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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마녀(6)
한 번쯤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내일까지 제출해야 하는 숙제를 하 던 도중 책상에 엎어져서 그대로 잠 이 들어버리면··· 이상하리만치 깊 게 잠에 빠져들게 된다·
본인은 아주 잠깐이라도 느낄 정도 로 찰나의 시간 동안 눈을 감았겠지
만 눈을 뜨고 보면 분위기가 심상치 않을 것이다·
짹짹 참새 지저귀는 소리와 따스 한 햇살 고요한 아침 공기의 흐름·
개운하다· 정신이 서서히 맑아지며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이렇게까지 푹 자본 적이 있던가?
그리고 이내 깨닫게 된다·
‘큰일 났다!’
오늘까지 제줄해야 하는 숙제를 아 직 다 하지 못했는데!
풀레임이 딱 그 짝이었다·
‘어라·’
정신이 선명해지기까지는 정말 아 주 잠깐의 시간이면 충분했다·
그리고 이내 무언가 이상하다는 사 실을 인지하게 된다·
‘뭐지?’
아직까지는 그게 뭔지 알 수가 없 다· 전날의 기억이 제대로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풀레임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가· 무언가 따스한 물체와 맞닿는 바람에 온몸 을 경직하였다·
‘아···?’
전날 밤에 내가 어디서 뭘 했더 라·
술을 마시지는 않았으나 요새 너무 피곤했던 탓일까 순식간에 잠에 빠 져드는 바람에 기억이 흐릿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내가 어제 기숙사에 돌아갔던 가···?’
아니· 아니다·
기숙사로 돌아가지 않았다·
마지막 기억에 따르면 분명히 백 유설의 기숙사로 몰래 잠입하였고·
그를 기다리던 와중 하도 안 오길 래 마침 침대도 푹신푹신하겠다 잠
깐 누워 있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
화들짝 놀란 그녀는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고■서 상체를 일으키려고 했으 나 묵직한 무언가가 배 위에 올려 져 있는 바람에 멈칫했다·
백유설의 팔이었다·
“커어····”
“미 미친···!”
설마설마했거늘 자신이 침대에 누 워있든 말든 그는 신경조차 쓰지 않 고서 옆에 나란히 누워서 잠을 청하 고 있다· 잠옷까지 말끔하게 차려입 고서 말이다·
그의 팔을 조심스레 옆으로 치워 버린 그녀는 슬그머니 침대에서 일 어나 기어 나왔다·
쿵!
“켁!”
도중에 실수로 책상에 발가락을 찧 고 말았으나 다행스럽게도 백유설은 깨어나지 않았다·
‘으윽 이게 무슨 꼴이야아···
여기저기 기숙사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풀레임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학생 기숙사에서 하룻밤을 지샌 적은 없었다·
게다가 그 상대도 하필이면 백유설 이라서 더더욱 신경이 쓰였다·
달칵!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용히 문을 열고서 그의 기숙사를 나선 풀 레임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 다· 이래 봐야 어차피 의미는 없지 만 갑자기 여기서 백유설이 깨어나 버리면 정말 최악의 분위기가 형성 될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었다·
“후우··· 으으으···
바보같이 이게 대체 무슨 꼴인지 모르겠다· 머리를 마구마구 헤집으 려다가 괜히 머리카락이 흩날릴까
봐 참았다·
*··등교는 해야지·’
아무리 창피한 일을 겪었다지만 그 렇다고 학생의 본분을 잊을 수는 없 었다· 살그머니 발걸음을 돌려 기숙 사로 돌아가려는데 하필이면 재수 없게도 바로 근처의 기숙사를 쓰던 누군가와 마주치고 말았다·
풍하랑이었다·
“···풀레임?”
“어 어· 그래· 안녕·”
그는 체육복 차림으로 복도에서 물 을 마시고 있었는데 방금 막 아침 운동을 끝마치고 돌아온 모양이었
다·
“지금 너 설마····”
풍하랑이 입술을 떼어 무어라 말하 려고 하자 잽싸게 인터셉트하여 먼 저 아무런 말이나 내뱉었다·
“아참! 나는 바쁜 일이 있어서! 그 럼 이만 안녕! 수업 때 보자!”
“아 응···
속사포처럼 외친 풀레임이 날랜 걸 음으로 사라지자 풍하랑은 멀거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풀레임이 방금 전까지 서 있 던 자리에 시선을 두었다·
백유설의 기숙사·
저 둘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특별 한 유대 관계로 이어져 있다· 그러 니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자신이 괜 히 참견할 필요는 없다·
풍하랑은 이내 자리를 떴다·
그의 아침 운동은 아직 끝나지 않 은 듯싶다·
오전 수업·
“마법진의 계를 잇는 선은 반드시
직선이 되어야만 합니다· 진의 각도 가 30도 45도 60도씩 차이가 벌어 질수록 마나의 순환율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만약 각도에 단 1도 라도 오차가 있을 경우 심각한 오류 를 초래하게 되겠지요·”
이론 수업은 언제나 지겹다·
2학기는 실습과 훈련 위주로 홀러 간다고 했지만 당연하게도 이론 수 업의 비중이 조금 더 많기는 했다·
실습의 비중이 1학기에 비해 아주 조금 더 늘어났을 뿐 결국 끊임없이 이론 공부를 병행해야 했다·
풀레임은 멍한 눈으로 칠판을 바라 보았다· 아직도 아침에서의 일이 잊 혀지지 않았다·
’···내가 원래 이랬던가?’
