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8화
쇼다운(19)
카바힘의 군주 아론바이거를 따라 왕도 바깥 고성에서 마주한 [뒷문]·
[문] 너머에 존재하는 이계의 성역을 반대로 열고 최심부를 엿보는 편법·
하지만 그 안에서 마주한 성역의 모습은 레녹이 예상하고 있던 것과 달랐다·
쿠오오오!!!
부서진 하늘 아래 회전하는 거대한 흑색의 원· 그 아래로 끝없이 흘러넘치는 검은 눈물·
눈물처럼 떨어지는 검은 액체가 부서진 성역 안을 덧칠하며 더럽히고 오욕한다·
중심부에 솟구친 검은 왕좌에 기대앉은 거대한 기사의 형상· 갑주 안쪽에서 심장을 대신하듯 회전하는 흑색의 구체까지·
“저것이····”
알고 있다·
저 거대한 기사는 얼음작인을 획득한 레녹이 의식세계에서 마주했던 ‘죽은 신’의 잔재·
하지만 그때 저 기사는 분명 얼어붙은 설산 위에 거대한 비석을 지키듯이 서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흑색의 헤일로와 그 중심부에 내리꽂힌 옥좌의 형상은 레녹도 처음 보는 풍경·
레녹이 예상하지 못했던 그럼에도 강렬한 기시감이 느껴지는 성역의 풍경에 말을 잃어버린 찰나·
“위신권역 만다라·”
옆으로 걸어 나온 아론이 마력을 끌어올리면서 말했다·
“영원한 순환 무구한 변화를 상징하는 거짓된 성역· 끝없이 변화하면서도 달라지지 않는 단 하나의 본질을 담아내는 기적·”
“····”
“그 어떤 초월자보다 파멸적인 기원을 품었던 그가 무언가를 창조하고 생산하려 노력했다는 증거일지니·”
그의 이중동공은 느릿하게 회전하는 검은 헤일로를 홀린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기원마저 바꿔가며 다음을 빚어내려 했다는 위대한 실패의 잔흔이 저곳에 있다·”
아론의 나직한 목소리에 담긴 숨길 수 없는 경외의 감정·
그가 반궁이라는 승천자를 얼마나 높게 평가하는지 지금 이 한마디로 알 것 같다·
하지만 레녹은 반궁의 위신권역에 홀린 듯한 아론의 말에도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침묵했다·
만다라에 대한 설명을 듣는 순간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이 무엇을 암시하고 있는지 곧바로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무구한 변화속에서도 달라지지 않는 단 하나의 본질·
반궁이 거짓된 성역으로 구현하려 했던 그 힘이 레녹의 만화경과 놀라울 정도로 비슷해 보인다면 착각일까·
실패한 미래를 근원심상으로 삼은 승천자가 종국에는 무언가를 파괴하는 대신 ‘만들어내려’ 노력했다면·
레녹은-
“왕도 지하에 존재하는 [문]은 세계에 열 개도 남지 않은 [문] 중에서도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기적· 그렇기에 만다라는 그 기원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힘이나 다름없지·”
부서진 성역을 바라보는 아론의 표정이 서늘하게 변했다·
“외신의 죽음이 저 안에 담겨 있는 것조차 그러한 기적의 하나일 뿐· 그렇기에 과인은-”
[문] 너머의 위신권역을 향해 아론이 한 발 앞으로 다가선다·
“위대한 승천자가 남겨둔 안배를 취해 이미 정해진 운명과 결말조차 한번 뒤집어 보이겠다·”
“···아니·”
레녹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저건 안배가 아니라····”
위신권역의 풍경을 마주하고 아론의 설명을 듣는 순간 레녹은 알 수 있었다·
만다라의 중심부에 보관된 ‘죽은 신’의 유해· 그 심장을 대신하듯 자리한 흑색의 구체·
블랙홀처럼 회전하면서 시선도 빛도 의지도 모두 빨아들이는 저것이야말로 위신권역 만다라를 이루는 핵심·
반궁이 ‘죽은 신’의 유해를 이 세계에 온전히 보존하기 위해 남겨둔 의지 그 자체라는 것을·
형태도 능력도 방향도 다르면서 끝내 레녹과 같은 것을 추구했던 조작술사의 실패작·
설명하지 않았음에도 이해할 수 있었다·
저것은 반궁이 남겨둔 조작술식의 정수· 특질계의 정점에 도달한 초월자가 자신의 술식을 구부려 현실에 남겨둔 ‘권역’이다·
레녹이 만화경을 통해 이루려 하는 일을 그가 자신의 조작술식으로 해내려 했다는 시도의 증거·
만약 만다라를 손에 넣고 그 구축원리를 이해할 수 있다면 레녹은 그의 위신권역과 조작술식을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확신보다는 막연한 직감· 믿음보다는 모호한 직관· 하지만-
쿠구구구구···!!!
