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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개학⑸
남자가 죽기 직전에 하는 가장 유 명한 말 중에 이런 게 있다·
‘죽기야 하겠어·’
그렇다·
영혼에 아공간 포켓 즉 인벤토리 를 새기기 직전에 내가 무심코 내뱉
었던 바로 그 말이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저 말처럼 죽 지는 않았다·
다만··· 죽을만큼 아팠을 뿐·
“끄허으으···
[당신의 영혼에 ‘아공간이 성공적 으로 각인되었습니다·]
엘트먼이 내 등에서 손을 떼자 회 색빛깔의 기묘한 마법진이 소용돌이 치며 모습을 감추며 가슴에서 기묘 한 감각이 느껴졌다·
[아공간 Lv·l]
* 등급: 초월
* 설명: 제4의 차완을 이용할 수 있다
▼특수 효과
* 아공간 호출
し최대 용량 120kg 부피 12m³ 의 물건을 탑재할 수 있다·
* 키워드 등록: 특정 행동이나 단 어를 등록하여 더욱 쉽고 빠르게 아 공간 호출이 가능하다·
드디어 인벤토리를 손에 넣었다·
앞으로의 생활이 정말 쾌적하고 간 편해질 것을 생각하면 눈물이 다 나 왔다·
···아니면 아직도 가슴을 코끼리 가 짓누르는 듯한 고통 때문에 눈물 이 나오는 것일 수도 있고·
“꺼흐으···「
“많이 아프겠지만 곧 완화될 거다· 내일 수업은 뺄 수 있도록 해주겠다 만 학기 초반의 진도를 못 따라가
면 너에게만 손해야· 그래도 괜찮겠 어?”
끄덕끄덕끄덕·
나는 침대에 엎어진 상태로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픈 건 아픈 거고 아무튼 교장이 직접 수업을 빼주겠다는데 거절하는 학생은 없으리라·
안간힘을 써서 자리에서 일어나자 엘트먼이 부축해 주려는 듯 손을 뻗 었다· 하지만 타인에게 아공간을 새 겨주느라 피곤할 게 뻔한 교장의 도 움까지 받을 생각은 없어서 정중하 게 거절하였다·
“백유설 학생·”
“···예·”
내가 힘겹게 침대에 엉덩이를 걸치 자 엘트먼은 식은땀을 손수건으로 훔치며 말했다·
“일반 학생이었으면 죽었을 거다·”
알고는 있다·
이건 육체적인 고통이 아니라 영 혼에 직접 타격을 가하는 고통이었 으니· 맷집이 아무리 높고 마나 실 드를 얼마나 두르던 관계없이 평범 한 마법사였다면 죽거나 정신질환을
앓았을지도 모른다·
“어지간한 7클래스 마법사도 버티 기 힘든 고통이었어· 나 또한 8클 래스를 막 달성했던 젊은 시절에 똑 같이 새겼기에 그게 무슨 고통인지 잘 이해하고· 그런데 너는····”
엘트먼은 눈을 가늘게 떴다·
“후유증이 심해 보이기는 해도 스 스로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을 정도로 정신력이 뛰어나구나·”
“···뭐 그렇죠·”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고민하 는데 그가 먼저 말했다·
“알고는 있어· 너는 평범한 학생이
아니야· 아마 우리들 중에서 누구보 다도 특별하겠지·”
“예? 그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요···
아무리 그래도 9클래스의 마법사보 다 내가 뛰어날 리는 없다· 평생을 걸려도 내 수명이 천 년이라도 내 가 9클래스의 수준을 따라잡을 수는 없을 테니까
그곳은 진짜 ‘천재’의 영역이고 범 재는 영생을 살아도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다·
“그런 뜻이 아니야· 이 세계는 9클 래스의 마법사든 진리를 깨우친 현
자든 영생을 연성한 연금술사든 심 지어는 십이신월조차도 특별하지 않 아· 그들 모두 ‘운명의 톱니바퀴’ 안 에서 맞물릴 뿐이니까·”
운명의 톱니바퀴라고?
