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9화
쇼다운(20)
“아론바이거 카바힘이 이 감옥에 숨겨둔 비밀이라고?”
“그래 재수 없는 가면··· 쿨럭! 역시 네놈이 맞았군·”
고성 지하 감옥의 한쪽에 쓰러진 질리언이 기침하면서 피를 토했다·
피가 섞인 가래를 뱉어낸 그가 아까보다 더 선명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내 성채에서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며 유물을 훔쳐 간 주제에 이제는 왕도까지 손을 뻗은 거냐·”
“···나야말로 카바힘의 대공이 이런 곳에 갇혀 있을 줄은 몰랐군·”
레녹이 대꾸했다·
“왕가의 직계혈족이 왜 이런 감옥에 갇혀 죽어가고 있는 거지? 반역이라도 저질렀나?”
“반역은 X발 무슨··· 퉤! 내가 그런 귀찮은 짓을 왜 하냐?”
질리언이 침을 퉤 뱉으며 비웃었다·
“잘나신 형님의 왕좌를 빼앗고 싶었다면 내가 변방의 성채에 눌러앉아 그따위로 시간을 죽치고 있지는 않았겠지·”
“····”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레녹이 광대와 함께 거인의 성채에 잠입했을 당시 질리언은 성채 보고에 처박혀 한참 잠을 자고 있었으니까·
반지를 훔치기 직전까지 질리언의 행방을 알지 못한 탓에 그에게 발각당해 한바탕 소란을 치르고 탈출해야 했다·
광대의 해적룰렛 탈출쇼가 아니었다면 거인의 성채에서 도망치기 위해 적잖은 시간을 소모해야 했겠지·
카바힘의 대공이라는 작위를 달고 있지만 레녹이 보기에도 질리언은 권력이나 명예에 관심이 없는 사람에 가깝다·
그가 주시자의 자리를 받아들인 것 역시 방만의 결과였던 만큼 그가 반역을 꾀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겠지·
“그딴 이야기는 아무래도 됐으니까 이 개 같은 사슬이나 빨리 풀어봐라·”
질리언이 오른팔을 레녹의 앞에 척 내밀었다·
“그러지 않아도 아까부터 왼쪽 옆구리가 가려워서 죽을 것 같아· 팔이 묶여 있으니까 긁지를 못하겠군·”
“그것보다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대놓고 질리언의 말을 무시한 레녹이 물었다·
“아론이 숨겨두었다는 비밀은 그가 보유한 양면성의 재능과 관련이 있는 건가?”
“···뭐?”
질리언이 순간 말문이 막힌 표정으로 레녹을 올려다보았다·
“도둑놈· 네가 어떻게 양면성의 재능을····”
“시간이 없으니까 간단하게 설명하지· 나는 지금 아론이 시도하고 있는 [문]을 여는 일에 관심이 있다·”
레녹이 가면 너머로 붉은 안광을 번뜩였다·
“하지만 [문]을 열고 성역을 엿보는 과정이 미심쩍기에 그 근거를 찾고 있었지· 무언가 알고 있는 것이 있는 거냐·”
“네놈 이번에는 왕도에 도둑질을 하러 온 게 아니- 쿨럭!!”
험악한 시선으로 레녹을 노려보던 질리언이 이내 기침하며 피를 토해냈다·
뚝뚝 떨어지는 피를 회의감 섞인 표정으로 바라보던 질리언이 침을 뱉었다·
“하··· 그래· 이대로는 얼마 버티지도 못하겠지·”
“····”
“도둑놈· 감옥 문을 열어라· 내 몸을 묶고 있는 이 사슬을 풀어·”
질리언이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손을 향해 눈짓했다·
“그러면 네놈이 원하는 대로 아론이 숨기고 있는 것을 보여주지·”
“꽤나 적극적이군· 아론바이거의 동생이면서 그와 적대할 생각인가?”
“아론과는 끝났어· 지금 내 꼬라지를 보면 모르겠냐?”
