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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고결한 영혼(5)
이따금 풀레임은 꿈을 꾸고는 한 다· 인간이라면 당연히 겪는 지극히 평범한 현상이지만 풀레임에게는 그 렇지 않다·
그녀는 특이하게도 태어날 때부터 무수히 많은 종족의 특성을 타고났 다· 인간 엘프 드워프 정령을 비
롯하여 천사의 특성까지도·
스텔라 아카데미에는 고작 다섯 개 를 기재했을 뿐이지만 풀레임 스스 로가 발견하여 기록한 종족 특성만 해도 벌써 12가지가 넘어가니 앞으 로도 더 발현될 가능성이 높았다·
엘프는 자연과 교감할 수 있고 드 워프는 물질을 다룰 수 있는 것처럼 각 종족에는 타고난 특성이 존재했 는데 풀레임은 그런 모든 것들을 가 지고 있다 보니 간혹가다 어느 종족 의 특성인지도 알 수 없는 특별한 능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예지몽’이라든가·
-그건 예지몽이 아니야 풀레임·
계시록’이라고 부르는 거야·
한때 천사들에게 물어본 적이 있으 나 그들의 특성은 아니었다·
천사는··· 꿈을 꾸지 않으니까·
으음·’
지끈거리는 두통 끝없이 이어지는 나락으로 무한히 추락하는 느낌 소 용돌이 속에서 정처 없이 헤매는 듯 머리가 어지러웠고 망망대해에 떨어 진 듯 막막하고 공허한 감각·
익숙하다·
1년에 한 번 아니·
어쩌면 3년에 한 번 정도밖에 느 끼지 못하는 이 특별한 감각은··· 예지몽이 틀림없었다·
¹···를 찾아서는 안····’
‘너는 처음부터····’
‘•••번째 별이 되어····’
‘정해진 운명은 없····’
깨달았다·
이것은 예지몽이며 자각몽이다·
하지만 자각몽이라는 사실을 알면
서도 풀레임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 었다· 가위에 짓눌리는 듯 몸을 움 직일 수가 없었으니까·
‘뭐야? 뭐라는 거야! 똑바로 좀 말 해!’
그녀는 허공을 향해 소리쳤다·
그곳은 황금색으로 물든 공간이었 다· 하늘에는 거꾸로 뒤집힌 거대한 성 한 채가 떠다니고 있었고 고무처 럼 U자로 휜 커다란 다리의 끝에는 구름이 매달려 있다·
꿈과 현실이 뒤섞이는 소름 끼치는 감각에 한시라도 빨리 깨어나고 싶 었으나 그래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예지몽은 특별하다· 원작 로판에서 도 예지 능력은 지극히 적었으니까·
그 능력이 자신에게 오더라도 분명 히 놀랍기는 하나 능력의 존재 자체 가 이상하지는 않다·
‘너는 대체 누구야?’
상대방은 마치 안개가 낀 듯 거뭇 하고 흐릿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 은 채 같은 말만을 반복했다·
‘너는····별이 되어 떠오를··
제발 그만·
목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머리가 아 프다· 이따위 것은 예지몽이 아니다·
어렸을 적에 꾸었던 꿈은 하다못해 스텔라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순간이 라든가 마법을 개안하는 순간 등의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장면이 직관 적으로 떠올랐단 말이다·
하지만 이 꿈은 고통스럽기만 할 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제발···
풀레임이 눈을 꼭 감고 귀를 틀어
막고서 소리치자 갑작스레 어디론 가 빨려들어가는 기묘한 감각과 함 께 세상이 흰색으로 물들었다·
“아···!”
그러자 눈앞에 뚜렷히 보이는 금 색의 머리칼과 흰색의 찬란한 날개 를 가진 소년과 청년들·
그들은 풀레임을 걱정스러운 눈으 로 바라보며 손을 뻗었다·
– 미안 풀레임· 네가 괴로워하는 것을 볼 수는 없어·
그러고서는 풀레임의 눈을 다시 감 겨주며 그렇게 말했다·
– 우리는 네가 꿈을 꾸지 않았으면
좋겠어 풀레임·
– 그건····
– 너를 고통스럽게 할 뿐이야·
‘아···
두통이 물로 씻어내리듯 사라졌다·
편안하다· 마치 어머니의 배 속에 서 잠드는 것처럼·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방금 까지 무슨 일을 겪었냐는 것처럼 놀 랍게도 평범한 일상이었다·
“자 다음 문제 풀어볼 사람?”
