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
50· 고결한 영혼(11)
소야는 벙찐 얼굴로 백유설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애썼다·
‘누구를 죽여달라고?’
틀림없이 철리번이라고 했다·
흑마도왕에게 도전하였고 패배하 였으나 보잘것없는 한목숨을 부지하
겠답시며 도망친 겁쟁이 흑마인· 지 금은 ‘배반자’로서 그 행방이 묘연 하다고 알고 있는데····
“철리번? 철리번이라고 했니?”
“응· 왜? 무서워?”
“하··· 너 말이야 인간이라 뭘 모르나 본데····”
그녀는 머리카락을 목 뒤로 쓸어넘 기며 말했다·
“철리번은 흑마 사회에서도 최악의 범죄 スト야· 그 목을 흑마도왕에게 바 치기만 해도 어마어마한 포상을 받 을 수 있는데 왜 여태 사냥한 사람 이 없겠어?”
철리번이 흑마도왕에게 도전할 정 도로 강해서· 그리고 그 행방이 수 년째 묘연해서·
“그자가 행방불명된 지도 벌써 수 년째· 나도 몇 번 찾아본 적은 있는 데 철리번의 사냥은 불가능····”
“구질구질하게 혓바닥만 기네·”
“···뭐?”
대화가 길어져서 좋을 건 없었기 에 백유설은 그녀의 변명을 단칼에 잘라버리고서 말을 이었다·
“내가 그런 사소한 것도 고려하지 않고서 제안할 거라고 생각해? 철리 번의 행방은 알고 있어· 그리고 네
가 그자를 이길 수 없다는 것도 알 고는 있지·”
소야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는 철리번을 이길 수 없다·
그건 명확한 사실이었다· 애당초 현존하는 흑마인 중에서 그를 이길 수 있는 자가 얼마나 있을까· 아마 흑마도왕을 제외하고서는··· 그 누 구라도 불가능할 것이다·
하여 소야는 이 제안을 거절하려 고 했다· 백유설이 말하는 ‘신령의 심장을 완벽히 홉수하는 법’이 아무 리 탐나더라도 목숨을 걸 필요까지
는 없었으니까·
그렇기에 백유설은 그녀가 혹할만 한 조건을 내걸어야만 했다·
“네가 정면에서 싸운다고 철리번을 죽일 수는 없어·”
“하지만 승리할 방법은 있지·”
“뭐? 같은 말이잖아· 지금 말장난 이나 하자는 거야?”
“다른 말이야· 너야말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제야 뒤늦게 백유설의 말을 이해 한 소야의 머리가 번쩍 뜨였다·
정면에서 전투를 벌여 죽일 수는 없지만··· 승리하는 방법·
“어차피 철리번의 목을 가져오기만 하면 되는데 굳이 정면승부를 할 필요가 있을까?”
“그렇다는 건····
”놈에게는 아주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어· 나는 그것을 알고 있고· 어때 거래할래?”
“···철리번에게 약점이 있다고? 설령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내가 그것을 어떻게 믿지?”
여기서 어떻게 더 설득해야 할까· 무엇을 증거로 제시해야 할까·
사실은 위의 모든 말이 전부 다 거짓말인데 말이다·
소야는 위험하다·
신령의 심장을 훔칠 수 있을 정도 로 아주 특별한 능력을 가진 것은 물론 단순 신체 능력만 따져도 제 대로 된 승부를 나누기도 전에 백유 설이 패배할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잎하넬을 위협하는 저 여자를 가만히 놔둘 수는 없는 노릇·
‘이이제이(以夷制夷)라는 거지·’
저 여자는 철리번을 이길 수 없다·
하늘이 무너지고 세상이 다시 시작 돼도 그 사실은 변치 않는다·
원작 아이테르 월드 온라인에서도 실제로 소야와 철리번의 전투씬은 몇 번 나온 적 있었는데 모두 다 철리번의 압승이었다·
그 이유인즉슨 철리번의 능력이 소야의 상위호환이었기 때문·
즉 여기서 그녀를 철리번에게 보 내려는 것은 소야를 손대지 않고 편 안히 처리하기 위함이었다·
‘여기서 저 여자를 혹하게 하려면 역시····’
또 다른 거짓말로 소야의 머리를
뒤흔들어놓으려던 백유설은 문득 느 껴지는 묘한 감각에 눈을 가늘게 떴 다· 그녀의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고 있자니 무언가가 느껴졌다·
[반신반의 긍정적 설렘 약의심 경계 우유부단·]
다양한 감정의 파편이 보인다· 이 것은 틀림없는 연홍춘삼월의 능력·
*···생각보다 긍정적이잖아?’
