은 혹시 찾기 힘듭니까?”
“후우· 찾기 힘든 게 문제가 아니 야· 특정 경지에 이른 몇몇 마녀는 자신이 추적당하는 순간 그 사실을 눈치챈다· 그래서 마녀왕급 거물은 마녀 사냥꾼들조차 손도 못 대고 있 었지· 추적하는 순간 도리어 살해당
하고 말았으니까·”
“오호···
그런 사연이 있었나·
마녀 사냥꾼에게는 꽤 리스크를 동 반하는 일이겠으나 오히려 백유설 에게는 희소식이었다·
“그러니까 마녀 사냥꾼이 추적하 는 순간 상대방이 눈치를 챌 수 있 다는 말이로군요?”
백유설이 반짝거리는 눈으로 말하 자 시클렌은 찝찝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ス]· 왜?”
“혹시 마지막으로 마녀왕을 추적 했던 마녀 사냥꾼이 언제 있었는지 기억하십니까?”
“내가 모든 마녀 사냥꾼의 소식을 듣지는 않는다만 500년 전이 마지 막일 거다· 당시 가장 강력한 마녀 사냥꾼이 마녀왕을 추적하려 했다가 살해당하고서는 그 뒤로 누구도 마 녀왕을 추적하지 않았으니까·”
“그럼····”
백유설은 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 갑자기 마녀 사냥꾼이 뜬금 없이 마녀왕을 추적한다면····”
“한다면?”
“마녀왕에게는 참으로 이례적인 일 이 되겠지요·”
“어 뭐··· 그렇ス1· 갑자기 이것들 이 미쳤나 싶을 거야·”
“바로 그거예요·”
“뭐?”
“어떤 원리로 어떻게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추적을 시작해 주 실 수 있나요?”
생각보다도 더 진지하고 기대하는 듯한 눈빛의 백유설을 보며 시클렌 은 살짝 당황하였다·
“안 될 건 없긴 하다만··· 왜?”
“이유는 복잡해요· 가능한 거죠?”
“지금 당장은 힘들고 근처 마을에 도착해서 의식을 치러야 돼·”
“좋았어·”
백유설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가 이토록 좋아하는 이유는 참으 로 간단한 일차원적인 문제였다·
최근 500년간 스칼렛을 추적했던 마녀 사냥꾼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 런데 갑자기 스칼렛이 아바타를 잃 고서 봉인되어 버린 상황에 뜬금없 이 마녀 사냥꾼이 그녀를 추적한다?
아마도 스칼렛은 백유설이 자신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그것으로 눈치 를 챌 것이다·
어디에 있는지 존재조차 알 수 없 는 스칼렛에게 보내는 일종의 신호 탄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마 이런 메시지를 보낸다 하여 도 스칼렛이 움직이는 건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 의미가 없는 행동일 수도 있다·
하지만 백유설은 그녀에게 신호를 보내는 행위만으로도 큰 기쁨을 느 꼈다·
그런 백유설의 모습은 비록 짧은 시간밖에 함께하지 않았지만 시클렌
과 피날렛이 보기에도 퍽 낯설게만 느껴졌다·
완벽한 포커페이스를 두르고서 표 정에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던 그 였기에 저토록 순수하게 기뻐하는 모습은 신기하기만 했다·
“마녀왕이 정말 네게 특별한 사람 이었다는 게 진짜였나보네?”
