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6화
상처에서 풍기는 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 마치 눈처럼 너무나 하얀 탓에 차가움마저 느껴지는 벽지· 그 사이 덜렁 놓인 침실·
김준혁은 아까 전 의사한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조치가 늦었으면 폐인이 될 뻔 했습니다·]
[농도 9pp의 마정석을 섭취하고도 마나 회로가 폭주하지 않은 건 정말 기적이라는 말밖엔····]
유라는 기적적으로 생환했다·
김준혁이 들은 소식통의 말로는 마침 오늘 합류한 신유성 덕분이라고 했다·
‘처음은 내 목숨과 은아· 그 다음은 유라인가····’
이 감사를 어찌 표할까?
김준혁에게 김은아가 목숨보다 소중한 가족이라면, 유라는 가장 아픈 손가락이었다·
유라는 김준혁이 아카데미를 다니던 시절부터 동료였으며 마정석 사건의 파티원이었다·
그러니 김준혁에게 유라는 가장 그립지만 동시에 가장 피하고 싶은 과거· 이렇게 잠든 척, 일어나지 않는 걸 보니 그건 유라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깨어난 거 알아, 방금 로쟈 님이랑 대화까지 했잖아?”
하지만 김준혁이 자세한 정황으로 증거를 들이밀자 눈을 뜬 유라는 비스듬히 몸을 틀며 말했다·
“···2년 만인가?”
“정확히는 거기에 반년 더·”
“깨어나도 한 번을 안 찾아오더니, 아프니까 찾아오네?”
유라는 예리하게 아픈 곳을 찔렀지만 김준혁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여유롭게 받아쳤다·
“피차 마찬가지잖아· 너도 내가 혼수상태일 땐 찾아왔지만, 깨어났을 땐 오지 않았으니까·”
만약 김준혁이 일부러 피했냐고 추궁한다면 유라는 할 말이 없었다· 그저 유라는 김준혁을 다시 만나도 할 말이 없었을 뿐이다·
“어쩔 수 없는 걸, 우린 이미 너무 멀어졌으니까·”
이젠 둘은 동료도 아니었고, 김준혁은 헌터도 아니었다· 동료라기엔 이젠 서로는 함께 하지 않았고 친구라기엔 둘은 이성으로서 너무 가까웠다·
“···그렇지·”
진지해진 김준혁이 굳은 얼굴로 동의하자 유라는 풋- 하고 웃었다· 2년간 잠들어 있던 탓일까? 김준혁은 바뀐 게 하나도 없었다·
결국 이번에도 웃으면서 분위기를 푸는 쪽은 유라였다· 마치 2년 전의 사건이 없었던 것처럼, 유라는 그날처럼 장난스럽게 말했다·
“네 여동생· 남자친구를 참 잘 골랐더라· 나랑 다르게·”
“그럼· 내 동생이지만 유성이가 아까울 정도야·”
결국 둘의 접점이 된 건 두 사람 모두에게 은인인 신유성의 이름이었다·
“친오빠가 직접 인정해버려도 되는 거야?”
“사실인걸·”
자연스레 분위기가 풀어지고 유라가 학생 때처럼 큭큭거리며 웃자 김준혁은 조심스레 유라에게 물었다·
“···유라야·”
유라는 바보가 아니었다·
김준혁이 어떤 꼴이 됐는지 알고도 고농도의 마정석을 준비해뒀다는 건, 오래전부터 자신의 최후를 준비해두었다는 이야기였다·
모티스를 향한 복수를 위해서라지만 분명 계기가 있었을 것이다·
“마정석은··· 언제부터 준비해둔 거야?”
김준혁은 죄책감에 고개를 숙인 채 물었다· 유라의 입에서 나온 게 어떤 대답이든 자신은 평생의 짐을 앉고 살아가겠지·
“솔직한 대답을 원해?”