레녹이 그것을 바라보면 ‘그것’도 레녹을 바라본다·
[문] 너머를 들여다보면 [문] 너머에서도 레녹을 들여다보았다·
알 수 있다·
쿤다라에서 승천의 비약을 마시고 타락한 분기점을 손에 넣은 그때처럼·
선종의 영혼을 실패한 미래로 날려보내기 위해 [문]을 열었던 그때처럼 가까이 와 있다는 사실을·
뒤를 돌아보면 손에 잡힐 듯한 거리에서 언제나 레녹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렇게 손을 뻗으면 당장이라도 레녹의 앞에 다가와 잡힐 것처럼-
우우우우웅!!!!
레녹이 무심코 손을 뻗은 순간 만다라의 중심부에 위치한 어둠이 요동치며 공명하기 떨리기 시작했다·
죽은 신의 심장을 대신하듯 회전하는 구체가 내면의 어둠을 폭발적으로 키우며 권역을 뒤덮었다·
만다라 중심에서 시작된 어둠의 확장이 [문]을 넘어설 것처럼 사납게 역류하고 범람했다·
쿠과과과과!!!
“···!!”
[문] 너머에서 폭발적으로 흘러넘치는 거대한 어둠의 파도·
만다라의 위신권역이 레녹에게 ‘돌아오기’ 위해 문을 역류하려는 듯한 기괴한 형상·
그 강렬한 어둠의 범람에 레녹이 얼굴을 굳히고 지켜보던 기사들이 놀란 기색으로 검을 움켜쥔 찰나·
아론이 무표정한 얼굴로 격렬하게 요동치는 [문]을 한 손으로 움켜쥐었다·
콰아아앙!!!!
맨손으로 문의 공간균열을 잡는 순간 강렬한 충격파가 터져 나와 고성의 로비를 들썩였다·
아론의 전신을 사납게 후려갈긴 반동이 순식간에 그 몸을 날카롭게 할퀴면서 뒤로 뻗어나가고·
그 충격으로 고성의 낡은 성벽과 바닥이 흔들리며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굉음을 내뿜었다·
“폐하!!”
“위험하오니···!!”
“아니· 모두 물러서라·”
마력을 끌어올린 기사들이 즉시 앞으로 나섰지만 아론은 태연하게 손을 들어 그들을 멈춰 세웠다·
“여기서는 과인이 직접 하겠다·”
콰직!!
힘을 주는 것과 동시에 아론의 손에 잡힌 [문]의 형상이 부서질 것처럼 일그러진다·
하지만 아론은 개의치않고 사납게 일렁이는 문을 잡고 아래로 찍어눌렀다·
아론의 전신에서 폭발적으로 흘러나온 마력이 주변을 뒤덮고 공간을 짓누른 그 순간·
레녹의 눈앞에서 문의 공간균열이 강제로 닫히면서 거센 폭발이 터져 나왔다·
쿠과과과과!!!!
“큭···!!”
시계가 새하얗게 변색될 정도로 강렬한 광량·
안절부절 못하던 기사들조차 마력을 끌어올리고 버텨야 할 정도의 반동이 로비를 휩쓸었다·
고성 중심부에서 터져나온 폭발에 지켜보던 이들이 엎드리거나 제각기 무기를 땅에 박고 그 자리에서 버틴다·
무너진 고성 천장에서 잔해물이 우르르 떨어지고 복도 내벽이 흔들리며 도미노처럼 무너졌다·
“여기까지군·”
하지만 아론은 몰아치는 폭풍의 중심에서 태연하게 문이 있던 자리를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고 서 있었다·
한 손으로 목을 주무르며 대수롭지 않게 돌아선 아론이 사방에서 밀려난 기사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뒷문을 여는 편법으로 죽은 신을 깨우지 않고 성역을 엿보는 것은 성공했으나 그 안으로 들어가는 건 아직 불가하다·”
“····”
“아마 지금처럼 시행착오를 반복하면서 무엇이 문제인지를 알아내야 하겠지·”
“과격하기 그지없는 마력운용이군·”
레녹이 그제서야 아론이 한 일을 깨닫고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문]의 균열을 강제로 찍어눌러 닫아버린 건가· 선천마력량이 대체 얼마나 많기에····”
방금 아론이 보여준 것은 마력에 의지를 덮어씌워 실재하는 물리력으로 변환하는 기예·
그를 통해 아론은 폭주하는 [뒷문]의 공간을 잡고 강제로 찍어눌러 억지로 안정화시켰다·
술식이나 심상을 사용하지 않고 마력에 의념을 담아 그런 짓을 하기 위해서는 대체 얼마나 많은 마력이 필요할지·
“글쎄· 꼭 그대가 생각하는 것만큼 비합리적인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아론은 그런 레녹의 말을 듣고도 묘한 미소와 함께 돌아섰다·
“나라의 모든 동력(同力)과 연료(燃料)는 곧 왕가의 재산이나 다름없으니· 과인은 카바힘의 군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것을 누리고 있는 것뿐이지·”
“···뭐?”
그 말을 들은 순간 레녹은 아론이 언급한 말의 의미를 이해하고 얼굴을 굳혔다·
고성 바깥에서부터 인상적으로 느껴진 아론의 파멸적인 마력운용· 그사이에 섞여 있는 묘한 불순물의 잔향·
아론이 설명한 말을 통해 그가 무엇을 암시하려 하는지 곧바로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
‘설마 순수하게 본인의 마력이나 의념이 아니라· 카바힘 전역에서 동력을 끌어다 쓰고 있는 건가?’