“제가 마녀와 마녀 사냥꾼 앞에서 거짓을 말할 이유가 있나요·”
피날렛은 찝찝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너 말야· 내가 마녀라는 건 어떻게 알았어? 일반적 인 마법사는 우리를 구분하지 못할
텐데·”
아마 사소하게 걱정도 될 것이다·
마녀로서의 정체가 이런 꼬맹이에 게 들킬 정도라면 언제 또 다른 마 법사에게 들키게 될지 모르는 일이 었으니까·
“마녀와 함께 오래 지내다 보니 그 런 능력이 자연스레 생긴 것 같아 요· 제가 또 일반적인 마법사와는 달리 특이 체질이기도 하구요·”
“그 그런 거겠지? 후우·”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다 보니 셋 을 태운 마차는 근방의 시골 마을에 도착하였다·
시골 사람들이 보기에 백유설 일행 의 복장은 귀하지도 않고 가벼운 여 행복 차림이었기에 그다지 신경 쓰 이는 대상이 아닌지라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시클렌은 마을을 돌아다니며 아무 도 쓰지 않는 폐가를 발견하더니 그 곳으로 들어가 내부를 깔끔하게 정 리 했다·
천장에 형광등까지 하나 말끔하게 설치하는 시클렌의 모습을 보며 백 유설이 말했다·
“의식이라길래 어둡고 더러운 곳에 서 행하는 줄 알았어요·”
“웃기는 소리· 하다못해 마녀의 의 식에도 불꽃은 필요하다· 그 불에 집중하기 위해 다른 불을 모두 꺼놓 는 경우가 있지만 그건 정말 능력 이 약한 하급 마녀들이나 하는 짓이 지· 그리고 의식은 항상 깔끔하고 깨끗한 곳에서 치러야 흐!!· 더러운 곳에서는 순수한 의지가 전달되지 않으니까·”
“하긴··· 마법진에도 불순물이 하 나라도 섞이면 기능 고장이 나서 곤 란하긴 해요·”
시클렌은 바닥에 마녀 사냥꾼 특유 의 마법진을 분필로 그리기 시작했 다· 이 역시도 핏물이나 붉은 마법
물약으로 할 줄 알았건만 고작 분필 이라서 살짝 실망했다·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시클렌은 수준 높은 마녀 사냥꾼이었 고 여타의 마녀 사냥꾼과 차별된 점 이 존재해도 이상하지는 않았으니까·
‘그나저나····’
백유설은 눈을 가늘게 뜨고서 마녀 사냥꾼의 추적 마법진을 바라보았 다·
마법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형태 의 마법진이었다·
그런 것이라면 백유설이 알아보지 못해야 정상이다· 직박구리 안경을
쓰고 있어도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직박구리 안경을 벗 고 있음에도····
이상하리만치 저 마법진에 대해 알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 막 들었다·
그래서 백유설은 저도 모르게 불편 한 점을 내뱉고 말았다·
“저기 1시 방향의 룬어에 점이 하 나 더 찍힌 거 아닌가요?”
“아 그렇군· 실수로 분필 가루를 흘려서····”
우뚝·
말을 꺼낸 백유설도 수긍을 해버 린 시클렌도 그 광경을 옆에서 지 켜보던 피날멧도·
셋 모두 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그러고선 시클렌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침묵을 깨뜨렸다·
“너··· 마녀 사냥꾼의 마법도 알 고 있는 거냐?”
백유설은 대답하지 못했다·
마녀 사냥꾼의 마법?
알 리가 없다·
애당초 일반적인 마법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백유설이었
다· 직박구리 안경이 없는 백유설은 그야말로 일반인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손바닥을 멍하니 바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런 적은 없는데 그 냥 왠지 모르게 예전에 배웠던 적 이 있는 듯한 느낌이 있어요·”
“···그래· 마녀왕과 어린 시절부 터 함께였다고 했던가? 마녀 사냥꾼 에게 대항하기 위해 사소한 지식 정 도는 알려줬을 수도 있겠지·”
그런 게 아니다·
마녀왕 스칼렛과는 사실 같이 지낸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다·
마녀 사냥꾼의 마법을 그녀에게 배 울 기회따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내가 알고 있는 거지?’
예전부터 이런 현상이 점점 나타나 고 있었다· 직박구리 안경 속의 기 능을 안경이 없을 때도 사용할 수 있게 된 점·
그리고 백유설 자신에게 서서히 지식이 동화되기 시작한 것까지도·
“자 이제 시작한다·”
거기까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시클 렌이 의식을 시작하기 위해 새하얀 소복으로 옷을 갈아입자 백유설도
집중하였다·
지금이 중요하다·
백유설은 이 순간을 상당히 기대하 고 있었다·
스칼렛은 사라지기 직전 백유설에 게 마지막 메시지를 남겼다·
‘나를 찾아줘·’
아마 메시지를 남기는 순간까지도 스칼렛은 아무런 기대조차 하지 못 했을지도 모른다·
천 년의 세월 동안 자신을 찾았던 이는 단 한 명도 없었으니까·
어쩌면 사라지면 사라진대로 백유
설이 스칼렛 자신을 잊고 살아가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함도 있었을 것 이다·
그곳에서는 외부의 그 어떠한 소식 도 들을 수 없을 테니까
그래서·
드디어 한참의 시간이 지나서야·
백유설은 스칼렛의 메시지에 화답 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당신을 찾고 있습니다·’
스칼렛이 불안해하지 않도록·
혼자서 외로움을 느끼고 있지 않도 록 한마디의 메시지라도 전달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