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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마녀(13)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 다· 내가 그 말을 믿게 된 것은 열 다섯의 어린 날 부모님이 돌아가셨 을 적의 일 때문이었다·
다시 돌아보아도 먹먹하고 울적해 지는 일이지만··· 과거 회상을 하 기에는 적기가 아닌 듯싶어서 패스
하고 아무튼 나는 언제나 ‘설마 죽 기밖에 더 하겠어’라는 마인드로 세 상을 살아왔다고 말하고 싶다·
무슨 일을 당해도 어떻게든 반드시 해결할 방법은 존재했고 그때마다 위기를 넘기며 ‘이번에도 나는 해냈 구나’라며 스스로 위안하였다·
아이테르 월드에 와서도 그건 역시 다르지 않았다· 이곳에서는 지구에 서 있었던 일과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힘들고 고된 일을 잔뜩 겪어 왔지만 나는 그 모든 역경을 이겨 내고서 이 자리에 서 있으니까·
하지만 이번 경우에는 조금 힘들 지도 모르겠다·
‘역산해 봐!’
-사용자의 마나가 부족하여 불가 능합니다·
‘아니면 뭐든 좋으니까 방법을 찾 아보라고!’
-존재하지 않습니다·
직박구리 안경의 냉정한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 다· 그런 나를 바라보며 빗자루 위 에 올라탄 멜리셔는 여유 가득한 미 소를 지었다·
“이제 조금 알겠어?”
허세다· 지금의 멜리셔는 더 이상 마법을 사용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 다· 내가 마음먹고 공격하면 당장에 라도 죽여 버릴 수 있을 정도로·
그러나····
과연 그 행위에 의미가 있을까·
[불가능]
[불가능]
[불가능 불가능 불가능····]
직박구리 안경의 한 면을 가득 채 우는 ‘불가능’ 메시지에 낙담할 수 밖에 없었다·
환상 결계의 해제는 어떤 수를 쓰 더라도 불가능· 설령 멜리셔를 죽인 다고 할지라도 나는 영영 이곳에 갇 힐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이런 상황은 직박구리 안경에도 기 록되어 있지 않았다·
애당초 ‘환상 결계’라는 것은 보스 전의 편의성을 위해 존재하는 것으 로서 플레이어는 내부로 들어가 멜 리셔를 성공적으로 쓰러뜨리면 자동
으로 무너져 내리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 보스전이 아니라 보스전을 위해 만들어진 ‘보스룸’에 갇혀서 영영 나갈 수 없는 꼴이 되다니·
이게 게임과 현실의 차이인 걸까·
항상 게임과 현실을 혼동하지 않도 록 주의하고 또 주의했는데도 이렇 게까지 크게 발생해 버리는 변수를 내가 대체 무슨 수로 대처해야만 할 까·
“우후후 왜 그래? 벌써 의지를 상 실해 버린 거야?”
나는 입을 꾹 다물고서 고개를 들
어 멜리셔와 눈을 마주하였다·
“뭣하면 무릎 꿇고 빌어보1· 그러면 내가 특별히···
[점멸]
“··。으*?1”
더 이상 저 여자가 주둥이 놀리는 꼬라지를 보기가 싫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니 그녀가 다급히 뒤로 물 러났다· 이미 예상했던 바이기에 마 녀 사냥꾼의 마도구를 하나 꺼내 허 공에 투척하였다·
[외팔 원숭이의 갈퀴]
촤라락!
공중에서 원숭이 팔 모양으로 생긴 그물이 튀어나오더니 멜리셔의 몸을 옭아매었다· 그러나 그녀는 혀를 차 더니 가볍게 고개를 흔들어 휘젓는 것으로 그물을 산산조각 찢어냈다·
하지만 잠깐 발을 묶어두기에는 충 분했기에 지척까지 접근하여 검을 휘둘렀으나 멜리셔는 빗자루의 방향 을 힘껏 꺾어서 아래로 추락하였다·
점멸과 점멸 사이에는 약간의 틈이 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거리의 섬세
한 조절과 그것을 명확하게 끊어내 는 집중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어 쩔 수 없는 딜레이였다·
대다수의 마법사는 나를 상대하면 서 그 짧은 빈틈을 포착하고는 했는 데 멜리셔 역시도 마찬가지일 터·
지금이 내 빈틈이라 판단하여 공격 하려는 것인지 마녀는 빗자루에서 내려타 허공에서 떨어지는 와중에도 마력을 끌어올리려고 했지만····
딸칵!
