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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모든 게 얼어붙은(2)
밤이 되었다·
레비앙 해안의 저녁은 싸늘하고 적 막하기 그지없었는데 원체 추운 날 씨를 좋아하는 홍비연은 겉옷을 여 미고서는 밤 산책을 나갔다·
칼날처럼 시린 바람이 빰을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잡생각이 죽어갔다·
날카롭게 내리치는 성벽의 외곽에 서서 그녀는 저 멀리 달빛에 반사 되어 반짝이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장관이었다·
세상에 저것보다 더 아름다운 풍경 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홍비연은 그 루비색 눈동자에 바다 의 풍경을 담았다· 그렇게 바라보고 있노라면 얼어붙은 바다가 녹아내리 기라도 할 것처럼·
‘네 역할은 아주 간단하다·’
머릿속으로 여왕 흥세류가 전해주 었던 말이 떠올랐다·
‘화령꽃을 네 몸에 담고서 영원한 얼음의 심장에 공명하거라· 그것이 네가 이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말은 참으로 쉽게 한다·
뜻을 길게 풀어 쓸 필요도 없다·
나라를 위해 희생 하랍시고 그대로 가서 죽으라는 소리다· 그것이 백성 을 지키기 위한 왕족의 의무라며·
참으로 우습기 그지없었다·
그 속내가 훤히 보인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그렇게 행동했다는 건 홍비연이 결코 거절할 수 없다는 것 까지 계산했기 때문이겠지·
휘이잉···!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휘날 렸다· 차디찬 기온이 귀와 코에 감 각이 없어진 듯하다·
“어머나 동생〜 이 시간에 이런 데 서 뭐해〜?”
참 얄궂게도 ‘우연히’ 근처를 지나 가던 홍시화와 마주치고 말았다·
홍비연은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았 다· 무엇이 그리도 신나는지 홍시화 의 걸음걸이는 어린애처럼 발랄하기 만 했다·
“안 추워? 그러다 감기 걸리면 어 떻게 해〜!”
아돌레비트의 왕족은 감기에 걸리 지 않는다·
대꾸할 가치도 느끼지 못한 홍비연 은 시선을 돌렸으나 홍시화는 그쪽 방향으로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언니가 이렇게 충고해 주는데 무 시 하기 야〜?”
“됐으니까 들어가시죠·”
“냉랭해〜”
더 이상 이곳에 있어봐야 귀찮겠다 싶어서 홍비연은 아예 걸음을 옮겼
다· 기분 좋은 산책마저 방해당했으 나 차라리 잠이나 평안하게 자는 편 이 낫겠다 싶어서·
“동생·”
그런데 갑작스레 홍시화가 목소리 를 내리깔고서 불러오는 바람에 홍 비연은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뭔가요·”
“왜 거절하지 않았어〜?”
“이상한 질문이네요·”
진짜로 죽는다·
여태 자신이 필사적으로 노력해 왔 던 그 모든 삶이 단 한 순간에 무
너져 버리는 것이다·
그래 스텔라에 입학하기 전의 나 였다면 거절했을지도 모르겠다· 자 신이 누려왔던 그리고 앞으로도 누 릴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도저히 놓 을 수가 없었으니까·
그 이전에····
죽는 게 너무나도 두려웠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홍비연은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 하며 말했다·
“저는 언니와는 다르거든요·”
당신이 무슨 계획을 꾸몄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간에 상관없다는 듯한 그 눈빛을 받아내며·
홍시화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날이 추운데 이만 가보지요·”
느리지만 여유 가득한 걸음으로 돌 아가는 동생의 뒷모습을 보면서도 흥시화는 끝내 그녀를 붙잡지 않았 다·
‘흐음··· 많이 컸네?’
