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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마녀(9)
12개의 달과 계절 그리고 원소의 힘을 그대로 물려받아 태어난 신비 로운 존재 십이신월(十二神月)·
그들은 제각각 다른 힘을 지니고 태어났으며 성격과 외모는 물론 개 성마저도 다양하여 비슷한 면모를 단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누군가는 다른 차원의 틈새에 숨어 정령들과 어울려 살아갔고 누군가 는 눈에 띄지 않는 깊은 곳에 자신 만의 왕국을 만들어 백성들을 다스 렸으다·
또 누군가는 오랜 시간 잠을 청하 였고 누군가는 스스로의 힘을 억제 하기 위해 스스로 고통받기도 하였 으며 인간들 사이에 숨어서 인간과 똑같은 행세를 하는 이도 있었다·
회공시월(灰空十月)은 그중에서도 가장 개성이 없는 축에 속했다·
그는 그저 유유자적 떠돌며 세상을 관찰할 뿐 그 무엇에도 간섭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최근 회공시월의 ‘개성’에 아주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결코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에 간섭 하지 않던 그가··· 조금씩 손을 대 기 시작한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회공시월은 그리 생각하며 움직였 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은 이 세상 에 존재하지 않는단 사실을 그 누구 보다도 잘 알았기에 스스로 모순점 에 빠져서 혼란이 일었다·
‘어째서 지?’
세상은 운명을 타고 홀러간다·
오늘 동네 빵집 사장님이 아침밥으 로 빵을 먹는 운명이 정해져 있다 면 반드시 이루어진다·
그는 운명을 몇 번이나 관측해왔었 기에 ‘운명’이라는 존재가 결코 변 치 않는다고 굳게 믿어왔다·
그러나 최근·
세상이 이상하다·
남들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겠지 만 회공시월만큼은 알 수 있었다· 세상이 운명의 순리대로 흘러가지 않고 있음을·
그가 그것을 결정적으로 깨닫게 된 것은 아돌레비트 왕국의 레비앙 해
안에 도착했을 때의 일이다·
,이건···!)
수백 년간 얼어붙어 있던 바다가 완전히 녹아내려 계절을 되찾은 레 비앙 해안은 이제 더 이상 혹한의 추위에 시달리지 않았다·
따스한 여름의 계절을 만끽하며 사 람들이 바닷가에 나와 수영복을 입 고서 서핑을 즐기고 있었고 바다의 심장부에 영원히 얼어붙었을 해적선 블랙 크로스 호는 관광 명소가 되어 있었다·
이건 이상하다·
너무나도··· 이상하다·
그는 운명을 수백 수천 수만 번 이나 관측해왔기에 잘 알고 있다·
레비앙 해안은 차디찬 재앙으로 뒤 덮여 지금쯤 그 어떤 생명체도 살지 못하는 지옥이 되어 있어야 정상이 었다·
그런데 휴가철 관광 명소 따위의 흉내를 내고 있다니·
‘내가 눈을 뗀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가·’
그는 회색빛 눈동자로 하늘을 응시 하였다· 태양 볕이 내리쬐는 하늘을 통해 별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 도 없을 것이나 회공시월의 눈동자
에는 밤하늘의 별자리가 선명하게 비쳤다·
‘•••이번에는 운명을 관망하지 않겠 다는 뜻인가·’
이내 별자리에서 시선을 뗀 그는 발걸음을 돌렸다·
“어엇 이봐! 거긴 절벽이라고! 낭 떠러지로 가면 위험···广
뒤에서 일반인이 회공시월을 향해 외쳤으나 그는 회색의 공간 틈새 사이로 금세 자취를 감추었다·
“어 어라···r
순식간에 모습이 사라지자 그를 말 리려던 사내는 자신이 헛것을 봤나
싶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무래도 요즘 기이한 일이 자주 발생하는 것 같다·
* * *
뚝-!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메아리처 럼 비좁은 공간을 가득 메웠다·
찰팍!
