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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여름의 끝⑶
평범한 사람이 살아가면서 ‘십이신 월’이라는 신화적 존재와 마주할 일 이 얼마나 있을까·
혹여나 마주하더라도·
그 존재를 믿을 수 있겠는가·
세상의 모든 만물에 금전적 가치를
매기며 살아온 자본주의의 젤리엘에 게 대뜸 설화 속 전설적인 존재가 찾아온다고 하더라도 꿈쩍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황금만능주의·
반드시 두 눈으로 보아서 가격표를 매기지 않으면 신뢰할 수 없다·
지극히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사고 방식이었고 그녀의 방식은 여태껏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기에 의 심하지 않고 살아왔다·
흔히 ‘돈으로 행복을 살 수는 없 다’고 한다· 젤리엘은 그 말을 여태 믿지 않았다·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녀는 틀 림없이 행복감을 느꼈으니까·
하지만····
명실상부 세계 최고의 부자로서 세 상의 모든 것을 돈으로 좌지우지하 던 젤리엘은 오늘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뒤늦 게 깨닫게 되었다·
‘그 길을 따라서 걷거라·’
머릿속에 울리는 노인의 목소리·
그의 정체는 틀림없는 십이신월·
전 세계 모든 마법사들이 염원하는 존재를 만났음에도 그녀에게는 크나 큰 감흥을 주지 못했다·
그저 그에게서 희망의 냄새를 맡 았기에··· 얌전히 뒤따를 뿐·
“이봐 헨리· 요즘 살 만해?”
“말도 마· 올여름은 장사 망했으니 까· 거 막걸리 좀 주쇼·”
“쯧쯧· 이 친구야· 그러니까 일찌감 치 장사 접고 사업이나 하자니까·”
하월평원 남부 묘호족 호수·
남부 평야 무역로의 중심에 위치한 묘호족 호수는 상당한 크기의 마을
로서 자리를 잡았는데 호랑이 무늬 의 고양이 귀를 단 수인족이 상당히 눈에 띄었다·
쏴아아아一!
거리의 주점에 앉아 갓을 쓰고서 얼굴을 가린 젤리엘은 조용히 물을 홀짝였다· 식사 생각은 나지 않았으 나 최소한의 영양분을 공급하지 않 으면 걸을 수 없었기에 어쩔 수 없 는 보급 행위였다·
그녀는 조용히 식사를 하며 주변 상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에휴···· 그러게 말이야· 나도 사 업이나 같이할 걸 그랬어·”
“거 소나기 때문에 장사라도 망했 나 봐?”
“글쎄· 소나기는 매년 이만큼 쏟아 지는데 이유가 되지는 않지·”
상인 청년은 도수 높은 술을 들이 켰다· 대나무로 만든 술잔이 인상적 이다·
“크흐···· 솔직히 말야 내 장사수 완에는 문제가 없어·”
“실패한 것들이 다 그렇게 말하고 는 하지·”
“아니 진짜라니까· 이번에 바람상 회 조합에서 코팅 우산을 대대적으 로 사업했잖아· 이게 또 엄청 반응
이 좋아서 완전 대박이었거든·”
“그런데?”
청년은 주위의 눈치를 보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별구름 상단에서 아주 제대 로 판을 흔들어버렸지 뭐겠어·”
“뭐어? 또 거기야?”
“그래· 이번에 별구름에서 내놓은 아이템이랑 겹치니까 장사를 아예 못하도록 뒤집어엎었다니까· ”
“쯧 이기적인 새끼들·”
“걔들은 항상 그래· 조금이라도 자 신들이 손해 볼 거 같으면 아예 판
을 엎어버린단 말이지· 근데 또 힘 이 너무 세서 우리가 뭘 할 수가 없어· 어쩔 수 있겠나·”
달그락!
“뭐 뭐야?”
조용히 별구름을 흉보던 상인들은 옆쪽에서 물컵 엎어지는 소리에 화 들짝 놀라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젤리엘은 조용히 사과한 뒤 물컵을 세우고서 휴지로 테이블을 닦았다·
손끝이 떨린다·
저들의 대화 익히 아는 내용이다·
그럴 수밖에·
저것은··· 젤리엘의 지시하에 벌 어진 일이었으니까·
아버지는 언제나 항상 청렴결백하 게 사업을 주도해왔기에 저런 더러 운 짓을 벌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가 상인으로서 사고할 수 있게 되었을 무렵부터는 그런 아 버지의 고집 때문에 별구름이 크게 흔들린 적이 있었는데 보다 못한 젤리엘이 몰래 뒤에서 더러운 짓에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이다·
‘돈만 되면 무슨 짓이든 한다·’
사람을 직접 죽여본 적도 있으며 기업 하나를 통째로 무너뜨린 적도 있다· 죄책감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 았던 젤리엘이었기에 행동에 있어서 망설임은 없었다·
“후우 아무튼 큰일이야· 집에는 마 누라와 자식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올겨울만 돼도 식량이 다 떨어지게 생겼거든· 난방은 무슨 끼니부터 걱 정해야 할 판이라네·”
“쯧쯧· 걱정 말게· 내가 도와줄 테 니까· 정 뭣하면 망한 사업 복구될 때까지만이라도 나랑 같이 일하는 건 어떻겠나?”
