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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모든 게 얼어붙은(6)
진짜 죽을 만큼 힘들면 하늘이 누 렇게 보인다고 옛 조상님들과 학교 체육과 선배들이 말하고는 했다·
근데 아마 그분들도 나만큼 힘든 적은 없었을 것이다·
“하아····”
내기가 끝난 뒤 나는 바닥에 털썩 드러누워 하늘을 바라보았다· 푸른 색의 하늘이 웅웅거리며 진동한다·
온 세상이 빙글빙글 회전하는 듯하 였으며 당장에라도 꺼질 것처럼 시 야가 점멸하였다·
진심으로··· 죽는 줄 알았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마라톤 달리기 를 두 시간 동안 쉬지 않고 뛰는 것조차도 힘겹고 버거울 것이다· 그 리고 나 또한 인간이기에 마력누설 지체 덕분에 체력은 조금 더 좋을지 몰라도 힘든 건 매한가지였고·
하지만 이곳은 모든 게 얼어붙은
공간· 내 육체는 이미 반쯤 죽어 있 는 상태였고 체력이라는 존재는 아 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저 버티기만 하면 된다·
힘들다고 해서 죽지는 않을 것이며 또한 체력의 한계를 겪을지언정 그 이상으로 지치지 않아 쓰러질 일이 없다는 말이다·
다만·
정신력이 문제였다·
내 의지가 허락하는 한 나는 영원 히 멈추지 않고서 달릴 수 있다·
영원히·
여기에서 나는 ‘연홍춘삼월의 가 호’의 덕을 제대로 보았다· 그 무엇 에도 꺾이지 않는 불굴의 정신력을 지닐 수 있게 해주는 이 특별한 능 력을 제대로 활용한 적이 없었는데 이런 곳에서 이렇게 쓰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하였다·
[연홍춘삼월이 당신을 지켜봅니다·]
연홍춘삼월의 가호는··· 그래 굳이 비유하자면 오르막길에서 그녀가 나의 등을 떠밀어주는 기분이었다·
자애롭지만 매혹적이었던 그 아름 다운 연홍춘삼월이 나의 등에 달라 붙어서 ‘힘내,라거나 ‘너는 할 수 있
어’라며 자꾸만 속삭이는데 어떻게 포기할 수 있단 말인가·
‘석 달인가···
그 덕분에 나는 90일이라는 시간 동안 오르고 또 올라서 마침내는 청 동십이월에게 인정을 받을 수 있었 다·
쿠웅···!
육중한 발걸음으로 다가온 푸른색 의 거인은 내게 말하였다·
-네 이름을 말하거라·
“···백유설·”
-좋다· 내기에 이겼으니 원하는
것을 들어주도록 하겠다·
그 말에 나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청동십이월은 허공에 얼음 의 결정을 맺고서 내게 그것을 건넸 다· 자그마한 고드름처럼 보일지 몰 라도 이건 무려 ‘고대’ 등급의 아티 팩트였다·
[아이기릭스의 궤]
무려 영원한 얼음의 저주를 풀 수 있는 열쇠· 단 일회용일 뿐이지만 그래도 내가 이 세계에서 얻은 최초 의 고대 아티팩트였기에 어쨌든 감 회가 새로웠다·
-그것과는 별개로··· 너는 천 년
만에 참으로 마음에 든 인간이다·
청동십이월과 눈을 마주한다· 비록 십이신월의 표정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은 없었으나 눈에서 이채가 서 려 있는 것을 보아하니 굉장히 기분 이 좋은 것 같기도 하였다·
-그러니 너에게 내 가호를 부여하 도록 흐卜지· 비록 네 능력이 보잘것 없어 나의 가호를 제대로 받아들이 지 못하나··· 훗날 네가 성장한다 면 얼마든지 진정한 능력을 끌어올 릴 수 있을 것이다·
직후 푸른색의 빛기둥이 벼락처럼
내게 내리친다 싶더니·
쿠궁!!
···무언가 거대한 해일처럼·
압도적인 기운이 내 온몸에 쏟아져 내렸다·
으윽!,
당장에라도 눈을 감고 죽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말도 안 되는 통증이었 으나··· 참았다·
석 달도 버텨냈는데 고작 이 정도 로 쓰러질 수는 없다·
참고 견뎌내어 결코 무릎 꿇지 않은 채 꿋꿋하게 그 모든 기운을
받아내니·
[청동십이월의 가호가 부여되었습 니다!]
