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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담갈토이월(1)
젤리엘의 질문은 여러모로 풀레임 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저런 질문을 던졌다는 것부터 이미 여태 까지 파다하게 퍼져 있던 소문을 모 조리 부정해 버리는 꼴이었으니까·
게다가 저 질문을 던지기 위해 마 음을 얼마나 단단히 먹어야 하는지
에 대해서도 잘 안다·
즉 젤리엘은 아직 백유설에게 생 각보다 많이 다가가지 못한 상태였 고 그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 못한 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런데··· 무슨 관계냐니? 그 질문 을 굳이 나한테 하는 이유가 뭐야?”
“방과 후에 계속 같이 다니길래···
그건 정말 듣던 증 뜬금없는 소리였 다· 풀레임이 알기로 백유설은 방과 후 항상 젤리엘과 어디론가 놀러 가 느라 학교에서 사라지고는 했으니까·
“뭔 소리야? 너랑 알콩달콩 데이트 라도 하는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야· 방과 후에 항상 바쁘다면서 어디론가 사라졌거든·”
“너랑 놀러 가는 게 아니었다고?”
“나는 여태 너랑 시간을 보내는 줄 알았어·”
“아닌데····”
즉 백유설은 별꽃나무에 와서도 단 하루도 빼먹지 않고 방과 후에 어디 론가 외출을 한다는 말이었는데····
‘얘는 또 어디를 싸돌아다녀?’
스텔라에 다니던 때부터 백유설이 방과 후 혹은 주말에 외출해 바삐 돌아다니는 것쯤은 진작 알았다·
다만 스텔라는 아이테르 대륙의 중 심지였기에 워프 흘 게이트와 비행 정 및 열차 노선이 전 대륙으로 뻗 어 나갔고 근방에 해결해야 할 사 건 사고가 끊이질 않아서 그랬다·
하지만 이곳은 세계수· 백유설이 방과 후 짧은 시간 동안 외출한다고 해서 어디 멀리 갈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세계수 내에서 많은 사건 사고가 벌어지나? 그것도 아닐 것이다· 원작 로판에서도 하늘꽃요 람의 이야기는 별다른 사건이 없어 서 참 루즈하고 재미없게 흘러가고 는 했었으니까·
‘아냐 그건 모르는 일이야·’
백유설이 지금 어디서 뭘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가 바쁘게 움직일 때 면 반드시 중요한 일이 있었다·
원작 로판이 너무나도 많이 비틀려 풀레임도 미래를 확신할 수 없는 상 황이지 않던가· 실제로 젤리엘이 저 렇게 쭈뼛거리며 말을 걸어온 것부 터가 애당초 말이 되지 않는다·
“뭐 바쁜가 보지·”
당장 젤리엘에게 해줄 말은 없었으 나 아무튼 풀레임은 백유설이 무언 가 목적을 가지고 뛰어다니는 중이라 는 사실을 알아낸 것으로 만족했다·
쿠구구궁!
“악 깜짝이야·”
대화 도중 갑작스레 바닥이 살짝 울려서 놀란 풀레임은 비틀거리다 벽을 짚었다· 지진은 아주 얕았던 것인지 금세 사그라들었다·
요즘 자꾸 왜 이러지?’
원작에서는 이런 적이 없었기에 자 꾸만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백유설 이 요즘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이유와 뭔가 관련이 있는 것은 틀림없어 보 이는데 그 원인을 알 수가 없었다·
···기다리면 이야기해 주겠지·’
그리고 다음 날·
출석을 부르는 과정에서 스텔라 생도 한 명이 결석을 하고 말았다·
“백유설? 백유설 생도? 자리에 없 니? 혹시 본 사람?”
“어라 방금까지 제 옆자리에 있었 는데요·”
“어디 갔니?”
