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4
66· 뒤바뀐 이야기⑹
휘이이잉···!!
날카로운 바닷바람이 풀레임의 뺨 을 스치고 지나쳤다· 그녀는 흐트러 진 머리카락을 정돈하지도 않은 채 머나먼 광경을 바라보았다·
얼어붙은 바다 그 한가운데에 소 용돌이치는 직격 1km의 초거대 소용
돌이
소용돌이는 얼어붙어 있었다·
거대한 해적선 한 척과 함께
레비앙 해안 리스본드 항구·
그리고····
바다와 하늘을 잇는 얼어붙은 용오 름을 기둥 삼아 지탱하여 일어서는 거대한 생물체 하나·
과연 그것을 ‘생물체’라고 표현해 도 옳은 것일까· 해골의 형상을 한 그것은 수백 년 전 이곳에 봉인된 전설 속 해적제왕 블랙 벨리즈·
그가 지금 이 순간 바다에 현현(顯
現) 하였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바다가 부 서지며 짙은 물안개를 뿜어댄다·
저런 게 지상에 상륙했다가는 아돌 레비트 왕국 전체가 위험할지도 모 른다·
이미 리스본드 항구에는 아무도 남 지 않았다· 마법사들은 본분을 잊은 채 모두 도망쳤고 해적들은 울부짖 으며 고향을 떠나갔다·
저것을 막을 존재는 없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구름을 꿰뚫고 나타난 비행정 한 척· 그 위에는 붉은색의 커다란 불
꽃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풀레임은 그것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홍비 연····’
본디 최악의 범죄자들만이 수감되 는 감옥에서 죽음을 맞이할 운명이 었던 홍비연은 이곳으로 불려와 여 왕의 명령으로 인해 강제로 저주를 폭주시키고 말았다·
‘불의 재앙이 발생하리라·’
원래 세계에서의 홍비연은 저 불꽃 을 통제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가히 아돌레비트의 환생이라고 극 찬하는 신문 기사가 몇 날 며칠이나
돌아다녔는데 기억하지 못할 리가·
그러나 이 세계에서의 홍비연은 불 의 재앙을 전혀 통제하지 못하고 있 었다·
마치 불사조를 닮은 형상으로 육신 과 영혼을 불태우며 비명을 지르는 그녀는 흡사 악귀를 닮아 있었기에 도저히 원래 세계에서의 홍비연이 떠오르지가 않는다·
푸른색의 해골 형상을 한 해적제왕 블랙 벨리즈와 불꽃의 화신의 충돌·
그것은 바다를 모조리 녹여 버릴 정도로 거대한 사투였으나·
···끝끝내 홍비연은 패배하였다·
한 줌의 잿더미가 되어 흩어지는 홍비연의 흔적·
자신을 막아설 유일한 숙적이 사라 지자 해적제왕의 원혼은 더 이상 거 칠 게 없었다·
그는 진격하였다·
며칠이고 앞으로 나아가며 세상을 꽁꽁 얼어붙게 만들었다·
아돌레비트 왕국은 단 일주일 만에 혹한의 저주에 얼어붙어 완전히 멸 망하였고 그 재앙의 손아귀는 스칼 벤 제국에까지 마수를 뻗었으나 영 웅들이 나타났다·
엘트먼 엘트윈·
사엘 리·
아류문 블류슌·
그리고··· 삭월탑주 루드릭·
기나긴 싸움이었다·
불꽃의 화신마저 집어삼킨 해적제 왕의 원혼은 9클래스의 마도사 넷이 힘을 합쳐서야 간신히 싸워볼 수 있 을 정도로 강력했으니까·
그 싸움은 무려 한 달이나 지속되 었고 마침내는··· 마도사들의 승 리로 전쟁은 끝을 맺었다·
-상처뿐인 싸움이었지·
흠칫!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풀레임 은 고개를 돌렸다·
이 기나긴 싸움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지켜보고 있던 그녀는 벌써 한 달째 입을 열지 않아서 입에서 단 내가 날 정도였다·
“누구···야···r
어린아이 였다·
은색 머리칼을 한 아이·
그는 백유설을 닮은 것 같기도 했 고 혹은 낯선 모르는 소년 같기도 했다·
-나? 은세십일월·
“에···? 네가? 아 아니· 당신 이?”
-응· 내 모습이 낯선가 봐?
