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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바람에 드리운 그림자(6)
풍제국의 모든 궁전은 전설 혹은 신화 속에 등장했던 신비로운 동물 과 위인들의 이름을 본떠와서 넣는 다·
예를 들어 철후궁은 움직이지 않는 강철 석상을 남편으로 맞이하여 모 두에게 놀림 받았으나 석상을 정성
스럽게 내조하여 정말로 사람이 된 강철 장군 ‘철야타’의 아내를 상징 하는 것으로서 보통 왕비나 공주들 이 머무는 궁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젤리엘은 그런 것 따위는 전 혀 알지 못한다· 그저 이곳이 손님 을 대접하는 아주 호화로운 궁전이 겠거니 하고 생각하고 있을 뿐·
“풍가문의 막내 아들 풍하랑이라 고 합니다·”
깍두기처럼 생긴 저 소년을 처음 보았을 땐 참으로 딱딱하게도 생겼 다는 인상을 받았다· 표정도 딱딱하 고 근육도 딱딱하고·
“음! 나는···!”
“쉿· 선배님· 자기소개는 나중에·”
그러다 뒤에서 콧김을 팍팍 뿜어대 는 독철광이라는 소년을 보았을 땐 그 인상을 살짝 수정했다·
*···저 근육이 더 딱딱해 보이네·’
체력은 의자에 앉아서 업무를 볼 때 쓰러지지 않을 정도로만 관리하 는 젤리엘으로서는 저렇게까지 근육 을 단련하는 이들이 그저 미련해 보 일 뿐이었다·
“반가워요· 별구름 상회의 젤리엘 이라고 해요· 별 볼 일 없는 저를 이렇게까지 극진히 대접해 주어서
얼마나 영광인지 몰라요·”
평소와는 달리 윗사람을 만날 때의 젤리엘은 얼굴에 가짜 미소를 깔고 서 부드러운 목소리를 장전한다·
착한 척? 예의 바른 척?
하도 연습해서 지긋지긋할 정도·
“저희는 별 볼 일 없는 사람을 극 진히 대접하지 않습니다· 아가씨 이 쪽으로 앉으십시오·”
풍하랑의 안내에 따라 성인들이 사 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회 장의 상석으로 천천히 걸어가며 그 와 함께 온 스텔라의 생도들을 힐끗 바라보았다·
‘마유성 해원량··· 풀레임·’
독철광인지 뭔지 하는 소년은 데이 터에 전혀 없으니 제외·
남은 세 명은 전부 머릿속에 정보 가 어느 정도 쌓여 있는 인물들이었 다·
마유성· 전교 1등으로 스텔라에 입 학했으며 척 보아도 귀티가 흐르고 배운 집 자식이라는 게 눈에 띄었으 나 어느 가문인지는 미지수· 스텔라 의 특례를 받았다는 소문도 있음·
해원량· 만월탑주의 후계자로서 전 교 2등으로 입학· 마유성의 미친 재 능을 최근 따라잡고 있으며 다속성
을 부리는 데에 다재다능·
풀레임· 고아 출신이지만 빛이나 식물 등 이종족이 다룰 수 있는 특 별한 속성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본래 마법 실력 또한 굉장히 뛰어 남·
그리고····
백유설과 한때 연인 관계로 지냈다 는 기록이 남아 있음·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이야·’
그녀는 다른 곳을 바라보려고 해 도 자꾸만 풀레임에게 시선이 돌아 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건 풀레임 또한 마찬가지였다·
‘저 미친년이 젤리엘이구만?’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
하지만 원작 로판 ‘불행한 공녀님 을 사랑하지 마세요’에서 지긋지긋 할 정도로 데여봤기에 그 인상과 성 격이 뚜렷하게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다·
에이젤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 을 정도로 끝까지 괴롭혔던 싸이코·
그것이 바로 젤리엘이었으니까·
자리에 착석한 젤리엘은 부드럽게 웃으며 마유성과 해원량 그리고 풀 레임에게 한 번씩 시선을 두었다·
“친구분들을 데려오셨군요·”
여】· 실례했습니다· 하지만 제 친구 들 또한 스텔라의 S클래스 생도로서 이 자리가 틀림없이 좋은 만남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예· 맞는 말씀이세요·”
스텔라의 S클래스는 상회의 입장에 서도 한 번씩 안면을 터놓을 필요가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젤리엘은 이 자리가 아주 살짝이지만 마음에 들었다·
마유성과 해원량은 한 번쯤 만나보 고 싶었던 인물들이기도 했고 무엇 보다 풀레임··· 항상 신경 쓰고 있
던 여자를 직접 볼 수 있게 되었으 니까
‘뭐 뭐야? 왜 자꾸 꼬라봐?’
