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0화
종언의 운명(11)
세계 10법·
만다라를 개방하자마자 눈앞에 펼쳐지는 개념의 의미를 레녹은 이미 알고 있었다·
복마전의 중간결산에서 얻은 마도서 [운명자천칭 : 극예 5법]의 원본이라 불리던 초월마법·
WORLD에서도 설정상으로만 존재했던 초월계통 고유마법이 만다라 안에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건-’
아카이브의 기억에서 ‘그’가 언급했던 최후의 보험이란 만다라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었나·
아니면 만다라에 죽은 신의 유해를 보존하기 위해 세계 10법을 사용됐던 것일까·
애초에 세계 10법이라는 술식은 세 번째 세계에 존재하는 개념조차 아니었을 터·
만다라를 개방한 찰나의 순간 무수한 생각이 레녹의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가고·
직후 그 모든 고민을 날려버릴 정도로 강렬한 노이즈가 레녹의 뇌리를 휩쓸었다·
화아아아악-!!!!
“···!!!!”
엄청난 양의 정보가 머릿속에 흘러들어오며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른다·
기억이 아니라 각인· 저장이 아니라 수정·
언어로는 해석할 수 없는 불가해의 정보를 머릿속에 강제로 꽂아 넣는다·
“윽···!!”
빠지직···!!!!
고막이 폭발하는 듯한 환청이 들리며 오감이 멀어졌다·
시야가 새빨갛게 흔들리고 레녹이 순간적으로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대가 왕도에 온 이래 행한 모든 일들이 과인의 예상을 뛰어넘는구나·”
무표정한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론의 표정이 처음으로 동요한 것처럼 흔들렸다·
“설마 만다라의 구성원리를 직접 해석하여 강제로 습득하려 한 것이냐·”
“···!!”
“아니 하나 그렇다 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론이 섬뜩한 표정으로 레녹을 내려다보았다·
“과인이 수천의 인간을 바쳐 아카이브의 지식을 빌려서도 불가능했던 일을 아무런 준비 없이 시도하고도 이렇게 멀쩡하다고?”
우우우웅···!!
아론이 걸음을 옮기는 것과 동시에 그의 뒤에서 얼어붙은 서리고리가 회전한다·
공간조차 얼려 붙이는 냉기를 뿜어내며 아론이 일그러진 얼굴로 소리쳤다·
“네놈이 정녕 신의 축복이라도 받았다는 말이더냐!!!”
차갑게 얼어붙은 대기를 움켜쥐고 레녹을 향해 그대로 휘갈긴다·
고개를 숙인 레녹의 머리 위로 섬찟한 냉기의 파동이 폭발한 그 순간·
강렬한 노이즈가 레녹을 휘감고 솟구치며 아론의 마력을 그대로 잡아먹었다·
퍼석!!
“···!!!!”
사과가 부서지는 듯한 기괴하고 어색한 파열음· 아론이 굳은 얼굴로 물러섰다·
레녹의 주변에서 일렁이는 마치 화면이 으스러지는 듯한 불길한 노이즈의 광채·
그 안에 존재하는 ‘무언가’를 이 세계의 정보로 출력하지 못해 오류가 발생하는 듯한 위화감·
하지만 레녹은 본능적으로 이것이 만다라를 구성하는 세계 10법의 힘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머릿속에 이 개념을 정리하고 받아내는 것만으로 레녹은 완전해지며 무결해진다·
원리를 이해하고 습득하는 과정을 거치는 순간 외부의 모든 힘을 거절하며 차단한다·
직접 사용할 때만이 아니라 배우고 습득하는 그 순간조차 무결에 가까워지는 초월의 잔흔·
하지만-
팟!!
거기까지 생각한 레녹이 점멸을 사용해 앞으로 가속· 아론을 그대로 들이받았다·
공간전이로 간극을 파고들어 팔꿈치 아래쪽을 쳐내 균형점을 무너뜨린다·
냉기의 폭풍이 사선으로 터져 나오며 레녹과 아론의 몸을 동시에 멈춰 섰다·
자신의 몸을 인형처럼 조작하는 레녹의 마력사를 본 아론의 표정이 차갑게 변했다·
“같잖은 수작을··· 만다라를 사용하지 않고 과인을 상대해 보겠다는 게냐?”