그런 단어는 생전 처음 듣는다· 직 박구리 안경에도 나와 있지 않은 단 어였기에 엘트먼 엘트윈이 이 자리 에서 즉석으로 만든 단어라고 유추 할 수 있겠지만····
‘뭔가 조금 느낌이 다른데·’
저 단어에서 느껴지는 기묘한 이질 감이 자꾸만 내 가슴을 텁텁 막히게 만들었다·
“너는 그렇지 않아· 우리와는 다른 길을 걸을 수가 있거든·”
9클래스의 마법사가 말하는 그 ‘다 른 길’이라는 게 대체 무엇을 뜻하 는 걸까· 엘트먼 엘트윈은 내 기준 으로 굉장히 특별한 사람이다·
원작 게임의 어떤 에피소드에서 우 연히 엘트먼과 명실상부 세계관 원 탑 최강자라고도 할 수 있는 흑마도 왕과 맞붙을 정도의 실력자니까·
그런 그가 내게 ‘특별하다’라고 말 해주고 있으니··· 과연 좋게 받아 들여도 좋을 것인가·
“백유설· 하나만 묻고 싶어·”
“말씀하세요·”
평소의 그 가벼운 분위기는 어디로 사라진 채 착 내려앉은 눈빛으로 나 와 눈을 마주하며 조심스레 입술을 떼었다·
“너는 혹시 아주 만약 세상이 끝 난다면···
그러나 이내 그는 입을 다물고서 고개를 저었다·
“으응 역시 아니야· 이건··· 나중 에 물어볼게· 지금은 네 몸 상태가 영 정상이 아니잖아?”
그리 말한 뒤 쓰게 웃는데 어찌나 어색하게 느껴지던지 연홍춘삼월의
가호 덕분에 표정 관리에 완벽한 나 조차도 어색한 미소를 지어버렸다·
“나중에 들을게요·”
“피곤할 텐데 조심히 돌아가도록 해· 네 수업 여부는 미리 말해놓을 테니 걱정 말고 푹 쉬어·”
“예에····”
엘트먼의 우려를 받으며 나는 힘겹 게 일어나 교장실을 빠져나왔다·
달칵!
교장실 문이 닫히고 나니 긴장이 탁 풀리며 경직되었던 근육이 비명 을 지르기 시작했다·
’。으’
——1 •
아프다· 죽을 만큼·
심장을 움켜쥔 채 나는 힘겹게 기 숙사를 향해 걸었다·
어차피 내일은 합법적으로 수업을 빼먹을 수도 있겠다 진짜 돌아가서 잠이나 퍼질러 잘 생각이다····
학생 한두 명이 아파서 조퇴하는 일은 마법 학교에서 상당히 흔한 일 이다· 마법 전사 생도라는 존재 자
체가 실전 경험을 쌓으며 다양한 실 습을 진행하다 보니 크게 다치거나 병에 걸리는 일이 꽤 잦은 것이다·
그렇기에 누군가가 다쳐서 수업에 빠지면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 어가는 게 정상인 반면·
백유설이라는 화제의 소년이 학기 초부터 수업을 통째로 사흘 동안이 나 빼먹었다는 소식은 다른 학생들 에게 의구심을 가져다 안겨주었다·
그도 그럴게 아직 2학기가 시작된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서 아직은 오리엔테이션만 진행할 뿐 제대로 된 실습은 시작하지도 않았으니까·
“뭔 일이래?”
“내가 들었는데 여름 바닷가에 나 가서 회 떠 먹다가 식중독에 걸렸 대·”
“이래서 여름에 회는 안 된다니 까·”
“무슨 소리야· 그냥 감기라던데?”
그에 대해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 는 탓에 소문은 헛바퀴를 돌고 돌았 고 그것이 또 과장되고 와전되어 다 양한 이야기가 파생되었다·
여태까지 백유설이 1학년 생도이면 서도 워낙에 다양한 업적을 쌓은 탓 에 오죽하면 대부분의 학생들이
‘어디서 또 몰래 흑마인을 사냥하다 가 부상을 입었다’라는 근거도 없는 소문을 맹신해 버릴까·
“···걔가 아프대?”
