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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모든 게 녹아내린(2)
아돌레비트 왕국 수도 테할란·
이 도시는 그다지 분위기가 좋다고 말할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관광지 로서 발달해 있기는 했으나 워낙에 칙칙하고 서늘한 날씨 때문이었다·
하지만 레비앙의 해안에서 모든 일 을 끝마치고 다시 돌아왔을 때 테
할란은 많은 게 바뀌어 있었다·
*···예쁘네·’
홍비연은 처음으로 테할란을 보며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저 족 쇄처럼만 느껴졌던 도시였거늘 구 름이 싹 걷히고 따사로운 햇살이 떨 어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나 아름다운 도시가 될 줄이야·
혹은··· 예전과는 다른 취급을 받 게 되어서 그렇게 느끼는 것일 수 도 있었다·
“공주님이 탄 마차 행렬이다!”
“비켜봐!”
“공주님!! 이쪽 한 번만 봐주세요!”
“사진 한 장만 제발!”
아돌레비트의 셋째 공주가 탄 마차 가 수도로 입성했다는 소문이 퍼지 자 이미 거리에 시민들로 가득했다·
카메라 셔터 소리는 겹치고 겹쳐서 이제는 소음 같지도 않았고 환호성 은 오는 길에 다른 도시에서도 질릴 대로 들어서 이제는 익숙해졌다·
서리궁전으로 향하는 모든 대로마 다 시민들이 쫙 깔려서 홍비연을 환 호하였다·
레비앙의 해안은 도시 테할란에서 도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던지라 재 앙이 발생했던 당시 그 여파가 이곳
까지 닿았었다고 한다·
한여름임에도 불구하고 갑작스레 영하까지 기온이 내려가질 않나 하 늘 전체가 붉은색의 먹구름으로 물 들어 붉은 스파크가 튀지를 않나·
그러한 끔찍한 현상을 직접 겪었 으니 홍비연이 해낸 일을 제대로 실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녀가 탑승한 마차는 테할란 수도 를 한 바퀴 크게 돌아 서리궁에 천 천히 입성하였다·
서리궁전의 정문에는 500여 명의 군악대와 의장대가 도열하고 있었는 데 이건 정말로 이전과는 판이하게
다른 대우였다·
홍비연이 입궁을 했는지 안 했는지 조차 모를 정도로 이전에는 그 어떠 한 환영도 없었으니까·
물론 아무리 그녀가 대단한 일을 했다지만 도열은 여왕이 시키지 않 으면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러한 대접은 홍비연에 게 아주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여왕 홍세류가 자신을 인정했다는 의미였으니까·
“셋째 공주님 입성하십니다!!”
마나를 실어서 외치는 사자후가 천 지를 쩌렁쩌렁 울려댔다·
뿌우우-!
웅장하게 울리는 나팔 소리와 함께 시작되는 군악대의 음악이 그녀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다·
홍비연은 최대한 침착하고 따분한 표정을 가장하여 창밖을 가만히 바 라보았다· 훗날 이러한 모든 이벤트 는 자신에게 당연한 일이 될 것이기 에 홍분해서는 안 된다·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궁에 도착하니 여왕의 친위기사단 이 그녀를 맞이하였다·
,,알아,,
홍비연이 가볍게 턱짓하여 안내하 라하고 지시하자 친위기사단은 고개 를 꾸벅 숙인 뒤 그녀를 여왕의 알 현실로 인도하였다·
“왔나·”
알현실에 도착하니 피곤에 잔뜩 찌 든 듯한 홍세류가 그녀를 맞이하였 다· 화장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다크 서클과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 뭉치 만으로도 그녀가 무슨 고생을 했는 지 보여주고 있었다·
그만한 잘못을 저질렀는데 고작 저 정도로 그친 게 다행이라고 할 수도 있을까·
“앉아라·”
평소의 홍세류였다면 서류에서 시 선을 떼지도 않았겠거늘 홍비연이 오자 그 산더미 같은 서류를 잠시 내려놓은 뒤 깍지를 끼고서 눈을 마 주하였다·
“커피?”