의심이 짙을 줄 알았더니 벌써부 터 이쪽으로 반쯤 넘어왔다·
‘그렇다면 차라리 어설픈 거짓말 보다는····’
목을 가다듬은 백유설은 무심한 목
소리로 툭 내뱉었다·
“의심이 많군· 제안은 취소다· 신령 의 심장을 뽑아갈 정도로 강단 있는 네 명성을 믿고서 제안했던 것인데 지금 보니 철리번과 다를 바 없는 겁쟁이였군· 다른 자에게 부탁하겠 다·”
그리 말한 뒤 백유설이 구두를 집 어 들려는 순간 기척도 없이 다가 온 소야의 분신체가 그의 팔목을 붙 잡았다·
탁!
···
움직임을 느끼지도 못해서 굉장히
놀랐으나 그녀의 반응을 대충 예상 했었기에 미리 알고 있던 척 당황하 지 않고서 태연자약하게 말했다·
“뭐 생각에 변화라도 생겼나?”
“···들어보기나 할게· 그 약점이 라는 게 대체 뭔지· 내가 정말로 놈 의 목을 딸 수 있는지· 그리고 네 가 심장의 흡수를 도울 수 있는지 도·”
넘어왔군·
소야의 반응에 백유설은 입꼬리를 눈에 띄지 않게 올리고서 고개를 끄 덕였다·
“그래 천천히 이야기 나눠보자고·”
* * *
“···후우!”
분신체가 돌아오는 감각과 동시에 수많은 기억이 소야의 머릿속으로 전송되었다·
천천히 눈을 뜬 그녀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흔들고서 백유설의 말을 곱 씹었다·
‘철리번의 약점이라···
그는 정말로 오랜 시간 철리번을 추격해온 것인ス 1 그 어떤 흑마인보
다도 그에 대해 자세히 파악하고 있 었다·
세계 유일무이 담갈토이월의 계약 자이자 흑마도왕에게 도전했음에도 살아남은 도망자·
‘흑마인도 아닌 마법사가 왜 놈을 쫓는진 모르겠지만···
백유설은 자신이 직접 나서서 전투 를 돕겠다고 말할 정도로 철리번 사 냥에 진심이었다·
‘왜?’
이미 백유설은 모든 게 의문투성이 다· 정말로 마법사가 맞는 것인ス 애당초 인간이기는 한 건ス]·
아무것도 알 수 있는 게 없다·
다만 그것은 아무래도 그리 중요치 않아 보인다·
백유설의 목적과 자신의 목적이 이 번만큼은 맞아떨어진다는 사실·
그것만 생각하면 된다·
“쏘야~ 이제야 돌아온 거야?”
뒤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소야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 다· 그곳에는 유난히도 노출도가 높 은 복장을 입은 여인이 서 있었는 데 저게 전신을 가리는 ‘로브라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여인은 연녹색의 로브를 펄럭이며 우아하게 걸어와 소야에게 속삭이 둣 말했다·
“토아가 시켜서 왔어· 최근에 너 허튼짓하는 것 같은데··· 죽여 버 리겠다고 손을 벼르던데?”
“···연녹탑주가 내게 그랬어? 흐卜 참· 어이가 없네·”
소야는 코웃음을 쳤으나 그의 말 을 쉬이 넘길 수는 없었다·
토아 레그론·
9클래스의 마법사이자 연녹탑주인 그의 스승이 다름 아닌 ‘순혈 마녀
의 왕’이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순혈 마녀’의 혈통을 물려받은 이는 극히 드물다·
소야 또한 하프 마녀로서 오히려 인간 혹은 혹마인에 가까운 존재였 으니까·
“이 세상에 남은 마녀는 너를 포함 해서 이제 손가락에 꼽을 정도야· 네가 아무리 하프라지만 얼마 남지 도 않은 마녀를 자신의 손으로 직접 죽이고 싶어 하지는 않으셔· 그러니 까 조금은 조용히 지내는 게 어때?”
마녀가 제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결국 마녀 사냥꾼과 마법사들에 의 해 거의 멸족이 되고 말았다·
그러니 눈에 띄는 행동을 했다가는 순식간에 표적이 될 수밖에 없을 터· 토아 레그론의 스승은 그것을 원치 않는다고 했다·
“하 마법사 주제에··· 건방져·”
“흐웅 그래?”
“내 일에 신경 끄고 갈 길이나 가 지그래? 죽여 버리고 싶어질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어머나· 무서워라〜”
여인은 과장되게 놀란 표정을 짓더 니 손을 살랑살랑 흔들며 뒤돌아 걸
어나갔다·
“안 그래도 가려고 했어~ 요새 스 승님이 눈독 들이는 소년이 한 명 있거든· 백유설이라고 했던가?”
“뭐?,,
“응? 들어본 적 있어?”
