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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기억(2)
알피지 게임을 하다 보면 보스전 을 시작하기 전에 사전작업을 하는 일은 상당히 흔하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는 ‘도핑’과 ‘버 프’라고 할 수 있었는데 상대하기 버거운 보스 몬스터를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준비 과정
이었다·
어떤 게임에서는 단 한 명이 솔로 레이드를 가는 데에 수십 명이 모여 서 버프를 걸어주고 최고급 요리와 약을 준비해서 도핑을 돕는 등 준비 과정이 상당히 길었는데 다행이라 고 해야 할까 아이테르 월드에는 그 러한 과정이 적었다·
아이테르 월드 온라인에서의 도핑 은 아주 간단한 물약을 마시거나 거 기에 더해 식사를 하는 것으로 컨디 션을 높이는 게 전부였다·
미리 버프를 걸어두고 전투에 임하 는 등 여타의 알피지와는 상당히 차 별화된 부분이었다·
마법사들이 전투에 들어가서 준비 해야 되는 것은 오로지 캐스트 매직 단 하나뿐이었고 그들은 오롯이 마 법에만 집중하면 그만이었다·
‘캐릭터 백유설’이라고 해서 다를 것은 없었다· 백유설은 게임을 플레 이하며 단 한 번도 사전준비라는 것 을 해본 적이 없다·
“〇으··”
—ロ •
그러나 지금 백유설에게는 사전준 비가 반드시 필요해졌다·
검 한 자루 들고서 분연히 일어나 그 상대가 드래곤이든 최강의 마법 사든 전혀 두렵지 않던 백유설이었
으나 지금은 싸우기 전에 명상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처지 가 된 것이다·
가장 먼저 [태령신공]·
마력누설지체를 강화하여 체내의 마나 순환율을 급격히 높이는 것으 로 공격력을 폭발적으로 증가시키는 이 기술은 최소 10초 이상의 명상 이 필요했는데 거기에 더해 [초집 중]을 사용하기 위해 최소 1분 이상 명상을 할 필요가 있었다·
사실 1분도 스텔라에 복귀하자마자 하루 종일 수행에 열중한 덕분에 많 이 줄어든 것이다·
처음 이 스킬을 재현하기까지 거의 10분 가까이 시간이 필요했으니 말 이다·
참 신기한 일이다·
철리번을 눈앞에 둔 일촉즉발의 상 황에서는 사전준비 없이 태령신공과 초집중이 동시에 발동되었는데 왜 지금은 안 되는가·
그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며 똑같이 재현하려고 해도 도저히 되지를 않 는다· 실전과 연습은 이렇게나 큰 차이가 있단 말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옆에서 빤히
쳐다보고 있는 저 단발머리의 주인 공이 문제인 걸까·
아무래도 이게 맞는 것 같다·
풀레임이 범인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집중력이 이렇게 까지 차이 날 리가 없다·
그녀는 약 서른 걸음 떨어진 장소 에 다소곳하게 무릎을 꿇고 앉아 이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는데 시 선을 떼지도 않은 채 움직이지도 않 고서 저러고 있으니 남의 눈을 신경 쓰지 않는 백유설로서도 상당히 부
담스러웠다·
“···야·”
하는 수 없이 집중에 실패한 백유 설이 말을 걸자 풀레임이 눈을 동그 랗게 떴다·
“어 응? 나 혹시 방해됐냐?”
맞다고 대답하려던 백유설이었으나 자기가 먼저 죄책감에 찔렸는지 당 황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또 그 러기도 묘하다·
“아니 뭐 그런 건 아닌데····”
“좀 떨어져 있을까?”
“어·,,
그러자 정말로 스무 걸을 떨어져서 또다시 무릎을 꿇고 앉는다·
같은 상황의 반복·
시선이 부담스러운 것은 여전했기 에 초집중 상태로의 전환이 상당히 버거웠다·
“저기··· 말 걸어도 돼?”
“···이미 걸었잖아· 뭔데·”
“아니 좀 쉬었다 하는 게 어떻냐 고·”
“얼마나 했다고 벌써 쉬어·”
“지금 몇 시게?”
