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4화
종언의 운명(5)
우우우웅···!!!
따스한 바람이 불어오는 황금빛의 신전·
창가를 타고 들어오는 노을빛을 받으며 걸음을 옮긴다·
저 멀리 펼쳐진 지평선 너머 주황빛으로 저물어가는 햇빛·
아무런 설명이 없어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르스노바가 만든 아카이브는 두 세계의 경계선에 겹쳐 만들어진 개념의 영역·
저물어가는 노을조차 얼마 남지 않은 이 세계의 시간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레녹이 이 세계에서 깨어난 뒤로 계속해서 들어왔던 결말이 이제 정말 머지않았다는 사실을·
“····”
가슴을 저미는 두려움마저 이제는 익숙하다·
하루를 살아 내일을 꿈꾸는 기나긴 여정 속에서 여전히 여기에 있다·
세계의 결말을 파헤치는 도중 가끔 마주했던 레녹 자신에 대한 흔적·
눈에 밟혀 허투루 지나치지 못하면서도 또 외면하고 주저해 왔던 비밀·
파앗!!
걸음을 옮길 때마다 황금빛의 신전 곳곳에서 눈부신 빛이 모여들었다·
금빛의 광자가 레녹을 따라 물결처럼 흐르면서 아름다운 선율을 연주했다·
귓가를 타고 가슴을 적시는 나른하고도 따스한 현악기의 소리·
어색한 만큼 익숙하고 또 낯선 만큼 정겹게 느껴진다·
마치 오래전부터 이 선율을 들어왔던 것처럼·
이 선율을 들으면 기억해 내리라 믿는 것처럼·
알면서도 억지로 무시해 왔던 기시감·
알지 못하면서도 매번 어디선가 느껴왔던 익숙함·
가슴 속에서 차오르는 레녹 자신의 것이 아닌 감정 속에서 천천히 눈을 뜬다·
휘오오오!!!
황금빛의 거대한 구체가 떠올라 레녹의 눈앞에서 고고하게 회전하고 있었다·
[제국 황성 아카이브 접속 완료]
[특급권한자 영성 개방]
[존재투사율 확인 완료]
[예약된 접속정보를 불러옵니다·]
파아아앗···!!!
아름다운 황금빛 항성이 회전하며 빛의 고리가 구체를 감싸 안는다·
레코드의 필름을 재생하는 것처럼 청아한 음성이 재차 흘러나왔다·
[권한자 본인이 아카이브에 남긴 메시지가 1건 있습니다·]
[열람하시겠습니까?]
그 말을 끝으로 마우스의 커서처럼 깜박이는 구체의 형상·
레녹의 대답을 서두르지 않고 차분하게 질문을 반복하는 금빛의 항성·
하지만 레녹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고 눈앞의 구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스스로 의지를 지니고 레녹의 동의를 기다리는 듯한 아름다운 정경·
아카이브를 이루는 모든 의지와 동력이 모여 레녹의 앞에 형태를 갖춘 듯한 모습·
하지만 구체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레녹이 신전 밖의 노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아르스노바의 아카이브에 방문한 특급권한자·
권한자 본인이 직접 자신의 앞으로 남겨둔 메시지·
언젠가 레녹이 기억도 하지 못하는 누군가가 이 순간을 준비해 두었다는 사실은 분명하겠지·
하지만 이 메시지가 누군가의 안배라면 레녹이 이것을 열람하는 순간 아카이브가 어떻게 반응할지 알 수 없다·
만약 아카이브가 지금과는 다른 형태로 변화한다면 안타레스가 언급한 ‘지식’을 손에 넣는 작업이 요원해질지도 모르는 일·
여기까지 와서 죽은 신의 유해를 훔칠 ‘권리’를 포기할 수는 없다·
당장은 아카이브에 대한 정보를 얻고 이곳이 정확하게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 알아보는 것이 우선·
고민하던 레녹이 구체 대신 스스로 질문을 골랐다·
“이 아카이브가 만들어진 목적은 뭐지?”