정신을 되찾은 김준혁은 반년을 도망친 끝에 결국 유라를 찾아왔다· 유라는 김준혁의 그 결심을 알기에 구태여 거짓말하지 않았다·
“···2년 전· 아니, 2년 반인가·”
* * *
헌터계에서 소문은 빠르다·
신강윤이 차기 헌터 협회장을 노린다는 이야기는 이미 정설이 된 지 오래였고, 그에 맞서는 신유성과 신성그룹의 커미션은 거물들이 모인 자리라면 한 번쯤은 나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아무리 이미 퍼진 소문이라 하여도 직접 신성그룹의 일원이 나를 찾아올 줄 이야· 참으로 노골적이군·”
마치 고대의 왕처럼 황금으로 된 옥좌에 앉은 건 브릴리언트의 길드장· 명왕 이현조·
그러나 이수현은 일개 비서가 아닌 신성그룹의 사신(使臣)으로서 이현조를 찾아왔기에 전혀 꿀리지 않았다·
“좋은 제안일 겁니다· 신성그룹의 장남이신 김준혁 도련님께서 함께 주신 제안이니까요·”
“제안을 듣기 전에 묻지· 신성그룹은 브릴리언트의 길드장인 명왕 이현조에게 제안하고 싶은 건가? 그게 아니면····”
이현조는 눈을 번뜩였다·
노련한 헌터인 그는 이수현이 어떤 제안을 하러 왔는지 이미 알고 있는 모양새였다·
“협회의 파이브 스타인 심사위원 이현조에게 제안하고 싶은 건가?”
그러나 바로 이야기의 본론으로 들어가는 건 이수현도 환영이었다·
“양자 모두입니다· 김준혁 도련님께서 원하시는 건 단순한 투표가 아닌 실질적인 지지니까요·
어차피 물질과 수치로 서로를 납득 시킬 수 있는 관계라면 재계의 정점에 서 있는 신성그룹은 무적이었다·
“실질적인 지지라···· 참 쉽게도 말하는군·”
그러나 이현조는 수염을 매만지며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미, 이쪽의 결정이 어느 정도 신강윤을 향해 기울었다는 건 알고 있을 텐데?”
“이해합니다· 신오가문과 유수길드가 끼치는 영향을 생각하면 정면으로 맞서는 건 브릴리언트에게도 부담스러운 일이겠죠·”
어떤 사업가라 하여도 리턴보다 리스크가 너무 크다면 그건 독이든 성배에 불과했다·
아무리 탐나더라도 손에 쥘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니 도련님께선 제안하신 겁니다· 신오와 유수 대신 브릴리언트가 우뚝 설 수 있는 제안을요·”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결국 헌터계의 정치는 이권 다툼이다· 리스크보다 리턴이 훨씬 크다면 이현조는 얼마든 신강윤 대신 신유성의 손을 들 수 있었다·
“일단 한 번 보시죠·”
이현조는 이수현이 준비한 제안서를 찬찬히 읽었다· 제안서에 적힌 글을 하나하나 읽어 나갈 때마다 이현조의 표정은 심각해졌다·
이수현이 내민 건 짤막한 제안서일 뿐이지만 거기에 담긴 내용들은 헌터계의 정치에 대한 김준혁의 이해도를 엿볼 수 있었다·
[현재 브릴리언트 길드는 상당량의 임무를 흑산이나 명월 등 상위 길드에게 외주 형태로 받고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상위 길드에 반기를 들어 본보기로 길드 간의 커미션이 끊어진다면 길드원 유지에 큰 부담이 되시겠죠·]
[그러니 제가 부탁한 대로 저희 신성그룹과 긴밀한 관계가 되어주신다면 상위 길드에 맡기던 임무 대부분은 브릴리언트와 우선으로 진행하려 합니다·]
[신성그룹과 그에 속한 자회사를 포함한다면 지금보다도 운영에 이점이 많으실 겁니다·]
[만약 상위 길드와 브릴리언트의 관계가 악화된다면 저와 신성그룹은 브릴리언트와의 관계를 우선시하도록 하겠습니다·]
가장 최고의 제안은 신유성이 브릴리언트 길드에 가입하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 김준혁의 제안만으로도 이현조는 귀가 솔깃했다·
‘브릴리언트의 대우를 신성그룹이 앞서서 신오, 유수, 흑월, 진산과 같은 급으로 올려주겠다라····’
하지만 이현조는 여전히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흥미가 동하긴 하군· 하지만 쪽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결정에 겨우 일감을 몰아주는 정도가 끝이라면 섭섭한 이야기지·”
“하단의 화살표 홀로그램을 클릭하시면 다음 페이지로 메시지를 넘기실 수 있습니다·”
이현조는 이수현의 설명에 두꺼운 검지로 페이지를 넘겼다·
‘어디 다음은 얼마나 대단한 조건을 걸어뒀는지 한 번 볼까?’