“커피 안 좋아하는 거 아시지 않습 니까·”
“···몰랐군· 미안하게 됐다·”
그 뒤로도 한참이나 홍세류는 말을 꺼내지 않았고 흥비연은 그저 기다 렸다· 커피조차 마시지 않고 있자니 이 침묵이 굉장히 어색하다·
결국 백기를 먼저 든 쪽은 홍세류 였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일전의 일은 진심을 담아서 감사 를 표하도록 하겠다·”
그 말에··· 홍비연은 순간 가슴이 철렁였다·
꿈에도 몰랐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여왕 홍세류 가 스스로 고개를 숙이는 날이 올 줄은· 여왕의 사과를 이토록 쉽게 들을 것이라 누가 생각했겠는가·
“나는 잘못되었다· 그리고 네가 그 것을 바로잡았지·”
“너는 화령꽃을 천년 만에 처음으로 제어하였고 레비앙 해안의 영원한 겨울의 저주를 녹여냈다· 그리고····”
홍세류는 단호하게 말하였다·
“여태까지 내가 형평성에 어긋나 는 짓을 저질렀다는 점을 인정해 야겠지· 그러한 부분에 있어서도 진심으로 사죄의 말을 전하고 싶 구나· 받아줄 수 있겠나?”
잘못한 주제에 뭐 저리 당당하겠 느냐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여왕 은 그래야 한다· 아무리 잘못했다 고 해서 아돌레비트의 여왕이 상
대에게 고개를 숙이는 건 품격이 떨어지는 일이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흥세류는 홍비연 이 되고 싶은 여왕의 정확한 표본 이라고 할 수 있었다·
“예· 받아드리도록 하지요·”
그렇기에 홍비연 또한 고개를 치 켜들고서 홍세류의 사과를 무덤덤 히 받아내었다·
“그래··· 고맙구나·”
여왕은 홍비연에게 책한 권과 서류뭉치를 내밀었다·
“그간은 내 사사로운 감정으로 인 하여 받지 못했던 정식 왕족 교육을
받게 될 것이다· 그 어떤 것에도 차 별을 두지 않겠다· 교육부터 시작해 서 먹을 것 잠자리 하다못해 숟가 락마저도· 그러니 첫째 공주와 동등 한 위치에서 경쟁하도록·”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차별을 받지 않는구나· 홍비연이 냉큼 서류를 받 으려는 그때 홍세류가 덧붙였다·
“단·”
“··
“이것을 받기 전에 하고 싶은 이 야기가 있다·”
홍비연은 다시 자세를 고쳤다·
어차피 받게 될 대가인데 서두른다
고 해봐야 싸보일 뿐이니까·
“네· 해보세요·”
“나는 너에게 씻을 수 없는 은혜 를 입었다· 그리하여 뒤늦게나마 이런 낯부끄러운 같잖은 짓을 하 고 있는 것이겠지·”
하지만 이라며 홍세류는 말했다·
“나는··· 여전히 너를 미워한다· 이 감정은··· 내 딸이 죽은 순간 부터 심장에 새겨져서 더 이상 지 울 수가 없나 보군·”
홍비연은 무덤덤하게 여왕의 눈을 마주하였다· 여전히 자신이 싫다고 말하고 있음에도 정말 더 이상 아
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녀가 나를 싫어하든 좋아하든 인 정하든 이제는 정말로 아무런 상관 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이상 감성에 지배당해 이성적으로 그릇된 판단을 하고 싶 지 않다· 그러니 너에게는 비밀로 하고 있던 사실 하나를 말하겠다·”
“비밀?”