마침내 내게 가장 큰 축복이자 선 물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허억 허어억···!”
-음! 너라면 버텨낼 줄 알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 아래 십이신월의 가호를 두 개나 받았던 인간이 얼마나 더 있던 가· 과연 너라면 우리 형제들을 올
바른 ‘형태’로 이끌어줄 수 있을지 도 모르겠군·
“올바른···형태···?”
무슨 소리지? 전혀 이해할 수 없 는 단어가 튀어나왔으나 되묻기도 전에 청동십이월이 미소지으며 말하 였다·
-슬슬 너도 돌아가야겠スI· 내게 그 러한 부탁을 한 이유도 어렴풋이 알 것 같고·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으나 솔 직히 말해서 자신이 없었다·
아마 이곳에서의 시간은 동결되어 있었기에 바깥에서의 시간은 얼마
흐르지 않았을 터·
하지만 슬슬 홍비연이 화령꽃을 받 아들일 시간이었기에 어떻게 해서든 그녀에게 나아가야만 했으나····
도저히 몸이 버텨주지를 않았다·
다리는 진작 풀려버린 지 오래였는 데 그 험한 얼음 바다를 헤쳐나가 는 게 과연 가능하기나 할까·
– 네 몸 상태는 내가 더 잘 안다· 무리할 필요는 없다·
“···예?”
– 나는 빠르고 시원스러운 전개와 극적인 연출을 아주 선호하거든!
* コ게 지금 무슨···
무슨 소리냐며·
의문을 표하려는 순간 바닥에 푹 꺼지더니 그대로 내 몸이 중력의 작 용을 받으며 추락하였다·
* ···어?’
너무나도 놀라는 바람에 저항조차 못 한 채 떨어지는 내 모습을 바라 보며 청동십이월은 새하얀 치아를 세우더니 엄지를 척 치켜세웠다·
– 행운을 빌지!
행운은 무슨 빌어먹을 십이신월!
“으아아아아아!”
그렇게 나는 추락하였다·
이야기의 마지막을 향하여·
* * *
레비앙의 해안 얼어붙은 소용돌이·
침몰하는 해적선의 상공으로 거대 비행정 다섯 척이 날아들었다·
쿠르릉···!
갑작스레 하늘에 뇌운이 끼더니 벼 락을 머금고서 울부짖는다· 더 이상 의 접근은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여왕 홍세류는 고요한 표정으로 하 늘을 바라보다가 살며시 입술을 떼 었다·
“놈들이 오는군·”
끼에에에엑!!
그녀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뇌운 에서 푸른빛을 띤 반투명한 무언가 가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대부분은 해골의 형상을 하고 있었으며 찢어 지고 박살 난 갑주를 착용하고 있었 으나 사용하는 무기가 천 년 전 고 대 시절의 투박한 커틀러스였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그들의 투 지는 진짜였다· 온몸에 강력한 마나
를 싣고 있어 어지간한 실드는 종 잇장처럼 가볍게 찢겨나갈 것이고 간단한 마법으로는 퇴치할 수 없으 리라·
“놈들은 언데드가 아니다·”
죽음에서 되돌아온 망령들을 언데 드라 칭하며 그들은 퇴치하기가 지 독히도 어렵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저것들은 죽음 직전에 영혼 이 동결된 비이상적인 존재일 뿐 언데드는 아니다·
“그러니 겁먹지 말고 모조리 불태 우도록!”
홍세류가 외치자 다섯 척의 거대
비행정에서 대규모의 붉은 마법진이 순차적으로 완성되어갔다·
5클래스 이상의 마법사들이 모여 합을 맞추어 그리기 시작한 다중 마 법진은 하나하나가 7클래스 이상의 위력을 내재하고 있었다·
“포격·”
여왕의 명령이 떨어지자 마법진에 서 어마어마한 폭발음이 울려 퍼지 더니 허공을 선회하던 유령들이 순 식간에 불길이 휩싸여 소멸되었다·
그러나 유령들의 공세는 끝날 기미 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재차 마법을 준비하기도 전에 또 다른 유령 군단
이 비행정을 습격하기 시작한 것!
