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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결석(4)
빙백산맥 백령고원 요새·
해발 고도 5000m에 달하는 눈 덮 인 산맥 위에 지어진 이 요새는 사 시사철 365일 어느 때나 눈보라가 몰아치는 것이 특징이다·
덕분에 냉기 속성의 마나가 풍부하 여 대부분의 군인이 냉기 계열 마법
을 익히고 있어 추위에 어느 정도 내성을 갖추고 있었다·
물론 냉기 마법을 익힌다고 해서 눈폭풍 같은 자연재해를 제어하거나 비켜 갈 수는 없는 법·
칼날보다도 날카롭고 차디찬 계절 에 견디기 위해 요새에는 강인한 정 신력과 뛰어난 마법과 체력을 가진 전사들만이 거주하고 있었다·
장장 156년·
빙백산맥에 서식하는 마수와 괴물 들이 중앙 대륙으로 내려오지 못하 도록 막아낸 세월·
단 한 번의 침입도 허용하지 않고
서 난공불락의 요새로서 자리잡은 지 도 벌써 2세기 가까이 되었거늘····
“···처참하군·”
바닥에 일반 스태프보다도 더욱 거 대한 특대형의 지팡이를 꽂아 넣은 설파람 대공은 침음을 흘리며 참혹 한 광경을 둘러보았다·
제4 푸른 바람 전진 기지·
북서쪽의 경계망을 굳건히 유지하 여 최전방에서 요새의 눈을 담당하 는 이곳이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
생존자 제로·
정기 보고가 올라오지 않아 급하게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내려온 병사
들 역시 실종되어 종적을 감췄다·
“장군···· 어떤 괴물이 이런 짓거 리를 할 수 있는 겁니까?”
사람은 물론 건축물이며 마법 병 기까지 날카로운 무언가에 썰려 나 간 듯 잘려 있는 모습은 두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하다·
인간의 마법으로는 이런 짓이 불가 능하니 틀림없이 괴물의 짓이다·
그러나 괴물이라고 생각해도 의문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 어디에도 괴물의 발자국이나 핏 자국 따위가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
설마 푸른 바람 전진 기지의 최정
예 부대가 괴수에게 티끌만큼의 상 처조차 입히지 못했다고는 상상할 수 없다· 분명 어딘가에 흔적이 남 아 있어야 정상일 텐데 어디를 둘 러보아도 군인들의 발자국뿐이다·
“마공학 수사대가 노력하고 있으니 조만간 답이 나오겠지·”
설파람 대공은 그리 말하면서도 상 황이 좋지 않음을 느꼈다·
수사대에게서 실시간으로 보고를 받고 있지만 여전히 진전이 없다는 내용뿐이 었으니 까·
세상이 그런 괴물이 존재하는 게 과연 가당키나 한가·
기지 하나를 초토화시켰으면서 그 어떤 흔적도 남지 않는다니·
“장군님 뒷일은 수사대와 수색대 에게 맡기고 우선은 복귀하셔야 될 것 같습니다· 북부 제1 기지에서 자 꾸만 정체불명의 형체가 감지된다고 보고가 올라오고 있습니다·”
“그래야겠지·”
설파람 대공은 지팡이를 손으로 꽉 쥐었다·
사실··· 이런 의문스러운 사건사 고가 터지기 시작한 게 이번이 처음 은 아니다·
괴수 도감에도 등록되지 않은 기형
적인 형체의 무언가가 이곳을 노크 하는 일이 최근 몇 년 동안 적지 않은 빈도로 일어나고는 했는데 그 것이 이렇게까지 큰 사건을 일으키 지는 않아서 여태 방치하고 있었다·
‘그분의 도움을 받는 수밖에는 없 는가···
요새로 복귀하며 설파람은 한숨을 내쉬었다· 언젠가부터 들려온 정체 불명의 목소리·
평소의 설파람이었다면 결코 그것 의 말을 듣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 누구라도 혹할 수밖에 없는 말로 그를 유혹했다·
‘너 동생이 아프구나·’
태어날 때부터 불치병에 시달리던 설파람 대공의 여동생 산새람·
그녀를 치료할 수 있다면 그 무엇 이든 대가로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 던 설파람이었기에 목소리의 유혹에 너무나도 쉽게 넘어가고 말았다·
‘내가 시키는 대로 하기만 하면 돼·’
아주 간단한 작업이었다·
그리 어렵지도 않았다·
정말로 너무 쉬운··· 그런 요구····
···내가 무얼 했더라?’