“그런 문제가 아니다·”
가면 너머로 레녹이 힘겹게 숨을 내쉬었다·
“이건··· 단순한 술식이나 힘이 아니야· 그것보다 훨씬 더 위험한 증거에 가깝다·”
초월적인 마법의 재능을 지닌 레녹조차 제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불가해의 법칙·
하지만 레녹은 아이러니하게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얼마 전에 해본 적이 있었다·
레녹의 통제를 벗어나 폭주하는 전격마법· 9레벨의 경계선에 도달한 벼락의 인과·
만다라를 손에 쥐는 순간 레녹은 자신이 이것을 통제하지 못하리란 사실을 깨달았고·
그것이 레녹 자신보다 훨씬 더 높은 위계에 도달해 있기 때문이라는 것마저 이해했던 것이다·
세계 10법· 이 세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열 번째 숫자의 의미·
구도자가 도달할 수 있는 아홉 번의 초월을 넘어 존재할지도 모르는 열 번째의 증거라는 것을·
누구도 도달하지 못했으나 분명히 존재하는 미답의 기적을 암시하는 전언이라는 것을·
“만다라가 보험이라는 이유를 이제 알겠군····”
레녹이 마력사를 조작해 삐걱대는 몸을 움직이며 힘겹게 중얼거렸다·
“이건 처음부터··· ‘그’도 완벽하게는 다룰 수 없던····”
어쩌면 레녹이 만다라의 존재를 인지하는 것은 지금보다 더 뒤의 일이 되어야 했을지도 모르지·
적어도 반궁 본인과 대등한 위계에 도달한 다음에야 그가 남긴 안배를 인지할 수 있게 설계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레녹이 쿤다라에서 승천의 비약을 마시고 편법으로나마 그의 분기점을 맛보았기에·
레녹 자신이었던 누군가의 기원을 내다보고 있었기에· 레녹은 아카이브에서 본디 허락되지 않는 기억을 마주하고 여기에 서 있었던 것이다·
쿤다라에서 승천의식을 집도하며 손에 넣은 요령과 지식· 극예 5법을 연구했던 기억이 아니었다면 손도 쓰지 못하고 휩쓸려버렸겠지·
“제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 말은 잘하는구나·”
아론이 냉소했다·
“우선 그 거슬리는 가면부터 박살 내주마·”
“후우···!!”
힘겹게 숨을 토해내며 레녹이 생각했다·
‘아론도 아직 정상적인 컨디션은 아니다· 적어도 지금이라면···!’
아론의 서리고리는 죽은 신의 유해로 만들어진 금기병장·
그가 아카이브의 지식을 이용해 본래 허락되지 않는 힘을 강제로 손에 넣었다는 증거다·
하지만 아론 역시 막 공정을 끝낸 탓에 상태가 안정되지 않았음은 틀림없는 사실·
기껏 손에 넣은 무구를 쓰지 않고 육탄전을 시도한 것 자체가 그 추측을 근거한다·
그렇다면-
파앙!!
거대한 기사의 유해· 옥좌에 올려둔 팔의 위에서 레녹과 아론이 동시에 움직였다·
그림자가 겹칠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두 사람의 팔과 손이 뒤엉키며 충돌했다·
쾅!
우두두둑!!
떨어지는 아론의 주먹을 옆으로 받아 흘려내고 팔꿈치로 갈빗대를 두들긴다·
발목을 밟고 무릎을 걷어차 밀어내며 명치를 찌르는 권격을 때려 빗겨냈다·
레녹의 몸을 묶은 마력사가 날뛰며 두 사람의 손이 허공에서 엄청난 속도로 교차한다·
미세한 충격파가 수십 번씩 연달아 터져 나오며 옷자락이 거칠게 흩날렸다·
두두두두!!!
“제법이구나!!”