“시계를 보더니 급히 뛰어나갔어요·”
교수는 혀를 찼으나 무어라 나무라 지는 않고서 당장 시간이 없었기에 곧바로 수업을 시작했다·
그 이후로도 백유설이 간혹 수업에 빠지거나 방과 후에 빛의 속도로 사라지는 일이 발생하자 슬슬 걱정 이 들기 시작했다·
진짜 큰일이라도 발생한 게 아닐까 하고·
‘돌아오면 물어보자·’
그녀는 그렇게 마음을 먹었으나 안타깝게도 그럴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백유설이 돌아오기도 전에 사건이 터지고 말았으므로·
* * *
요정의 왕국 ‘천령나무의 요람’은 총 일곱 개의 도시로 구성되어 있다· 세계수의 뿌리 근처에 지어진 도시 를 시작으로 서서히 상층부로 올라 가며 도시의 층이 나뉘는데 그증에 서도 엘프왕 꽃서린의 거처 백색의 성은 수도 하늘꽃요람에 위치한다·
백색의 성 아그네틱 룬의 공회당·
인간에게 도시를 통치하는 영주 혹 은 시장이 있다면 엘프들에게는 ‘나 무의 수호자’라는 직책이 존재한다·
그들은 서로 다른 층의 도시에 살 아가고 있기에 모두 모일 일이 극히
드물었으나 최근 세계수에서 발생 하는 재해로 인해 일곱 명의 수호자 가 모두 모이게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하이엘프의 장로회까지 참석하였으 니 가히 세계수에서도 가장 지고한 요정들이 모두 모였다고 해도 과언 이 아니었다·
“최근에 발생하는 지진의 원인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폐하·”
그런 그들 사이에서도 가장 상석에 앉은 꽃서린은 근심 어린 표정을 지 은 채 입술을 떼었다·
“담갈토이월의 태동이 거세지고 있 어요·”
“분명히 스텔라의 교장이 일부분 봉인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예· 하지만 그 힘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도 충고했지요· 백성들 이 대피하기에 충분한 시간입니다·”
처음에는 꽃서린도 상황을 지켜보 고자 했다· 태초의 세계수를 버리고 떠난다는 행위 자체부터가 세계수 와 엘프 사이의 ‘영성 교감,을 부정 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최악이다·
엘트먼 엘트윈이 예상했던 것보다
도 담갈토이월이 봉인을 더욱 빨리 깨뜨리고서 일어나려고 시도하는 것·
“마법사들을 다시 모을 수는 없는 겁니까?”
“봉인을 재차 시도하지 않는 이유 가 궁금하군·”
“쯧 애당초 봉인에 실패한 것부터 가 잘못이라고 봅니다만····”
몇몇 장로들이 대놓고 꽃서린의 잘 못을 힐책하였다·
“엘프왕의 그 막대한 권능을 사용 하여 세계수를 깨우십시오! 우리 요정들을 위해!”
“폐흐卜· 세계수의 힘이라면 틀림없
이 막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대가리에 뭐가 들어 있기는 한 건 지조차 의심스러운 발언을 하는 엘 프도 있었고 현실적이지도 못한 대 응방안을 내놓고서 빨리 어떻게든 해결하라고 보채는 엘프도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최고의 방안을 입에서 꺼내지는 않았다·
“···백성들을 모두 대피시켜야겠어 요· 상황이 완전히 종료될 때까지·”
우뚝·
소란이 멎어들었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놀라운 방 법을 엘프왕께서 꺼내셨기에?
천만에 말씀·
모두가 알고 있으나 그렇게 할 수 없어서 꺼내지 않았던 발언을 대놓 고 수면 위로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그럴 수는 없소·”
모두가 조용해진 와중 300세가 넘 는 최고령의 하이엘프 장로가 고개 를 들어 발언했다·
“폐흐}· 요정의 왕국이 왜 ‘요람’이 라 불리는지 아시오?”
“알고··· 있습니다·”
“천령나무의 요람은 요정의 고향이 자 영혼을 담는 요람· 요정은 죽어
서 세계수와 하나가 되고 태어날 때 세계수로부터 영혼을 부여받소· 우리 의 육신과 혼이 모두 세계수로부터 비롯되었는데 지금 우리가 살고자 이곳을 버리고 떠나자는 말이오?”
“버리자는 말이 아니에요! 안전이 확인되면 그때 다시 돌아와···
“그게 버리자는 말과 똑같다는 것 을 정녕 모르겠소? 엘프왕· 우리가 요람을 버리고 떠난 人卜이 모든 게 무너져 내리면··· 어떻게 책임지려 고 그러시오?”
“알아요·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거· 그래도 백성들이 살아남는다면 뭐든 해낼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나요?”
장로들은 고개를 저었다·
“세계수는 우리와 하나 된 몸으로 서 결코 떠날 수 없소·”
“저희도 같은 생각입니다·”
“도시 구름꽃요람은 피난령을 반 대하는 바입니다·”
“안개꽃요람 역시도 마찬가지·”
“세계수를 버린다는 것은 곧 나의 어머니를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 폐 하 그 의견은 부디 거둬주십시오!”