마법사들이 개별적인 마법으로 유 령들을 요격하였으나 수적으로 너 무나도 부족하였다·
“여왕님! 비행정이 얼어붙고 있습 니다!”
“···플레어를 사용하도록·”
“벌써 다섯 개나 사용했습니다!”
홍세류는 지상을 바라보았다· 지금 도 저 얼어붙은 바다에서는 기괴한 형상을 한 괴수들이 비행정을 향해 포효를 내지르고 있었다·
바닷길에는 수천 마리 이상의 괴수 가 서식하였고 저 군단을 꿰뚫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녀가 바닷길을 택하지 않고서 극 한의 한파를 뚫고서 공중 횡단을 선 택한 이유가 바로 저것 때문이다·
“어쩔 수 없다· 지금은 지상에 착 륙할 수 없으니·”
“예! 플레어를 사용하겠습니다·”
아돌레비트의 특수 기술력 ‘플레 어’는 모든 것을 얼려 버리는 이 극 한의 한파에서도 마나석 엔진이 얼 어붙지 않도록 막아주었으나 그 개 수가 터무니없이 부족하여 오래 버 틸 수는 없었다·
그러니 가장 좋은 방법은 단 하나·
한시라도 빨리 홍비연이 화령꽃을 소용돌이의 심장부에 가져가는 것·
“셋째 공주· 준비는 되었나·”
어느덧 비행정은 해적선에 지척에 도달하였다· 아돌레비트의 마법 전 사들은 아주 훌륭하게도 천 년이나 살아온 유령 군세를 막아내 주었으 나 더 이상은 버티기 힘들 터·
홍비연은 얼어붙은 소용돌이를 바 라보며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 였다·
“지금 바로 시작하시죠·”
“···그래· 옳은 선택이다·”
그녀는 화령꽃이 들어있는 박스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새하얀 로브를 입은 채 홍비연이 뱃머리 위에 우 뚝 올라서자 세 명의 여사제가 그녀 의 뒤에 꿇어앉아 기도를 올렸다·
···웅웅웅웅!
화령꽃을 보호하던 상자의 결계가 하나둘 끊어지며 뜨거운 열기가 퍼 져 나왔다·
홍비연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것 에 양손을 가져다 대었고·
으읏!’
그 순간 전신을 휘감는 뜨거운 열 기에 하마터면 정신을 잃을 뻔했으
나 애써 견뎌냈다·
피부가 타오르는 고통에 서둘러 양 팔을 어루만졌으나 착각이었다·
,아···
불길은 아직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그저 기운이 몸에 휘감기는 것만으 로도 이 정도의 고통이라니·
“아윽···!”
화상을 입은 듯한 통증은 점점 더 심해져 팔다리를 비롯하여 머리부터 가슴 허벅지까지 타고 내려가 마침 내는 전신이 불에 타오르는 듯하였 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내장까지
불에 구워지는 듯한 끔찍한 감각이 닥쳐오자 이번에는 정말 다리에 힘 이 풀리는 줄 알았다·
그러나 견뎌냈다·
’···익숙해·’
어린 시절·
불을 마시고 불로 샤워하고 불을 식사하고 불을 입었던 시절의 감각 이 다시금 되살아난다·
익숙하다 못해 이제는 편안할 지경 이었다·
전신이 타오르고 찢겨나가고 녹아 내리는 그 모든 감각 속에서도 홍비 연은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버텨낼 수 있다·
이 정도쯤은 얼마든지·
-이야 너 흥미로운데?
···그때·
어디에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홍비연은 천천히 눈을 떠서 자신의 품 안에 안긴 화령꽃을 바라보았다·
굵직하고 중저음의 목소리에 어쩐 지 발랄하고 활기찬 분위기·
-웅? 고통스럽지 않아? 왜 그렇게 까지 참는 거야? 그냥 받아들여! 네 가 스스로 불꽃이 되면 이런 고통 쯤은 아무것도 아니니까!
“···시끄러워·”
홍비연은 그 목소리를 무시하려고 했다· 하지만 점차 불길에 타오르는 감각이 편안해지고··· 쾌락으로 점 차 바뀌어나가자 크게 당황하고 말 았다·
‘이게 무슨····’
-신기하지? 이게 바로 진정한 불 꽃이라고! 나는 알 수 있어· 너는 특별해! 피를 제대로 물려받지도 못 한 주제에 아돌레비트의 후예 행세 를 하는 저 늙은 여자보다도 더!