홍세류는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은 말을 하는 사람처럼 무미건조하게 툭 말을 내뱉었다·
“아돌레비트의 직계 혈족은 30세 를 넘기기 전에 반드시 죽는다·”
“···아·”
“그리고 너처럼 불꽃의 재능을 타 고난 아이들은··· 스물을 채 넘기 는 것조차 버겁겠지·”
가슴을 망치로 울린 듯 거센 진동 이 온몸을 타고 퍼져 나갔다· 그러 나 홍비연은 손끝조차 떨지 않았다·
믿을 수 없어서?
아니·
비록 여태 알지는 못하였으나··· 어 렴풋이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주를 이겨내는 방법은 단 하나· 여왕이 되어 왕관을 하사받는 것·
그렇기에 역사 속 모든 아돌레비트 가 치열하게 싸워왔던 것이다· 왕이 되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홍세류는 자신의 왕관을 어루만지 며 씁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네 어미처럼 핏줄의 힘을 희미하 게 타고난 경우 모든 불꽃과 마법 을 포기하여 그 수명을 조금이나마 연장할 수는 있겠으나 그것은 고통 스럽고 불명예스러운 일이다·”
마법사가 마법을 포기해서까지 살 아갈 이유가 과연 있을까?
글쎄·
그럼에도 홍비연의 어머니는 그렇
게 해서라도 살아가는 것을 택했다·
더 이상 여왕이 될 수 없음에도 그녀가 그리하였던 이유·
···설마·’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언제나 자신에게는 가혹하기만 했 던 어머니였다· 단 한 순간도 따뜻 한 눈빛을 지어 보여주신 적이 없으 며 매 순간순간 혹독한 교육과 체벌 을 내려주셨던 어머니 홍이엘·
그녀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돌레비트에의 핏줄이 새겨진 이 끔찍한 저주를·
그렇기에 여왕이 될 수 없다는 사 실을 깨닫자마자 자신의 자식에게 죄송스러워졌던 것이다·
현왕에게 적대하였기에 자신과 자 식이 아돌레비트에서 설 자리는 없 을 것이며 제대로 된 교육 따위는 받지 못하리라 생각한 그녀는··· 왕족으로서 모든 직책과 마법을 포 기한 뒤 스텔라의 교수가 되었다·
“으·”
홍비연은 머리카락을 움켜쥐고서 입을 다물었다· 홍세류는 그런 그녀 를 보더니 이제는 하지 않을 것 같 은 말을 또 내뱉는다·
“그래서 나는 개인적으로 네가 여 왕이 되지 않았으면 한다·”
”··또 그 소립니까?”
“아니· 지금의 나는 멍청하게도 사 사로운 감정에 휩쓸려 그릇된 판단 을 하지 않아·”
홍세류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도 또렷했다·
“너는··· 왕관 없이도 저주를 극 복할 수 있을 것이다· 화령꽃을 제 어하는 데에 성공했다면 불의 화신 이 직접 핏줄에 새겨둔 저주를 지우 는 것도 그리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 지·”
그건 처음 듣는 사실이었기에 홍비 연이 가만히 반응조차 하지 않자 홍세류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 쉬었다·
“그래도 이런 게 무슨 소용인가 싶 겠군· 정작 너는 여왕이 되고 싶고 둘째 공주는 여왕이 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니····”
“예? 잠깐 그게 무슨 소립니까?”
둘째 공주 홍시화가 여왕이 될 생 각이 전혀 없다고? 그럴 리가 없다· 지금껏 여왕이 되려는 나를 얼마나 방해했는데 그 여자가·
심지어 목숨까지도 노렸단 말이다·
되었다·”
그러나 홍세류는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며 고개를 젓더니 자리에서 일 어났다·
“이 서류를 가지고 돌아가거라· 방 학이 얼마 남지 않았으나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
“알겠···습니다····”
대화는 거기서 종료되었고 흥비연 은 얼떨떨한 의문을 가득 안고서 알 현실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공주님· 곧바로 청령궁으로 돌아 가시겠습니까?”