“···조금은요·”
자신을 은세십일월이라 칭한 소년 은 전쟁이 끝난 자리를 바라보았다·
-끔찍하지? 아돌레비트가 완전히 멸망해 버리고 말았어·
“네····”
소년은 천천히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돌레비트의 멸망과 엘트먼 엘트 윈이 치명상을 입고서 스텔라에 꼼 짝없이 묶여 버린 것 불치병을 앓
고 있던 아류문 블류슌은 전투 도중 그 자리에서 사망해 버린 사실까지·
끔찍했다·
모두 이 세상을 위해 애쓰던 위대 한 대마법사였다· 그런데 이런 싸움 에서 허무하게 상처 입고 또 목숨까 지 잃게 되다니
-그뿐만이 아냐· 삭월의 거탑··· 그들의 존재를 사회가 알아버렸어·
“그게··· 문제가 되나요?”
-인간은 참 신기해· 삭월탑이 인간 들을 위해 그림자 뒤에서 얼마나 애 써왔는데 그 정체가 탄로 나자 그 런 건 이제 신경 쓰지 않아·
“어째서죠?”
-그들의 기술력과 자본이 너무 막 강하기 때문이야·
곧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인간들은 탐욕스럽다·
자신들을 지켜주던 존재가 너무나도 거대하다고 느꼈을 때는 감히 엄두조 차 내지 못했지만 그들이 상처입고 약해지자··· 도리어 그것을 물어뜯 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 한다·
“참혹해····”
-응· 삭월탑주 루드릭 또한 치명상
을 입었는지 사태를 수습하지 못하 는 모양이야·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요·”
-글쎄· 우리 세상은 멸망하게 되겠 ス]· 이건 정해진 사실이야·
흠칫· 그의 말투에서 이상한 점을 느낀 풀레임은 오싹한 심정으로 그 를 돌아보았다·
-너의 세상은 어떤데?
그의 말투는 꼭··· 풀레임이 다른 세상 다른 시간대에서 왔다는 사실 을 알고 있는 듯하지 않은가?
“어 어떻게···
-음? 흐ト하! 놀랐어? 나는 다 알 ス】! 내가 본 미래에 너는 없었거든·
“그 그렇군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풀레임 은 순간 번뜩이는 생각에 그를 다시 바라보았다·
-응? 왜?
“저 혹시···
그녀는 굳게 마음을 먹고서 힘겹게 입술을 떼었다·
“제가 원래의 시간대로 돌아갈 방 법이 있을까요···r
-···뭐?
그는 진심으로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복귀 주문이 있을 거 아냐?
“그 그게· 제가 그걸 까먹어서····”
-허· 이런 띨빵한 시간여행자를 다 보네· 복귀 주문을 까먹었다고?
끄덕·
풀레임이 말없이 고개만을 흔들자 은세십일월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글쎄· 네 복귀 주문이 키워드로 발동될 테니 나로서도 방법은 딱히 없는걸·
“역시 그렇군요····”
-그런데 어쩌다 주문을 잊어버린 거야?
“모르겠어요· 그냥 기억 속에서 주 문을 외우던 부분이 통째로 지워진 느낌이에요·”
-흐음? 흐음 흐음··· 흐음— ■ ロ ・ ロ Iコ ·-ロ «
은세십일월은 괴상한 소리를 내며 고민하는 듯했지만 영 해답이 나오 지 않는 모습이었다·
“아 그렇지!”
그러다 에이젤과 홍비연이 떠오른 풀레임은 황급히 그들에 대해 이야
기했다·
-너 말고 다른 시간여행자가 있었 다고?
“네· 그런데 저처럼 기억의 일부를 잃어버린 게 아니라 전부 다 잊어 버린 것 같아요·”
-그증 한 명이 얼마 전에 불타서 죽은 홍비연이라는 소녀고?
“네·,,
-그럼 잘됐네·
“···네?”
-홍비연은 아마 먼저 원래의 세계 로 돌아갔을 거야· 시간여행 트리거
중 하나가 사망이거든· 대신 무책임 한 일이ス 1· 사망을 통해 원래의 세 계로 돌아가면 이쪽 세상의 너 자신 은 정말로 죽게 되는 거니까·
“그럼 저도 죽으면···
희망이 생겼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주체할 수가 없 었다· 이렇게나 간단한 방법이라니·
그와 동시에 망설여졌다·
이쪽 세계의 풀레임 역시 또다른 세계선의 ‘나’라고 할 수 있다·
그녀를 죽임으로써 돌아가야만 한 다니· 그건··· 꽤 비참한 짓이다·
-역시 망설이는구나· 너는 착한 아 이야·
-맞아· 사실은 나도 그 방법은 추 천하지 않아· 이쪽 세계의 네가 불 쌍해서가 아니야· 너는··· 내가 모 르는 어떤 ‘운명’으로 얽혀 있는 것 같아·
“운명···?”
i응·
은세십일월은 은색빛 눈동자로 그 녀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지워진 너와 네 친구들의 기억·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 없어?