젤리엘이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서 스캔하듯이 풀레임의 두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자 그녀는 살짝 당황하 여 표정을 와락 구겼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표정 관 리가 되지 않는 평범한 인상의 그녀 를 보며 젤리엘은 어림잡아 풀레임 의 성향을 파악하였다·
*···저런 느낌이 이상형인 건가·’
표정도 쉴 새 없이 뒤죽박죽으로 바뀌고 전혀 얌전하지 못한 채 자
꾸만 입이 근질거리는 듯 무언가 쓸 데없는 말을 내뱉는다·
그건 완전 젤리엘과 반대되는 성 격·
아니 그 전에 이해할 수 없는 성 격이기도 했다·
‘저런 천박한 성격으로··· 정말로 백유설과 연인 관계였다고?’
키도 작고 머리카락도 짧고 체형 도 완전 유아에 가까운데 도대체 어디의 무얼 봐서 매력이 있다는 걸 까·
차라리 어른스럽고 아름다운 하이 엘프인 자신이 더욱····
내가 무슨 생각을·’
이런 생각 자체가 어른스럽지 못하 다·
젤리엘은 눈을 감고서 심호흡을 한 뒤 풀레임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천사의 핏줄을 물려받았다면서요?”
“아닌데요?”
젤리엘이 내민 손을 맞잡으니 꽈 악 들어오는 힘이 심상치 않다·
운동을 하지 않았다지만 썩어도 엘 프라는 것일까· 그 신체 능력이 인 간에 비해 월등하다·
하지만 풀레임 또한 근력으로는 어 디 가서 빠지라 하면 서러울 정도의 장사였으니· 어렸을 땐 동네 팔씨름 대회에 나가서 성인 남자들을 죄다 패대기치고 다녔을 정도로 근육에는 자신 있어 고작 공붓벌레 샌님에게 악력으로 밀릴 생각은 없다·
꽈아아아악!!
풀레임과 젤리엘의 손등에 새빨갛 게 핏줄이 솟아오르고 서로의 얼굴 에서 식은땀이 흘러나오기 시작할 무렵 풍하랑이 뒤늦게 끼어들어서 상황을 제지하였다·
“아무리 반갑더라도 풍제국에서는
악수를 그런 식으로 나누지 않습니 다·”
두 소녀의 팔이 떼어내며 풍하랑이 말했다·
“자신의 반대쪽 어깨를 주먹으로 세 번 두드리고 목례하는 것으로 예의를 차리지요·”
풍하랑의 시범을 보면서도 풀레임 은 그러든 말든 뒤로 물러나 의자에 털썩 엉덩이를 붙였고 젤리엘은 화 사하게 미소 지으며 그 동작을 어색 하게 따라 한 뒤 물러났다·
“거참· 여자들 신경전 무섭구만·”
마유성과 해원량은 둘의 기 싸움을
보면서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는 데 눈치 없게도 독철광이 한마디를 툭 내뱉자 풍하랑이 무시무시한 표 정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뭐··· 내가 틀린 말 한 것도 아 니고· 왜 다들 나한테만 그러냐·”
독철광이 그리 말한 뒤 얌전히 자 리에 앉자 해원량은 드디어 본론을 꺼낼 수 있었다·
“한 번은 꼭 보고 싶었는데 이 자 리에서 보게 되어 영광입니다· 부탁 이 하나 있다고 들었는데 스텔라의 생도이자 만월탑주의 후계자 혹은 동갑내기로서 저희가 들어드릴 수 있는 부탁이라면 얼마든지 발 벗고
나설 테니 부담 없이 말씀해 주시지 요·”
“···그렇습니까?”
해원량의 말에 젤리엘은 열이 팍팍 올랐던 머리를 식히고서 생각했다·
사실 저들에게 할 부탁이라고는 아 무것도 없다· 그냥 정말 백유설의 얼굴을 보기 위해 잠깐 들렀다가 어 쩔 수 없이 묶이게 된 것이니까·
그러나 그 대상이 저들이라면 또 이야기가 달라진다·
“사실··· 제가 기존에 생각했던 부탁과는 조금 다른 아주 사소한 부탁이 될 수도 있습니다만· 괜찮을
까요?”
“사소한 부탁이라도 얼마든지요·”
젤리엘의 조심스러운 말에 해원량 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꾸하자 그 녀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번 학기에 별꽃나무 마법학교와 스텔라 아카데미 사이에서 교환학생 이 프로젝트가 있을 예정이에요·”
“알고 있습니다·”
이런 부탁을 풀레임이 보는 앞에서 하는 게 상당히 거북했으나 어쩔 수 없다· 지금밖에는 기회가 없다·
‘정보에 따르면 저 마유성이라는 소년이 백유설과 친하다고 했어·’
시종일관 싱글벙글 웃으며 가만히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저 신비로운 소년은 진심으로 누군가와 친하게 지내는 모습을 거의 보이지 않았는데 유일하게 가깝게 지내는 극소수의 인물이 존재하기는 했다·
그중 한 명이 백유설·
“혹시 이번 교환학생 때··· 스텔 라의 백유설 생도에게 별꽃나무에 와달라고 설득해 주실 수 있을까 요?”