“···고맙네 정말로·”
“고맙긴 뭘· 자네가 그때 날 살려 놔서 이렇게 돕는 거니까 어떻게 보면 자네는 자네를 스스로 살린 셈 이ス]· 크크 방금 이 말 조금 멋지 지 않았나? 나중에 자서전에 써야겠 어·”
“마지막 말만 아니면 완벽했겠군·”
“하하핫!”
방금의 대화는 꽤 훈훈하게 마무리 되었지만 과연 다른 이들도 그럴까·
지금 이 순간에도 눈에 보이지 않 는 어딘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가 난에 시달려 죽어가고 있을 것이다·
젤리엘에 의해서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그녀의 머릿속에 자꾸만 새하얀 파 도가 거칠게 들이닥치는 이유는 대 체 무엇일까·
···도울 수 있는데·’
지금 당장 일어나서 저 청년 상인 에게 금덩이 몇 개 쥐여 주면 살려 낼 수 있다· 그녀의 자본력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아이고 이번 사업은 글렀어···「
“에휴· 요즘 경기가 이래서야····”
“장사하려고 떠난 그 푸줏간 할배
는 어떻게 됐다나?”
“쫄딱 망했다더군·”
청년 상인뿐만이 아니다· 여기저기 서 사람들이 앓는 소리를 냈다·
위의 이야기는 묘호족 호수에 한정 된 것이 아니었다·
젤리엘은 백유설을 되찾아오기 위 한 여정을 위해 하월평야를 횡단하 며 수많은 부족과 마을과 도시를 경 유하였는데 그들 모두가 같은 고민 거리를 가지고 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힘들어하는 가장 대표적인 이유가 바로 자신의 무리
한 사업 정책 때문이었다·
그녀의 마음속에 차곡차곡 무엇인 가가 쌓여간다·
그러다 문득 어떤 확신이 들었다·
···내가 바꿀 수 있어·’
돈으로 무엇이든 마음대로 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런 사실을 최 근에 깨닫게 되었으나 여전히 세상 은 황금으로 돌아간다·
자신의 압도적인 재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면····
틀림없이 그 소년은 기뻐하지 않 을까· 그는 자기 자신을 챙기는 것 보다도 먼저 타인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할 줄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젤리엘은 하월평원을 한참이나 걷 고 또 걸어서 횡단하였다· 비가 오 는 아침에도 안개가 낀 새벽에도 날씨가 개어 은하수 다리가 펼쳐진 한밤중에도·
마력 열차와 워프 홀이 전혀 연결 되어 있지 않은 완전한 자연의 터전·
그곳의 끝에서·
– 왔구나·
젤리엘은 마침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구름을 뚫고 솟아오른 절벽·
그 위에 세워진 새하얀 신전에는 일전에 보았던 노인이 뒷짐을 진 채 로 젤리엘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소녀를 향해 따라오라는 듯이 고갯짓을 하여 정면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웬 계단이 펼쳐져 있 었다· 하늘로 향하는 계단이었다·
-누군가는 이것을 보고 천국으로 가는 계단이라고 하더군· 어처구니 없는 소리ス]· 천국은 저승이란 말이 다 미련한 인간들·
노인의 농담은 재미가 없었으나 젤 리엘은 웃었다·
-과거로 향하는 길이다· 네가 직접 그곳으로 가서 백유설을 데려오라·
계단은 저 하늘 높이까지 솟아 있 었는데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하나 명심해야 할 점이 있다·
그는 계단을 목전에 둔 젤리엘을 향해 쓴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술주정뱅이에 도박꾼이지만 나름대로 별자리에 맞닿아 있는 신 성한 존재라서 말이ス]· 죄와 업을 가득 쌓은 이들은 이 계단을 밟을 수 없다·
어째서죠?”