–■ 11 •
마녀 멜리셔는 복부를 부여잡고서
아르카니움 지하 하수도를 천천히 거닐었다· 일전에 마녀 사냥꾼에게 입은 상처가 아직도 회복되지 않아 제대로 된 마력을 발산하는 것이 불 가능했다·
냄새나는 하수도 따위를 배회해야 만 한다는 사실 자체가 참으로 역겹 고 자괴감이 들었으나 어쩔 수 없 다· 마녀 사냥꾼을 상대로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당장은 만족해야만 했으 니까
“흐··· 그래도 괜찮아···
시간이 살짝 필요할 뿐이다·
조금만 더 회복하면 이전처럼 다
시 마녀 식당을 운영할 수 있다·
그렇다고 너무 오래 공백 기간을 잡아서는 안 된다· 아직까지 중독성 이 약한 학생들은 금세 자신의 마력 으로부터 벗어나고 말 테니까·
특히나 천성부터 마력을 타고난 명 문 학교의 학생들이니 더더욱 그 기 간이 빠를 것이다·
“이봐 상당히 아파 보이는데· 잠깐 와서 들르지그래?”
흠칫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멜리셔는 재빠르게 지팡이를 겨누었 다· 그곳에는 웬 여인이 이쪽을 바
라보고서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뭘 그렇게 놀라? 아르카니움 지하 수도에 사람이 산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잖아?”
“···흑마법사 연합이냐?”
“응· 잘 아네? 우리는 너희에게 딱 히 적대적이지 않아· 조금쯤은 도와 줄 수도 있는걸?”
“꺼져· 내 수정구슬을 노리고 찾아 왔다는 것을 모를 줄 알아?”
“에이~ 그것도 맞긴 한데 숨어 사 는 처지끼리 친하게 지내면 좋잖아? 아 너는 조금 다르려나? 지상에서 아주 설치고 다닌다면서?”
“바퀴벌레처럼 시야에 띌 때마다 역겨운 지하수도로 숨어드는 너희보 다는 내가 나아·”
“그렇겠지〜 그런데 말야···
여인은 멜리셔를 위아래로 훑어보 더니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얻어맞고 다니는 꼬라지를 보아하니 차라리 숨어 사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이 드는걸?”
“이 새끼가····”
“나중에 다시 생각해 봐〜 여기서 숨어 사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구?”
“내가 아무리 추해져도 너희처럼
천박한 생을 살지는 않을 거야·”
“응응! 그럼 잘 있으라구〜!”
흑마법사 여인이 그림자 속으로 모 습을 감추자 멜리셔는 벽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역겨운 새끼들····”
마법사고 흑마법사고 죄다 똑같은 족속이다· 사지를 찢어버린 다음 하 나하나 해부하여 그 얼굴에 들이밀 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 인내심에 한 계가 도달했다·
‘내가 아르카니움에 영역을 넓히 면 지하수도부터 깨끗하게 청소해 야겠어····’
아르카니움의 총 지배자 ‘마도지 사’가 지하에 벌레 몇 마리를 풀어 서 기르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 만 설마하니 흑마연합의 흑마법사가 대놓고 모습을 드러낼 줄은 몰랐다·
‘흑마연합이라····(
생각해 보니 우습다·
흑마인이든 흑마법사든·
모두 다 집단이 있게 마련인데 마 녀만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태생적으로 홀로 살아갈 수밖에 없 어 애당초 집단을 꾸린다는 행위 자체가 불가능해서 그렇다·
‘아무튼 기분 더러운 도시야····
이제 아르카니움은 지긋지긋했으나 자리를 뜨기에는 늦었다·
이곳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 으니 죽을 때까지 최선을 다해 마 녀 식당을 운영하는 수밖에 없다·
탁탁탁탁!
“저쪽으로 가 보도록!”
“옙!,,
“···윽!”