[최근 브릴리언트가 헌터 바이온과의 물수 계약이 끝나며 마나석 수급에 차질을 빚고 있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건 단기적인 흐름이 아닙니다· 다른 길드는 물론이고 국내외를 가릴 것 없이 마나석 물자는 지속적으로 모자랄 예정입니다·]
[신성그룹이 헌터 바이온과 계약한 신기술이 공개되면 그 속도는 더욱 가속 되겠죠·]
[위험한 마정석을 사용하고 있는 일부 길드를 제외한다면 업계 전체가 마나석 수급으로 큰 타격을 입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성그룹은 최근 5개의 마나 광산을 매입 했습니다· 브릴리언트가 저희 신성그룹의 손을 잡는다면 그 흐름을 충분히 벗어날 수 있습니다·]
[제 제안만 받아주신다면 채굴 된 마나석 중 일부를 브릴리언트에게 원가 그대로 제공 하도록 하겠습니다· 길드원 전체가 사용하실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양입니다·]
마나석 광산 매입 건도 신기술에 관한 이야기도 브릴리언트의 입장에선 너무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덕분에 이현조는 여기에 적힌 이야기가 사실인지 이수현의 눈치를 보자· 이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업 쪽에선 이미 공공연한 사실입니다·”
이현조는 못 마땅한 듯 눈을 얇게 찌푸렸다· 이러니 헌터들은 역시 기업의 손에 끌려 다닐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상위 길드들의 수익이 높아도 협회의 수수료와 기업들에 지급 되는 돈을 떼고 나면 길드 운영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뒤에도 더 많은 계약 조건이 남아 있습니다·”
이수현은 자랑스레 다음 페이지를 넘기라 말했지만 이현조는 이제 됐다는 듯 다시 소파에 앉았다·
‘···신성그룹이 자기 일인 듯, 이렇게 발 벗고 나서다니 역시 그 소문이 사실인가 보군·’
이쯤되면 브릴리언트를 위해서라도 이현조는 생각을 반전 시킬 필요가 있었다·
신강윤의 줄에 섰다가 만약 신유성이 이기게 된다면? 아니 그 이전에 김준혁의 제안을 거절해 신성그룹에게 밉보이게 된다면?
지금까지 신성그룹이 개인 길드에 보복을 한 적은 없었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그 체급을 이용해 얼마든 데미지를 줄 수 있었다·
신성그룹의 힘이라면 신오, 유수, 흑산, 명월 같은 상위 길드도 휘청 거릴 정도였으니 브릴리언트는 뼈도 추릴 수 없었다·
‘결국 어느 쪽의 편에 서든 내가 중립을 벗어난 순간· 리스크를 져야한다는 사실은 같다·’
그러니 지금처럼 누가 이길지를 맞출 수 없는 상황에선, 다른 부분을 보아야 했다· 가령 누가 이겼을 때 브릴리언트가 많은 이득을 보는가?
‘신강윤의 편에 선다고 해서 브릴리언트에 떨어질 건 없다· 오히려 협회장이 되었다고, 신오를 밀어줘서 브릴리언트에 악영향이나 안 오면 다행이겠지····’
반면 김준혁의 제안은 달콤하다 못해 이가 썩을 지경이었다· 앞에만 읽어도 이렇게 파격적인데 뒤는 어떠할까?
하지만 이현조는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었다·
“···그럼 결정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지· 이번 대답만 납득이 간다면 더 이상 이번 건으로 의심하지는 않겠네·”
이 부분에 관해선 추측이나 소문이 아닌, 꼭 관계자의 입장에서 직접 듣고 싶었다·
“후계자인 장녀는··· 소문을 들어 이해하지만· 장남까지 이렇게 신유성을 감싸고도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러나 이수현의 대답은 너무나 심플했다·
“···은인· 김준혁 도련님에게 신유성 학생은 은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