– 밟으면 죽는 것보다도 아프기 때 문이 ス]· 그런데 너는 관상을 보아하 니 살면서 셀 수도 없이 많은 업을 쌓아왔구나·
사실이었기에 반박할 수 없었다·
– 너는··· 정말로 죽을 수도 있겠군· 고작 반백 년도 살지 못한 하이엘프 가 버틸 수 있는 업이 아니야·
“할 수 있어요·”
– 그래· 만약 네게 용기가 있다면 이 고통을 통해 속죄하거라· 그들이 당했던 그 모든 절망과 슬픔이 고스 란히 담겨 있을 테니·
“아니요·”
고개를 저으며 그녀는 단호한 얼 굴로 말했다·
“이 고통은 제가 저지른 것이기에 받아들일 뿐 이런 식으로 속죄하지 는 않을 거예요·”
-···그렇다면?
“저는 저만의 방식으로 속죄하겠어 요·”
이미 자신이 빼앗은 것을 그들에게 모두 원래대로 돌려줄 수는 없다·
그녀는 평생 업을 짊어진 채 살아 가야만 할 터·
그러니 가면을 벗어 던지고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으 로 세상에 헌신할 것이다·
“이 고통은··· 응당 제가 받아야 하 는 벌입니다·”
신발을 벗어 던진 젤리엘은 한 치 의 망설임도 없이 계단 위에 발을 올려놓았다·
그 순간·
마치 온몸을 톱으로 난도질하는 듯 한 끔찍한 고통이 영혼을 스치고 지 나갔다·
붉게 충혈된 눈을 부릅뜨고서 그
녀는 한 발자국을 더 내디뎠다·
비명은 새어 나오지 않는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눈을 질끈 감은 채 계단을 오르며·
모든 고통을 감내하여 받아들인다·
이제 와서 도망칠 생각은 없다·
도망칠 바에 차라리 떨어져서 죽 어버릴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죽을 수는 없다·
만약 내가 여기서 죽었다가는 백유 설이 다시 이 세계로 돌아올 수 없
을지도 모르니까·
한 걸음 오를 때마다 지옥이 펼쳐 졌고 한 걸음 오를 때마다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고 싶었으나·
인내했다·
‘나는 주저앉을 자격이 없어·’
나로 인해 많은 이들이 이러한 고 통을 느껴왔다· 메마른 마음 틈으로 새어 들어온 감정이라는 이름의 칼 날은 그녀의 영혼을 난도질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버틸 수 있 는 이유 역시도 감정 때문이었다·
누군가를 향한 간절한 마음·
얼마나 올랐을까·
그녀는 종착지를 바라보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럴 새가 없었다는 표현 이 옳을까
살아 있는 게 기적일 정도로 그녀 의 영혼은 갈기갈기 찢긴 채 간신히 버티는 정도가 고작이었으니까·
숨이 턱턱 막혀왔고 발에는 감각이 없었으며 마음의 상처 틈새 사이로 또다시 파고드는 또 다른 슬픔과 절 망은 그녀에게 자꾸만 포기를 속삭 였으나 이제는 멈출 수가 없었다·
그것을 과연 의지라고 말해도 좋을 까· 아니 이제는 정말··· 본능에 의 존하여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다 마지막 순간·
더 이상 발을 들어 올릴 힘조차 없어 계단에 발목을 걸리고 말았다·
,아····’
직감했다·
이대로 넘어지면 영영 일어설 수 없음을·
‘안 되는데····’
여기서 내가 쓰러지면 아무도 구 할 수 없는데·
그러나 기울어지는 몸을 바로잡을 힘조차 남지 않았기에 그녀는 자연 의 섭리에 자신의 몸을 맡겼다·
털썩!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넘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프 지 않았다·
여태껏 너무나 괴로웠기에 이 정도 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까·
“···사람을 마중 보낸대서 기다렸는 데 그게 너였냐?”
들려오는 목소리에 젤리엘은 천천 히 눈을 떴다·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그 소년의 얼굴 이 있었다·
‘아·’
성공했다·
그 끝없는 계단을 오르고 또 올라 서 마침내는 그에게 닿은 것이다·
힘없이 백유설의 품에 안긴 채 젤 리엘은 헤프게 웃어 보였다· 그것은 세상 살면서 가장 놀랍고 또 신기한 광경이었기에 백유설은 진심으로 경 악하고 말았다·
“왜 이래? 야채 없는 야채호빵이라 도 먹은 사람처럼·”
그토록 만나고 싶었거늘 기껏 재 회 직후에 한다는 소리가 저런 멋도 없고 재미도 없는 농담이다·
그런 점까지도·
너무나 백유설이었고 백유설다웠 고 틀림없이 백유설이라서·
젤리엘은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