멀찍이서 웬 사내들의 외침이 들려 오자 멜리셔는 재빠르게 허공에 환 상을 흩뿌려 몸을 숨겼다·
죽이고자 마음먹으면 죽일 수는 있
겠으나 많이 지친 지금의 상태에서 끊임없이 몰려오는 스텔라 기사단을 상대할 자신은 없었다·
‘하필이면 스텔라가 직접 움직이다 니···
재수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 있 을까·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환상을 꿰뚫고서 나의 위치를 찾을 수 있는 마법사는 없을 테니까·
‘행동반경이 조금 좁아진 것뿐이 야· 조심히 움직이다가 다시 식당을 개업하면 돼·’
마녀 식당은 그 자체로도 이미 상 상으로 이루어진 존재였기에 설령
스텔라 기사단이 제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자신을 잡아낼 수는 없다·
마녀 사냥꾼이라는 이레귤러가 간 섭하지 않는 이상··· 얼마든지 학 생들을 끌어들일 수 있다·
‘게다가 일전에 마녀 사냥꾼 하나 를 사냥했으니 이제 문제는 없어·’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은··· 찬란한 미래 를 위해 아주 작은 발돋움을 할 때 다·
* * *
마녀 식당에서의 테러 사건이 발생 한 이후로 닷새가 흘렀다·
그간 스텔라 마법 수사대는 온갖 첨단 마법 장비를 동원해 이곳에서 무언가 흔적을 발견해 보려 애써보 았으나 안타깝게도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마녀가 미지의 존재인 것을 감안하 면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었다·
그동안 내가 무얼 했냐고?
“···이봐 백유설 학생· 언제까지 그 러고 있을 셈이지? 슬슬 뭐라도 하 지그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냥 가만히 사건 현장에서 기다렸 다· 스텔라 기사단이 내 행동을 보 고서 슬슬 뿔이 오르는 것도 당연하 다면 당연한 일·
“이번 사건이 끝난 뒤 아레인 기사 단장님께 네 행동을 있는 그대로 보 고할 것이다· 임시 기사 작위를 얻 으니 뭐라도 된 줄 아는 것 같나?”
“아뇨·”
뭐라도 됐으면 얼마나 좋을까·
오히려 아레인에게 할 말은 내가 더 많다· 도움도 안 되는 이상한 머 저리들을 잔뜩 붙여놓았으니까·
“으하암····”
내가 하품을 쩍쩍 내뱉자 기사는 혀를 쯧 차고서 돌아갔다·
그 뒤로 다섯 시간·
해가 뉘엿뉘엿 질 때까지도 기사단 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채 결국 철수하고 말았다·
최소한의 병력만을 남긴 채 모두가 돌아간 와중에도 나는 그 자리를 꿋 꿋하게 지켜냈다·
‘정확히 닷새·’
마녀 사냥꾼이 죽음으로부터 부활 하는 시간·
人人人人···II
사건 현장에서 거뭇한 안개가 피어 오르더니 서서히 허공으로 떠올라 마치 사람을 닮은 형체를 갖추기 시 작했다· 혹여나 주변에 지켜보는 사 람이 있는지 확인한 뒤 그것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나는 내 생각이 맞았음을 직감했다·
“···설마설마했지만 예상대로네·”
一너···는···
“오랜만이다· 초짜 마녀 사냥꾼·”
一흐卜···
저 마녀 사냥꾼과는 일전에 열차에
서 조우한 적이 있다· 아마도 경력 이 얼마 되지 않는 것으로 추정되는 바로 그 마녀 사냥꾼·
“마녀에게 당했나?”
-그래··· 꼴이 우습군····
굳이 비유하자면 호랑이가 토끼를 사냥하다가 도리어 잡아먹힌 꼴이라 고 봐도 좋다· 절대로 질 수 없는 싸움에서 졌으니까 말이다·
마녀 사냥꾼은 상당히 주눅이 들었 는지 거뭇한 형체 그대로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그러한 와중 나는 생각했다·
‘저 마녀 사냥꾼은 원래의 에피소
드에 나오는 그 인물이 아니야·’
당시 에피소드에 등장했던 마녀 사 냥꾼은 [죽은 마녀의 숨결]이라는 특성을 갖추고 있었다·
그 특성 때문에 에이젤이 죽음 직 전까지 내몰렸으나 해원량과 마유성 에 의해 구원받는 내용이었던가·
하지만 눈앞의 마녀 사냥꾼에게는 그런 특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단 한 번 닷새 뒤에 죽음에서 되 돌아오리라]라는 특성을 갖추고 있 었는데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마녀 사냥꾼이 하나 더 있군·’
원작 게임에서 에이젤을 습격했던
마녀 사냥꾼은 다른 인물이라는 의 미· 이건 내게 있어서 상당히 좋지 않은 징조였다·
기껏 마녀 사냥꾼이 죽었나 싶었더 만 그게 아니었으니까·
“여긴 왜 온 거지?”