정신없는 난타전 속에서 아론의 주먹이 레녹의 마력사를 쥐어 끊어버렸다·
관자놀이를 노리는 역수를 받아내며 레녹의 배를 발로 걷어찬 그 순간·
뻐어어엉!!!
차가운 혜성의 유해에서 추락한 레녹의 신형이 눈밭에 처박혀 나뒹굴었다·
미리 설치해 둔 마력사로 몸을 받아내는 게 아니었다면 척추가 부러졌을 터·
기침을 토해내는 레녹의 앞에 내려선 아론이 물었다·
“술사 주제에 나름 솜씨가 좋군· 무예를 배운 적이 있느냐?”
“윽···!!”
“판단이나 반응속도는 훌륭하나 타고난 그릇이 저열해 무재를 담아내지 못하는군·”
콰직!!
레녹의 어깨를 짓밟은 아론이 싸늘하게 고했다·
“이길 수 없는 싸움임을 알면서도 과인과 힘을 겨루려 하다니 그 마음가짐은 훌륭하다· 하나 거기까지·”
“····”
틀린 말은 아니었다·
반궁이 만다라 안에 남긴 것이 생각 이상으로 말도 안되는 개념이었기에 그에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으니까·
하지만 그 이상으로 놀라운 것은 아론이 만다라의 진짜 의미를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
그렇다면 역시 그 이유는-
“처음부터 한쪽을 포기할 생각 따위는 없었군····”
레녹이 마른 기침을 하며 시선을 들어올렸다·
“죽은 신의 유해도··· 만다라도··· 모두 직접 손에 넣을 생각이었나·”
“때로는 그릇을 손에 넣기 위해 내용물을 먼저 취해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니·”
아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다라의 존재가 보다 더 거대한 의미임을 알기에··· 과인은 그대와는 달리 순서를 착각하지 않았던 것뿐이다·”
“····”
“신의 유해와 승천자의 잔재· 이 세계에서 가장 뒤틀린 두 가지 의미로 운명의 양면을 덧칠하여 초월에 도달하리니·”
등 뒤에서 번뜩이는 서리고리를 띄워 올리며 아론이 말했다·
“그리하여 비로소 과인은 아카이브의 지식을 모두 열람할 자격을 손에 넣으리라·”
아론은 레녹에게 죽은 신의 유해를 금기병장으로 가공하는 것이 목표라 말했지만 애초에 그는 어느 것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만다라에 접근하기 위해 반궁의 혈족이나 그를 재료삼은 금기병장이 필요하여 고성 지하에서 건틀렛을 만들고자 했지만·
레녹이 왕도에 나타나며 그럴 필요가 없게 된 순간 기존의 계획을 포기하고 [뒷문]을 사용해 성역으로 진입했던 것·
도중에 레녹에게 그 의도를 들키면서 일이 꼬이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성공하기 직전까지 도달해 있었다·
죽은 신의 유해를 재료삼아 만들어진 서리고리· 만다라에 접근하기 위해 필요한 레녹의 존재까지·
아론이 도모했던 그 모든 계획은 아카이브를 자유롭게 열람할 자격을 손에 넣기 위한 과정이었던 것이다·
“아카이브는 결말 이후에도 존속하는 지식의 보고이자 ‘제국’의 설계도와 같으니 그곳에 세계를 구할 방법과 기술이 있다·”
레녹의 어깨에서 발을 뗀 아론이 말했다·
“아르스노바는 미처 실행하지 못하고 멸망했으나 과인이 그 지식을 사용해 대륙 바깥에서 그들이 꿈꾸던 일을 대신 행하리라·”
“···대륙 바깥이라·”
“세계의 운명이 이 대륙에 지나치게 종속되어 버렸으니· 과인은 대륙 바깥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려 한다·”
고오오오!!!