이 순간 예전에 죽어버린 홍에린 이 갑작스레 떠오르는 이유는 뭘까·
”에잇 또 쓸데없는 생각을·”
홍시화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서 총총걸음을 옮겼다·
어찌 되었든 선택은 정해졌고 앞 으로 벌어질 일들을 막을 수는 없으 니··· 이제부터는 운명에 모든 것 을 맡길 차례였다·
‘여기서 죽으면 애초부터 그럴 운 명이었던 거지·’
홍비연은 스무 살을 채 넘기지 못 하고서 죽을 것이다· 첫째 언니가 그러했던 것처럼·
그러니 지금 죽는다고 하여도 고작 그 운명이 3년 정도 앞당겨지는 것 일 뿐·
변하는 건 없을 것이다·
블랙 마탈레·
먼 옛날 세계의 모든 바다를 제패 하였던 전설의 해적제왕의 후손이자 현재는 천화빙궁을 다스리는 성주로 서 아돌레비트 왕가에 충성을 맹세 한 그는 여태 단 한 번도 여왕에게 반기를 든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경우가 달랐다·
“재앙이 찾아올 것입니다·”
여왕의 앞에 무릎 꿇은 채 블랙 마탈레는 조용히 읆조렸다· 거대한 왕의 알현실에 그 중저음의 목소리 가 널리 퍼져나갔다·
“···할말은 그것 뿐이더냐?”
“제 말을 믿으십시오 폐흐卜· 결코 블랙 크로스 호를 건드려서는 아니 됩니다·”
“하 그깟 해적선에 잠든 망령이 무서운 것이더냐?”
조상을 모욕하는 말에 마탈레는 분 노어린 눈빛을 지었다가 금세 거두 었다· 다행스럽게도 순간 고개를 숙 인 덕분에 들키지 않았다·
“그는··· 한때 바다를 지배했던 사나이입니다· 시조 마법사와 그 열 두 제자가 육지를 지배했다면 바다 에는 해적제왕 블랙 벨리즈가 있었 다는 말입니다· 그의 망령을 건드리 지 마십시오·”
“그것도 천 년 전의 이야기· 최근 백 년 동안 일곱 차례에 달하는 원 정대를 보냈거늘 망령은 꿈쩍도 하 지 않더군·”
“잠시 잠들어 있을 뿐입니다· 해적 제왕의 망령은 영원한 저주에 갇혀 있어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쿵!
마탈레가 소리치자 여왕이 구두로 발을 힘껏 내려찍었다· 그러자 허공 에 폭발하며 궁전의 사방에 불꽃의 기둥이 치솟았다·
“감히 여왕의 면전에서 소리를 치 는구나·”
“제가 이렇게까지 해서 당신을 막 으려는 이유를 모르시겠습니까? 저 희 가문이 아돌레비트 왕가에 충성 하는 이유는 언젠가 다시 레비앙의 바다를 돌려주겠노라 약조하였기 때 문입니다· 이건··· 규율을 위반하 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여왕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하 였다·
“너 따위가 내 말에 거역해서 무 어가 달라지느냐?”
마탈레는 침음을 삼키며 고개를 숙 였다· 맞는 말이었다· 여왕은 무려 8클래스의 마법사였으며 친위대 역 시 6클래스에서 최고 7클래스의 마 법사로 구성되어 있었으니까·
과연 초강대국이라고 할 수 있는 말도 안 되는 병력·
그에 비해 바다를 잃어버린 블랙 마탈레는 아돌레비트 왕가에 대적할
만한 힘이 전혀 없었다·
이제 와서 약조를 어긴다고 하여··· 막을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이다·
“조상님들이··· 그리고 해적제왕 의 망령이 노할 것입니다·”
이렇게까지 말했음에도 여왕은 듣 지 않는다· 블랙 마탈레는 눈을 질 끈 감고서 절망을 받아들였다·
‘그의 영혼을 분노케 하면 재앙이 찾아올 것이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께서 줄곧 해 주시던 이야기·
‘선조 블랙 벨리즈의 영혼은 얼음 의 화신과 계약을 맺었단다·’
‘계약이요?’
