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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고결한 영혼(6)
천년신령 잎하넬의 정원·
이곳에 처음 왔을 때가 학기 초 반이었던가· 그때는 아직 마력누설 지체에 대한 이해도 제대로 하지 못한 상태였었다·
마력누설지체라· 그렇게 생각하니 그녀에게는 가장 큰 도움을 받은
셈이 아닐까·
다른 무엇도 아닌 내 신체의 비 밀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덕분에 시한부를 극복하였으니까·
굳이 잎하넬이 아니더라도 방법은 많았다지만··· 솔직히 스텔라를 졸 압하기 전에 내가 해낼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 그녀 에게는 항상 감사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표현할 기회는 없 었다· 그녀와의 만남은 짧았고 깨 어난 후에도 계속 잠을 자느라 제 대로 대화를 나누지도 못했으니까·
그렇게 거리가 멀어지니 마음도
멀어졌고··· 솔직히 여태까지는 그 녀를 완전히 잊고 살았다·
핑계를 굳이 대자면 정말로 바빴 다· 바쁘다는 말로도 부족할 정도 로 여름방학 내내 쉴 새 없이 아 이테르를 누비고 다녔고 심지어는 시간여행까지 다녀왔단 말이다·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잎하 넬은 이제 막 깨어나서 굉장히 연 약하고 취약했으니 내가 관심을 가 지고서 자주 살펴봤어야 했다·
원작 게임과는 완전히 다른 이야 기 전개가 되었으니까·
“마나의 농도가··· 점점 가라앉고
있어요·”
꽃서린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 였다· 보통의 일반인은 느낄 수 없 겠지만 마나에 민감한 우리는 아 주 어렴풋이 무언가 문제가 생겼 다는 점을 감지할 수 있었다·
잎하넬의 정원으로 향하는 길목 은 보통의 사람이 다니기 위해 닦 인 길목이 아니라 완전히 험난한 지형이었기에 나 혼자 다닐 때는 굉장히 힘들었으나 꽃서린과 함께 하니 그런 부담은 적었다·
스르륵···
그녀가 거닐면 길이 없는 곳에도
길이 생겼고 시야를 가리는 나뭇 잎이 저절로 앞을 터주었으며 하 늘에서 꽃잎이 내려와 발판을 만 들어주었다·
누군가는 저 광경을 보고 예쁘다 신비롭다 아름답다 등의 감상평을 내릴수도 있겠다만 솔직히 그런 것보다는 그냥 편리해서 좋았다·
나도 저런 능력 하나 있으면 참 편할 텐데····
어느덧 목적지에 도착한 꽃서린 이 발걸음을 멈추자 그녀를 돕기 위해 모여들던 꽃잎과 나뭇가지들 이 스르륵 뒤로 물러났다·
“···느낌이 좋지 않아요·”
정원의 입구는 세계수의 나뭇가 지로 칭칭 둘러져 있어 보통의 엘 프는 눈치채지 못한다·
하지만 꽃서린의 손짓 한 번에 넝 쿨이 걷어지더니 오래되어 이끼 낀 비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것이 바 로 정원의 입구·
나는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서 정원으로 통하는 열쇠를 꺼냈다·
“그건····”
“예전에 선물로 받았죠·”
“열쇠를 선물로 받았다구요···?”
,,예·,,
선물을 준 사람이 콘스텔라티오 프로젝트이긴 하다만 어쨌든 거짓 말은 아니니까·
달칵!
[신령 잎하넬의 정원으로 향하는 문이 열립니다!]
열쇠를 비석에 갖다 대니 스르르 옆으로 밀리며 새하얀 빛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잎하넬이 머무는 장소는 현실의 3차원에서 약간 벗
어난 장소였기에 저런 식으로 공 간 자체가 살짝 왜곡되어 있었다·
꽃서린과 눈을 한번 마주친 나는 먼저 심호흡을 하고서 내부로 발을 뻗었다·
우웅!!
공간이 뒤집히는 익숙한 감각이 재빠르게 스쳐 지나간 뒤 눈을 뜨 니··· 온통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 는 정원 내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윽!”
순간 현기증이 일어서 재빠르게 아공간에 손을 뻗어 마스크를 꺼 냈다· 현실의 방독면을 흉내내어
만든 이것은 독가스 대신 탁한 마 나를 막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내 신체가 강렬한 색을 품은 마력 에 굉장히 취약하다는 사실을 알고 서 제작한 것인데 설마 잎하넬의 정원에서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이럴 수가···「
뒤이어 정원으로 들어온 꽃서린 은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정원 내 부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본디 초록색의 아우라로 가득하여 아름답고 신비로운 장소였던 잎하 넬의 정원은··· 보랏빛의 강력한 탁기에 오염되어 있었다·
방독면을 썼음에도 제대로 숨을 쉬는 게 힘들 정도로· 이거 아무래 도 알테리샤에게 부탁해서 성능을 더 업그레이드 해야겠다·
“괜찮으신가요?”