어둠 속에서 질리언의 두 눈이 활활 타오르는 것 같았다·
“거인의 성채를 지키지 못한 죄로 목을 쳤다면 받아들였을 거다· 전장에 나가 고기방패가 되라고 했다면 따랐겠지·”
“····”
“하지만 아론이 이 고성 지하에서 시도하고 있는 미친 짓거리에는 동참 못 해· 그것뿐이다·”
왕의 친혈육인 질리언이 이런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이 이상하다 싶었더니 아론의 계획에 동참하는 것 거부하다 여기 갇혀 버린 것인가·
생각에 잠겨 있던 레녹이 팔짱을 풀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멋대로 날뛰다 죽는 건 상관없지만 방해는 되지 말아야 할 거다·”
이용할 가치가 있다 느꼈기에 거래할 뿐 레녹은 질리언이 죽든 말든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주시자라고는 해도 레녹이 청의 눈을 탈퇴한 시점에서 그런 것 따위는 아무런 의미도 없어진 바·
애초에 레녹은 주시자 중에서도 몇몇 이들을 제외하면 유대감이나 친밀감을 느끼지 않았다·
질리언이 아론을 적대하다 죽든 말든 레녹으로서는 크게 상관하고 싶지 않았으니·
오히려 아론에 대한 적개심을 이용해 그의 비밀을 알아낼 수 있다면 남는 장사다·
“풀어주지· 문 앞에서 비켜·”
“잠깐 감옥 안에 침입자를 감지하는 술식이 설치되어 있으니 내가 설명하는 대로-”
찰칵!!
감옥 문의 잠금이 허무할 정도로 쉽게 풀리며 레녹이 감옥 안으로 들어섰다·
그림자 속에서 흔들리는 흑색 로브를 보며 질리언이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분명 며칠 전에 한 놈이 탈출을 시도하다 끌려가서 도축당했던 것 같은데·”
“평범한 탐지 술식 따위로 내 기척을 탐지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지·”
레녹이 손을 뻗어 마력사를 뽑아내며 말했다·
“손 내밀어· 사슬을 잘라주마·”
“도둑놈답게 몰래 숨어드는 일에는 아주 도가 텄구나·”
“팔까지 같이 잘리고 싶은 건가?”
“아 그건 좀 곤란한데·”
싸늘한 레녹의 반문에 질리언이 피식 웃으며 어깨를 돌렸다·
“그러지 않아도 이미 외팔이거든·”
“····”
피범벅이 된 질리언의 왼팔 소매가 나풀거리는 것을 본 레녹이 입을 다물었다·
고문이나 투옥만 당한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왼팔을 잃어버리기까지 했던 것인가·
하지만 팔 한짝을 잃었음에도 질리언은 그 사실에 슬퍼하거나 분노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쿵!!
마력사를 사슬 사이에 쑤셔넣고 조작해 잠금장치를 풀어낸다·
굉음과 함께 떨어진 육중한 사슬을 두고 일어선 질리언이 오른팔을 휙휙 돌렸다·
“뭐 이 정도면 괜찮겠군·”
어깨를 돌리면서 천천히 가동범위를 확인한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섰다·
“손가락이 몇개 안 움직이긴 하는데 주먹을 휘두르는 데는 문제 없어· 가보자고·”
“어디로 가자는거지?”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냐? 당연히 이 개 같은 지하 감옥의 최하층이지·”
우웅···!!!
질리언이 그렇게 말하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팔이 하나 잘리고 만신창이가 된 몸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웅혼한 마력·
레녹이 반사적으로 같이 마력을 끌어올린 그 순간 질리언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주먹을 펼쳤다·
훅-
소리도 없이 레녹의 옆을 스쳐지나간 팔이 지하 감옥의 뒤쪽 벽면을 움켜쥐고 뜯어냈다·
투툭···!!
