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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옛날이야기⑵
위잉!위잉!
요란스레도 울려대는 사이렌에 섞 여 빗물이 추적추적 쏟아져 내렸다·
쿠르릉···!
벼락이 요란스럽게도 세상을 두드 리자 젤리엘의 창백한 뺨이 푸른색
으로 물들었다· 그녀는 공허한 눈동 자로 넋이 나간 듯 한참이나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곳은 아마도·
아버지가 앉아계셨을 자리였다·
세계 상공 기업 회의·
별구름 회장을 포함하여 각국의 내 로라하는 정치인과 기업인들이 모여 세계의 경제 발전을 목적으로 토론 을 가지는 모임·
참가자만 무려 100인에 달하는 이 회의는 세계의 최정상들이 모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그중에서 도 젤리엘의 아버지 멜리안은 최고
의 상석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없다·
99인의 참가자 모두가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증언하였으니까·
‘멜리안 회장이 사라졌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눈앞에서 먼 지가 되어 화했다는 것이다·
쏴아아아-!!
쿠르릉!
소나기가 유난히 거세다·
거탑의 꼭대기에서 진행되는 상공 기업 회의는 현재 토론이 종료되어 천장이 거둬진 채였는데 덕분에 젤
리엘은 구름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소나기를 맨몸으로 맞을 수밖에 없 었다·
아버지의 실종 이후 사흘이 지났다·
많은 일들이 있었다·
전 세계 각지에서 ‘거탑’ 후보로 거론되는 대마탑의 마법사들이 찾아 와 수색을 도와주기도 하였으며 당 장에 바깥에 깔린 경찰 수색기동대 만 해도 수백 대였고 갑철 마법 기 사단이 찾아와 호위를 도와주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수백 명 이상의 취재진이 찾아와 진을 치는 바람에 7클래스의 마법사
들이 폴리스 라인의 결계를 쳐야만 했다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으며 혹 여나 멜리안의 생명을 감지할 수 있 을지도 모른다며 연금술사들의 천공 위성이 지금도 구름 아래를 둥실 떠 다니며 사방을 비추고 있었다·
고작 단 한 사람을 찾기 위해 세 계 각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어 모든 힘을 쏟아붓는다·
그만큼 아버지가 대단했다는 의미 였으나 그런 것따위는 젤리엘에게 아무런 위안이 되지 못했다·
빗물에 젖은 타이포그래피처럼 주 변의 모든 풍경이 흘러내렸다· 아무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결국 그 누구도 아버지의 흔적조 차 발견해 내지 못하고 있다·
···자신도 포함해서·
‘나 때문이야·’
다른 무언가 또 다른 원인이 있었 다면 그래서 아버지가 사라졌다면·
원망할 대상이라도 있었을 텐데·
이 사태가 오로지 자신의 잘못 때 문이었기에 그녀는 그 누구도 원망 하지 못한 채 스스로의 감정을 서서 히 깎아내리고 있었다·
‘나는 대체 무슨 짓을···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저녁이었다·
눈을 감았다 뜨니 해가 떠 있었고·
흐릿해진 눈을 깜빡이니 또다시 저 녁이 었다·
며칠이 지났을까·
같은 자리에서 미동조차 하지 않는 그녀를 걱정하여 별구름의 전속 의 료진이 찾아왔으나 젤리엘은 그들 에게 시선조차 두지 않았다·
“미련한 것·”
그가 찾아온 것은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 어느 날 오후였다·
아직 해가 중천에 떠 있을 시간이 었거늘 먹구름에 가려져 하늘이 어
둑어둑하기만 하다·
“기어이 이런 사달을 냈구나·”
세계에서 최정점이라 불리는 9클래 스의 마법사 중 한 명이자 서부 사 막의 기둥이라 불리는 사내·
만월의 거탑주 해성월·
그가 젤리엘을 찾아왔다·
멍한 눈으로 해성월과 눈을 마주친 그녀는 기계적으로 목례를 했다· 해 성월은 그 꼬라지가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성큼 다가오더니 젤리엘의 뺨을 힘껏 후려쳤다·
짜악-!!