설원 저편에서부터 펼쳐지는 황금빛의 정광을 바라보며 아론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제국조차 정복하지 못한 대륙의 바깥에서 과인은 새로운 기틀을 세우고 비어 있는 황좌를 대신하리라·”
그제서야 레녹은 카바힘의 기사와 왕족들이 어째서 그렇게 추방당하고 버려진 것인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십정 1기사단장이 대륙 바깥의 인물로 삼았던 것처럼 아론은 카바힘의 부족한 재능을 대륙 바깥에서 수급하려 하고 있었던 것·
“거창하기 그지없는 꿈이로군·”
하지만 레녹은 그 사실을 이해하면서도 아론을 비웃었다·
“그런 속 편한 해결책이 있었다면 중앙도시가 그렇게 허무하게 멸망했을 리가 없지· 착각하고 있는 것 아니냐?”
“····”
“아카이브는 세계를 구할 설계도 따위가 아니다· 황제 역시 그렇게 자비로운 구세주는 아니었겠지·”
비틀거리며 일어선 레녹이 힘겹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 세계에··· 처음부터 그런 편리한 방법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던 거다·”
“아니 과인은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
아론이 무표정한 얼굴로 레녹을 돌아보았다·
“그 대답이 바로 눈앞에 있지· 만다라를 손에 넣기 위한 재료가 여기에 있지 않더냐·”
“····”
“그대가 보유한 건틀렛과 그대가 사용하는 조작술식· 그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 어느 쪽이라도 좋다·”
천천히 발걸음을 돌려세운 아론이 마력을 끌어올리며 중얼거렸다·
“그대가 이 세계에서 반궁과 가장 가까운 연결점이라는 사실만이 이 순간의 전부일 뿐···!”
“시도조차 하지 않은 일을 벌써부터 성공한 것처럼 지껄이는군·”
레녹이 피식 웃으면서 천천히 양 손을 합장했다·
“그런 말은 일단 날 죽인 다음에나 해라·”
“틀렸다 혈족이여·”
아론이 그렇게 말하며 손을 들어 올렸다·
“과인은 이제부터 그대에게 생사를 선택할 기회조차 허락하지 않을 것이니·”
조작술식을 사용할 틈은 주지 않는다·
아론이 서리고리를 회전시켜 얼음 속에 레녹을 파묻어 버리려던 순간·
그 옆에서 나타난 광대가 아론의 관자놀이를 향해 냅다 발을 휘둘렀다·
“서프라이즈~”
쩌어어어엉!!!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나타나 이미 가속을 마친 상태로 머리를 걷어차는 선공·
하지만 아론은 광대의 기습을 인지하고도 그를 막아내기 위해 반응조차 하지 않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아론의 머리를 뒤덮은 얼음이 투구처럼 광대의 발차기를 막아냈다·
싸늘한 안광을 빛내며 돌아선 아론과 광대의 신형이 동시에 다른 방향으로 회전하고·
두 초월자가 엄청난 속도로 허공에서 수십 번이 넘는 공방을 주고받았다·
퍼버버버버버벙!!!
빠르게 물러나 진통제를 투여하던 레녹조차 순간 감탄할 만큼 극도로 수준 높은 기술의 교환·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권격과 발차기를 교환할 때마다 포탄 같은 굉음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땅을 거의 딛지도 않고 공중에서 몸을 화려하게 회전시키는 광대와 일체 움직이지 않고 그 모든 공세를 받아치는 아론의 모습·
“흐럇!!”
괴상한 기합과 함께 주먹을 움켜쥔 광대의 오른팔이 기괴하게 부풀어 오른다·
부풀어오른 거인의 주먹을 아론이 무표정한 얼굴로 받아낸 순간 광대의 풍선근육이 그 자리에서 폭발·
그 안에서 수백 마리 나비가 날아올라 아론의 주변에서 일제히 빛을 발하며 자폭했다·
콰아아아앙!!!
“이런 미친·”
폭발 속에서 상처 하나 없는 아론을 본 광대가 황당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아직 제대로 힘을 다루는 게 아니고도 이 정도라구요?”
“판데모니엄의 환술사· 토커퍼즈의 광대인가·”
눈동자를 돌려 광대를 바라본 아론이 차가운 시선으로 말했다·
“우물에서 있던 일은 과인도 받아 보았었지·”
“···그 지금이라도 도망치면 봐주실 겁니까?”