으윽!”
주춤 뒤로 물러났지만 이 기묘한
감각은 사라지 않는다·
-그래 이걸 원했ス 1! 아주 신선하 고 진한 아돌레비트의 핏줄··· 하아! 마음에 들어· 나와 함께하는 거야· 너 저 뒤의 여자에게 복수하고 싶 지 않아? 너도 알잖아? 저 여자는 너를 죽음으로 몰아가려고 했어· 나 를 받아들이는 게 어떤 의미인 줄 아주 잘 알면서도!
이제 알겠다·
이 목소리의 주인은··· 화령꽃에 잠들었다는 바로 그 전설 속 ‘불의 화신’이 틀림없을 터·
*···닥쳐· 나는 네 말 따위에 넘
어가지 않아·’
-하하 그러기 쉽지 않을걸?
흐읏!”
순식간에 불길이 솟아오르더니 전 신을 고통과 쾌락이 강타하였다·
-분노해! 내 힘을 받아들여! 너는 할 수 있어· 모두에게 복수하고 네 꿈을 모두 이룰 수 있어· 너도 알고 있잖아? 세상은 너에게 적대적이야· 그렇다면 너도 적대적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지 않겠어?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분노 라는 감정이 불처럼 타올랐다·
불태워라·
나를 괴롭게 한 모든 것들을·
나를 힘들게 한 모든 것들을·
모조리 불태워버리면 행복해질 수 있을 테니까·
“아윽···广
애써 고개를 저어 그것을 떨쳐내려 고 해도 버틸 수가 없었다· 차오르 는 분노는 또 다른 불씨를 낳아 사 방으로 번져나갔고 그것은 곧 발화 점이 되어 폭발하였다·
화르르륵! 쿠궁!!
••으윽!”
뒤에서 그녀를 지켜보던 홍세류는
황급히 실드를 둘러서 불꽃을 막아 내었다· 8클래스의 마법사인 그녀조 차도 일순간 당황하게 만들 정도로 폭발적인 마나의 발산·
‘이 이게 불의 화신···!!
바닥에 무릎을 꿇고서 지팡이에 지 탱한 채 고개를 들어 불꽃의 위력 을 실감하였다·
모든 해골 병사는 순식간에 녹아내 렸으며 하늘의 구름조차 꿰뚫은 채 솟아오른 불꽃의 기둥은 마치 태양 이 얼굴을 들이민 것만 같다는 착각 이 일 정도였다·
“아 아아···!”
마법사들이 하나둘 무릎을 꿇었다·
뇌운 가득한 하늘이 불꽃에 휘감기 더니 얼어붙은 바다에 불의 소나기 를 떨어뜨리기 시작하였다·
‘불의 재앙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 결코 저항할 수 없으며 극복하는 것도 불가능하 다·
‘고작 건드린 것만으로도 이런 재 앙이 발생하다니···!
화령꽃이 위태롭다는 사실은 알았 으나 이렇게 갑작스레 폭주하는 줄 은 몰랐다·
“폐하!”
“불의 재앙이 시작되면 더 이상은 돌이킬 수 없습니다!”
하지만····
홍세류라고 해서 어떻게 하겠는가·
방법이 없다·
폭주하기 시작한 화령꽃은 더 이상 제어가 불가능하니까·
‘잠깐·’
저 정도의 불꽃이··· 소용돌이의 심장부 근처에서 발생해도 과연 괜 찮은 것인가?
그런 근본적인 의문이 들어 서둘
러 해적선을 확인하려는 순간·
무언가 커다란 푸른색의 손이 해 적선을 짚었다· 마치 미니어처 장난 감을 쥐는 듯한 거대한 그 손은··· 홍세류조차 다리를 풀리게 만드는 귀기(鬼氣)를 지니고 있었다·
이윽고 ‘그것’이 얼굴을 드러냈다·
푸른색의 두개골·
텅 빈 눈동자 속 붉은 눈빛·
그리고··· 마치 하늘까지 닿을 듯한 거대한 몸체에 옛 시절 해적제 왕의 제복까지·
“아 아아···
홍세류는 그만 자리에 주저앉고서 지팡이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해적제왕 블랙 벨리즈·
그의 원혼이 천 년 만에 깨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