볼이 얼얼하다·
아주 조금 정신이 돌아왔다·
“고대 카르멘세트를 찾을 때 아무 도 경고하지 않았더냐?”
경고했다·
지금 눈앞에 서있는 세상에서 가 장 위대한 마법사가 직접·
‘카르멘세트는 너의 모든 것을 파 멸로 이끌 것이다·’
멜리안과 교류 관계를 맺고 있는 해성월은 어린 시절의 젤리엘과 마 주할 때마다 줄곧 충고를 해주었다·
그러나 듣지 않았다·
자신이 가장 옳다고 믿었기에·
“그래서 지금 어떤 꼴이 되었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젤리엘은 고개를 천천히 들어서 빗 물에 젖은 분홍빛 입술을 떼어 그에 게 물었다·
“저는··· 어떡해야 하나요···
혀를 찬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 다· 멜리안은 사업적인 관계 외에도 워낙 성격이 좋은 탓에 술친구로서 자주 만나고는 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가버릴 줄이야·
해성월 또한 나름대로 필사적으로 그를 찾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나 도 저히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카르멘세트에게 어떤 소원을 빌었 느냐·”
“···아버지에게 영생을 달라고 하 였습니다·”
“멍청하고 우둔하고 어리석군· 네 무지가 아버지에게 해악을 끼쳤다·”
그는 젤리엘과 눈을 똑바로 마주쳤 다·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꿰뚫어 죽 일 수 있는 대마법사의 시선에 그녀 의 몸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렸 으나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네 소원은 분명히 이루어졌을 것 이다·”
“···네?”
“너에게 삶이란 무엇이냐?”
너무나도 철학적인 질문이었다·
기계적이고 계산적이고 합리적으
로 살아온 젤리엘에게 있어서는 덧 없이 어려운 질문이기도 했다·
“저마다 ‘삶’의 의미는 다르다· 누 군가에게는 마법의 진리를 파헤치는 것이 곧 삶의 의미일 것이고 누군 가에게는 물욕을 채우는 것이 삶의 의미일 수도 있겠지·”
해성월은 말했다·
“그런데 너는 아무런 조건도 규칙 도 제한도 없이 단지 영원한 삶을 달라고 하였다· 세상의 모든 존재가 저마다 각자 다른 삶의 의미를 타고 나는데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그제야 그의 말뜻을 이해한 젤리엘
은 눈동자를 크게 뜨고서 입술을 파 르르 떨었다·
“서 설마···!”
“그래· 네 아버지는 ‘카르멘세트의 삶에 가치관이 맞춰졌다· 아마도 그에게 있어 영생이란 육신을 버린 채 혼령이 되어 구천을 떠도는 것이 겠지· 본인이 그러한 것처럼·”
“아···广
털썩
젤리엘의 몸이 그대로 무너져 바 닥에 무릎을 끓고 말았다·
육신의 완전한 소멸·
그건····
죽음과 다를 게 없지 않은가·
“지금도 네 아비는 자아를 상실한 채 혼령이 되어 아이테르의 어딘가 를 떠돌고 있겠지· 안타깝게도 유령 을 탐지하는 기술은 존재하지도 않 으며 설령 그의 혼을 찾는다 하여 도 소멸된 육신을 복구하는 건 불가 능하다·”
등을 돌리며 해성월은 냉정하게도 판단을 내렸다·
“···너의 아비를 찾는 것은 포기 하거라·”
만월탑주는 안개가 되어 사라졌고
젤리엘은 그가 서 있던 자리를 넋이 빠진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흐흐··
가슴이 터질 것처럼 답답하게 콱 막혀왔고 목울대를 타고 무언가가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으며 머리가 깨져 버릴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이게 뭘까
살면서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다·
아니 이건 감각이 아닌····
감정이었다·
* * *
비록 입으로는 포기하라고 말했으 나 해성월은 만월의 거탑 인력을 총 동원하여 유체 탐색 신기술 개발에 착수하였다고 한다·
그 외에도 혹여나 다른 형태로 멜 리안이 생존해 있을 가능성을 생각 하여 엘리트 마법 수색대를 풀어놓 았으나 여전히 성과는 없었다·
그렇게 이 주일쯤이 경과하여 몸도 마음도 지쳐갈 무렵·
“학생· 운세 좀 봐·”
···웬 지나가던 점쟁이가 젤리엘 에게 말을 걸었다· 현장의 수색을
지휘하던 와중이었기에 사소한 말씨 름을 할 틈은 없었으나 점쟁이가 찾 아온 타이밍이 아주 기가 막혔기에 젤리엘은 잠시 멈출 수밖에 없었다·
”뭐야 아줌마? 여긴 어떻게 들어 온 거야! 당장 나가!”