문득 설파람 대공은 자신의 기억 일부가 흐릿해져 있다는 사실을 깨 달았으나 더 이상의 추리는 불가능 했다· 무엇을 잊었는지를 모르니 생 각할 수도 없는 것이다·
“후우··· 쓸데없는 고민이군·”
안 그래도 사태가 혼란스러운데 이 런 잡념에 에너지를 쏟을 수는 없 다· 설파람은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떨쳐내고서 길을 서둘렀다·
한시라도 빨리 요새에서 발생하는 이 원인불명의 미스테리를 해결해야 만 한다·
* * *
그것은 아마도 백유설이 ‘점멸’을 사용할 수 있게 된 이래로 가장 어 려운 상대가 아니었을까·
여태까지의 백유설은 점멸을 통한 우월한 기동성으로 상대방의 마법을 회피하고 포인트를 캐치하여 약점을 정확하게 찔러넣는 방식으로 전투를 치러왔다·
여태까지는 이 전략에 제대로 먹혀 들지 않았던 상대가 없었다·
단 아주 극소수지만 기동성을 특 징으로 가진 몇몇 흑마인들을 상대 로는 약간 고전하긴 했지만··· 그 럼에도 백유설의 기동성을 따라올 수는 없었다·
그는 말 그대로 공간을 접어서 이 동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으 니까
그런데 그와 비슷한 능력을 지닌 상대를 만나게 된다면 어떨까·
– 호르르른···
저 흰색빛의 아지랑이 같은 존재가
바로 그러했다· 백유설처럼 점멸을 통해 자유자재로 이동하는 것은 아 니었으나 마치 렉 걸린 컴퓨터 그래 픽처럼 실체를 흩어버린 뒤 순식간 에 다른 장소로 늘어지는 것이다·
자신과 똑같은 기동성을 가진 존재 와의 싸움·
그건··· 막연히 ‘어렵다’라는 단 어만으로 표현하기에는 이상했다·
뭐랄까 조금 더 적극적인 단어가 필요했다·
이를테면··· ‘즐겁다’라든가·
서걱!
아지랑이가 흐느적거리며 흰색의 잔상을 휘두르자 백유설은 본능적 으로 고개를 비틀어서 피해냈다·
그러자 그가 서 있던 곳에서 불과 몇 센티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장 소에 거대한 칼자국이 스며들었다·
,이건····’
두근!
심장이 떨린다· 나와 비슷한 능력 을 가진 상대방과의 접전· 단 한 순 간이라도 방심하면··· 죽는다·
만약 상황이 불리했다면 이런 여유 로운 생각조차도 할 수 없었겠지·
쐐액-!
백유설이 청풍명월을 거칠게 휘두 르자 그 궤적 끝에 걸린 아지랑이의 일부가 찢겨져 나가 흩어졌다·
어떤 마법에도 상처 입지 않았던 아지랑이가 백유설의 검격에는 효과 를 보이는 것이다!
심지어 아지랑이의 일부가 흩어질 때마다 본체의 크기도 점차 작아지 며 그 능력이 약화되니 본디 소모 전에서 최약체의 모습을 보이던 백 유설이 이상하게도 소모전에서 유리 한 양상을 띠는 전투였다·
흐卜기야 단순히 어렵기만 하면 누가
즐겁다고 하겠는가·
어려우면서도 내가 유리해야 즐거 운 게 곧 한국인 게이머의 마인드가 아니 겠는가?
서걱!
