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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옛날이야기⑺
젤리엘은 감히 단언할 수 있었다·
일전에 자신이 직접 원정대를 이끌 고서 유적지를 탐사할 때보다 지금 이 훨씬 더 힘들고 고되다고·
당연히 그럴 수밖에·
이곳 ‘침묵하는 미로의 숲’은 백유
설의 표현법을 따르자면 ‘고레벨 필 드’였으니까·
그래서 오히려 그렇기에·
백유설에게는 더욱 익숙한 장소일 지도 모르겠다·
저레벨의 필드는 아이템과 레벨로 찍어 누를 수 있지만 고레벨의 필 드는 그런 방식이 불가능하다·
이러한 극한의 필드를 손쉽게 돌파 하기 위한 방법은··· 단 하나뿐·
공부하고 숙지하고 직접 부딪쳐가 며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끊임없이 죽음을 맞이해가며·
직접 숙달되는 수밖에 없었다·
수준이 낮은 마법사는 감히 이곳에 서 소리를 들을 수 없으며 어느 정 도 수준이 된다고 해도 방향 감각을 완전히 상실하고 만다·
침묵하는 미로의 숲을 탐험한다는 건 체력보다는 정신력이 더욱 중요 하다는 말이 이해가 갔다·
빛이 제대로 새어 들어오지도 않아 서 시야 확보조차 어려운 와중 흐 릿한 안개 속에서 불쑥불쑥 튀어나 오는 강력한 괴수들·
한순간도 긴장을 늦춰서는 안 되 며 조금의 방심이 폐해를 불러왔으
니까
“이쪽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숲을 헤매일 필요는 없었다· 그들에게는 명확한 이정표 가 있었으니까·
백유설의 특수한 나침반을 따라서 탐사대는 아주 수월하게 숲속 깊은 장소까지 진입하였다·
베테랑 마법사들조차 당황하는 돌 발상황에도 백유설은 의연하게 대처 하며 탐사대를 이끌었다·
물론 괴수가 출몰할 때면 은근슬 쩍 뒤로 빠지는 것도 잊지 않았다·
솔직히 아직까지 그의 실력으로는
이곳의 괴수에게 흠집조차 낼 수 없 었으니까·
끼오오오-!!
“뭐 뭐야?”
“무슨 소리지?”
짙은 안개로 가려진 능선을 지나칠 무렵 어디에선가 초고음의 괴성이 들려왔으나 백유설은 신경 쓸 것도 없다는 듯 말했다·
“안개 포식자입니다·”
“안개···포식자? 그게 뭐지?”
도감에도 안 나와 있어·”
미로의 숲은 아직 제대로 탐사가
된 적이 없어서 도감이라고 해봐야 제대로 된 것들이 기록되어 있지 않 았다· 하지만 백유설의 머릿속에는 이곳에 대한 정보가 가득하다·
“미로의 숲을 둘러싼 안개는 숲의 중심부에 자리한 초거대 괴수 ‘미스 트리’ 때문입니다· 숨을 내뱉을 때 마다 마약 성분이 함유된 안개를 내 뿜는데 그걸 마시고 사는 놈들이 안개 포식자죠· 긍정적인 신호입니 다· 근처에 포식자들이 있으면 감각 이 어느 정도 돌아오거든요·”
“오··· 그렇군·”
“그러고 보니 아까보다 앞이 더 잘 보이는 것 같아·”
“그러게· 대화도 힘든 수준이었는 데 이제는 말도 잘 들리고·”
“이 틈에 빠르게 진행합시다· 포식 자는 소식하는 편이라 금방 돌아가 거든요·”
정말 그의 말대로 안개 포식자는 금세 사라졌다·
모두가 동시에 ‘어떻게 저런 걸 아 는 거지?’라는 의문을 가졌으나 질 문하지 않았다·
원정대는 점점 더 깊은 숲으로 향 하였고 이제는 한 치의 앞도 보이 지 않을 정도로 안개가 심해졌을 무 렵·
화아악-!
갑작스레 안개가 걷히며·
···유적지가 나타났다·
고대 카르멘세트의 유적·
“아···!”
“드디어···!”
