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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담갈토이월(5)
화르륵 콰콰콰쾅!!
요란스레 울려 퍼지는 불꽃·
“저 미친년이!”
풀레임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야 빨리 따라와!”
그녀의 뒤로는 칠십여 명의 학생이 뒤따르고 있었는데 지금까지 홍비 연을 뒤쫓으며 모은 이들이었다·
재난 사태 제1수칙·
상황이 엿된 것 같으면 일단 사람 을 긁어 모아라!
그녀가 아는 한 자신이 집단을 제 어할 자신만 있다면 이것이 가장 최 선의 방법이었다·
“이쪽이에요!”
에이젤이 얼음으로 거대한 방벽을 세우자 그 위로 미끄럼틀처럼 학생 들이 하나둘 넘어왔다·
본래는 홍비연을 가장 먼저 뒤쫓으 려고 했던 풀레임이었으나 도중 도 중 고립된 학생들을 챙기는 바람에 상당히 늦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썩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다고 할 수 있었 다·
홍비연은 가는 길목마다 망령을 해 치우거나 혹은 철저하게 계산하여 망령이 없는 위치로 빙 돌아서 가고 는 했는데 그것은 곧 풀레임이 이 수많은 학생들을 안전한 위치로 이 끌 수 있는 이정표가 되어주었다·
“이 인간· 저쪽에는 망령들이 몰려
들 거야· 어서 반대로 가자고···「
“맞아! 이건 위험해·”
“자살행위야·”
풀레임이 불꽃을 향해 가려고 하자 몇몇 학생들이 불평하였다· 그도 그 럴 게 저 마법은 너무나도 눈부셔 서 이 근방의 모든 망령을 끌어모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망치겠다고?”
“도망치는 게 아니다·”
대답한 것은 ‘블라썸 트리오’의 멤 버 서랑이었다· 여태까지 풀레임을 졸졸 쫓아다니며 귀찮게 굴었던 그 는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저··· 위험을 피해서 우회하는 것뿐이야·”
“우회?”
“풀레임 양 너는 이 집단의 리더 야· 책임감을 가지고 행동해야만 흐H·”
서랑의 말에 몇몇 학생들이 동조하 였다· 엘프 뿐만 아니라 인간 학생 들도 마찬가지로·
그러자 풀레임은 코웃음을 쳤다·
“하 내가 여태 우회할 수 있었는 데 안 한 줄 알아? 너네 구하러 뛰 어들었을 때 위험하지 않았던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어? 아니잖아· 서랑 내가 널 구했을 때 뭐 하고
있었지?”
“망령에게 대적하고 있었다·”
“아니· 일방적으로 처맞고 있던 거 지· 내가 아니었으면 넌 진작에 죽 었어· 너도 알지?”
“그리고 거기 너· 내가 바위에 깔 리면서까지 구해줬는데 그러기야?”
이곳에 모인 학생들은 한 명 한 명이 모두 에이젤과 풀레임이 목숨 을 걸고 위험 속으로 달려들어 구출 해 낸 이들이다· 비록 그들을 구한 게 자신을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어 쨌든 풀레임이 목숨 걸고 지켜주었
다는 것은 사실이지 않겠는가·
“이번에도 마찬가지야· 난 지금까 지 너희에게 했던 것을 또 한 번 할 뿐이라고·”
“지금까지와는 상황이 많이 다르 다· 풀레임 양 냉정하게 생각하자 우리·”
“난 항상 냉정해·”
“네 가슴은 너무 뜨거워· 지나칠 정도로· 이건 누가 보더라도 자살이 라고밖에 볼 수 없어·”
서랑은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와 다정하게 웃으며 말했다·
“방공호에 거의 도착했어· 뒤에서
교수님들이 망령을 청소하면서 다가 오는 증이고· 우리끼리 모여서 기다 리기만 하면 안전은 보장된 거나 마 찬가지야·”
“풀레임 양 너는 충분히 잘해왔어· 이만큼이나 많은 학생들을 구해냈잖 아· 최고라고 칭찬해도 부족해· 인간 을 다시 보게 되었으니까·”
그의 말에 풀레임은 화사하게 웃으 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나는 최고야· 가슴이 차가우 면서 뜨겁기까지 하지·”
“그래? 다행이네· 판단이 섰구나·”
서랑이 잘됐다는 듯 손을 뻗으려고 하자 풀레임은 그것을 탁! 쳐냈다·
“응· 여기서 꺼져· 블라썸인지 블랙 홀인지 역겨운 네 친구들 데리고·”
“···뭐?”
“실망이다 서랑· 그래도 꽤 괜찮은 남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고작 거기까지밖에 되지 않는구나· 나한테 수작질했던 것도 진심이기는 했어?”
“그 그건 진심이었어!”