퉁! 퉁!
농구공 튀는 소리·
끼익!
신발 끌리는 소리·
내부 강당 운동장에서 간편한 체육 복을 입은 채 농구 경기를 뛰던 풀 레임은 남자 사람 친구들에게 소식 을 전해 들었다·
“뭔 일 있나?”
“네 전 남친이잖아· 안 궁금해?”
“뭐래·,,
풀레임은 코웃음을 치며 농구공을 가볍게 던졌다·
덜컹!
깔끔한 슛 그리고 골인·
“오오· 역시 풀레임!”
“지랄 호들갑 떨지 마 띠꺼우니 까·”
“꼬우면 나보다 잘하던가·”
“내가 너보다 축구 사구 야구 테 니스 탁구 전부 다 잘하는데 농구 하나 정도는 양보해도 되지 않을
까·”
“···이런 젠장·”
친구를 약 올리며 풀레임은 벤치로 돌아와 수건으로 땀을 닦았다· 수건 을 돌려놓기 귀찮은 탓에 그것을 대 충 목에 걸친 뒤 이온음료를 벌컥벌 컥 마시고 있자니 누군가가 다가오 는 기척이 느껴졌다·
“···안녕흐!•세요·”
“앙? 뭐야 에이젤 아가씨잖아· 너 는 운동 안 좋아하지 않아?”
푸른 머리칼을 뒤로 꽉 묶은 에이 젤은 풀레임과 마찬가지로 체육복을 입고 있었는데 기초 체력단련은 꾸
준히 한다지만 스포츠를 별로 좋아 하지 않는 그녀였기에 저런 차림이 퍽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그냥요···· 기분 전환 삼아서 저 도 공이나 굴려볼까 하구요·”
“어· 너라면 잘할 거야·”
에이젤의 사기 특성 [팔방미인]이 라면 조금만 연습해도 수준급의 실 력은 나올 것이다· 그래 봐야 [전설 의 회오리 슛] 특성을 가진 마유성 보다는 한참 못 미치겠지만·
“뭐 고민 많은 표정이네? 무슨 이 유 때문인지는 알 것 같지만·”
백유설이 아프다· 그 사실만으로도
속내가 불편할 사람은 많을 것이다·
···그리고 솔직흐】 풀레임도 자꾸 만 그쪽이 신경 쓰여서 죽을 것 같 았으나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 력하고 있었다·
괜히 먼저 걱정하면 지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대충 들어보니까 그래도 밥 먹을 때는 어기적어기적 기어 나온다더 라· 죽을병은 아니것지 뭐·”
점심이나 저녁 시간이 되면 모자 를 눌러 쓴 폐인 꼴의 백유설이 나 와서 밥을 먹는다는 목격담(?)이 여 기저기서 들려오는 것으로 보아 정
말 단순히 어디가 조금 안 좋은 게 전부일 수도 있다·
“그건 그렇긴 한데···
에이젤이 가지는 걱정은 사실 백 유설이 아프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 었다·
“왜 아픈 걸까요···?”
“응?,,
그 원인까지는 생각해 보려고 한 적이 없어서 전혀 예상치도 못한 질 문이었다·
“글쎄? 거기까지 알 필요가 있나?”
“···그렇겠죠?”
하기야 조금 더 생각해 보니 뭔가 가 이상하긴 하다·
강철보다 튼튼할 것 같고 평생 감 기 한 번 안 걸려봤을 것처럼 건강 한 백유설이 뜬금없이 사흘이나 폐 인 몰골로 지내고 있으니까·
심지어는 백유설의 결석을 무려 엘 트먼 엘트윈이 직접 허락했다고 하 니 분명히 모종의 이유가 있는 것 은 틀림없었으나····
“걔는 그 정도로 안 죽어·”
풀레임은 참 시원스럽게도 그리 말 하였다·
그녀가 아는 백유설은 시간마저 역
행하고 차원의 틈새에서도 살아 돌 아오는 바퀴벌레 같은 생존력을 자 랑하는데 고작 병을 시름시름 앓다 가 죽는 건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정 뭣하면 직접 찾아가 보던가·”
“찾아가 보기는 했는데··· 괜찮다 고는 본인이 말하더라구요·”
그럼 괜찮은 거지 뭐·”
슬슬 쉴 만큼 쉬었겠다 풀레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내가 봤을 때 조만간 툭 털고 일 어나서 평소랑 똑같이 멀쩡히 걸어 다닐걸?”