‘사할렌의 비커·’
마녀 사냥꾼이 애지중지 아끼던 고 대 아티팩트로서 결계 봉쇄술이 각
인되어 상대방의 영혼을 옭아맬 수 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으나 그건 하수들에게나 통하는 효과·
이 아티팩트의 진정한 위력은 바 로 그 내부에 봉인된 악령들이 모조 리 폭발함으로써 나타난다·
휘릭!
내게 빗자루를 겨누는 멜리셔를 향 해 비커를 집어 던지スト 뒤늦게 위 기를 감지한 그녀가 다급히 실드를 펼쳤다·
‘소용없어·’
차라리 물리력으로 이루어진 매직 실드라면 또 모를까 부족한 마력으
로 만들어낸 환상과 허구의 실드로 는 저것을 막아낼 수 없다·
쨍그랑!
···통!
고대 아티팩트라고 믿기에는 믿기 힘들 정도로 아주 귀여운 충격음·
그러나 효과는 확실했다·
“아 으 욱····
사할렌의 비커에 전신을 관통당한 멜리셔가 갑작스레 자신의 몸이 으 스러지듯 꽉 팔짱을 끼더니 각혈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쿨럭···!”
마력이 조금이라도 온전했다면 어 설픈 투척 따위로는 맞추기 힘들었 겠지만 지금의 멜리셔는 이미 바닥 을 드러낸 상태였기에 요행으로 적 중시킬 수 있었다·
피를 토하며 바닥으로 추락한 멜리 셔는 그대로 아르카니움의 빌딩 구 석으로 처박힌 뒤 한참을 뒹굴고서 야 바닥에 쓰러졌다·
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서 점 멸을 타고 접근하여 그녀의 가슴에 있는 힘껏 검을 찔러 넣었다·
푸욱!!
“꾜윽···
빗나갔다·
급하게 생성해 낸 결계에 검의 경 로가 비틀려 어깨를 찌르고 말았다·
그것도 상당히 얕게·
콰지지직!!
다시 한번 급소를 찌르고 싶었으 나 그녀의 몸에서 붉은 전격이 번 쩍이기 시작하여 하는 수 없이 뒤로 훌쩍 점프하여 물러났다·
“하아 하··· 역겨운 새끼··· 그딴 아티팩트를 숨기고 있었다니···
빗자루로 몸을 지탱하여 간신히 몸 을 일으킨 멜리셔는 비틀비틀 고개
를 들었다·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 도 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흐 흐흐· 그래 나를 죽일 수는 있겠지· 그래서··· 어떡하려고?”
콰장창!!
허공에서 유리 파편이 터져 나가더 니 그대로 공간에 금이 가기 시작 하였다· 뜯겨진 공간과 공간의 틈새 사이로 거무죽죽한 공허(空虛)가 비 친다·
말 그대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 멜리셔의 마법으로 인해 만들 어진 환상 세계 그 진실된 모습·
그녀의 생명이 다하더라도 이 세계
는 영영 사라지지 않고 방향도 시 간도 공간도 색도 존재하지 않는 허 무의 형태로 남아··· 나를 영영 괴 롭힐 것이다·
“응? スト 뭐라고 말이라도 해봐· 나를 죽인다고 해서 뭐라도 달라질 것 같아? 영영 저 지옥에서 죽지도 못한 채 살아갈 텐데 말이야·”
방법이 없다·
멜리셔를 죽이는 건 차선도 차악도 아닌 그저 분풀이에 불과했다· 그러 나 나는 그녀에게 검을 겨누었다·
더 이상 싸울 힘조차 남아 있지
않은 그녀였기에 다음의 몇 합으로 목을 쳐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선뜻 움직일 수 없는 이유 는 뭘까·
죄책감?
그런 게 있을 리가·
악인을 죽이는 행위에는 거리낌이 없고 누군가를 베어내야만 하는 순 간에 망설이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정말로 멜리셔 를 베어버리면 그때는 정말로 모든 방법이 사라질까 봐·
그것이 두려웠다·
“아직도 방도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너도 참 시시하네···· 다른 마법사와 다를 것도 없잖아?”