«··?”
병실에서 깨어난 직후 훈련장으로 곧장 달려와서 초집중을 수행한 뒤 이한월에게 돌아가 복귀 신고를 뒤 늦게 하고서 기숙사로 돌아가 취침·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훈련장으로 곧장 나와서 초집중을 수행하기 시작한 지 어언 몇 시간·
“점심 먹을 시간이냐?”
“아니· 기숙사 돌아가야 돼·”
,,뭐? 왜·”
“열 시까지 안 돌아오면 사감이 지 랄하잖아·”
“···열 시인데 벌써 돌아가?”
풀레임은 손가락으로 훈련장 구석 의 시계를 가리켰다·
오후 9시 48분·
사감의 지랄까지 앞으로 12분·
“엥···?”
뭘까·
분명 초집중의 수행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시 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너 밥도 안 먹고 그러고 있잖아·
그러다 진짜 쓰러지면 어떡하려고 그래?”
“아니··· 시간이 벌써 이만큼이나 지났다고?”
“몰랐어?”
“전혀·”
백유설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허탈한 표정으로 시계를 보다가 문득 풀레 임에게 고개를 돌렸다·
분명 수행을 시작하기 직전에도 있 었던 것 같다· 초집중 모드에 들어 갈 때마다 그녀의 존재를 까맣게 잊 어버리고는 했지만 명상이 풀릴 때 면 항상 그 존재감이 느껴지고는 했
는데····
“그럼 너 계속 거기에 있던 거냐?”
“왜? 아까 말했던 거· 뭐야· 리그 오브 스피릿에 참가하라고?”
“맞아·,,
“···내일 해도 되잖아· 굳이 황금 같은 주말을 하루 종일 허비할 필요 가 있었어?”
이건 진심으로 황당하고 어이가 없 어서 그렇게 물었거늘 풀레임은 아 까와 표정 변화 없이 그렇게 대답할 뿐이었다·
“글쎄· 딱히 시간 낭비는 아니었 어·”
“···그러냐·”
“응· 네가 그러는 모습을 또 얼마 나 볼 수 있을지도 모르고· 너 요새 너무 위험천만해·”
“내가 뭘····”
“아아아〜 근데 이제는 진짜 돌아 가야겠다· 사감한테 욕 처먹어가면 서 여기에 있을 생각은 없거든·”
그리 말한 풀레임은 자리에서 일어 나 몸을 부르르 떨며 기지개를 켜더 니 혼자서 훈련장을 빠져나갔다· 백 유설은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리그 오브 스피릿···
최근에 사정은 들었다·
황태자 스칼벤에 의하여 어쩔 수 없이 강제로 참가하게 된 이후 팀 변경을 위해 멤버를 모집하는 중이 라고 했던가·
에이젤과 마유성을 어찌저찌 꼬셔 서 현재 인원은 세 명· 백유설까지 참가하면 네 명이 된다·
리그 오브 스피릿의 최소 팀 결정 조건은 다섯 명· 안 그래도 인원 부 족에 허덕이고 있을 테니 풀레임이 일요일 내내 이런 재미없는 장소에
남아서 사람 한 명이라도 더 구해보 겠답시고 지극정성을 들인 이유를 알겠다·
“어쩔 수 없나·”
리그 오브 스피릿에는 최대한 간섭 하지 않으려고 했던 백유설이다·
그가 ‘리오스’를 싫어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가 이유가 있다·
첫 번째 인간이 다섯 명이나 모이 면 반드시 한 명은 쓰레기다·
어느 만화 등장인물의 명대사처럼 그는 팀 게임에 신물이 나 있는 상 태였고 일대일 대전이 그에게는 더 잘 맞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그 쓰레기가 바로 백유설 본인이었다·
일대일에서는 최상위 랭커 자리를 굳건히 유지할 만큼 백유설의 개인 컨트롤은 분명히 뛰어난 편이었다·
그러나 팀 게임에서의 백유설은 달 랐다·
팀원과의 소통 부재·
혼자서 게임을 하려고 드는 버릇 때문에 그는 언제나 전투에 참여하 지 않고 개인행동을 했고 그 덕분 에 여러 번 캐리를 하고는 했으나 트롤을 더 자주 하는 편이었다·