-···네가 이곳에서 마녀를 사냥 한다기에 찾아왔다·
“그래서 먼저 선점하려고 했다가 꼴사납게 당했고? 우습네·”
할 말이 사라졌는지 마녀 사냥꾼의 안광이 서서히 줄어들었다·
“분명히 말했을 텐데· 사냥하기 쉽 지 않은 마녀라고· 내가 명예조차 저버린 채 이따위 인간의 모습을 왜 했다고 생각해?”
일전에 했던 거짓말을 대충 끄집어 내서 상황에 끼워 맞추니 꽤 그럴듯 하게 들려서 마녀 사냥꾼은 더더욱 할 말을 잃고 말았다·
– 미안하군····
“뭐 상관없어· 어쨌든 완전히 죽지 는 않았잖아?”
저놈이 살아남은 것은 순전히 마녀 의 패착이다· 아마 그 마녀도 강력 한 힘을 지니고는 있지만 마녀 사
냥꾼들이 죽음마저도 거스를 수 있 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겠지·
-이곳의 일은 너에게 맡기겠다·
“돌아가려고?”
-그래··· 면목 없게도 네게 민폐 를 끼쳤군·
“잘 아네· 근데 그냥 돌아가려고?”
-··?
내가 괜히 마녀 사냥꾼이 살아나기 를 확인하겠답시며 기다렸겠는가·
당연히 손쉬운 마녀사냥을 위해 진짜배기 마녀 사냥꾼의 손을 빌리 기 위함이다·
눈앞의 저놈은 마녀를 당해낼 만한 힘을 가지지는 못했으나 그가 가진 모든 능력은 마녀사냥에 있어서 아 주 큰 이점을 내게 쥐여줄 것이다·
“이번에 그 마녀의 목을 따러 갈 생각인데 너도 그 여자한테 당해놓 고서 그냥 돌아가면 찝찝하잖아?”
-그건 그렇다만····
“게다가 너는 마녀 사냥꾼 사이에 서 철저하게 금기로 여겨지는 동족 배반의 규율을 어겼어·”
-잠깐· 사냥감을 노렸다고 규율을 어겼다는 건 너무 억지다!
“뭐? 너 몇 살이냐? 나는 예전에
사냥감 스틸했다가 척살당한 놈 하 나 아는데· 본 적 있어?”
-···없다·
“없으면 말을 하지 마· 나는 본 적 있으니까·”
사실 없다·
“아무튼 뒈지기 싫으면 잠깐 나 좀 돕자· 거 네 아지트 있지? 잠깐 문 좀 따봐· 가서 필요한 도구나 챙겨 서 나오게·”
-네 아공간은 어쩌고····
“아오· 저번에 말했잖아· 마녀랑 싸 우다가 잃어버렸다고· 두 번 말하게 할래?”
-···알겠다· 열어주겠다·
일전에 내게 삥뜯긴(?) 경험이 있 어서 그런지 놈은 상당히 망설이는 기색이었으나 그래도 뭐 어쩌겠는 가· 협박이 제대로 통했다면 더 이 상 놈이 내게 저항할 수는 없을 것 이다·
콰드득! 우우웅-!
허공이 반으로 찢어지며 어두컴컴 한 아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놈보다 한 발자국 앞서 그곳 을 향해 발을 들이며 슬그머니 입꼬 리를 올렸다·
오늘은 왠지 운수가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