“예··· 뭐 그럭저럭· 오히려 제 가 묻고 싶은데요·”
“네?”
꽃서린의 안색이 창백하다·
입술을 파르르 떨고 동공이 멈출 생각을 하지 않은 채 흔들리는 것 만 봐도 그녀의 상태가 좋지 않음 을 알 수 있었다·
흑마의 오염도 때문에?
아니 그럴 리가·
세계수로부터 가호를 받은 그녀 가 고작 이 정도의 흑마력으로 피 해를 입을 리는 없다·
꽃서린은 지금··· 잎하넬의 정원 에서 이런 흑마력이 느껴진다는 믿을 수 없는 상황에 패닉을 해버 린 것이다·
놀랍게도 연홍춘삼월의 가호 덕 분일까 그것을 겉으로 거의 티내 지 않아서 하마터면 나도 모르는 채로 지나칠 뻔했다·
“진정하세요·”
“아···
나는 그녀의 손을 양손으로 꽉 붙들고서 말했다·
“아직 내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 는지 모르잖아요·”
그녀는 입술을 꾹 닫고서 흔들리 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더니 이 내 눈을 질끈 감았다·
“네· 어서 가봐요·”
흑마에 오염되었다고는 해도 잎하 넬의 정원이 무언가 바뀌거나 하지 는 않았다·
예전에는 여기에서 식물 형태의 몬스터를 사냥했었는데 그건 전부 잎하넬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홑 뿌려놓은 골렘과도 같은 것들이었 기 때문에 지금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때보다 지금이 더욱 던 전 같은데 몬스터가 하나도 없다 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조심스레 꽃서린과 한참을 걸어 서 정원의 끝에 도달하니 커다란 바위벽이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예전에는 없던 것인데··· 꽃서린 이 익숙하다는 듯 다가가는 것을 보아하니 내가 왔을 때만 없었던
모양이다·
“이건··· 잎하넬이 외부인을 들 이기 싫을 때 쳐두는 결계에요·”
“결계요?”
평범한 바위처럼 보이는데·
다행스럽게도 꽃서린이 비밀번호 를 아는 모양인지 결계에 손바닥 을 대고서 주문을 외웠다·
우웅!!
허공에 붉은색 푸른색 노란색의 원형 마법진이 파동처럼 퍼져 나가 며 바위벽이 달칵대는 소리가 들리 더니 요란스러운 굉음과 함께 옆으 로 밀려나기 시작하였다·
이윽고 바람이 뺨을 스치며·
달빛이 쏟아져 내렸다·
다시 봐도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뻥 뚫린 하늘에는 지구의 달보다 더욱 커다란 달이 세 개나 걸려 있 었고 하늘을 가로지르는 은색빛깔 은하수가 꽃밭을 풍만하게 채워주고 있었으니까·
달빛이 무너져 내리는 그 드넓은 꽃밭 아래에 그녀가 있었다·
천년신령 잎하넬·
영원히 멈춰 버린 시간 속에 갇혀
있다가 다시금 심장을 얻어 새로운 삶을 부여받은 그녀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굳어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그때 그 자세와 같았다· 마치 기도를 올리는 듯 양 손을 모은 채 무릎을 꿇은 소녀의 형상· 당시에는 여인이었으나 겉 외형이 어려진 그녀는 무언가 슬 픈 듯 표정을 찡그리고 있었다·
“잎하넬····”
본디 달빛보다 차갑고 시린 푸른 색을 띠었던 잎하넬은 현재 보랏 빛으로 물들어 있었는데 누군가가 작정하고 그녀를 흑마력으로 물들
인 것으로 보였다·
꽃서린은 착잡한 심경으로 입을 틀어막았으나 나는 오히려 냉정하 게 머리를 굴렸다·
‘왜?’
갑자기 왜 잎하넬을 흑색으로 물 들였는가·
내가 알기로··· 지금으로부터 대 략 1년쯤 뒤에 ‘흑마성전’이 벌어 질 예정이다·
그때 잎하넬이 때마침 흑마력으 로 물드는데··· 대체 왜 누가 그 녀를 물들였는지에 대해서는 밝혀 지지 않았다·
다만 플레이어들이 추측하기로는 꽃서린을 흑마력으로 세뇌하여 흑 마성전에서의 장기말로 써먹으려는 게 아니냐는 가설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직 흑마성전이 한참이나 남아 있으며··· 애당초 그 것이 실제로 벌어질지도 의문이다·
왜냐하면··· 흑마성전은 마유성이 타락하는 루트에서만 벌어지는 사 건이었기 때문이다·
“이건··· 말이 되지 않아요·”
“···네?”