모두가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미로의 숲은 정말이지 끔찍한 장소였기 때 문이다· 숨이 탁 트이는 느낌을 받 으며 원정대는 천천히 유적지를 향 해 걸어갔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이거··· 분명 얼마 전에 옮겨왔 다고 하지 않았던가?”
고대 카르멘세트의 유적지는 위치 가 시시각각으로 바뀌어 쉽사리 발 견할 수 없는 ‘유동하는 던전’이다·
하나 이걸 보라·
“이 흔적은··· 마치 수천 년 전 부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는 듯 이 자리에 동화되어 있잖아?”
수백 살 이상의 나무 넝쿨이 유적 지를 에워싸고 있었고 유적지에 낀 이끼나 풍파된 흔적 등은 결코 방금 막 생긴 흔적이 아니었다·
이 미스테리한 현상에 마법사들은
짙은 호기심을 느꼈다·
해답은 금방 나왔다·
유적지를 빤히 바라보던 백유설이 말을 툭 내뱉었기 때문이다·
“어제 제가 ‘나선 시간 이론’이 틀 렸다고 했잖습니까·”
“어,어? 그랬지· 2주 만에 다른 장소에 나타났으니까·”
“제가 틀렸네요· 박사님이 정답입 니다· 고대 카르멘세트의 유적은 공 간은 물론 시간마저도 초월하여 스 스로를 옮겼습니다·”
“뭐··· 뭐라고?”
“아마도 옮겨간 장소는 수천 년 전 미로의 숲· 그때부터 이 자리에 온 전하게 남아 있었겠지요·”
“그럴수가···
공간이동 정도는 이제 일상이 되어 새삼 놀랍지도 않았으나··· ‘시간 이동’은 마법으로 정복하기는커녕 제대로 근처에 발을 들이지도 못했 다·
느껴지는 아득한 벽·
모두가 입을 다물고서 아무런 말 도 내뱉지 못하였다·
그건··· 해성월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9클래스의 마법사라도 시간 이란 지배 불가능한 영역이었기에·
‘놀랄 만하지·’
···사실 처음부터 백유설은 이러 한 ‘설정’에 대해서 알고는 있었다· 미리 말하는 건 쓸데없는 짓이었기 에 어제는 모르는 척을 했을 뿐·
‘시간이동이라·’
아이테르 월드에서도 시간을 다루 는 존재는 극히 드물다· 아니 은세 십일월이 사실상 유일하다고 봐야만 했다· 하지만 은세십일월이 십이신 월으로서 ‘가호’를 내릴 수 있는 이 상 시간에 간섭하는 존재가 아예 없
을 수는 없다·
고대 시절을 살아가던 카르멘세트 가 딱 그러한 예시 중 하나였다·
한때 은세십일월의 가호를 받았으 나 그 능력을 박탈당하여 영원히 구 천을 떠돌게 된 가엾은 영혼·
그러나 그는 능력을 빼앗겼음에도 이미 시간을 극한까지 다룰 수 있도 록 스스로를 단련하였고 가호가 없 음에도 시간에 간섭하는 법을 터득 하고야 말았다·
“들어갑시다· 저는 지금부터 뒤쫓 겠습니다· 유적지 탐사는 더 전문가 분들이 계시니까요·”
“어,그래···· 우리가 앞장서지·”
여태껏 선두에서 원정대를 이끌었 던 백유설이었지만 그건 괜히 미로 에서 오래 헤매기 싫어서였을 뿐 유 적지까지 그럴 필요는 없다·
유적지 내부에는 수많은 마법적 함 정과 기믹 퍼즐이 존재하였다·
순간순간 두뇌를 빠르게 굴려야만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었으며 찰 나의 실수가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 한다· 하지만 역시나 베테랑답게 단 한 명의 사상자도 발상하지 않았다·
아주 천천히 진행하면서도 약간의 피해를 감수해야만 했던 젤리엘의
별구름 원정대와는 판이하게 다른 결과였다·
“···도착했군·”
해성월은 착잡한 표정으로 정면에 우뚝 서 있는 거대한 문을 응시했 다·
이곳을 넘어서면 고대 카르멘세트 의 원혼이 기다리고 있다·
“이게 정말 옳은 일인지는··· 모 르겠군·”
카르멘세트에 의하여 일어난 참사 를 카르멘세트로 틀어막는 게 과연 괜찮은 방법일까·
모르겠다·
하지만 방법이 이것밖에 없으니 이 제 와서 무를 수도 없는 노릇·
“저 혼자 들어갑니다·”
“체스는 내가···广
“아니· 내가 들어갈게·”
젤리엘이 서둘러 손을 뻗었으나 백 유설이 고개를 저었다·
“너는 일전에 카르멘세트를 만나서 승리했지?”