[아카이브의 설계 목적과 구조에 대한 키워드 접근·]
레녹의 질문에 황금빛의 구체가 반응했다·
종횡으로 느릿하게 회전하는 그것은 어디서 바라보든 완벽한 구체의 형상을 띄고 있었다·
거대한 레코드 판처럼 구체가 회전할 때마다 감정이 없는 청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카이브는 제국 황성이 멸망하기 전 외우주에 남겨둔 골든 레코드입니다·]
[세계와 외우주· 물질계와 허수차원의 경계선에서 중첩상태를 유지하기에 아카이브는 언제나 사상변수를 더해 관측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아카이브는 외우주가 멸망한 뒤에도 존속하며 다음을 위한 초석으로서 기능합니다·]
“이곳에 존재하는 모든 지식들이 아르스노바가 남긴 유서라는 건가?”
[아카이브는 물질계에 존재하는 개념이 아닙니다· 권한자가 접속한 이곳 역시 아카이브의 본질은 아닙니다·]
레녹의 눈앞에서 금빛의 구체가 느릿하게 기울어졌다·
[무한한 시간선 안에 무한한 잔상으로 남아 지식의 습득과 갱신을 목표로 매 순간 존재하며 소멸합니다·]
[이는 외우주에 이론상으로 존재하는 아카식 레코드의 작동원리를 가정하고 모방연산하여 만들어졌습니다·]
“····”
쏟아지는 개념과 정보가 지나치게 많아 일일이 질문하고 반응하기도 어렵다·
그저 눈앞의 구체가 설명하는 모든 말을 기억하고 잊지 않으려고 노력할 뿐·
하지만 레녹은 그 와중에도 아카이브의 대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읽어낼 수 있었다·
“아카이브의 본체라는 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고 이곳은 아카이브의 무수한 잔상 중 하나라는 건가····”
흘러가는 시간 속 모든 순간 존재하는 모든 아카이브가 자기 자신의 복제이자 독립적인 잔상 그 자체·
그것은 마치 의식을 무한히 쪼개어 체감시간을 영원에 가깝게 잡아 늘리는 승천자의 사고방식과도 닮아 있다·
아르스노바 황성은 자신의 지식을 외우주에 남기기 위해 승천자의 힘마저도 마음대로 다뤄내었던 것일까·
레녹은 그 대답을 듣고서야 지금 자신이 마주한 상황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이곳이 아카이브의 잔상 중 하나이기에 안타레스와 낚시꾼의 능력으로 접속할 수 있던 거였군·”
[실시간으로 지식을 습득하고 갱신하며 정리하고 선별합니다·]
[기록된 정보를 매 순간 다르게 분류하여 외우주의 정보오염을 방지합니다·]
[특수한 소질이나 미지의 지식을 지닌 이들의 접속을 우선적으로 허가하고 있습니다·]
양면성의 재능을 지닌 아론바이거 수원을 이동하는 낚시꾼이 아카이브에 접속이 가능했던 건 그런 이유 때문이었나·
“아카이브 내부의 정보가 계속 갱신되고 있다면 지금 이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도 관측이 가능하겠군·”
레녹이 물었다·
“지금 갱신되고 있는 강력한 정보의 흐름이나 위치좌표를 이쪽에서 확인할 수 있나?”
[특급권한자의 요청을 황성 의전서열에 의거해 판독·]
[판정불가· 정보연산 오류·]
···
···
···
[연산 재개· 해당 명령을 최우선적으로 처리합니다·]
“···?”
순간적으로 눈앞의 구체가 버벅거리면서 오류를 일으키는 듯했지만 레녹이 그것을 의아해할 시간은 없었다·
황금빛의 구체가 눈앞에서 종횡으로 회전하며 빛을 발하는 순간 주변의 풍경이 빠르게 변하기 시작했기 때문·
화악!!!
레녹을 중심으로 거대한 신전 전체가 움직이며 풍경을 바꾸는 듯하다·
형태를 알 수 없는 무수한 이미지와 염상이 흐릿하게 일렁이며 가속하고 이내 순식간에 조립되며 쌓아 올린 그 순간·
눈앞에 펼쳐진 광대한 벌판의 풍경을 마주한 레녹의 표정이 창백하게 변했다·
“이건····”
[현재 중앙대륙에서 가장 방대한 독립정보의 개체충돌을 실시간으로 관측 중·]
고오오오오!!!!