그녀의 성격은 상당히 쿨하고 시원 스러운 편이다· 스스로가 자칭해서 말하는 게 아니라 주변 모두가 그렇 게 말하는 편이었고 듣고 보니 본 인 또한 맞는 것 같아서 그렇게 인 지하며 살아왔다·
동침? 그런 것쯤이야 시원스레 훌 훌 털어낼 수 있다· 둘이 무슨 짓을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잠만 잤을 뿐 이니까· 그런데 왜 자꾸만 신경 쓰
이는 건지 도저히 모르겠다·
“자 그럼 계의 개수에 따라서 형 태가 변질되는 과정을 알아보기 전 에 우선 질문 하나 할게요· 마법계 에서 가장 불에 잘 타는 것으로 알 려진 물질로 뭐가 있을까요?”
“저요!”
“정답이에요·”
“네?”
수업 내용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는 다· 풀레임이 멍하니 칠판을 바라보 고 있자 옆에서 누군가가 그녀의 어 깨를 툭툭 쳤다·
« 으”
“뭐 해? 아까부터 멍하니·”
“응? 어 아니··· 그냥?”
“오늘 저녁에 우리 다같이 노래방 가기로 했는데 너도 갈래?”
노래를 잘 부르기로 유명한 풀레임 은 친구들이 노래방에 갈 때마다 줄 곧 부르고는 했는데 원체 질러대기 를 좋아하는 그녀의 성격상 거절하 는 일이 거의 없었다·
“음··· 오늘은 조금 피곤해서
“그래에?”
하지만 오늘은 왠지 구미가 당기지
않아서 풀레임이 거절하자 친구는 상당히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차였냐?”
“··아니?”
“그럼 고백받았냐?”
“뭐래,,
“너 최근에 그 백유설이랑 같이 다 니던데· 다시 합친 거지? 그치?”
“아니거든····”
대체 또 어디에서 그런 소문이 퍼 졌는지는 모르겠다만 풀레임으로서 는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 일이다·
··그런가?’
딩동-댕-!
수업 종료를 알리는 벨이 울리スト 풀레임은 여느 때처럼 친구들과 함 께 복도를 우르르 걸어나갔다· 같은 수업을 듣는 것도 아니고 같은 클래 스도 아니었지만 그냥 이렇게 움직 이는 게 습관이 되어버렸다·
스텔라의 학생들이 쉬는 시간에 여 가 생활을 보내는 방법은 참으로 다 양하다·
하늘 정원을 가만히 거닐며 친구들 과 수다를 떠는 이들도 있었고 별 빛 테라스에 모여 우아하게 티타임 을 즐기는 소녀들도 있었고 체육관
에 모여서 스포츠를 즐기거나 머리 를 쓰는 두뇌 트레이닝을 하기도 했 다·
풀레임은 아주 평범한 편에 속했는 데 보통은 정원이나 카페에서 옹기 종기 모여 이야기 나누는 것을 즐기 는 편이었다·
“풀레임? 오늘 뭐 기분 안 좋은 일 있어?”
“···안 좋은 일?”
글쎄· 딱히 없는 것 같은데·
당황스러운 일이라면 몰라도·
“그런데 왜 표정이 그래? 엄청 심 각해 보여·”
“그래···r
내가 심각하게 고민할 만한 일이 있나? 아침의 사건은 그저 당황스러 운 헤프닝이 아니었던가?
*···그저 헤프딩?’
생각해 보니 그것참 기분이 묘하 다· 평범한 소년이라면 또래의 여자 아이가 자신의 침대에 누워서 무방 비하게 자고 있는데 그 옆에 나란 히 누워서 잠을 청할까?
‘그 아저씨라면···/
보통은 침대에 누워서 자는 소녀를 옮기거나 자신이 쇼파에서 잠을 청 한다는 선택을 하는 게 정상이다·
물론 위의 경우가 상당히 민폐라는 사실은 잘 알지만··· 어쨌든 간에 자 신은 이미 실수를 저질러 버렸고 그 상황에서 백유설은 그런 선택을 하 지 않았던가?
혹은 그것도 아니라면·
‘내가 옆에 누워서 자는 게 익숙해 서···?
거기까지 생각이 들었을 무렵 옆에 서 친구들이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바람에 정신을 차렸다·
“야야 저기 봐·”
“스텔라 기사단이다·”
“으응?”