스텔라 아카데미 강의실·
어젯밤 늦게까지 밀린 과제를 처리 하다 보니 깜빡 졸았나 보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때 악몽··· 아 니 예지몽을 꿔버리다니·
“저기··· 풀레임 괜찮아?”
옆자리에 앉은 남학생이 조용하게 말을 걸어왔다· 이제 보니 온몸에 식은땀이 흥건하다·
어··· 응· 별거 아냐·”
스텔라에 입학한 뒤부터는 한 번도 꾸지 않았던 예지몽이었거늘 하필이 면 지금 꾸게 된 이유라도 있을까·
글쎄····
예지몽에 이유는 없다·
의미도 없고·
알고 싶은 것은 제대로 알려주지도 않고 알고 싶지 않은 것만을 똑바 로 알려주는 게 예지몽이었으니까·
이 특성이 어느 종족의 것인 줄은 몰라도 아무튼 고약한 종족이리라고 는 생각하고 있다·
···백유설은 예지몽에 대해 알고 있을까?’
아마도 또 다른 세계의 자신이 백 유설에게 예지몽을 털어놓았을 가능 성이 높다· 아마도 그는 그것의 진 실을 알아냈겠지· 그런 성격이니까·
하지만··· 굳이 또 다른 세계의 자신이 남겼던 기억을 그에게 다시 주입하고 싶지는 않다·
어차피 언젠가 때가 되면 알게 될 테니 지금은 묻지 말자·
띵-동댕-!
수업 종료 종이 울린 후 전공서적 을 챙겨서 강의실을 빠져나온 풀레 임은 피곤에 찌든 얼굴로 복도를 걸 었다·
“안녕 풀레임!”
“어·”
“안녕! 오늘은 피곤해 보이네?”
“어·,,
“풀레임! 카페 브릿지 갈래?”
“아니·,,
복도를 오고 가며 친구들이 인사를 건네왔으나 지금은 그마저도 귀찮아 서 건성으로 대답했다· 물론 평상시 에도 건성으로 대답하는 풀레임이었 기에 친구들은 별다른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는 못한 듯싶었다·
,,안녕·,,
“어·,,
이번에도 역시 누군가 인사를 건네 오기에 대충 대답하고서 지나치려고
했으나 상대방이 앞을 가로막아 서는 바람에 강제로 멈출 수밖에 없었다·
“···뭐야?”
뒤늦게 고개를 들어서 상대를 확인 한 풀레임은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붉은색이 감도는 흑색 머리칼에 차 디찬 인상을 가진 그 소년은 자줏빛 눈동자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 다·
“···해원량· 뭐 해?”
“부탁할 게 있다·”
“부탁? 귀찮은 거면 패스·”
“귀찮은 건 아니고 너도 꽤 흥미
를 가질 것 같아서 가져왔다·”
“뭔데···r
요즘은 하루하루가 심심해서 딱히 흥미를 가질 만한 것도 없는 참이었 는데 해원량이 그리 말하니 호기심 이 들었다· 그는 풀레임이 눈동자를 반짝이자 재빠르게 자그마한 팸플릿 을 건넸다·
“이번에 교내에서 예비 선수 추가 선발을 위한 리그 오브 스피릿 대회 가 열린다·”
“아하· 구경하러 오라고?”
해원량은 고개를 저었다·
“선수로 참여해 볼 생각은 없나?”
“뭐?,,
그러고 보면 일전에 비슷한 상황을 겪었던가· 그러다 뒤늦게 생각난 사 실 하나·
‘나 생각해 보니 참가 등록은 어떻 게 됐더라···?)
풀레임은 어디까지나 리그 오브 스 피릿의 경기 관람을 즐길 뿐 굳이 본인이 참가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일전에 제레미 스칼벤에 의 하여 강제로 선수 등록이 되어버렸 는데····
그 이후로 취소를 하기 위해 동분 서주로 노력했으나 이미 명단에 올
라가 버려서 불가능하다는 소리만 하루 종일 듣고 말았다·
그 뒤로도 며칠 동안이나 관리자를 찾아갔으나 불가능한 소리만 들었는 데 며칠이 지난 현재 추가 선수 선 발 대회를 개최한다고 하니····
‘나 설마 정말로 선수가 된 거야?’