역시 그렇겠죠?”
풀레임의 말에 안심한 듯 그제야 에이젤이 미소를 지으며 수긍했다·
“어· 그러니까 걱정 말고 너 할 일이나 열심히 해·”
그리고·
그날 밤 늦은 시각·
“···에휴·”
어쩐지 자꾸만 신경이 쓰여서 참을 수가 없었던 풀레임은 오밤중에 일 어나 기숙사 남자 구역에 몰래 찾 아오고야 말았다·
남녀의 기숙사 왕래를 온전히 금지
하는 학교는 아니라지만 이 시간에 여학생이 남학생 기숙사에 왔다가 사감에게 걸리면 벌점 정도로 끝나 지 않는다·
진심으로 목숨(?)을 건 기행이라고 도 할 수 있겠다·
“내 팔자야····”
다행스럽게도 백유설은 S클래스의 기숙사에서 생활하였고 이곳은 유동 인구가 굉장히 적어서 이렇게 늦은 시간에는 다른 학생과 마주칠 일이 거의 없다·
그러니 백유설만 조용히 만나고 돌 아가면 그만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풀레임?”
“으엑·”
오밤중에 하필이면 산책을 하고 싶 어서 나오던 1학년 S반의 풍하랑과 괜히 마주치기 전까지는·
“야 이 놀래라··· 이 시간에 왜 쓸 데없이 싸돌아다니는 거야?”
“···그건 내가 할 말이 아닌가 싶 은데· 여기는 남학생 기숙사다· 무슨 볼일이라도 있어서 찾아왔나?”
“어 응· 그렇지·”
백유설을 보러 왔다고 말하기가 낯
간지러워서 숨기려다 새삼 그걸 감 추는 스스로가 더욱 낯간지럽고 이 해가 가지 않아서 대뜸 말했다·
“백유설 보러 왔어·”
“···그래?”
“에휴 아프다고 시름시름 앓는다 더라· 오늘은 식사 때도 안 나왔다 던데· 죽이라도 사서 갖다 주려고·”
“그건··· 필요 없어 보인다만·”
풍하랑은 백유설의 기숙사 바로 앞 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자그마한 상 자나 봉투 같은 것들이 놓여 있었는 데 그를 걱정한 몇몇 학생들이 음 식을 가져와 놓고 간 것이다·
“저런 거랑 같은 줄 알아? 중요한 건 정성이야 정성· 그것도 내가 직 접 싸줬는데 백유설 따위가 거를 수 있을 리가 없지·”
풀레임은 그리 당차게 말한 뒤 백 유설의 기숙사로 향해서 힘차게··· 는 아니고 조용히 노크를 했다·
“아저씨· 문 열어· 누나 왔다·”
문은 열리지 않는다·
풍하랑은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안 열릴 거다· 여태까지 아무에게 도 열어주지 않았으····”
하지만 그가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안쪽에서 문이 열리더니 초췌 한 몰골의 백유설이 빼꼼 얼굴을 내 밀었다· 풀레임은 기회를 잡았다는 심정으로 열린 문을 벌컥 열고서 내 부로 쏙 들어가 버렸다·
달칵!
풀레임이 사라진 뒤 고요해진 S반 남학생 기숙사 복도·
한참이나 착잡한 눈으로 백유설의 기숙사를 바라보던 풍하랑은 체육복 저지를 걸치고서 복도를 따라 내려 갔다·
오늘 밤은 달빛을 받으며 상쾌하게
산책이라도 해볼 생각이었는데 여 러모로 심란한 밤이 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