친위기사들이 그녀에게 붙으며 말 하였다· 아직 예테린이 복귀하지 않 은 탓에 그들과 함께하고는 있었으 나 역시 어색하기 짝이 없다·
“아니· 잠깐 내성으로 가자· 볼 사 람이 있어·”
청령궁으로 돌아가 봐야 당장은 할 것도 없다는 생각에 홍비연은 내성 에서 머물고 있을 백유설을 떠올렸 다· 왕립 도서관을 지나쳐 궁인들이 지내고 있다는 개인 숙소를 찾았을 때 이미 그는 떠날 채비를 끝마친 뒤였다·
뭐야·”
짐이라고 해봐야 얼마 되지도 않았 기에 기숙사를 깨끗하게 비우고 커 다란 짐가방 하나를 세워둔 게 전부 였거늘 이토록 분위기가 싸늘해질 수가 더 있을까·
백유설은 어색하게 웃었다·
“아 너한테 미리 말하려고 했는데 워낙 바빠 보여서···· 나도 할 일 이 끝났으니 가 봐야지· 남은 여름 방학 동안 처리할 일이 있어서·”
“그렇구나····”
백유설이 말하는 ‘처리할 일’은 평 범한 10대 소년이 감당할 수 있을
만한 종류의 간단한 것이 아닐 터 다·
자신으로서는 두 번 다시 겪고 싶 지 않은 어마어마한 사건이 바로 직 전에 있었음에도 깨어나자마자 곧 바로 또다시 어딘가로 향하여 무언 가를 해결해야만 한다니·
‘가지마·’
혀끝까지 그 말이 올라왔으나 차 마 내뱉을 수 없었다·
아직 그녀는··· 백유설의 업을 따 라가서 감당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너무나도 많았기 때문이다·
···참는 거야·’
아직은 기다리자·
여왕이 되는 날·
그때가 되면 백유설과 모든 것을 함께하는 것이다·
그러나·
차마 그때까지 목 놓고서 하염없이 기다리기는 싫었던 홍비연은 백유설 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나중에· 학교를 졸업하면 어디 로 갈 생각이야?”
“어? 글쎄···· 딱히 생각해 본 건 없는데·”
“그럼 다시 서리궁으로 들어와·”
그건 정말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여 서 홍비연 나름대로··· 엄청난 용 기를 내서 말한 것이다·
“그때는 임시 궁인이 아니라 정식 기사로 채용해 줄게· 여왕의 직속 친위기사가 되는 거야·”
“흥세류 여왕님의?”
“아니! 홍비연 여왕님의!”
···정적·
자기 입으로 내뱉고 보니 뭔가 엄 청나게 부끄럽고 창피한 말을 한 것 같아서 그 당당한 흥비연조차 오류 가 걸린 사람처럼 입을 벙긋거리지 조차 못했다·
“하하·”
백유설은 그러한 어색한 침묵을 깨 뜨리며 시원스럽게도 웃었다· 그러더 니 배낭을 힘껏 들쳐 매며 말했다·
“여왕의 기사라· 나한테는 과분하 지만 분명 영광스러운 자리겠지·”
”그건···
무어라 말을 하려 했으나 백유설 이 먼저 말을 끝마쳤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야· 나는 내가 살아 숨 쉬는 동안 해결해야 할 일이 너무나도 많고 과연 내가 그 모든 것들을 감당할 수 있을지 없을지 잘 모르겠어· 그러니 그런
근심과 걱정이 모두 해결됐을 때····”
그는 홍비연을 지나치며 약간은 웃음기를 띤 듯한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그때 다시 한번 말해줘· 여왕으로서·”
그렇게 백유설은 자취를 감추었고 홍비연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한 참이나 가만히 서 있었다·
소녀의 얼굴에 내리쬐는 노을빛이 유난히도 아름다운 저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