‘자신이 다시 깨어나는 날 이 세 상을 모두 얼려버리겠노라고·’
‘지금은 왜 그러지 않아요?’
‘끌끌 그거야 모르ス]· 언젠가 때가 올 때까지 그저 쉬고 있을 수도 있 고· 그러니 명심하거라· 무슨 일이 있어도 선조의 영혼을 건드려서는 아니 된다·’
전설은 모두 거짓이 아니다·
블랙 마탈레는 그 사실을 너무나도 선명하게 깨닫고 있어서 여왕의 만 행을 막을 수 없는 이 현실이 고통 스러웠다·
“할말은 그게 끝인가?”
“···그렇습니다·”
“그깟 옛 전설에 예민하게 구는 이 유를 모르겠군· 전설은 전설일 뿐 현재의 마법기술은 월등히 발전하였 다· 설령 드래곤이 나온다 하여도 사냥할 수 있을 텐데 무엇이 그리 두려운가?”
“폐하께서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뭐 좋다· 그래도 혹시 모르지 않 느냐? 아돌레비트의 화령꽃이 정말 로 바다를 녹여 버릴 수도 있으니 까·”
블랙 벨리즈의 후손들은 선천적으 로 해신의 축복을 타고나며 바다를 끝없이 갈망하게 된다·
하지만 천 년이라는 세월이 넘도록 그 누구도 바다에 오르지 못했다·
그들의 핏줄에 걸린 특별한 저주 때문이었다·
‘해적제왕의 블랙 크로스 호가 깨 어나기 전까지 그 누구도 배에 오를 수 없으며 바다에 나갈 수 없다·’
그 규율을 어긴 모든 선조들은··· 바다의 재앙에 휩쓸려 죽음을 맞이 하였다· 시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블랙 가문의 해적들은 평생토록 저
영원히 얼어붙은 바다가 녹아내리기 를 기원하며 살아가다 그렇게 스러 져갈 뿐이었다·
“이만 돌아가도록 하지·”
여왕이 홀을 떠난 뒤 한참이나 지 나고서야 블랙 마탈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선 창밖의 하늘을 바라보며···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 다·
‘···재앙이 발생하겠구나·’
지금의 여왕은 우둔하며 독단적이 다· 그녀는 왕의 재목이 아니었음에 도 누구보다 강력한 불꽃의 피를 타 고난 덕분에 왕이 되었다·
‘결국 선조들이 지켜왔던 모든 규 율이 내 대에서 깨지는군·’
그는 눈을 질끈 감고서 주먹을 움 켜 쥐었다·
도망칠 생각은 없다·
차라리 그렇게 될 운명이라면····
재앙의 한가운데에서 모든 것을 지 켜보리라·
그것이 블랙 벨리즈의 마지막 후손 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예의일 테 니까
* * *
“이럴 수가···!”
나는 포크를 쥔 손을 떨었다·
“스텔라보다 시세가 비싸잖아···?”
음식의 평균 단가가 높은 스텔라보 다도 가격이 비싼 도시가 존재한다 니·
여기는 귀족의 도시인가? 아니면 그냥 화폐의 가치에 심각한 문제가 생긴 것일까?
아이테르 월드 온라인을 플레이할 때는 캐릭터가 굳이 밥을 먹을 필요 가 없어서 이런 사소한 부분에 신경
쓰지 못하여 왜 이런 일이 발생하 는지를 전혀 알지 못하였다·
“···거 얼마나 비싼데 그렇게 궁 상이냐 꼬맹아?”
“스텔라보다 500크레딧이나 더 비 싸잖아요· 이게 말이 됩니까?”