뜬금없이 무슨 소린가 해서 하늘 공원의 테라스 바깥을 내다보니 스 텔라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다리 위 로 수십 명의 기사단이 오와 열을 맞춰 척척 걸어 나가고 있었다·
머리 위로는 마법으로 만들어진 말 이 날아다니고 그들의 몸 주변에 각 각 마법의 불빛이 흩날리는 것만 보 아도 대단한 장비를 착용하고 있다 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그래서 의 문이 하나 들었다·
‘이 시기에 기사단이 나설 일이 뭐 가 있지?’
정식 출정식을 하지는 않는 것으로 보아 소규모 임무를 위해 파견을 나 가는 것 같은데 그럴 만한 일이 최 근에 있던가 싶다·
‘하기야 뭐 내가 뭐든지 다 아는 것도 아니고·’
암만 원작 로판을 읽었다지만 그 책 속의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에이 젤을 중심으로 한 서사만이 서술되 어 있었다· 그 외적인 이야기를 전 부 알지는 못하니 이런 사소한 일에 굳이 의문을 품을 필요는 없다·
그런데·
그곳에 상당히 눈에 띄는 누군가
가 한 명 있었다·
“···야· 저거 백유설이지?”
“그러게· 맞네·”
“뭐야? 진짜? 나는 시력이 안 좋 아서 안 보여·”
“어· 진짠데?”
백유설·
스텔라의 교복을 입은 그 소년이 기사단의 가장 앞에서 행렬을 이끌 고 있었다·
기사단과 저 소년이 함께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이상한데 심지어 선두에 서 있다니·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 야?’
사태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풀레임 의 머리에 혼란이 가득 들어찼다·
* * *
“···방금 뭐라고 했어?”
움찔·
차를 마시던 소녀들의 손이 그대로 정지하였다·
홍비연 공주가 이렇게까지 냉랭한 목소리를 낸 적이 얼마나 있던가·
그녀는 항상 말수가 적고 도도하지 만 그렇다고 화를 자주 내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더더욱 조심스러워질 필 요가 있었다·
홍비연과 함께 티타임을 보내던 소 녀들이 살살 눈치를 살피スト 예테린 은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보고를 해 버린 자신의 판단을 원망하며 계속 해서 말을 이었다·
예· 백유설 학생이 스텔라 기사단 에 임시로 소속되어 임무를 수행하 는 듯싶습니다·”
“···그래?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 야· 쓸데없는 보고는 안 해도 좋아·”
홍비연이 그리 말하며 눈을 감아버 리자 예테린은 나지막히 말했다·
“아무래도 공주님이 신경 쓰일 만 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군요· 그렇다면 다음의 보고는 생 략하겠습니다·”
그리 말하며 예테린이 목례한 뒤 돌아가려고 흐卜자 홍비연이 두 박자 늦게 그녀를 붙잡았다·
“아니· 잠깐만· 그래도 듣던 건 마 저 들어야지·”
“···그렇습니까?”
예테린은 속으로 살포시 웃으며 눈 치를 주자 소녀들이 우르르 일어나
자리를 떴다·
아마도 그녀들은 예테린에게 상당 한 고마움을 느낄 것이다·
“제가 전해 들은 바에 따르면 최 근 아르카니움에서 발생하는 미지의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아레인 기사 단장이 직접 그에게 도움을 청했다 고 합니다·”
¹¹그 아레인 기사단장이 직접···?”
홍비연은 예테린을 신뢰한다· 어렸 을 적부터 자신의 곁을 지켜준 유일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예테린의 말 이라도 믿을 수 있는 말과 그럴 수
없는 말이 존재했다·
이를테면··· 지금의 보고는 아무 리 생각해도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다·
차기 9클래스 마법사가 될 것으로 추정되는 세기의 괴물 마법가 아레 인이 다른 누구도 아니고 고작해야 1학년 학생에게 도움을 청한다니·
애당초 그를 직접 만나본 적도 몇 번 있었기에 그 성격 또한 잘 안다·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아레인의 자 존심은 결코 누군가에게 굽혀지지 않을 터· 그런 그가 학생에게 사건 의 해결 의뢰를 맡겼다는 건····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사건을 해결할 수 없지만 그 평민은 가능하 다는 말이 되는 건가?”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흐응···
홍비연은 백유설의 진짜 모습을 어 느 정도 알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그렇기에 오히려 아레인의 눈썰미 가 상당히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그는 자신처럼 백유설의 진실에 대 해 단 하나도 아는 것이 없을 텐데 도 불구하고 순수하게 통찰력만으로 그의 가치를 알아내고서 손을 내밀
었다는 이야기가 되니까·
하지만·
그건 그거고·
“···맘에 안 들어·”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니· 아무 말도 안 했어·”
천천히 향을 즐기던 홍차를 원샷으 로 시원스레 들이켜버린 그녀는 벌 떡 일어나서 걸어나갔다·
···내 약속을 잊은 건 아니겠지·’
설마 그럴 리는 없다·
그날의 약속은 여전히 흥비연의 가
슴에 가장 강렬한 기억으로 각인되 었고 영원한 추억으로 남았으니까·
백유설 역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