끝없는 벌판을 짙은 어둠으로 물들이는 장엄한 광경·
일렁이는 암흑의 파도를 밟고 솟구치는 어둠의 배와 그 선박을 떠받치는 암흑거인·
그리고 그 어둠이 향하는 저편에서 심장박동처럼 솟구치는 형태 없는 언어의 잔향·
흑관을 짊어지고 진군하는 어둠의 군세·
시체를 문자로 삼아 타락한 언어의 정원·
레녹이 알고 있는 역사상 전례 없는 두 초월자의 상징과도 같은 풍경을 마주한 그 순간·
멍하니 입을 벌린 레녹의 옆에서 황금빛의 구체가 무감정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승천자 진와(陳蝸)· 흑율(黑律)의 마지막 혈통·]
[아르스노바의 영공을 활보하는 초월체들 중 급격하게 보유정보를 갱신하며 접근 중·]
[사상전역과 흑율권역의 시공간좌표 중첩 개시· 44시간에 걸쳐 해당 시공을 완전개변·]
[멸둔(滅遁)과 공경(空鏡)의 영성이 지정좌표 인근에 출현· 정보갱신 관측이 목표로 추정·]
“···명왕이···!”
발아래 펼쳐진 풍경을 보자마자 상황을 이해한 레녹이 얼굴을 굳혔다·
첫 번째 관문에서 가비행을 시작했던 명왕이 끝내 진와의 실낙원에 발을 들인 건가·
아직 승천자 본인과 조우하지는 않은 것 같지만 그녀의 사상전역에 진입한 것은 확실하다·
쿠구구구···!!!!
장엄하게 솟구치는 어둠의 배 위에서 얼굴이 보이지 않을 만큼 짙은 어둠에 뒤덮인 인간의 형상·
그런 흑마법사를 떠받치듯이 발아래서 몸을 굽히고 앞으로 진군하는 암흑거인들의 군세·
벌판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과 초목이 시들어가며 싸움이 벌어지기도 전에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다가올 결전을 앞두고 주변을 정리하듯 가비행과 실낙원이 교차하는 지점마다 재액이 펼쳐졌다·
레녹이 그 형용할 수 없는 참상을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해 앞으로 한발 내디딘 그 순간·
[정보갱신 불가· 실시간 관측 데이터 부족·]
팟!
명왕이 내려다보이던 풍경이 그대로 소멸하며 황금빛의 신전으로 돌아왔다·
[다음 시간선의 아카이브를 참조해 주십시오·]
“···내가 접속한 아카이브에 존재하는 명왕의 정보는 이게 끝인 건가?”
레녹이 서 있는 이곳은 무한한 시간선 안에 존재하는 아카이브의 잔상 중 하나·
그렇기에 이곳에 존재하는 지식은 레녹이 아카이브에 접속한 시점에 갱신이 멈춰져 있다·
아마 레녹이 아카이브에 접속하던 그 시점에 명 역시 진와의 실낙원에 진입하고 있던 것이겠지·
그것을 깨달은 레녹이 빠르게 질문의 방향성을 바꾸었다·
“아카이브에 접속을 유지한 채로 이곳의 정보를 새롭게 갱신받을 수 있는 방법은?”
[아카이브는 현실과 현상의 경계선에 중첩되어 있기에 양쪽으로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접속자의 위치가 정보갱신 지점과 가까울수록 특이점의 정보를 쉽게 열람할 수 있습니다·]
어디에서 아카이브에 접속했느냐에 따라 열람할 수 있는 지식이나 정보가 일부 달라진다는 건가·
그제서야 레녹은 어째서 자신이 아카이브에 접속할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단순히 안타레스의 예지나 낚시꾼의 능력으로 아카이브에 바로 접속할 수 있던 것이 아니다·
그저 레녹이 현실에서 위치해 있는 카바힘 왕도가 바로-
“외신이 죽고 그 유해를 보존한 장소였기 때문이었군·”
[북대륙에 추락한 차가운 혜성은 대륙의 기후를 반영구적으로 개변하였습니다·]
[해당 좌표에 남겨진 신의 유해는 이 세계에 종언의 운명이 내려왔다는 증거·]
“···종언의 운명?”