그는 다급히 말했다·
“네가 여기서 꺼지라고 하면 떠날 수는 있어· 그래도 내 마음이 거짓
이었다고 짓밟는 건 옳지 않아· 그 때 말했잖아 처음에는 아니었는데 나중에는 진심을 느끼게 되었다고·”
“···그래? 안타깝네·”
그녀는 미소지었다· 그러나 눈은 웃고있지 않았다· 생전 처음 보는 소녀의 어두운 미소에 서랑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네 그룻 정도로는 내 마음을 얻 기에 글렀다는 걸 모르는구나·”
“나는 그저 우리 모두의 안전을 생 각해서 계산한 거야· 이보다 더 좋 은 판단은 없어·”
“그딴 계산을 하니까 네 그릇이
거기까지밖에 안 된다는 거야·”
그녀는 뒤돌아 걸었다· 에이젤 역 시 풀레임을 뒤따르자 서랑의 눈치 를 보던 학생들 역시도 쫓아가기 시 작했다·
여전히 불꽃은 화려하게 터지고 있 었고 그곳을 향해 떠나는 풀레임의 등이 어찌나 크게 보이던지 서랑은 감히 그•녀를 향해 손을 뻗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마직으로 용기 를 내어 소리쳤다·
“말해줘! 네가 말하는 그릇이란 게 대체 뭐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 어!”
우뚝 걸음을 잠시 멈춘 풀레임은 고개만을 돌려 머리를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말했다·
“사람을 구하는 데에 계산을 하는 게 문제라는 거야· 이 겁쟁아·”
마치 누군가를 연상하는 듯 그렇게 말한 풀레임이 떠나가자 홀로 남게 된 서랑은 멍하니 그녀의 발자취를 지켜보았다·
여전히·
‘이해할 수 없어···
풀레임의 말은 서랑에게는 너무나 도 큰 과제였다·
* * *
시조 마법사 이후 천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지금까지 아이테르 대 륙에는 수많은 전쟁이 발생하였다·
이종족 간의 전쟁은 물론 국가와 종교 부족 사이의 다툼까지·
무수히 많은 싸움이 있었으나 그 중에서도 가장 무의미하고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대표적인 전쟁이라고 하면 역시 ‘죽은 자들의 3차 전쟁’ 이었다·
300년 전 네크로맨서가 세계 곳곳 에 큰 위세를 떨치고 있을 무렵·
신성국가의 턴 언데드 마법이 존재 하지 않았을 시절에는 네크로맨서가 세상을 거의 지배할 뻔했다·
수십만의 군대를 보내도 모조리 자 신의 수하로 만들어버리는 그들의 공포스러운 능력은 세상의 모든 종 족을 벌벌 떨게 만들었는데 죽여도 죽여도 적은 되살아나고 아군은 지 쳐 쓰러져 나가니 용기와 의지마저 도 상실될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다·
방금까지 등을 맞대고 싸우던 든든 한 아군이 순식간에 썩어 빠진 시체
가 되어 자신에게 칼을 들이밀면 그 누구라도 마음이 꺾일 것이다·
콰드득!
세계수의 뿌리가 하늘을 에워싸더 니 녹색빛의 커다란 그물망이 펼쳐 지며 지상을 향해 새하얀 빛을 쏘아 보냈다· 태양빛을 머금은 뒤 한 점 에 모아서 발사시키는 최상의 마법·
단일의 대상에게 큰 피해를 입히는 기술이었으나 꽃서린은 이것을 여 러 다발로 분산시켰다·
수십 수백 아니 수천 다발·
꽃서린은 그 모든 빛줄기를 섬세하 게 컨트롤하였다· 단 하나라도 궤적
이 빗나가는 순간 애꿎은 백성에게 닿을 수도 있었으니까·
‘크웃···!)
단순히 빛을 발사하는 형태라면 모 를까 태양빛을 굴곡시켜 반사하는 마법인 탓에 계산식이 더욱 복잡했 다·
그런 와중 백성들을 지켜가며 싸워 야 한다니· 무수히 많은 연산식이 교 차되며 뇌가 터져 나갈 것 같았으나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어서 버텼다·
주륵 핏줄기가 흘러내렸으나 고통 을 대가로 마법을 시전한 효과는 확 실했다·
“오 오오···
“하늘에서 빛이···!!”
마치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리는 수 천 가닥의 빛줄기가 요람 전역의 망 령들을 강타하여 소멸시킨 것이다!
하나하나에 7클래스의 위력을 지닌 그 무지막지한 마법에 엘프들이 바 닥에 무릎을 꿇고서 세계수를 향해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도망치세요 제발!’