꽃서린은 입술을 꽉 깨물고서 고개 를 숙였다· 자신이 아무리 명령을
내려봐야 저들이 합심하여 거부하면 손 쓸 도리가 없다·
엘프왕의 모든 권력은 세계수와 소 통하는 능력으로부터 비롯된 것인데 세계수를 버리고 피난하자고 하니 누가 듣겠는가·
그렇게 제대로 된 타개책을 찾지 도 못한 채 회의는 종료되었고 꽃서 린은 착잡한 심정으로 돌아왔다·
“일이 잘 안 풀렸나 보죠?”
“···아 백유설·”
그곳에는 만전의 태세를 갖춘 백유 설이 찡그린 표정으로 미소를 지은 채 서 있었다·
“기다리셨나요?”
“혼자서 출발할 수는 없으니까요·”
“일이 조금 복잡해져서요····”
“뭐 그 꼰대···가 아니라 할아버지 들이 제대로 이야기를 들을 것 같지 는 않았거든요·”
꽃서린은 한숨을 푹 내쉬고서 그에 게 물었다·
“앞으로는 어떻게 되는 거죠?”
“아마 지진이 여기서 더 크게 발생 하지는 않을 겁니다· 교장 선생님의 예상대로 한 달 정도는 더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르죠·”
그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그녀의 표정이 일순간 밝아졌으나 백유설 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다만 다른 문제가 있겠죠·”
“다른 문제라면····”
“죽은 거인의 땅에 잠들어 있던 망 령들이 깨어나 세계수를 배회할 겁 니다· 그것들을 막아낼 병력이 필요 해요·”
도시 내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것은 막을 수 없다· 그렇기에 백성들을 모두 대피시키려고 했으나 역시나 불가능한 의견이었다· 고작 지진 때 문에 한 나라의 모든 백성을 움직인
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된다고 생각 하는 것이다·
그러나 도시에 출몰하는 망령을 막 아내는 건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 다· 이 모든 사건의 원인을 찾아내 뿌리를 뽑아내는 것만이 정답·
“저도 준비는 끝났습니다·”
“오늘 밤에 바로 출발하시는 건가 요?”
“원래는 조금 더 기다리려고 했는 데 더 늦어지면 안 될 것 같아서 요·”
백유설은 이미 꽃서린과 모든 이야 기를 끝마쳐 놓았다·
‘죽은 거인의 땅으로 직접 찾아가 서 담갈토이월의 태동을 멈추겠다·’
그 말에 꽃서린은 어떤 말꼬리도 물지 않았다· 의문은 생겼으나 표현 하지는 않았다· 그가 그렇게 말했다 면 틀림없이 방법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물론 혼자서 대뜸 뛰어들겠다고 말한 것도 아니었다·
백유설은 자신에게 6클래스 이상의 마법 기사 20명을 붙여달라고 요구 하였는데 그녀는 아주 흔쾌히 수락
하였다· 꽤 부담스러운 부탁이라고 생각했던 백유설 입장에서는 조금 놀라운 일이었으나 꽃서린에게는 별 것도 아닌 요구였다·
“기사들이 남쪽 성곽에서 대기중이 에요· 눈에 띄면 가십거리가 될 수 도 있어서 은밀하게 움직이라고 지 시해 두었어요·”
“좋네요·”
아공간 포켓에 알테리샤의 수제 아 이템을 챙겨 넣은 백유설은 전투용 배낭을 등에 걸쳤다·
쿠구구구궁!!
때마침 요란스레 울리는 진동·
백유설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창밖 을 바라보았다· 어느덧 해가 떨어지 고 초승달이 휘영청 떠올라 있었다·
“다녀올게요· 그 동안 세계수를 잘 부탁해요·”
“그게 저의 일인걸요·”
달빛을 등진 채 꽃서린을 향해 씨 익 미소 지은 백유설은 그대로 창밖 으로 폴짝 뛰어내려 빛이 되어 사라 졌다· 급히 창가로 달려가니 어느덧 백유설의 모습은 점이 되어 저 멀리 에 달려가고 있었다·
꾸욱!
주먹을 움켜쥐니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핏방울이 맺혔다·
하지만 고통은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재앙이 발생한 상황에서도 그에게 의지만 하고 있는 자신의 모 습이 한심스러운데··· 너무나도 고 마워서 머리가 뜨거워지는 아이러니 한 감정에 죄책감이 자꾸만 샘솟았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꽃서린은 자신의 지팡이를 챙겨서 뒤돌아 복도를 걸었다· 창문을 통해 새어 들어온 달빛이 복도에 젖어 새 하얗게 반사되었는데 그 사이를 걸 어가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여신을 연상케 하였으나 안타깝게도 누구도
그 모습을 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