당연히 있다· 왜 없겠는가·
하지만 원인도 모르고 그런 걸 고 민해봐야 해결되는 일도 없었기에 지금껏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아마 너는 여기에서 죽는다고 해 서 돌아가지 못할 확률이 높아· 아 니면 죽음으로써 돌아간다고 해도 네가 원치 않는 결말이 발생하게 되 겠지·
“네에?”
-네가 사는 세계의 누군가가 너의 시간여행에 조작을 해뒀을 거야· 음 잘은 모르겠지만 이쪽 세상에서 발
생한 ‘어떤 사건’을 네 세상에 가져 가려는 게 틀림없어·
“어떤 사건이라면···
-가령 네 세계에서는 살아 있는 누군가가 이쪽에서는 죽었다든지·
그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두 명·
홍비연과 백유설·
직후 그녀의 마음은 점점 더 백유 설쪽으로 기울었다·
만약 은세십일월의 말이 사실이라 면 그게 정말이라면····
”회공시월···!”
손끝이 덜덜 떨린다·
그제야 자신이 왜 이쪽 시간대에 고립되었는지 어쩌다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그리고 이렇게나 쉽게 시 간여행을 할 수 있었는지까지·
모두 깨달을 수 있었다·
-뭔가를 알아냈구나?
“회공시월··· 그자가 백유설이 없 는 세상을 우리의 세계로 가져가려 고 해요·”
-흐음 나는 백유설이 누군진 모르 겠지만··· 그 회공시월이 직접 시 간에 조작을 가할 정도면 보통 인물 이 아닌 모양이네·
고개를 끄덕인다·
-네가 데려왔다는 친구들에게도 그 백유설이라는 아이는 소중했어?
“저만큼이나··· 소중하게 생각하 고 있을 거예요·”
-방법이 하나 떠올랐어·
“···! 뭐 뭔가요?”
아예 무릎까지 꿇고서 정중하게 앉 은 풀레임을 보며 은세십일월은 부 담스럽다는 듯 손사레를 쳤다·
-대단한 건 아니야· 그 에이젤이라 는 소녀한테 기억 충격을 주면 돼·
“기억 충격····”
-지금은 회공시월의 능력으로 기
억의 대부분이 가려져 있지만 그건 정말 희미한 장막으로 가리고 있을 뿐이야· 왜냐면 회공시월은 기억 조 작 능력이 없거든· 아마도 다른 신 월에게서 능력의 일부를 훔쳐 온 게 고작이겠지·
“아····”
전혀 알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그런 미숙한 능력으로 기억 전체 를 지운다? 절대 불가능하거든~ 너 의 경우에는 ‘복귀 주문’ 단 하나만 을 가려놓으면 되는 거라 두터운 기 억 장막으로 가려져 있을 거야· 떠 올리기 쉽지 않겠지·
“네·”
-하지만 에이젤과 홍비연은 달라· 얇은 기억의 장막으로 원래 세계에 서의 기억을 모두 뒤덮고 있을 거 야· 그래서 아주 약간의 충격만으로 도 쉽게 껍질을 벗겨낼 수 있겠지·
즈
-너는 이제부터 백유설의 행동을 흉내 낼 거야· 그의 모습을 따라 해 서 에이젤에게 원래 세계의 기억을 떠올리도록 만들어·
“어떻게 하면 되는 거죠···r
그는 어깨를 으쓱 올린다·
-나야 모르지· 나는 백유설을 모르 니까· 하지만 너는 가능해· 만약 에 이젤이 기억을 되찾는다면··· 네 세계에서 백유설이 사라지는 일은 없을 거야· 에이젤이 백유설을 기억 하고 있으니까·
풀레임은 입술을 꾹 다물고서 눈을 질끈 감았다·
현재의 에이젤은 마음의 문을 굳게 닫은 채 모두를 외면하고 있다·
동시에
모두에게 외면당하고 있다·
그녀의 마음을 뚫고서 백유설을 떠 올리게 만들어라·
‘가능할까?’
아니· 의문은 필요없다·
‘무조건 가능하게 만들어야 해·’
그녀가 결심한 듯 반짝이는 눈으로 고개를 들어 올리자 은세십일월은 반딧불이로 화해 사라지며 말했다·
-명심해· 기한은 이 세계의 에이젤 이 죽기 전까지야· 그녀가 사라지면 더 이상 복귀 주문을 떠올릴 방법은 존재하지 않아·
**···명심할게요·”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줘 간신 히 몸을 일으킨 풀레임은 뒤를 바라
보았다·
어느덧 장소는 스텔라 아카데미·
이번에는 회색의 의지가 아닌 오 롯이 그녀의 의지로 타입 슬립을 하 여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기다려 백유설·’
결코 네가 사라지도록 두지 않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