“현실조작의 경지에 도달한 환술사를 살려둘 수는 없지·”
쩌저적···!!
아론의 팔이 차가운 서리에 휘감기며 순백색의 갑주로 화했다·
“머리를 짓뭉개주마·”
오른팔을 갑주화시킨 아론의 손을 따라 끝없는 마력이 서리고리를 타고 회전했다·
거대한 서리의 파동이 폭발하며 광대의 신형을 관통할 것처럼 쏘아진 그 순간·
“소환술·”
양손을 합장한 레녹이 영창을 마치고 시선을 들어 올렸다·
“허수차원의 재단사·”
쩌적!!
공간이 갈라지고 여덟 개의 팔이 튀어나와 균열을 잡아 벌린다·
[킬킬킬···!!]
음습한 웃음과 함께 튀어나온 매부리코의 거인이 광대의 목에 마력사를 걸고 잡아챈 순간·
우둑 소리와 함께 광대의 몸이 뒤로 쭉 당겨지며 레녹의 발아래 눈밭에 처박혔다·
콰아아아앙!!!!
광대를 아슬아슬하게 빗겨나간 서리의 파동이 성역을 휩쓸고 폭발했다·
황금빛 성역의 시공이 크게 기울어지며 거대한 벽과 천장이 무너져 내린다·
이리저리 벌어진 균열과 파편 사이로 하나둘씩 가까워지는 강렬한 기척·
쿵 쿵···!!
걸을 때마다 묵직하게 흔들리는 갑주· 그 이음새 사이로 움직일 때마다 뿜어져 나오는 한기·
기사단마다 형태를 달리하여 제각기 날카롭고 둔중하게 제련해낸 푸르른 형상·
얼굴을 가리는 각진 투구를 쓰고 짙은 망토를 흩날리며 설원을 진군한다·
기사들의 나라 카바힘· 고위기사들로만 이루어진 십정 기사단의 최정예·
성역 곳곳에 전력이 분산되어 있던 기사단의 핵심 전력이 일제히 복귀하고 있는 것인가·
‘작전을 시작하기 전에 아그네타에게 부탁해 마력사를 채워 넣긴 했지만 만전의 상태는 아니야·’
레녹이 안개 저편에서 다가오는 기사들을 보며 재단사를 힐끗 바라보았다·
특질계 인공소환수 허수차원의 재단사· 아그네타의 능력을 흉내 내어 만든 조작술식의 보조기구·
하지만 토커퍼즈에서 한차례 바닥까지 소모한 탓에 완전히 충전되어 있는 상태는 아니다·
재단사가 뽑아주는 마력사를 건네받은 레녹이 빠르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용할 수 있는 건 한 번뿐이다· 그렇다면-’
“빅터 괜찮습니까?”
풀썩!!
그 순간 레녹의 발아래 눈밭에서 광대가 얼굴을 쏙 내밀었다·
온 몸을 눈덩이처럼 파묻은 채 얼굴에 묻은 눈을 낼름 핥아먹는 우스꽝스러운 모습·
“시간을 좀 벌어드리긴 했지만 상태가 안 좋아 보이던데·”
“딱히 아픈 건 아니니 신경 쓰지 마라·”
“후후 그럼 다행입니다·”
광대가 고개를 휙 돌려 저 멀리서 눈보라에 휩싸인 왕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저걸 혼자서 상대하기에는 조금 막막했던지라·”
“····”
고오오오!!!!
성역에 존재하는 모든 냉기와 마력을 흡수하며 성장하는 거대한 서리고리의 형상·
얼어붙은 서리고리가 회전할 때마다 아론의 몸이 그 자리에서 얼어붙으며 얼음갑주에 둘러싸여 간다·
인간의 형상을 잃고 얼음의 화신으로 탈태하며 무한에 가까운 마력이 그의 몸을 두르고 솟구쳤다·
서리고리를 헤일로처럼 두르고 형태를 바꿔 가는 얼어붙은 백기사의 강렬한 존재감·
“마력이··· 끝이 보이지 않는군·”
레녹이 그 모습을 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저것이 신의 유해로 만든 금기병장의 힘인가?”