그러나 그런 모습은 꽃서린의 가슴 을 답답하게 만들 뿐이었다· 저들을 대피시키기 위해 커다란 마법을 시 전했는데 그러질 못하니까·
이럴 때 도시의 수호자들이 나서서 백성들을 인도해야 하거늘 대부분 이 도망치고 없어서 암담하다·
하는 수 없이 꽃서린은 마법을 컨 트롤하면서 동시에 세계수와의 교감 을 한 번 더 시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일종의 텔레파시였다·
단일의 대상이 아닌 세계수에 뿌 리를 둔 모든 요정들에게 보내는 초 광역 범위의 텔레파시·
‘메시지를 보내는 건···
불가능하다·
그저 그들에게 의지를 심는 것밖에
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백성들이여·’
‘자리에서 일어나세요·’
‘그리고 뛰세요·’
‘모든 생명의 어머니가 당신들을 보호할 것입니다·’
‘믿으세요·’
훌렁·
“허윽···!”
순간 세상이 어두워지는 듯한 감각 과 함께 몸의 중심이 흔들렸다· 그 러나 그녀는 필사적으로 마법의 연 산을 유지하였다· 여기서 마법을 놓
아버리면 그 순간 대참사가 발생할 테니·
“하아 하아아···
텔레파시를 성공적으로 끝마치고 빛의 궤적으로 망령들을 소멸시킨 꽃서린은 자리에 주저앉아 가슴을 가다듬었다· 이 정도까지 했으면 망 령들이 계속 살아나더라도 어느 정 도 시간을 벌었을 터·
그녀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지팡이 로 땅을 지탱하여 간신히 일으켜 세 웠다· 이미 정신력은 너덜너덜했지 만 지금 당장 명상을 통해 마나를 회복하지 않으면 다음 상황에 대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이 정도면 버틸 만해····”
꽃서린은 백유설이 떠나기 전 자신 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저는 지금부터 담갈토이월의 몸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 충격적인 말을 듣고서 어찌나 놀랐던가· 역사 속 그 누구도 생각 하지 못했던 말도 안 되는 발상·
십이신월의 몸속으로 들어가겠다니·
‘말이 안 된다구요? 됩니다· 담갈
토이월의 입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 셨습니까? 그게 입구예요· 뭐 눈으 로 들어가도 상관은 없지만요· 이목 구비의 형태로 구멍만 뚫렸을 뿐 텅 비어 있는 공간이니까요·’
입구를 물어본 게 아니다· 꽃서린 이 그렇게 말하자 백유설은 씨익 웃 으며 답했다·
‘압니다·’
불가능한 무언가에 도전할 때 사 람들은 제각각의 방식으로 그 두려
움을 떨쳐낸다· 백유설은 그저 훌렁 웃어 넘겨버리는 것으로 그 공포를 가볍게 이겨내고는 했다·
항상 그랬듯이·
“지금쯤이면····”
꽃서린은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백색의 성 꼭대기에서 바라보는 전경은 시야가 탁 트여 있 어서 언제나 아름답다·
이곳에서 시야를 확대하면 죽은 거인의 땅을 바라보는 것은 일도 아 니었다·
그런데·
“··아?”
꽃서린의 시야에·
도저히 믿지 못할 광경이 들어왔 다·
“저게 뭐 야····”
그것은 평범한 사람의 형체를 가지 고 있었다· 하나의 얼굴과 두 개의 팔 두 개의 다리· 온몸이 갈색으로 칠해진 육체는 마치 진흙을 닮은 듯 했는데 양다리를 움직여 서서히 이 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런데·
평범한 인간과는 다른 점이 하나 더 있었다·
그것은 바로··· 구름에 닿을 정도 로 높디높은 키를 가지고 있다는 것·
···
바닥에 손을 짚자 진동이 울려왔다· 어지간한 대규모의 지진조차 세계수 가 모조리 그 충격파를 흡수하여 피 해가 오지 않는단 점을 생각하면 저 것의 한 걸음 한 걸음이 얼마나 무 거운지 감히 예상할 수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백유설의 계획은?
엘트먼의 봉인은?
모두 어떻게 되었는가?
천 년의 역사 속에서 단 한 번도 이런 적은 없었다·
왜 담갈토이월이 두 다리 쭉 뻗고 일어나 이곳을 향해 걸어오는가·
구워어어···!!
“윽···!,,
뻥 뚫려 있어 공허한 눈빛의 담갈 토이월이 입을 벌리자 기괴한 진동 이 울리며 하늘의 구름이 모조리 흩 어지고 말았다· 마치 고리의 형태로 휘어진 구름 그 아래를 걷는 거인·
그래 이제야 기억났다·
‘세상에 존재했던 모든 거인 중에 서도 가장 거대한 존재가 있었으니·’
‘거인의 통치자이자 대지의 지배スト·’
‘십이신월 담갈토이월(淡褐土二月)·’
꽃서린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자리 에 주저앉고 말았다·
고작해야 담갈토이월의 가호를 받 는 철리번조차 이길 수 없었다· 그 런데 저만한 덩치를 가진 담갈토이 월이 직접 이곳에 닿는다면····
세계수는 뿌리채로 뽑혀 영영 세 상에서 사라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