손에 쥐고 있던 돌가루를 한 손으로 털어낸 질리언이 자신이 만든 벽의 구멍을 가리켰다·
“됐다· 이 정도면 바깥에 들키지는 않았겠지·”
“····”
“왕족인 내가 복도를 걸어 이동하면 무조건 들킬 거다· 여기서부터는 길을 만들어야 해·”
“짐덩어리 주제에 발목을 잡지 않는 방법 정도는 아는 것 같군·”
“이 도둑놈 자식이 말 다했냐?
투덜거리면서도 앞장서서 벽의 구멍을 향해 걷는 질리언의 모습·
하지만 레녹은 방금 전 질리언이 벽을 뜯어낸 ‘기술’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왼팔을 잃었다고 소우주까지 잃은 건 아닌 모양이군· 오히려 능력 자체는 더 강해진 것 같은데····’
질리언의 소우주 [거신병장]은 신체 일부를 거인화시켜 무기로 사용하는 심상능력·
광대와 함께 질리언을 상대해 본 레녹은 그의 소우주가 얼마나 강력한 능력인지 잘 알고 있었다·
신체의 크기와 질량을 키우는 능력 자체로도 충분히 강력하지만 놀라운 것은 소우주를 발동하는 그 속도·
신체 일부를 순간적으로 거인화시켜 포탄처럼 쏘아내는 속도는 레녹조차도 정면에서 겨우 반응할 정도였다·
단순히 거인이 되어 날뛰는 것보다 거대화와 축소화를 반복하며 중량을 조절할 때 상대하기 훨씬 까다로울 정도였으니·
방금 질리언은 손을 거대화시켜 감옥 벽면을 뜯어낸 뒤 곧바로 크기를 되돌려 쥐고 있던 파편을 압축해버렸다·
손을 키웠다 줄이는 일련의 속도가 너무나 빨라서 벽면이 부서지는 소리조차도 나지 않았을 정도·
체감상으로는 거인의 성채에서 질리언을 상대했을 때보다 더욱 빨라진 것 같았다·
‘저번에 비해 속도가 더 훨씬 빨라졌다· 팔을 잃은 사고와 무언가 관계가 있는 건가?’
“이쪽이다·”
콰드득!!
왼팔 소매를 나풀거리며 오른팔을 휘둘러 엄청난 속도로 벽면을 파고 들어가는 질리언의 모습·
그 과정에서 진동이나 소리가 거의 없어서 방음마법이나 기척차단 술식을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내 형과 만났다면 아론이 어떤 사람인지도 이미 알고 있겠군·”
으깬 돌 부스러기가 떨어지는 작은 소음 속에서 질리언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설명할 건 많지 않아· 이 아래서 벌어지는 일을 보면 한 번에 이해할 수 있을 거다·”
“계획의 실행장소를 이 고성으로 잡은 것이 감옥의 존재 때문이 아니었다는 건가?”
“이 감옥은 아론이 숨기고 있는 비밀의 찌꺼기 정도에 불과하지·”
투두둑···!!
합급을 덧댄 벽을 우악스럽게 뜯어낸 질리언이 천천히 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여기 갇혀 있는 죄수들은 대부분 이렇게 아론의 ‘부품’들을 보관하는 장소에 불과하거든·”
“···아”
피칠갑이 된 비좁은 감옥 안쪽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던 누군가 시선을 들어올렸다·
두 눈이 엉망진창으로 파내어 뜯겨나간 채 피골이 상접해져 있는 수척한 몰골·
바닥을 더듬거리면서 땅의 진동을 감지해 방향을 찾은 남자가 천천히 얼굴을 돌렸다·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벙긋거리며 손톱이 뽑힌 손으로 바닥을 쓰는 모습·
“아 아아···”
“두 안구와 혀만 뽑혀 나간 게 아니군·”
가면 너머로 남자의 전신을 훑어본 레녹이 말했다·
“한쪽 간장과 신장· 오른쪽 손목과 다리· 힘줄과 연골까지· 모두 강제로 적출당한 건가·”
“이 나라에서 아론의 눈에 들지 못할 만큼 소질이 낮은 죄인은 보통 이렇게 된다·”
질리언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대로 쓰이지도 못하고 쓸 만한 장기만 빼 먹힌 채 감옥에서 죽는 날을 기다리게 되는 거지·”
“아····”
질리언의 나직한 말에도 남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목을 끓는 듯한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천천히 옆으로 비켜섰을 뿐·
“감옥의 이쪽 벽면이 지하 감옥 최심부로 향하는 지름길이다·”
질리언은 그런 남자를 말없이 바라보다 천천히 돌담 쪽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그리고 들키지 않고 이 고성을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하지·”
“왜 최심부로 가는 길이 탈출로라는 거지?”