“외해의 신들이 지닌 그들만의 전유물 중 하나지요·”
광대가 어깨를 으쓱했다·
“현재가 아니라 다른 시간선에서 힘을 끌어다 쓰기 때문에 소모값이라는 게 없습니다· 이미 존재했던 과거· 자신들이 멸망시킨 별에게서 힘을 끌어쓰고 있다고 하지요·”
“···이미 멸망한 별에게서 힘을 끌어다 쓰고 있다고?”
“죽은 신의 유해로 금기병장을 만들어 그 힘을 어설프게나마 끌어다 쓸 수 있는 건 애초에 그 동력이 ‘과거’에 존재하기 때문이니까요·”
눈 속에서 헤엄치듯 팔을 저어 굴러나온 광대가 대답했다·
“다만 저 서리고리는 금기병장치곤 형태가 모호하군요· 신의 유해를 제대로 가공한 게 아니라 혼의 잔재만을 가공하여 저런 형태가 된 게 아닐까 싶습니다·”
“····”
아론이 신의 힘을 금기병장으로 만들었는데도 얼어붙은 기사의 유해가 남아 있던 이유가 그 때문이었나·
하지만 레녹은 그보다 광대가 방금 말했던 외신들이 힘을 다루는 방식에 대한 설명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현재가 아니라 다른 시간선에서 힘을 끌어다 쓰는·
존재하는 과거 멸망시킨 별에게 소모값을 떠넘기는 그 방식은-
“오래전에 죽은 신의 유해· 육체가 아니라 혼만을 가공했다면 그 능력은 외신의 편린을 흉내 내는 정도이긴 하겠지만····”
눈덩이를 뭉쳐 얼굴에 마사지를 하듯 문지르던 광대가 말했다·
“역시 아론바이거를 죽이지 않고는 저걸 가져갈 수 없겠죠?”
아론바이거 카바힘이 아까부터 움직이지 않던 것은 서리고리의 힘을 갈무리하기 위해서일 터·
안정화 작업이 끝나면 본격적으로 차가운 혜성의 힘을 휘둘러 레녹의 존재를 ‘보존’하려 하겠지·
그가 만다라가 아니라 신의 유해에 먼저 손을 댄 이유 역시 그것 때문이었으니·
그 전에 먼저 움직여야 한다면 기회는 지금 뿐이었다·
“토커퍼즈 때와 똑같군·”
레녹이 냉소했다·
“이번에도 각자 알아서 할까?”
“아뇨· 제가 빅터에게 맞춰드리는 걸로 가죠·”
광대가 웃었다·
“사도랑 싸우는 일 따위야 아무래도 상관없었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좀 달라서 말입니다·”
“왜지?”
“저거 아마 높은 확률로 단장에게 필요한 물건일 겁니다·”
아론의 등 뒤에서 회전하는 서리고리를 눈짓한 광대가 말했다·
“아마 단장이 하는 일을 마지막까지 구경하려면 저게 필요하겠지요·”
“····”
“뭐 이유를 설명하자면 조금 복잡합니다만····”
느릿하게 말끝을 흐린 광대가 품 안에서 다트를 꺼내 들었다·
“시간을 끌어드리지요· 얼마나 있으면 되겠습니까?”
“얼마든 상관없어· 단 한 번이면 된다·”
다가오는 기사들을 향해 돌아선 레녹이 마력사를 뽑아 쥐며 말했다·
“그 뒤로는 내 마음대로 할 테니 너도 알아서 도망치든 해·”
“그거야 뭐·”
광대가 씩 웃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제가 제일 잘하는 일 아닙니까·”
파앗!!
뒤로 넘어진 광대가 휙 모습을 감추고 마력사를 뽑아 든 레녹이 가속했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튀어나간 두 인영을 향해 기사들이 거칠게 질주했다·
쐐애애액!!!