“고작 500크레딧 갖고 뭘····”
지나가던 용병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치며 사라졌다·
리스본드 항구 지부 용병 사무소·
천 년 전 먼 과거에는 전 세계를 연결하는 심장부의 역할을 하였던 리스본드 초거대 항구는 현재로서 그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다·
하지만 바다가 얼어붙은 이후 신 비로운 괴수와 던전이 출현하기 시 작하면서 이곳은 모험가와 용병들의 성지가 되었는데 덕분에 용병 사무 소도 상당히 발달하여 건물의 때깔 이 상당히 고운 편이었다·
왕실의 궁인들은 천화빙궁에 딸려 있는 자그마한 궁에서 머물 자격이 주어졌으나 내가 굳이 이런 곳까지 와서 밥을 먹는 이유는 따로 있었 다·
‘왕가에서 일을 진행하는 동안 나 도 내 할 일을 해야겠지·’
홍비연이 화령꽃을 몸에 머금은 채
소용돌이의 심장부에 가는 순간 전 설 속에 잠들었던 블랙 벨리즈의 망 령이 깨어날 것이다·
이게 또 참 어이가 없는 부분이 하나 있다·
만약 여기서의 일이 척척 진행되면 플레이어는 평범하게 아카데미에서 여름방학 이벤트를 하하호호 즐기다 가 난데없이 [Bad End]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정말 물음표를 난사할 수밖에 없는 황당한 전개· 이제 막 마유성 해원 량과의 관계가 진척되어서 슬슬 호 감도를 올리려고 하는데 뜬금없이 세상이 얼음으로 뒤덮인다니·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고 정말 수 만 명 중 한 명의 플레이어가 겪는 사건이었기에 크게 화자가 되지는 않았으나····
내가 하필이면 그 수만 명의 플레 이어 중 한 명이었다·
‘그땐 재미있었지·’
당시의 나는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정말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 하였다·
끝나지 않는 여름방학·
모두가 죽어 나가는 세상을 끝없이 반복하며··· 마침내는 홍비연으로 인해 세계가 얼어붙는 엔딩을 막아
낼 수 있었다·
당시에는 딱히 그녀를 구하기 위해 서가 아니라 내 게임 데이터를 지키 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지만····
이제는 아무래도 좋았다·
덕분에 나는 다른 누구도 모르는 히든 피스 하나를 알고 있었으니까·
“후우····”
근데 이거 솔직히 조금 겁난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진짜로 죽는다·
이 에피소드의 ‘배드 엔딩 플래그’ 는 두 가지이다·
화령꽃에 잠든 불의 화신이 폭주하
여 아돌레비트 왕국이 불길로 뒤덮 이거나·
해적선에 잠든 얼음의 화신이 폭주 하여 세상이 얼음으로 뒤덮이거나·
꿈도 희망도 없어 보이지만··· 그 래도 계획대로만 진행하면 된다·
‘에휴··· 죽기밖에 더 하겠어?’
조금은 무섭지만 내가 아니면 누 구도 할 수 없다· 그러니 반드시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다·
그런 결심이 들었기에 나는 망설이 지 않고서 움직일 수 있었다·
식사를 끝마친 뒤 테이블을 짓밟 고 올라서서·
“응? 뭐야 저 꼬맹이·”
“오 스텔라 학생이잖아?”
“처음 보는군·”
용병들의 이목을 내게 집중하도록 만든 뒤 소리쳤다·
“회오리치는 얼음 계곡에서 히든 던전 발견! 선착순 20명! 용병 모집 합니다! 팔다리 잘 달려 있고 장기 멀쩡하신 분 환영!”
물론 그렇다고 해서·
뭐든지 내 힘으로 해결할 생각은 아니 었다·
가끔은 사람들 좀 속여먹고 부려먹
으면서 편한 길도 가고 그래야지 않 겠는가?
가끔 소설 속 만화 속 주인공들 보면 뭐든 혼자 해결하려는 버릇이 있던데····
나는 주인공이 아니라서 그런 귀찮 은 짓 도저히 못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