그녀가 조심스럽게 꺼낸 이야기에 백유설이라는 이름이 난데없이 툭 튀어나오자 세 명의 소년과 한 명의
소녀는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배 백유설 말씀이십니까?”
풍하랑은 말을 더듬으면서까지 되 물었고 젤리엘은 확인사살을 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아요·”
“···어째서입니까?”
“별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그냥 학 교에서 보고 싶어서····”
아마 젤리엘을 아는 주변 인물들이 지금의 그녀를 봤다면 경악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속마음을 전혀 숨기지 못하고 내뱉
다가 말꼬리를 흐리는 것은 젤리엘 이 가장 멍청하다고 생각하는 행위 중 하나였으니까·
그녀가 당황하고 있음을 눈치챈 해 원량은 빠르게 거들었다·
“그렇군요· 백유설 생도는 확실히 별구름 상회의 입장에서도 만나보고 싶은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아 네 맞아요· 상회의 입장에 서 그래서 만나보고 싶어요·”
자신이 무슨 말을 내뱉고 어떻게 횡설수설을 하고 있는지 과연 알기 나 할까·
너무 급작스러운 상황에서 하고 싶
었던 부탁을 급하게 내뱉은 바람에 젤리엘은 스스로 적잖게 당황하였 고 그것을 전혀 수습하지 못하였다·
‘쟤 왜 저래?’
풀레임은 눈을 가늘게 뜨고서 젤리 엘을 바라보았다· 생긴 건 분명 원 작 소설대로 싸가지 없게 생겼는데 성격이 들었던 것과는 전혀 다르다·
‘뭔가 느낌이 좀···
상대방을 지옥으로 떨어뜨리기 위 해서라면 무슨 지독한 짓이든 서슴 지 않고 하는 악귀가 아니라 그저 한 명의 평범한··· 사랑에 빠진 소 녀 같은 분위기지 않은가·
‘쟤 원래 저래? 진짜로?’
백유설이 젤리엘과 만난 적이 있다 는 이야기는 들어봐서 알고는 있다 만 그렇다고는 쳐도 분위기가 너무 너무너무 다르다·
‘대체 저 싸이코한테 무슨 짓을 저 질러놓은 거야?’
이제는 원작 로판 등장인물들의 성 격마저도 의심해야 할 정도로 모든 것들을 비틀어 버리고 있으니 과연 이걸 좋아해야 할지 싫어해야 할지·
···좋은 일이겠지?’
평민이 만나기에는 까마득히 높은 최상류층에 위치한 젤리엘을 도대체
무슨 수로 어떻게 개인적으로 만났 는지 그리고 저 성격을 어떻게 바 로잡았는지는 모르다·
하지만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녀는 비록 원작 로판에서 에이젤 을 지독하게 괴롭히던 권력자의 위 치였지만 만약 아군으로 바뀌게 될 경우 든든한 조력자가 될 테니·
그런데 뭘까·
기쁘기는커녕 뭔가 불편하고 불안 하기만 한 이 기분은·
“어렵지 않은 부탁이네·”
불쑥 이야기를 꺼낸 사람은 지금까 지 잠자코 있던 마유성이었다·
“사실 백유설한테 얘기는 몇 번 들 었는데 예전부터 별꽃나무 교환학 생에 관심을 가지더라고·”
“···그런가요?”
“뭐? 정말?”
젤리엘과 풀레임이 동시에 되묻자 마유성은 살짝 의자를 뒤로 물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으응· 진짜야· 난 거짓말 안 해·”
그 말에 젤리엘은 생각이 복잡해진 듯한 표정이 되었으나 애써 티 내 지 않고서 미소를 지었다·
“그건··· 다행이네요·”
네? 다행인가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또다시 쓸데없는 말을 내뱉었다·
오늘의 나는 자꾸만 왜 이러는 걸 까· 멍청한 자기 자신에게 자괴감마 저 일어날 정도였다·
젤리엘은 애써 뜨겁게 달아오르는 머리를 식히고서 이번에는 해원량 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부탁을 드려 도 될까요? 이건 단순한 부탁이 아 니라 의뢰이기 때문에 넉넉하게 사 례금을 드릴 예정이에요·”
“···무슨 부탁이십니까?”
이번에는 방금과는 다른 분위기였 기에 해원량과 풍하랑이 표정을 굳 히고서 답하자 젤리엘이 천천히 입 술을 떼었다·
“사람을 찾고 싶어요· 이 대륙 어 디에도 없는 아주 특별한 사람의 행방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