그림자로브가 거칠게 흩날리며 레녹의 신형이 마력사를 따라 반원을 그리며 회전한다·
번뜩이는 검광과 참격을 아슬아슬하게 빗겨내며 엄청난 속도로 성역 외곽을 향해 가속·
얼어붙은 왕좌· 그 안에 남겨진 차가운 혜성의 유해와 반대 방향으로 빠르게 거리를 벌렸다·
레녹이 기사들의 신형을 돌파해· 성역 바깥을 향해 전속력으로 손을 뻗은 그 순간·
어마어마한 압력이 머리 위에서 쏟아지며 레녹을 찍어눌렀다·
콰아아아아앙!!!!
순식간에 레녹의 몸을 짓밟고 로브 사이를 꿰어 바닥에 박아넣는 검격·
엎드려 쓰러진 레녹의 몸을 다섯 명의 기사들이 밟고서 검을 겨누었다·
철컥!!
“거기까지다 반궁의 혈족·”
“술식을 사용하는 순간 목을 베겠습니다·”
십정 기사단의 필두· 왕도에서 가장 강한 기사단장들의 집결·
이 와중에 레녹의 목적지를 읽어내고 도착지점을 예측해 그대로 요격해 낸 건가·
대검과 곡도 직검을 각자 다른 자세로 쥐고 레녹의 급소 가까이 찔러넣는 단호한 손속·
개중에는 유젤을 비롯한 아는 얼굴과 처음 보는 검사나 창사 역시 섞여 있다·
“폐하께서 그대의 목숨을 필요로 하니 기다리도록·”
“죽고 싶지 않으면 움직이지 마·”
“이번에는 도망칠 수 없을 걸세·”
“아니·”
그 순간 레녹이 희미한 웃음과 함께 대꾸했다·
“이번에는 도망치지 않을 거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도 없었지·”
“뭐라고?”
“결착을 내지 않을 거라면 애초에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어· 다만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다·”
아카이브에서 마주했던 그의 기억·
레녹이 아직 실감하지 못하는 자신이었던 순간의 잔향·
알면서도 주저하며 망설이고 또 확인하는 것을 미루었을 뿐·
모든 것을 버리고 다시 돌아와 여기 서 있기에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지 알고 싶어 했다·
이미 답을 정했으면서도 순간적으로 망설이고 말았다·
그렇기에 이번에는-
파아아아아아앗!!!!!
무채색의 파문이 거세게 터져 나오며 성역을 잠식한다·
레녹을 찍어누른 기사들이 극도로 경계하고 있던 전조·
하지만 그 파문이 퍼져 나오는 곳은 단장들이 포위하고 있던 레녹의 발 아래가 아니었다·
레녹과 한참 멀리 떨어진 곳에 부유하는 매부리코의 거인 허수차원의 재단사·
여덟 개의 팔을 모아 수인을 맺은 소환수를 중심으로 무채색의 파문이 터져 나오고 있다·
“이럴 수가···!!!”
“설마 말도 안 돼!!”
그제서야 그 의미를 깨달은 기사단장들이 경악하며 시선을 돌렸다·
레녹의 의도가 무엇인지 그 방법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것인지 그들 역시 곧바로 이해했기 때문·
자기개변의 일곱 가지 위계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만큼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고도 믿을 수 없다·
“처음부터 술자가 미끼 역할을 한 건가!!!”
“인간이 아니야· 어떻게 소환수를 사용해 심상을···!!”
“조작술식의 진가는 매개체를 사용해 현상을 지배하는 것에 있으니·”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 올린 레녹이 웃었다·
“극에 이르면 근원심상을 펼치는 일조차도··· 나 자신에게서 기인할 이유가 없지·”
빅터의 신분으로 손에 넣은 조작술식의 분기점·
판데모니엄의 멤버이자 승천자 반궁의 술식을 계승한 초월자로서·
특질계의 정점에 도달해 술식의 한계조차 초월한 미래의 분기점에서·
“죽여!!”
“목을 베라· 영창하지 못하게 막아!!”
카각!!
목과 심장을 향해 떨어지는 차가운 칼날을 마주하며 레녹이 속삭였다·
“자성영역 전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