“쯧쯔· 요즘 젊은 것들은 말이여·”
수색대가 점쟁이를 쫓아내려고 했 으나 젤리엘은 손을 들어서 막았다·
“기다리세요·”
“네? 네 넵!”
“물러나겠습니다!”
현재 이 장소는 7단계 폴리스 라
인 결계로 보호되는 구역이다· 일반 인은 결코 쉽게 출입할 수 없다는 의미· ‘우연히’ 들어왔다는 말로는 결코 설명되지 않는다· 젤리엘은 경 비를 그렇게 허술하게 두지 않았다·
“흘흘 운세 좀 볼텨?”
게다가 눈앞의 이 점쟁이·
뭔가 느낌이 이상하다·
분명히 살아 있는 생명체를 마주하 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거대한 산을 올려다보는 느낌이었 다·
해성월과 마주했을 때도 이런 느낌
은 받지 못했다· 그녀는 오싹한 기 분을 애써 꾹꾹 눌러담으며 말했다·
네· 운세를 보고 싶어요·”
“어떤 운세를 보고 싶으냐?”
젤리엘은 잠시 고민하였고·
“···재회운· 재회운을 봐주세요·”
“흘흘흘· 그리움은 아름답지만 애 달픈 감정이기도 하지·”
그리 말한 뒤 점쟁이는 먼 곳을 바라보았다· 아득히 머나먼 어딘가 젤리엘의 인지 능력으로는 감히 바 라보는 것조차 불가능한····
“네가 그리워하는 이와 함께 그렸
던 추억의 장소가 있을 것이다·”
“그곳을 찾아가보거라· 너의 재회 운이 좋다면 재수 좋은 만남을 가 질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홀홀·”
점쟁이는 그리 말한 뒤 굽은 등을 돌려 터덜터덜 어디론가 걸어서 사 라졌다· 젤리엘은 그녀의 말을 한참 이나 머릿속으로 곱씹었다·
‘추억의 장소····’
젤리엘과 아버지는 평생을 바쁘게 살아온 터라 추억을 그리 많이 쌓지 는 못했다·
그러나 단 한 곳
추억을 쌓았던 장소가 틀림없이 존 재했다·
* * *
당시의 젤리엘은 아버지의 손을 잡 고 열차를 탑승했던 것 같다·
‘해피랜드로 향해요!’
낡아빠진 팻말이 소나기에 부딪혀 비り 걱 거린다·
이곳은 오로지 놀이공원으로만 운 행하는 ‘해피라인,이 움직이던 열차 역· 지금은 해피랜드가 폐쇄되어 아
무도 찾지 않는다·
관리가 전혀 되지 않아 철로 위에 는 초록색 잡초가 잔뜩 자라났으며 몇 년 전의 포스터가 너덜거리고 잔 뜩 갈라지고 박살 난 벽면과 운행을 멈춘 에스컬레이터 등은 어쩐지 서 늘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다·
추억의 장소·
그날 젤리엘은 아버지의 손을 잡 고 생에 처음으로 여행을 떠났다·
오로지 그녀를 위해 운행이 종료된 해피라인의 열차가 움직였었고 오 로지 그녀를 위해 가동이 정지된 해
피랜드에 불빛이 들어왔었다·
또각!
찰팍!
젤리엘이 걸어갈 때마다 바닥에 고 인 물방울이 튀었다· 검은색의 심플 한 드레스는 우산을 쓰지 않아서 흠 뻑 젖은 지 오래였으나 전혀 개의치 않았다·
아무도 없는 열차역을 한 걸음씩 걸어갈 때마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함께했던 그 날의 기억이 자꾸만 떠 올랐다·
벌써 10년 가까이 되어갔으나 그 녀의 완벽한 기억력은 단 한 순간조
차 기억 속에서 놓치지 않았다·
아버지와 함께 걸었던 이곳을 이 제는 혼자 걷는다·
쏴아아-!