안색이 새하얗게 질려 버린 풀레임 이 입을 떡 벌리자 해원량의 표정이 굳었다·
“선수에는 관심이 없나?”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어떡하지?
당장 앞날이 깜깜해서 해원량의 말 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팔자에도 없던 리그 오브 스피릿의 선수를 해야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현기증까지 일었다·
“제레미 이 개새끼··· 내가 언젠 가는 꼭 죽인다····”
그녀의 눈빛이 살벌해졌다·
* * *
새벽녘 아침·
불그스름하게 물드는 하늘빛이 유
난히 아름다운 제3세계수 나무화란 의 과수원에 새벽 기차를 타고서 도 착한 나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어르신들이 산에 올라가서 정기를 흡수한답시며 체조나 스트레칭하는 것을 볼 때는 그저 이상하다고만 생 각했었는데 지금 와서는 상당히 이 해가 간다·
나는 마력누설지체로서 들이마시는 마나가 그대로 배출되어 버리고는 하는데 이게 막 아예 의미가 없는 건 아니었다· 순수한 마나로 호흡할 수록 더욱 체내 마나 순환율이 높아 져서 성장 속도가 증가할 테니까·
물론··· 이런 곳에서 숨을 아무리
열심히 쉬어봐야 크게 의미는 없다·
정기 가득한 곳에서 빡세게 훈련한 다면 또 모를까·
나무화란의 과수원은 엘프들의 나 라였으나 인간들에게 개방적으로 변 한 지도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문화나 풍경 자체는 옛날과 별반 다 를 게 없다고 한다·
이들이 전통을 지키는 이유는 이곳 이 관광지로서의 의미가 더욱 커졌 기 때문인데 타지인들에게 엘프의 문화를 알리면서 덤으로 돈벌이에도 좋으니까 그런 듯싶다·
“···조금 기다릴까·”
정거장에 도착했으나 곧바로 활동 하지 않고서 근처의 대기석에 착석 한 나는 책을 펼쳤다·
아이테르 월드의 역사는 그야말로 거대한 판타지 대서사시였기에 이것 을 읽는 것만큼이나 재미있는 시간 은 없다·
이 세계에 도착한 이후로 마법 지 식은 거의 늘지도 않았으나 덕분에 역사만큼은 빠삭하게 되었다·
나중에 할 거 없으면 역사 선생님 해도 좋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한 30분 정도 책을 읽으면 서 기다리고 있으니 다음 기차가 정
차하는 소리가 울렸다·
엘프의 나라를 왕래하는 기차답게 소음이 적었는데 대가로 속도를 상 당히 포기한 것인지 굉장히 느렸다·
그리고 저 기차에는····
엘프왕 꽃서린이 타고 있다·
치이익-!
기차의 문이 열리며 소수의 인원이 하차했다· 로브를 뒤집어쓴 음침한 마법人卜 키가 작으나 고개를 빳빳히 든 자신감 넘치는 드워프 귀를 붕 대로 칭칭 감아서 숨긴 엘프 일상 에 찌든 인간 등등·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하차했으나
단번에 꽃서린을 찾아내는 것은 그 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흑색의 드레스를 입고서 얼굴을 가 면으로 가린 그녀는 마법사치고는 꽤 평범한 차림새라고 할 수 있었으 나 내 눈에는 특별하게 보였으니까·
그녀 역시 나를 한눈에 발견하고서 는 종종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오랜만이네요· 설마하니 여기에서 다시 뵐 줄은 몰랐지만요····”
“외출할 때는 여전히 가면을 쓰시 는 겁니까?”
“아직은 저주가 남아 있어서 외출 할 때는 각별하게 주의해야만 해요·
그리고··· 엘프왕의 신분으로는 자 유로이 돌아다니기도 힘들구요·”
흐]■기야 저주도 저주겠지만 평생토 록 자유를 갈망하던 꽃서린이었으니 누군가에게 구애받지 않고서 마음대 로 움직이기 위해 가면을 썼을 것이 다· 아마도 저주가 풀린 뒤에도 가 면을 즐겨 쓰지 않을까 싶다·
그녀의 얼굴이 공개되는 순간 세계 사람들이 모두 알아보게 될 테니까·
¹¹그럼 가 볼까요?”