협력보다는 개인 활동이 더 익숙했
던 백유설에게 팀 게임은 그야말로 쥐약이었던 것·
하지만 이번에는 어떨까·
여전히 협력 활동에 자신이 없는 백유설이었지만··· 팀원이 풀레임 에이젤 마유성이라면 이야기가 다 르다· 그들과 협력할 자신이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저 세 명의 주인공들은 협력 따위 를 하지 않아도 좋을 정도로 사기적 인 개인 능력치를 보유하고 있었기 에 그렇다·
협력하는 다른 팀원에 비해 개인 활동 위주로 움직이는 풀레임 팀이
불리한 면이 있을 수도 있겠으나 그러한 단점마저도 커버하는 게 바 로 저들의 우월한 피지컬·
‘으음· 대충 참가해서 숟가락만 얹 으면 되겠지·’
풀레임이 저렇게까지 나오는 마당 에 거절하는 것도 미안하다·
또 그녀는 고향을 공유할 수 있는 유일한··· 친구이기도 했고·
“으음 차라리 잘됐네·”
연습하던 초집중을 실전에서 써볼 기회가 필요했었는데 리그 오브 스 피릿이라면 훌륭한 연습장이 되어줄 것이다·
* * *
모르프란 숲·
아돌레비트 붉은 마탑 수호 점령 지·
오로지 모르프란 숲을 관리하기 위 해 세워진 드높고 삭막한 마탑을 바라보며 홍비연은 붉은 입술을 혓 바닥으로 촉촉하게 물들였다·
‘직접 와보는 건 처음이네·’
이곳은 10년 전 멸문한 모르프 대 공가의 마지막 남은 유산이자 흔적
으로 강력한 흑마력에 물들어버린 바람에 아돌레비트 왕가에서 주기적 으로 정화작업을 도맡아서 하고 있 다·
‘딱히 좋은 느낌은 안 드네·’
흑마력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이 장소에 는 흑마력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산바람·
공기는 맑고 여기저기 산새 지저 귀는 소리가 들려온다·
도토리를 숨기던 다람쥐와 눈이 마 주쳤으나 겁을 지레 먹고 나무 위로 숨어버린다·
흑마력에 물들어서 매년 정화를 해 야 하는 것치고는···
이상하리만치 평화롭다·
“오셨습니까 홍비연 공주님· 정화 대 신성 연방 의식술사 카이젠입니 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정화작업은 주로 왕가의 첫 번째 공주 홍시화의 담당이었으나 어째 서인지 이번에는 홍비연 공주가 참 여하게 되어 여론이 술렁이고 있었 다·
그것이 그녀의 눈에 띄지는 않았으 나 저들의 표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바로 알 수 있었다·
‘나를 꺼려하는군·’
홍비연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이런 취급받는 거 상당히 오랜만 이다· 백유설을 만난 이후로는 왕궁 내에서 자신의 입지가 탄탄해져서 자신에게 이런 취급을 할 수 있는 자들이 거의 없어졌기 때문이다·
나와 연줄이 있는 자는··· 역시 나 아무도 없고·’
모르프란 정화작업은 오르칸 공작 가의 주도하에 극비리에 진행되는 탓에 이곳에는 홍시화 파벌의 귀족 마법사들이 모여있었다·
붉은 마탑에 들어선 홍비연은 아주
오랜만에 향수를 느꼈다·
어린 시절 궁전에서 느끼던·
그 싸늘하고 날카로운 분위기·
마탑의 꼭대기에 도착하니 온통 창 문으로 이루어진 옥상이 그녀를 반 겨주었다·
이곳에는 마땅히 가구라고 할 만한 물건이 존재하지 않았다·
벽면 전체는 창문으로 이루어졌고 그 위에 붉은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 는데 불꽃의 마법이라기에는 썩 불 길한 주문이 적혀 있어 상당히 불쾌 한 기분만 들었다·
그리고 그런 창문을 등진 채 서
있는 노인 한 명·
붉은 고깔모자를 쓴 그 노인은 가 느다란 눈을 뜨고서 홍비연과 눈을 마주하였다·