“내 형이 여기 와 있다면 이 주변은 기사단이 물샐틈도 없이 포위하고 있을 테니까·”
질리언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감옥 최하층에 공간전이 마법진이 있어· 그곳을 지키는 놈들을 때려눕히고 탈출한다·”
“네 주먹으로 치면 머리가 터져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주변이 꽤 볼만해지겠군·”
“아무래도 상관없어·”
우두둑···!!
질리언이 주먹을 쥐는 것과 동시에 손등을 타고 올라온 핏줄이 두드려졌다·
“거기 있는 놈들은 모두 내 형과 한통속이다· 죽든 말든 알 게 뭐야·”
“진짜 그런 걸 신경쓰지 않는 사람은 그렇게 혓바닥이 길지 않지·”
“이게 아까부터 진짜··· 지금 나랑 한번 해보자는 거냐?”
옆에서 노려보는 질리언의 눈빛을 무시한 레녹이 생각에 잠겼다·
아론바이거가 숨기고 있는 것을 몰래 캐내려다 예상 이상으로 커다란 비밀을 조우한 상황·
하지만 고성 지하 감옥 아래 아론의 ‘목적’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건 생각보다 중요한 수확이다·
당장 고성을 탈출할 생각은 없지만 질리언을 도와 혼란을 부추기고 감옥 최심부를 뒤져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
‘만다라의 존재를 확인한 이상 회수할 방법을 찾아야 해· 그냥 넘어갈 수는 없겠지·’
레녹이 만다라에서 가능성을 느낀 부분은 만다라가 사상전역이 아니라 권역이라는 것·
권역이란 일반적으로 술사가 그리는 술식의 이상향을 현실에 구현하는 개념에 가깝다·
만다라가 권역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면 그것을 회득하는 것만으로 레녹의 조작술식에 엄청난 진전이 될 터·
그리고 그만한 특이점이라면 만화경 안에 존재하는 조작술식의 분기점을 차원이 다른 수준으로 진보시키는 것도 가능하겠지·
만다라 자체의 능력이나 본질에도 관심이 있지만 가시적인 조작술식의 성능향상에 대해서도 역시 지나칠 수 없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이 시점에 아론이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를 먼저 확인해보아야 했다·
“역시 현장을 직접 확인하는 게 가장 빠를 것 같군·”
결론을 내린 레녹이 시선을 들어올렸다·
“전이법진이 있다는 감옥 최심부로 가지· 안내해라·”
“이 자식이 아까부터 누구를 집 지키는 개로 알고····”
질리언이 투덜거리면서도 감옥 벽면을 뜯으면서 길을 열기 시작했다·
투두둑!!
감옥 안으로 깊게 들어갈수록 아벨보다도 더 엉망진창이 된 죄수들이 눈에 들어온다·
벽을 부수고 길을 뚫는데도 레녹이나 질리언을 눈치채지도 못할 만큼 감각이 망가진 이들·
인간으로서의 기능이나 능력은 모두 잃고 그저 숨만 붙어 있는 고깃덩어리나 마찬가지·
“다 왔군· 저 안쪽이다·”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서늘한 냉기에 표정을 굳힌 질리언이 말했다·
벽이 아니라 감옥 천장 쪽을 부순 질리언이 뒤로 뛰어오르며 손짓했다·
“한번 보고 나면··· 네놈도 더 이상 발을 뺄 수 없을 거야· 마음의 준비를 해두는 게 좋을 거다·”
“쓸데없는 걱정이군·”
질리언이 뚫은 구멍을 통해 천장의 빈틈을 타고 천천히 이동한다·
레녹이 말없이 그런 질리언의 뒤를 따라 몸을 움직이던 그 순간·
콰직!!