[첫번째는 우연· 두번째는 필연· 세번째는 운명·]
구체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 이상의 비밀을 답했다·
[시작은 우연일지라도 마지막은 운명일지니·]
[세 번째로 이름 지어진 운명의 이름은 종언·]
[이 세계의 종언은 본디 운명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
이 세계에 결말을 지어주는 역할을 맡은 세 번째·
알고 있었다· 언제나 궁금해했었다·
그 말이 레녹의 과거와 현재 미래 중 어디를 가리키며 암시하고 있는 것인지·
확신하지 못하고 불안해하면서도 계속해서 부정해 왔다·
우연과 필연이 그러했듯 운명이란 말에 얽매이지 않으리라고·
하지만 그 운명이란 역시-
[권한자 본인이 아카이브에 남긴 메시지가 1건 있습니다·]
[열람하시겠습니까?]
“····”
구체가 다시금 레녹에게 띄워올린 전언·
말없이 그것을 바라보던 레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키이이잉-!!
그 순간 황금빛의 구체가 눈앞에서 검게 물들면서 풀려나왔다·
노을 진 아카이브의 정경을 어둠으로 물들이고 거대한 암흑 속에서 레녹을 끌어안았다·
그것이 머릿속에 정보를 직접 꽂아 넣는 ‘기억’의 전이방법임을 레녹이 깨달은 그 순간·
레녹의 눈앞에서 펼쳐진 풍경이 새카만 노이즈로 뒤덮였다·
파지지직!!!
귀를 찌르는 고통스러운 지저귐· 눈앞을 일그러뜨리면서 일그러지는 시야·
끈적이는 검은 호수에 걸터앉아 검은 피로 뒤덮인 양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양손을 새카맣게 물든 피로 칠한 채 머리 위로는 부서지는 하늘을 얹고·
노이즈로 뒤덮인 시선을 들어 부서지며 뒤집히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슈우우우우···!!!!
따스했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고 검은 호수 주변이 얼어붙은 설원으로 변한다·
온후했던 북대륙의 기후를 영구적으로 뒤바꾸고 변질시키는 사상 최악의 재해·
얼어붙은 하늘의 중심에서 회전하는 거대한 흑색의 원·
쿠오오오···!!!!
[····]
검은 눈물을 흘리면서 끝없이 망가져가는 검은 고리의 형상·
그가 염원하고 시도하였음에도 이뤄내지 못한 실패의 증거·
그제서야 레녹은 자신이 누군가의 기억을 이 자리에서 들여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었다·
레녹에게 메시지를 보낸 존재는 자신의 전언을 구태여 언어로 남겨둔 것이 아니다·
그저 자신의 기억을 아카이브에 새겨넣고 언젠가 찾아올 레녹에게 보여주려 했을 뿐·
‘감정이····’
끼기기긱···!!!
기억의 동화율이 비정상적으로 높아 필요 이상으로 많은 감각이 내면에 흘러 들어온다·
매 순간마다 느껴지는 상실의 고통도 복잡한 감상 속에서 흐릿해져 가는 정신도·
아주 오랫동안 미뤄두었던 반드시 해야 할 일을 이제서야 해냈다는 안도감조차·
모든 것이 레녹의 것이 아니면서 또 레녹의 것처럼 익숙하기만 하다·
치지지지직-
기억 속의 ‘누군가’가 눈앞에서 일렁이는 노이즈에 희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 존재를 이 세계에서 거부하고 지워내려는 듯한 강렬하면서도 섬뜩한 노이즈·
마치 레녹이 교주와 단장에게서 한차례 마주했던-
“당신은 내가 아니군요·”
그 순간 노이즈를 뚫고 선명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검은 호수 위에 새하얀 사제복을 입은 누군가가 서 있었다·
“흥미로운 일입니다·”
노이즈가 낀 얼굴로 사제가 부드럽게 말했다·
“나는 세 번째가 이미 당도했으리라고 분명 당신일 거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
“당신이면서 당신이 아니군요· 당신이 아니면서 당신입니다·”
대답하지 않는 그를 지나쳐 천천히 걸었다·
“그건 어쩌면 당신의 기원이나 당신이 행해온 과업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지요·”
검은 호수 위를 걸으면서도 한점의 더러움도 닿지 않는 몸으로·
한 번만 들어도 결코 잊을 수 없는 특유의 절대적인 신성(神聖)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모든 것을 무한하게 부수고 만들기를 반복하며 끝내는 자기 자신까지 갈아 넣고····”
교주가 웃으면서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스스로의 종언이 되고자 하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