여인의 말에 소야는 순간 반응했다 가 멈칫 고개를 저었다·
“흐웅· 아무튼 나는 이만 가 볼 테 니까 조! 용! 히! 지내도록 해! 그 럼 안녕〜!”
그녀가 나간 뒤 소야는 혀로 입술 을 핥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 할망구가 관심을 가진단 말이 지···?
속세에 대한 일은 마녀를 제외하고 서 그 누구에게도 관심을 갖지 않 던 그녀가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것 만으로도 이미 백유설이 평범하지 않다는 증거·
‘확실히 써먹을 만하겠어·’
철리번의 목·
그리고 신령의 심장·
그 모든 것들이 굴러떨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그녀의 미소가 한 층 더 짙어졌다·
* * *
우드득!
“커헉···!”
양팔로 흑마인의 목뼈를 꺾어서 부 러뜨린다· 물론 이런다고 흑마인은 죽지 않는다·
정확하게 심장을 관통하여 터뜨려 그 흑마력의 원천을 파괴해야만 완 전히 생명이 정지한다·
푸슉!
마치 파리채로 모기를 잡는 듯 무
신경한 눈으로 흑마인 한 명의 심장 을 맨손으로 뽑아낸 철리번은 귀찮 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조용히 처리하긴 했군·”
최대한 흑마력이 바깥으로 새어나 가지 않도록 신경 썼다· 힘을 개방 하지 않고서 싸우는 게 생각보다 어 렵다는 사실을 이번에 깨달았다·
“그럼 이번에는 조용히 넘어갈 수 있겠지?”
손을 탁탁 털어내며 철리번이 그리 중얼거리 スト·
“누구 마음대로?”
허공에서 웬 청년의 목소리가 메아
리처럼 울려 퍼졌다·
어쩐지 익숙하다 못해 짜증스럽기 까지 한 그 목소리에 철리번의 표정 이 와락 구겨졌다·
“···뭐야 너?”
느긋하게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 려다보니·
마치 허공에서 투명한 계단을 걷 듯 다가오고 있는 아류문과 눈을 마주칠 수 있었다·
“찾느라 고생했어· 그 버러지들이 너에게 시비를 걸지 않았더라면 아 마 조금 더 힘들었을지도 모르겠 네····”
나른하고 느긋한 목소리·
만사가 귀찮다는 듯 듣는 사람마 저 졸리게 만드는 그 묘한 음색은 철리번을 짜증 나게만 만들었다·
“하아···· 이번에는 그냥 지나가 게 두면 안 되겠나? 여기서 정말 싸우려고? 내가 할 말은 아니다만 이 세계수가 완전히 무너지고 무고 한 인명피해가 있을 텐데?”
“상관없어요·”
이번에는 다른 사람이 대답했다·
재빠르게 뒤를 돌아보니 그곳에는 온몸을 흑색의 로브로 가린 여인이 우아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엘프왕·’
단번에 직감할 수 있었다·
저토록 특별하고 생생한 세계수의 기운은 아무나 품을 수 없다·
설령 세계수조차도 저 여자보다는 순수하지 않을 것이다·
“세계수는 다치지 않을 테니까요·”
“···이거는 좀 곤란한데· 엘프왕 께서 여기에는 무슨 일로 행차하셨 을까? 설마 나 잡으려고?”
“그런 하찮은 이유는 아니니까 걱 정하지 마세요· ’아주 중요한 볼일’ 이 있던 와중 당신은 잠깐 처리해
야 하는 잡일에 불과해요·”
꽃서린은 진심으로 기분이 좋지 않 아 보였다· 그녀가 말하는 ‘아주 중 요한 일’이 대체 뭔지는 몰라도 나 름대로 전설로 이름을 날린 철리번 자신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은 꽤 충 격적이 었다·
“내가 이런 취급을 받을 짬밥은 아 닌데 말이지····”
어떻게 해야 할까·
철리번은 앞뒤로 자신을 가로막은 엘프왕과 협회장의 기운을 감각에 각인하였다·
한 명은 9클래스의 마법사·
또 한 명은 세계수의 축복을 받은 하이엘프·
철리번이 제아무리 흑마도왕에게 도전했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지 고는 있다지만 고전을 면하지는 못 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싸움을 피할 수는 없 겠지·’
거기까지 생각하니 오히려 즐거워 졌다· 철리번은 입꼬리를 천천히 찢 어 올리며 기괴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순수하디 순수한 ‘즐거움’이 담겨 있는 미소·
”그래··· 마침 심심했는데 잘됐
어 둘 다 덤벼봐·”
그는 양 손목을 우두둑 꺾었다·
“대신 둘 중 하나는 목을 내놓을 각오를 하는 게 좋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