질리언이 천장 아래로 향하는 구멍을 뚫고 곧바로 그 아래로 내려섰다·
그를 따라 내려선 레녹은 그제서야 감옥 최심부의 풍경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여기는?”
휘오오오!!
어둠 속에 적응되어 있던 시야가 갑작스럽게 환하게 탈색된다·
음침하고 어두운 감옥과는 달리 밝고 따스하며 선명하게 느껴지는 조명·
어느새 레녹은 새하얗게 빛나는 말끔한 복도 한복판에 서 있었다·
쓰레기 하나 없이 깔끔한 복도· 통풍이 잘되어 있는 쾌적한 공기·
거대한 실험실이나 연구동에 갑작스럽게 들어온 것만 같은 기묘한 정적까지·
그 모든 것이 갑작스럽고 예상치 못한 광경이라 순간적으로 레녹도 멈칫거릴 정도·
“이쪽이다·”
하지만 질리언은 갑작스럽게 변한 환경에도 놀라지 않고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온몸이 피범벅이 된 채 한 팔을 잃어버린 추레한 모습은 이 공간에 어울리지 않는 지독한 위화감을 풍긴다·
그럼에도 질리언은 자신이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내 형이 이곳에 숨겨둔 비밀을 보고 싶다고 말했잖냐·”
레녹을 돌아본 질리언이 사나운 미소를 지었다·
“저 아래 아론이 만들어둔 걸 보고 나면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
“····”
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 천천히 질리언의 뒤를 따라 걷는다·
인적이 없는 복도를 느릿하게 걸어 코너를 돌아 창문이 나 있는 방향으로 향한다·
유리창 앞에 서 있는 질리언의 손짓을 따라 레녹이 그 앞으로 걸어나온 그 순간·
레녹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확인하고 걸음을 멈춰 섰다·
“····”
고오오오!!!
투명하고 새하얀 연구동 벽에 수천에 달하는 얼음 덩어리들이 걸려있었다·
차갑게 얼어붙은 얼음 안에 평온한 표정으로 눈을 감은 사람들이 그 안에 누워 있었다·
무수한 얼음관 안에 단단하게 얼어붙은 채 시간이 멈춰 버린 것처럼 잠든 사람들의 모습·
차가운 얼음덩어리를 하나의 관으로 삼은 듯한 싸늘하고도 오싹하기 그지없는 광경·
벽에 걸려 있는 얼음관들이 레일을 타고 운반되어 일정한 속도로 연구동을 이동하고·
사방에서 오가는 연구원들이 얼음관의 수치를 측정하며 기록하고 있었다·
“이 나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곧 왕가의 재산·”
레녹의 옆에 서 있던 질리언이 말했다·
“하지만 아론에게 있어 그건 유물이나 무구만이 아니라 ‘인간’ 역시 마찬가지다·”
“····”
“이곳에 존재하는 건 아론의 손에 의해 직접 ‘보존’되어 왕가의 재산으로 편입된 재능과 소체들·”
천천히 복도 옆으로 걸음을 옮긴 질리언이 고개를 비틀었다·
“그 모든 시도가 저기 존재하는 단 하나의 목표를 향한 추악한 시행착오의 발로였지·”
그 시선을 따라 눈길을 돌린 순간 레녹은 공동 끝에 새겨진 벽화를 발견하고 얼어붙은 듯이 멈춰 섰다·
주먹을 쥔 채 세개의 원 안에 둘러싸인 거대한 건틀렛의 형상·
벽화에 새겨져 있는 그림은 레녹이 지닌 금기병장과 정확하게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