“네 패턴은 진작 읽혔을 거야· 상 대는 체스의 신이니까·”
“그럴 수가····”
일전에 젤리엘이 승리했던 것은 운 수 좋게도 카르멘세트의 체스 전략 이 익숙했었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공략하기 위해 수천 번 이상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왔으니 당연히 승리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체스의 신이 나의 패턴을 낱낱이 꿰뚫어 보고 있다·
그런 상대를 두고서 과연 승리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그럼 너는 이길 수 있다는 거야?”
그에 백유설은 피식 웃더니 카르 멘세트로 향하는 문을 힘껏 열었다·
“너한테 체스를 가르쳐 준 게 누 구인지 벌써 잊은 거야?”
“아···!”
끼이 익-쿵!
그 육중한 철문이 너무나도 손쉽게 열리더니 붉은 불빛 두 개가 나타 나 허공을 넘실거렸다·
그것은 틀림없는 누군가의 안광·
카르멘세트의 원혼은 눈빛을 번쩍 이며 스산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끌끌끌 위대하고 고결한 영혼이
찾아왔구나· 나를 깨운 이유가 무엇 이더냐?
“닥치고 체스판이나 깔아·”
고대의 존재를 목전에 두고서도 대 뜸 막말을 내뱉는 백유설을 보며 만 월탑의 마법사들은 말을 잃고 말았 다· 카르멘세트 역시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는지 당황하는 게 보였다·
-어리석은 자여· 무례한 태도를 보 여서 내게 좋을 게 없을 텐데?
“뭐래· 너 체스 개못하잖아· 나보다 하수한테는 존댓말 안 해·”
-···이거 안 되겠군·
쿠구구구궁!!
순식간에 바닥이 뒤집히기 시작하 자 대문 앞에서 대기하던 마법사들 이 뒷걸음질을 쳤다·
백유설이 딛고 있던 지형은 순식간 에 흰색과 검은색으로 칠해지더니 거대한 체스판이 완성되었다·
사람보다도 커다란 체스말이 육중 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으나 ‘킹’의 자리가 공석이었다·
-네가 킹이 되어 나와 소울 체스 를 둔다· 네가 승리하면 소원을 이 루어줄 것이나 패배하면 너의 영혼 은 나의 것이다·
“그래· 알고 있어·”
백유설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신 호로 체스가 시작되려는 그때·
···쿠구구구궁!!!
갑작스레 요란한 굉음이 유적지 전 체를 뒤흔들었다·
“으아”? ド
“무 무슨 일이야!”
“크윽···
이리저리 바닥이 흔들려서 중심을 제대로 잡기도 힘들 정도· 마법사들 은 각자 마법을 사용하여 자리에 스 스로의 몸을 고정하였고 백유설도 서둘러 검을 빼들어 바닥에 자세를 낮추었다·
‘뭐야? 뭔 일이야?’
그에게도 이런 돌발상황은 전혀 예 측하지 못한 것이었기에 놀랄 수밖 에 없었다·
**···큰일이군· ‘미스트리’가 활동 을 개시한 모양이야·”
유적지의 출구를 바라보며 해성월 이 표정을 찡그리고서 말했다·
“미 미스트리 말씀이십니까?”
“그래·”
미스트리는 백 년에 한 번 활동한 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평소에는 잠 자코 있으나 어느 순간 잠에서 깨 어나면 요란스럽게 잠꼬대를 하여 온 사방의 지형을 뒤집어 놓는다·
그러나 정말 아주 간혹 발생하는 일이었기에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있 었는데 하필이면 이 순간에 미스트 리가 깨어나다니·
“백유설· 돌아오도록 해라·”
“···타 탑주님!”