열차역 승강장으로 걸어 올라가자 관리되지 않은 천장에 구멍이 뚫려 소나기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듬성듬성 새어 들어오는 소나기 사 이를 피해서 걷던 젤리엘은 문득 느 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
웬 소년이 있었다·
흑색의 날림 머리칼 스텔라 교복·
우산을 쓴 채 웬 포스터를 바라보 며 머리를 긁적이는 그 옆모습 은··· 틀림없는 백유설이었다·
‘···왜?’
대체 왜 저 소년이 여기에 있느냔 말인가· 이성적으로는 도저히 이해 할 수 없었으나 젤리엘은 저도 모 르게 그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찰팍! 찰팍!
발걸음이 빨라진다· 걸음에 방해가 되는 굽 높은 구두는 벗어 던진 지 오래였다· 점점 그가 내게 더 빠르 게 다가온다·
아니 아니다·
내가 그에게 더 더 더 빠르 게··· 다가가고 있었다·
“··어?”
백유설은 웬 못생긴 사람이 그려져 있는 포스터를 황급히 등 뒤로 숨겼 으나 애당초 젤리엘은 그곳에 시선 조차 한 번도 두지 않았다·
“하아 하아···
“뭐 뭐야? 갑자기 왜 그래?”
영문도 모르는 백유설이 당황하든 말든 젤리엘은 그의 앞에 도달하자 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바닥 에 주저앉았다·
쏴아-!!
하필이면 소나기가 쏟아지는 자리 였거늘 그녀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지도 못한 채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 손이 간신히 닿은 곳은··· 고작 해야 백유설의 바짓자락·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소년 과 눈을 마주하였다·
착각은 아닐 것이다·
젤리엘의 눈에 고여 있는 건 빗물 따위가 아닌 틀림없는 눈물이었다·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벌어진 참 상·
9클래스의 위대한 대마법사조차 포 기를 선언했다· 모래사장에서 소금 한 톨조차 찾아내는 최고의 수색대 조차 고개를 저었다·
모두가 가능성이 없다고 말했다·
희망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를 본 순간 희망이 심장 에 감도는 이유는 대체 뭘까·
“너 설마····”
무언가를 눈치챈 백유설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그녀는 마침내 눈물 을 쏟아내며 입술을 떼었다·
“···도와줘·”
그를 괴롭혔고 해하려 했으며 또 한 인생을 망가뜨리려고 했던 나 따 위가 할 말이 아니었다·
이제는 감정이 생겼기에 안다·
내가 그에게 했던 짓이 얼마나 추 악하고 못된 행위였는지를·
그 죄책감이라는 이름의 송곳이 자 꾸만 심장을 파고들어 그녀를 괴롭 게 만들었다·
이성적으로 백유설이 자신의 부탁 을 들어줄 리가 없었다·
역지사지로 생각해 보아도 나 같 은 쓰레기의 부탁을 대체 누가 들어 준단 말인가·
그녀는 혼자였고 혼자서는 아무것 도 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제발 제발··· 나는 이제 아무것 도할수가없어····”
젤리엘은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야·”
백유설이 말을 걸어오자 소나기가 갑작스레 멎었다·
쏴아아-!
여전히 빗소리가 세상을 뒤덮고 있 는데 이상하게도 그녀의 머리에는 더 이상 소나기가 떨어지지 않았다·
‘아···
다시금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하 니 백유설이 내게 우산을 씌워주고 있었다·
“감기 걸린다·”
그리 말하며 소년이 손을 뻗어오 スト 젤리엘은 덜덜 떨며 양손으로 그것을 붙잡았다·
“아 아으····”
그의 행동이 무슨 의미인지 잘 알 았기에 그녀의 심장 속에서 무수히 많은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소나기가 억수로 쏟아지는 날·
분명 우산을 쓰고 있었거늘 젤리 엘의 뺨을 타고 유난히도 뜨거운 빗 방울이 홀러내렸다·
감정을 담은 빗방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