변수다·
이건 그저 예측하지 변수에 의한 자그마한 사고였을 뿐이다·
그렇다면 또 다른 변수를 넣어야 만 한다· 나라는 존재는 이 세계에 서 항상 변수였으니 이번에도 가능 할 것이다·
직박구리 안경조차 마법을 역산하 지 못했지만 나의 그 어떤 물리적 인 공격조차 통하지 않았지만·
어떻게든·
계속해서 머리를 쥐어짜 내 방법을 떠올리면 예전과 마찬가지로 ‘변수’ 를 창출해 낼 방법을····
‘••・만들어낼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애당초 환상 결계에 그 어떤 마법 의 간섭조차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이상 나는 한계에 다다른 것이나 마찬가지다·
내가 가진 모든 수단과 방법이 가 로막혔다· 직박구리 안경조차 그 어 떤 방법을 떠올리지 못하였고 나에 게는 마법적 지식이 전무·
심지어 이 상황을 게임 속에서 겪 어보지도 못했으니····
마법사도 뭣도 이도저도 아닌 그 저 평범한 ‘일반인’에 불과한 나로 서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 다·
그것이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하니 검을 쥔 손에 힘이 풀리고 말았다·
테리폰 소드를 늘어뜨리자 땅거미 지는 밤하늘 노을에 비친 그림자처 럼 멜리셔의 입꼬리가 길어졌다·
“정답이야·”
“너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환상이 통하지 않는다고 해서 자 만한 거니? 그런데 이걸 어쩔까?”
멜리셔는 한 발자국씩 내게 다가오 기 시작하였다·
“너의 모든 마법은 내게 통하지 않 아· 네가 지금! 여기서 그 어떤 마 법과 아티팩트와 마도구를 꺼내더라 도 내 환상 앞에서는 소용없다고!”
어느덧 지척까지 도달한 그녀는 이 를 드러내고서 상냥하게 웃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감
을 느끼니 기분이 어때?”
멜리셔는 내게 속삭였다·
“그게 내가 느꼈던 기분이야·”
그녀의 말대로였다·
지금 나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어떤 무슨 짓 을 하더라도··· 여기서 스토리를 완전히 뒤집을 만한 변수’를 창출 해 낼 방법이 도저히 존재하지 않았 다·
“굴복해·”
그건 꽤 달콤한 유혹이었다·
“무릎을 꿇고 내게 영혼을 바쳐·
이곳에서 영원히 떠도는 것보다는 차라리 나을 거야· 평생 나의 노예 가 되어 벌레만도 못한 삶을 살겠 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꼭 죽여 주겠다고 약속할게· 응? 이 정도면 상당히 괜찮은 제안이지 않아?”
그래·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는 마법을 사용하지 못한다·
아마도 영원흐】·
이곳에서 수십 수백 수천 수만 년을 죽지도 못한 채 머문다고 하더 라도··· 나는 마법을 사용하지 못 할 것이다·
이 세상 대부분의 마법 지식을 갖 춘 아이템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아 이러니하게도 마법을 사용할 수 없 는 신세라니·
언젠가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르면 직박구리 안경은 이 환상 결계를 분 석해 낼지도 모른다·
그때 안경은 말할 것이다·
‘어떠어떠한 마법을 어떠어떠하게 사용하면 탈출할 수 있습니다·’
그때가 되면 나는 또다시 절망하고 말겠スI· 절망에는 바닥이 존재하지 않는다· 아주 약간의 희망이라도 비 치는 순간 하늘 높이 끌어 올려져
다시 추락하게 될 테니까·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내게 있어 서 마법을 사용해야만 하는 방법이 란 곧 희망 고문과도 다름없었고 그건··· 나의 자아를 완전히 망가 뜨려 버릴 것이다·
“자 선택해·”
마지막 기회였다·
그녀는 완전히 무방비하게 실드조 차 꺼버린 채 내게 양팔을 벌렸다· 검을 휘두르면 곧장 목을 쳐버릴 수도 있는 거리·
‘어디 죽일 테면 죽여봐·’
그녀는 확신에 차 있었다·
내가 검을 휘두르지 못할 것이라 고·
정답이었다·
나는 검을 휘두를 의지가 전혀 없 었다· 그녀는 단 하나밖에 남지 않 은 마지막 탈출구였으니까·
그렇게·
최후의 판단을 내리려는 순간·
···갑작스레 하늘에서 무언가 검 은 물체 하나가 떨어져 내렸다·
철푸덕!!
“···어?”
“아?”
나와 멜리셔는 거의 동시에 그곳 을 바라보았다·
익숙한 생김새였다·
‘흑색의 단발 흑색의 눈동자·’
금빛의 테두리가 아름다운 검은색 의 스텔라 교복을 입은··· 자그마 한 체구의 소녀·
풀레임·’
그녀는 힘겹게 고개를 들어올렸다·
시선을 돌릴 필요도 없이 단번에 내 쪽을 쳐다본 것은 우연일까·
바보처럼 배시시 미소 짓는 그녀를 바라보며 나는 그 어떤 의문도 품
지 않았다·
“잠 깐···
정확히는 의문을 품을 시간이 없었 다· 내 검은 다시 빛을 뿜어내고 있 었고 그것은 정확히 멜리셔의 가슴 을 향해 궤적을 그렸다·
“이건 뭔가 잘못됐-”
푸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