꽃서린은 그리 말하며 당당히 어디 론가 걸었다· 오랜만에 만끽하는 여 유로운 휴가· 고작 이틀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일지라도 알차게 보낼 생 각인 듯 보였으나··· 안타깝게도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 꽃서린의 계획은 망가지고 말았다·
척! 척!
흑색 드레스와 횐색의 가면으로 정 체를 숨긴 꽃서린의 앞에 무릎을 꿇 은 초록빛 로브의 엘프 기사들·
그들의 로브에는 모두 나무화란의 문양이 그려져 있었는데 무슨 상황 인지는 불 보듯 뻔했다·
‘들켰군·’
대충 예상은 했다·
꽃서린은 엘프왕으로서 모든 세계
수의 근원 첫 번째 세계수 ‘천령나 무’와 연결되어 있었으니까·
그녀에게서는 엘프만이 느낄 수 있 는 신비로운 기운이 스멀스멀 새어 나오고 있을 터· 저 드레스는 저주 막이를 해줄 뿐 엘프왕의 기운까지 가로막지는 못한다·
그래도 최대한 기운을 감춰서 들키 지 않으려고 애썼던 것 같기는 하나 일반인은 속일지언정 제3세계수 나 무화란의 장로까지 속일 수는 없었 나 보다·
“왕이시여· 어찌 저희의 요람에 방 문하심에 말씀이 없으셨나이까·”
선두에 무릎을 꿇고 앉은 엘프 사 내는 무게감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꽃서린에게 그리 물었다·
과연 저 사람을 한국으로 따지면 시청장에서 구청장쯤 되는 엘프라고 보면 되려나·
“···조용히 방문할 만한 이유가 있어서요·”
“그렇습니까· 폐하의 깊은 뜻을 헤 아리지 못하여 송구합니다· 허나 왕 께서 직접 이 누추한 곳에 방문하심 을 깨달은 이상 감히 외면할 수가 없어 이렇게 직접 찾아뵙습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꽃서린은 내게 미안한 표정을 지었 으나 사실 나는 별생각도 없었다·
구청장이고 나발이고 어찌 되었든 잎하넬의 정원에만 가면 되니까·
가끔 이런 경험을 하는 것도 신선 하기도 하고·
그나저나 어째 느낌이 쎄하다·
‘엘프 치고는 지나치게 격식이 과
한데?’
인간의 귀족문화와 엘프의 귀족문 화는 상당히 분위기가 다르다·
인간들은 신하가 왕에게 극존칭을 하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르나 엘프
들은 왕이라는 존재가 그저 천령나 무 소통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존 재일 뿐 저렇게까지 빌빌 길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꽃서린이 제아무리 사회 경험이 적 다지만 이런 대우는 상당히 낯선 듯 무언가 상당히 고민이 깊어 보인다·
“폐하 부족한 몸이나 감히 전언해 도 되겠습니까·”
아니나 다를까 역시 뭔가가 있는 듯한 목소리로 엘프 장로가 말한다·
“···말씀해 보세요·”
꽃서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고 개를 들어서 입술을 떼었다·
“나무화란의 과수원이··· 뿌리부 터 오염되기 시작했습니다·”
어라 잠깐·
나무화란이 오염됐다고?
벌써?
‘뭔가 진행이··· 상당히 빠른데?’
내가 알기로 나무화란의 과수원이 흑색의 마력에 의해 오염되는 시기 는 최소 2학년 중후반 혹은 3학년 이 막 되었을 때다·
아무리 세계의 이야기가 변질되고 또 변질되었지만 1년에서 2년 정도 는 앞당겨졌다는 의미·
지금까지 에피소드가 망가지는 경 우는 있었어도 이렇게까지 한 번에 크게 앞당겨진 적은 없었기에 나 또 한 꽃서린 못지않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왕이시여· 부디 저희의 요람을 보 전하여 주시옵소서····”
장로는 그리 말한 뒤 고개를 숙였 고 꽃서린과 나는 한동안 입을 다 물고서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잎하넬의 근황을 보러 찾아왔거늘 생각보다 더 일이 꼬여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