“···메이지 태리번·”
“어서 오십시오 공주님· 오래간만 에 뵙습니다·”
“예··· 오랜만이군요·”
“어린 공주님이 손가락 끝에 불꽃 을 피워올린 시절이 바로 엊그제 같 은데 벌써 이렇게나 아름답게 자라 셨군요· 허허····”
저건 결코 칭찬이 아니다·
메이지 태리번·
한때 아돌레비트 왕가의 수석 마법 사로서 공주들에게 불꽃 마법을 가 르치던 이가 바로 태리번이었는더1 그는 다른 두 공주에게는 다정다감 하고 친절했으나 홍비연에게만큼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제대로 된 가르침을 주기는커녕 매 번 구박에 재능 하나 믿고 그따위로 하면 안 된다는 둥 마법을 다루는 꼬라지를 보니 나중에 폭주할 수도 있겠다는 둥 온갖 폭언을 일삼아서 어린 시절의 홍비연의 마음을 갈기 갈기 찢어놓은 장본인 증 한 명이었 다·
뚜벅
태리번은 허허 웃으며 홍비연을 향 해 천천히 다가왔다·
움찔 저도 모르게 반 발자국 뒷걸 음질을 친 홍비연은 식은땀을 흘리 며 입술을 깨물었다·
“어이구 그렇게 반응하시면 이 노 인네··· 마음이 많이 상한답니다·”
“···성격이 많이 변했군요 태리 번· 이제 와서 인자한 할아버지 흉 내라고 낼 셈입니까?”
“세상에 변치 않는 것은 없답니다 공주님· 저 또한 한낱 미물로서 자 연의 법칙을 따라 변화하고 있을 뿐
이지요·”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아요 태 리번· 그따위 역겨운 가면은 지긋지 긋하니까 그만두시는 게 어떤가요?”
“허허 이해합니다· 어린 시절의 공 주님께 제가 너무 가혹했지요· 하지 만 하나만큼은 꼭 알아주셨으면 좋 겠습니다· 저는 공주님을 위해서 그 랬을 뿐입니다·”
“···소름 끼치네요·”
그녀는 그렇게 일축한 뒤 뒤돌아 대기하던 정화술사들에게 말했다·
“쓸데없는 허례허식은 됐습니다· 곧바로 정화의식에 들어가고 싶은
데 준비는 모두 끝났습니까?”
예 공주님· 그런데 하나 말씀드려 도 되겠습니까?”
“하세요·”
“정화의식에 들어가기에 앞서 공 주님께서 왕가의 문양으로 ‘화령진’ 을 가동해 주셔야 합니다만····”
말끝을 흐린다·
이유는 뻔하다·
이전까지 화령진을 가동해왔던 술 자는 홍시화로서 그녀는 7클래스의 마법사였으니까·
그에 비해 흥비연은 고작해야 4클
래스의 마법人上·
열일곱의 나이에 저 성취도를 이뤄 낸 것은 대단하나 가문의 마법을 혼자서 부담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부 족하다·
“할 수 있습니다·”
“으음 정말이십니까?”
귀족들이 영 미덥지 못하다는 표정 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뭐어··· 실패한다고 해서 큰일이 나는 건 아니니까요· 여차하면 홍시 화 공주님을 불러와도 되니··· 일 단은 진행해 보도록 하지요·”
말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저들은 홍비연을 전혀 신뢰하고 있 지 않았다· 애초에 정화의식의 준비 를 철저하게 하지 않는다는 점만 봐 서도 그녀가 화령진 가동에 실패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모양이었 다·
“그러시죠 그럼·”
그러나 홍비연은 그들의 그런 반응 에 별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이제는 일일이 짜증 내고 울컥하 며 반응하는 것도 지긋지긋하다·
‘간단해· 보여주면 되는 거잖아·’
홍비연이라는 사람을·
홍비연이라는 마법사를·
홍비연이라는 공주를·
있는 그대로 저들에게 보여서 증명 하기만 하면 된다·
‘지금의 내게는 아주 쉬운 일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