마침내 아지랑이의 목을 베어낸 백 유설은 [천기일체]를 해제한 뒤 바 닥에 검을 꽂아넣고서 지탱했다·
오랜 시간 사용하지는 않았으나 그 반동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후우····”
아지랑이가 연기가 되어 허공에 완 전히 홑어지는 것을 확인한 백유설 은 이 장소가 도시에서 몇백 미터
정도 벗어난 위치라는 사실을 뒤늦 게 깨달았다·
워낙에 재빠른 존재와 싸우다 보니 자연스레 장소를 이동해 버린 것·
아지랑이가 처리된 것을 확인했는 지 저 멀리 마법 전사들이 우르르 몰려오는 것을 확인하고사 백유설은 직박구리 안경을 서둘러 썼다·
“어때· 분석에는 진전이 있어?”
잠시 뒤 들려오는 대답·
[에러 발생!]
[Error code: ???]
[상세 확인 결과 분석할 수 없는 차원의 코드입니다·]
역시나였다·
아예 직박구리 안경이 인지조차 하 지를 못하니 분석이고 뭐고 아무것 도 할 수가 없었던 것·
‘대체 정체가 뭐지···?
최소한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 것 은 확실하다· 평범한 몬스터가 아니 라는 의미· 게다가 상대와 검을 맞 대면서 느꼈던 기묘한 이질감이 자 꾸만 백유설을 찝찝하게 만들었다·
“이보시오 괜찮습니까?”
“그 괴인은 어떻게 됐소?”
“이런··· 주변이 완전히 초토화되 었군·”
마법 전사들은 혀를 차며 참상을 바라보았다· 차디찬 날씨에도 꿋꿋 하게 버티며 자라나던 겨울의 소나 무들이 모조리 작살 나 있던 것·
저것들 중 절반은 백유설이 잘라낸 것이었으나 그는 뻔뻔하게 말했다·
“모두 그놈 짓입니다·”
“저런 천하의 썩을 놈이었군···!”
“아주 수고했네· 마법이 전혀 통하
지 않아서 당혹스럽던 차였는데·”
“트칼란타의 수호대로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게 굉장히 자존심이 상하 지만 그래도 은인에게 보답은 해야 겠지· 따라오게·”
,,예·,,
무심코 그들을 따라가려던 백유설 은 무언가 꽤 마음에 걸리는 문장을 떠올렸다·
‘마범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고?’
아이테르 월드 온라인에서도 그런 형태의 몬스터가 단 하나 존재하지 않았던가?
마법 세계를 컨셉으로 잡아놓은 주
제에 마법 면역 99%라는 괴랄한 스텟을 보여주던 그 존재·
‘에이 설마··· 관계없겠지·’
흑마룡과 아지랑이는 약간 다르지 않던가· 흑마룡은 마법의 절대자로 서 모든 마법을 분석하고 역산하여 튕겨낸다는 설정이었는데 아지랑이 는 실체가 거의 존재하지 않아서 평 범한 마법으로 타격하지 못하던 것 이었으니까·
게다가 또 뜬금없이 흑마룡과 관계 있는 무언가가 여기에 나타날 이유 는 뭐란 말인가?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전혀 관계가
없다·
“흐음···
“왜 그러나?”
“아닙니다·”
그런데 왜일까·
이렇게 찝찝한 이유는·
’···조금만 더 시간을 두고 생각 해 봐야겠어·’
* * *
북부 빙백산맥·
백령고원 철벽 요새·
또각니
천황정팔월은 노란색 머리칼을 흩 날리며 우아하고 당당하게 정문을 통과하였다·
“누구셔?”
“몰라· 장군님이 통과시키라고····”
“설마 숨겨둔 연인?”
“고우시다····”
북부에서는 찾아보기도 힘든 아름 다운 여인이 나타나자 요새는 발칵 뒤집어졌는데 거기서 더욱 놀라운 점은 설파람 장군이 별다른 확인 절
차도 없이 그녀를 통과시키라고 명 령한 것!