해성월은 냉정하게 판단하였다·
“바깥으로 대피하지 않으면 대참사 에 휘말릴 수도 있다· 평범한 지형 이 붕괴되는 것이라면 내가 얼마든 지 막을 수 있겠으나 ‘공간형 던전 의 붕괴에 휩쓸리면 어떻게 되는지 는 자네도 똑똑하니까 잘 알겠지?”
알다마다·
던전의 붕괴에 휘말리면 그 자리 에서 소멸해 버리는 수도 있다·
하지만··· 이곳은 사정이 조금 다 르다· 일전에 말했다시피 카르멘세 트의 유적지는 공간형 던전이 아니 라 세계 유일무이 ‘시간형 던전’이
었으니까·
어쩌면 휩쓸리더라도 소멸하지 않 을 수도 있다·
“아뇨· 저는 여기에 남아서 체스를 두겠습니다· 먼저 원정대 여러분을 이끌고 대피해 주십시오·”
“···미쳤군·”
“어쩔 수 없습니다· 시간형 던전이 같은 시대에 두 번 존재하는 것도 기적입니다· 지금 카르멘세트의 유 적지를 잃어버리면 영영 멜리안 회 장님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모릅니 다·”
백유설은 자신의 말을 끝마친 다음
뒤돌아 카르멘세트를 응시하였다·
두두두두두!!
그들이 침착하게 대화를 나누는 와 중에도 던전은 지금 이 순간에도 거 칠게 진동하였다·
“타 탑주님!”
“어서 빠져나가야 합니다!”
해성월은 그런 백유설의 뒷모습을 잠시 응시하였다·
그의 마법이라면 백유설을 억지로 끌고 나가서 미래를 기약하도록 하 는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돌아가세·”
“아···!”
해성월이 말이 떨어ス1자마자 원정 대는 서둘러 던전을 빠져나가기 시 작하였다· 냉정해 보인다고도 할 수 있겠으나 남아서 백유설을 기다리 는 건 정이 많은 게 아니라 멍청한 행동일 뿐이다·
마법사들이 정신없이 던전을 빠져 나가는 와중 카르멘세트와 백유설 의 소울 체스가 시작되었고·
그런 그들을 등진 채 해성월은 뒷 짐을 지고서 여유로운 걸음으로 뒤 돌아 나아갔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젤리엘·”
흘로 남아서 백유설의 체스를 지 켜보려 하는 어떤 한 소녀가 아니었 다면 말이다·
“먼저 돌아가세요· 저는 여기에 남 아서 백유설의 체스를 끝까지 지켜 볼 거예요·”
아니· 그럴 수는 없다·”
“제 아버지를 되찾기 위한 싸움이 에요 먼저 돌아갈 수는 없···
툭!
읏!”
젤리엘이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해성월은 그녀의 이마에 손을 가져 다 대었다·
그러자 그녀의 몸에서 서서히 힘이 빠지며 더 이상 저항하는 게 불가 능하였다· 덜덜 떨리는 몸을 어떻게 든 움직이려고 애써 보는 젤리엘이 었지만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는다·
그녀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해성월 을 바라보았으나 개의치 않았다·
“미안하구나· 네 아비는 네가 이런 식으로 죽지 않기를 바랄 것이다·”
애당초 그녀에게는 의사결정의 권 한이 없었다· 처음부터 해성월은 젤
리엘에게 위험한 짓을 결코 시키지 않을 생각이었으니까·
힘이 완전히 풀려 버린 젤리엘을 마법으로 이끌고 나가며 해성월은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씁쓸하군·’
첫 만남부터 인상적이었던 천재적 인 소년· 비록 마법을 사용하지 못 하는 신체였으나 어쩌면 훗날 세계 를 이끌 위대한 대마법사가 되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거늘·
‘안타까운 인재를 잃게 되는구나·’
힘이 빠진 몸으로도 어떻게든 발버 둥치는 젤리엘을 이끌고서 해성월
은 가장 마지막으로 유적지를 빠져 나왔고·
···슈욱-!
그 순간·
카르멘세트의 유적지가 완전히 소 멸하여 세상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아···!”
털썩·
그 광경을 보며 젤리엘은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공허한 눈동자가 유적지의 흔적을 한참이나 바라보았으나··· 이미 그 곳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