그때 옆에서 꽃서린이 고개를 절 레절레 저으며 입술을 떼었다·
“신령을 흑색으로 물들이는 건 불 가능해요·”
“이 정도로 농도가 짙으면··· 잎하 넬도 버티기 힘들었을지도 몰라요· 게다가 지금은 약해졌으니까요·”
“그런 뜻이 아니에요·”
“네?”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잎하넬은 신령이에요· 신령으로 승천하는 순간··· 세상 그 무엇에 도 타락하지 않는 ‘고결한 영혼’의 자격을 갖춘단 말이에요·”
“아·”
순간 누군가 내 머리를 망치로 두드린 느낌이었다·
여태까지 전혀 품지 않았던 의문 이다· 고결한 영혼은 흑마에 타락 하지 않으며 신령의 영혼은 언제 나 고결하다·
이 단순명료한 전제를 내가 항상 빼먹고 생각했던 이유는 뻔하게 도··· 잎하넬이 타락하는 루트가 생각 외로 ‘원작 게임,에서는 굉장 히 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 원인을 모른다·
그저 그런 스토리가 존재했기에 플레이했고 에피소드가 시키는 대
로 던전으로 향하여 잎하넬과 싸 우는 일만을 반복했다·
무엇이 그녀를 그리 만들었는지 생각하려는 시도조차 않은 채·
‘고결한 영혼을 대체 무슨 수로 타 락시켰는가· 과연 그럴 만한 능력을 가진 빌런이 있었는가·’
모든 게 의문투성이다·
“하아····”
원인도 모르고 범인도 모르고·
나는 잎하넬을 향해 천천히 다가 갔다· 그녀는 여전히 눈을 질끈 감 은 채 양손을 가슴에 꼭 그러모으 고 있었는데 그 표정이 마치 무엇
인가에 겁을 지레 먹은 듯하여 더 욱 가슴이 아팠다·
“내가 조금 더 빨리 왔어야 했는 데···
그녀는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
자꾸만 귓가를 맴돌던 그 자그마 한 비명조차 이제는 더 이상 들려 오지 않았다·
환청이라고 생각했던 그것이 사실 은 잎하넬의 도움 요청이었다니·
*···잠깐만· 그럼 최소한 일주일 전까지는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었 다는 건데·’
그 잠깐 사이에 이 정도까지 완
전히 오염되는 게 가능한가?
제아무리 흑마도왕이 온다고 하 더라도 신령을 이렇게까지 오염시 키는 건 불가능하다·
나는 퍼뜩 주변을 둘러보았다·
완연한 보라색으로 물든 흑마력·
지금 와서 보니··· 본디 잎하넬 이 품고 있던 초록빛 마력이 흔적조 차 남아 있지 않았다·
남아 있는 건 오로지 보라색의 마 력뿐· 그리고 이 공간 전체에 퍼져 있는 그 보라색은··· 마치 수백 년 전부터 이곳에 존재했다는 듯 자연 스레 환경에 녹아 있었다·
“이거 설마···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꽃 서린에게 무어라 말하려는데 갑작 스레 그녀가 몸을 휘청이며 바닥 에 무릎을 꿇었다·
—ロ •
“뭐 뭐야· 괜찮아요?”
허겁지겁 그녀를 부축하니 꽃서 린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어루만지며 식은땀을 한 줄기 흘 리며 말했다·
“···네· 괜찮아요·”
“갑자기 무슨··· 역시 흑마력이 부
담됐던 겁니까?”
“그건··· 아니에요···· 다만 세계 수가 자꾸만 말을 걸어와서···
“뭐라고 하는데요?”
꽃서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 니 천천히 분홍색 입술을 떼어서 말했다·
“담갈색의 기운을 지닌 불청객이 찾아왔다고····”
“담갈색···?”
그 낯설면서도 익숙한 단어에 잠 시 머리가 멍해졌으나 이내 직박 구리 안경이 자동으로 검색하여 내 눈앞에 정보를 출력해 주었다·
그 직후 나는 가슴이 싸늘하게 식는 것을 느꼈다·
,설마···?
이 세상에 그런 독특한 기운을 지닌 존재는 단 두 명밖에 없다·
그중 한 존재는 결코 움직이는 일이 없으니 남은 것은 한 사람·
‘철리반·’
그 전설의 흑마인밖에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