‘후후 즐겁네···
그녀의 외모는 인간의 본능적인 욕 망을 자극하는 형태로 조각되어 있 어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눈을 마 주치는 것만으로도 욕망이 들끓는다·
사랑에 빠져서 상사병에 이르게 만 들었던 꽃서린의 [연정흡인지체]와 는 또 다른 오히려 그보다 한 수 위에 있는 능력·
상대를 자연스레 죽음에 이르게 하 는 것이 아닌 욕망을 이용하여 완 전히 자신의 노예로 만들어버리는
능력이었기에 굉장히 위험하다·
‘이 기분 아주 끝내줘〜!’
이렇게 얼굴을 당당히 드러내고 걷 는 게 얼마 만이던가·
애당초 ‘육체’라는 게 존재하지 않 는 천황정팔월이었기에 하나의 인간 에게 실체를 보이기 위해서는 어마 어마한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한다·
그녀에게 닿는 시선 하나마다 마나 가 천문학적으로 소모되었으므로 시 선이 많은 장소에서는 사용이 불가 능하다는 의미·
그렇기에 이런 인적이 드문 북부에 서나 실체를 드러내는 게 가능했다·
무엇보다도 백령고원 요새는 그녀 가 핵심 요충지로서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 생각이었기에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내도 큰 손해는 없었다·
이곳의 모두를 노예로 만들어버린 다면 다스리기도 쉬울 테니까·
대로를 거닐고 있자니 얼마 지나 지 않아 병사 수백 명이 우르르 몰 려 나와 양옆에 대열하여 지팡이를 바닥에 쿵!! 내려찍는다·
여러 명이 동시에 올리는 경례·
그 끝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내는 다름 아닌 설파람 대공이었다·
회백색 머리칼에 푸른 눈동자·
강렬한 인상을 지닌 사내였으나 어 딘지 모르게 고민이 많아 보이는 깊 은 눈빛· 살짝 우울해 보이지만 누 구보다도 강직한 정신력을 가진 북 부의 사나이 설파람·
“···오셨습니까·”
부하들이 보는 앞이었기에 천황정 팔월의 정체를 숨기기 위하여 목례 따위를 하지는 않는다·
그녀와 그는 어디까지나 동등한 입 장으로 남아 있어야만 했기에·
“응 좋은 곳이네·”
“직접 모습을 드러내시다니· 놀랐 습니다·”
“그래? 오늘부터는 꽤 자주 찾아올 거야·”
뒤에 숨어서 수작질만 하면서 지내 기에는 시대가 너무 빠르게 변하고 있다· 회공시월이 무슨 짓을 벌이기 전에 더 빠르게 행동해야만 했다·
“그렇습니까· 저로서는 환영입니다· スト 이쪽으로 드시지요·”
“고마워·”
설파람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요새 로 입장하던 천황정팔월은 퍼뜩 짜 증이 솟구쳤다·
쳇 시조 마법사 그 할배가 내린 저주만 아니었어도··· 스칼벤의 황
금 궁전에서 대우를 받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그러나 어쩔 수 있나·
지금까지 천 년 동안 잘 견뎌왔고 이제는 이렇게라도 모습을 드러낼 정도로 저주를 이겨내지 않았던가·
조만간이 다·
직접 모습을 드러내고서 아이테르 월드 위에 당당히 서는 날까지는 얼 마 남지 않았다·
‘회공시월··· 무슨 꿍꿍이를 벌이 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내가 볼 수 있는 이득만 챙긴 다음에 빠 질 거라구·’
설파람을 따라 요새에 입성하며 그 녀는 코웃음을 쳤다·
‘그때까지는 어디 마음대로 해봐·’
절대 그 재수 없는 놈의 뜻대로 상황이 흘러가도록 내버려 둘 생각 은 없다·
···그녀가 그리 생각하고 있을 무 렵 요새의 상공 수천 미터·
구름보다도 더 높은 장소에서·
회공시월은 천황정팔월을··· 아 니 그보다도 더 먼 장소를 바라보 고 있었다· 애당초 그는 그녀를 신 경조차 쓰고 있지 않았다·
“슬슬 시작이군·”
목적만을 간단히 확인한 회공시월 은 금세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천황정팔월은 과연 알고나 있을까·
자신이 이곳에 온 것부터가 이미 회공시월의 계획이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