아론이 카바힘의 군주로서 나라의 마력과 연료를 끌어다 쓰고 있다면 그 한계치는 한 사람의 초인에게 허락되는 수준을 아득하게 초월해 있을 터·
8레벨의 초인 그것도 양면성의 재능 보유자의 마력에 한계치가 없다면 왕국 안에서 아론의 힘은 사실상 반신(半神)에 준하는 수준이라고 보아야겠지·
쿠구구구구!!!
아론의 마력밀도가 어찌나 강한지 옆에 서 있는 것만으로 호흡이 곤란해질 정도로 공기가 무거워지는 듯하다·
어마어마한 마력과 의념을 끌어다 쓰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도 아론의 내면에서는 바닥이 쉽사리 보이지 않는 상황·
하지만 아론은 자신의 몸에서 끝없이 흘러넘치는 마력과 의념의 폭풍을 두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저었다·
“왕도의 연료를 끌어다 쓰는 정도로 충분할 줄 알았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마력을 소모하는군· 이대로 시행착오를 반복하면 틀림없이 마력이 부족해질 거다·”
철컥!!
아론이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을 튕기자 주변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경계를 서던 기사들이 자리를 바꾸고 고성 전역을 둘러싸듯이 위치를 조정한다·
수십에 달하는 기사들이 아론의 양 옆에 서서 길을 만들어주듯이 걸음을 멈추고·
미련 없이 돌아선 아론이 레녹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력을 더 끌어다 쓰기 위해 출력을 조정하고 돌아오지· 그대 역시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해라·”
“계획이 실패할 경우 대책이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군·”
분주하게 움직이는 기사들을 보며 레녹이 물었다·
“애초에 처음부터 성공할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던 건가?”
“첫 번째 시도에서 성역을 엿본 것 자체가 기적이나 다름없지·”
아론이 레녹을 보며 느릿하게 말했다·
“과인이 그대를 이끌어준다고 해도 그대가 [뒷문]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통제를 어려워할 가능성은 이미 상정하고 있었어·”
“····”
“하지만 통제를 어려워하기는커녕 곧바로 개념을 이해하고 만다라까지 접근하다니··· 반궁의 혈족은 참으로 괴물 같은 재능의 소체로군·”
계단 위쪽에 올라선 아론이 레녹을 부드러운 눈길로 내려다보았다·
“역시 그대를 선택한 것은 이번 일에서 결코 틀리지 않은 결정이었다· 지금처럼 계속해서 선전을 부탁하지·”
레녹에게 계획을 설파했음에도 아론 본인조차 한 번에 성공할 거라 상정하지는 않았던 것인가·
오히려 첫 번째 시도에서 성역을 엿보았다는 것 자체가 아론에게 있어서는 만족스러운 성과인 듯했다·
“위대한 혈족이시여· ”
계단을 타고 고성 상층부로 사라지는 아론을 두고 레녹에게 다가온 기사들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고성 안쪽에 무너지지 않은 방을 청소해두었습니다· 오늘 하루는 그곳에서 휴식을 취하시지요·”
“····”
“귀인께서 휴식을 취하시는 동안 6 기사단이 귀인을 보필하겠습니다·”
투구를 벗은 기사가 레녹을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레녹이 아론과 함께 고성 안쪽에서 무슨 일을 준비하고 있는지 지켜보았기 때문일까·
고성 안쪽의 방으로 레녹을 안내하는 기사들의 태도는 실로 정중하기 그지없었다·
찰칵!!
낡은 카펫이 깔린 어두운 방· 안쪽에 마련된 침상과 테이블 위에 차려진 간소한 식사까지·
하지만 레녹은 방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감응력이 반응하는 것을 느끼고 피식 웃었다·
‘다비·’
[역시 보고 있는 것 같죠?]
오감으로는 인지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먼 거리에서 누군가 레녹의 기척을 탐지하고 있다·
살의가 섞인 것은 아니지만 반대로 레녹을 보호하거나 호위하려는 종류의 시선도 아닌 바·
거기까지 생각한 레녹이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침상 위에 떨어뜨렸다·
털썩!!
성인 남성의 체격을 지닌 체비엔의 인형· 작전을 시작하기 전 받아두었던 대용품이다·
방 안쪽 침상에 인형을 밀어넣고 마법으로 얼굴을 꾸민 뒤 마력을 불어넣는다·
바깥에서 레녹의 기척을 감지하는 정도로는 이상을 발견하기 어려울 터·
품 안에서 다비를 꺼내 침상에 눕힌 레녹이 조용히 속삭였다·
‘바깥에서 부르면 반응해 줘· 할 수 있겠지?’
[예전에도 한 번 해봤잖아요· 문제 없다구요·]
따지자면 그래서 걱정이 됐지만 레녹은 내색하지 않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침상 안에 벌렁 누워 앞발을 흔드는 여우정령을 보며 얼굴에 손을 가져대 댄 순간·
후욱!!
전신을 덮어쓰고 있던 위장마법이 해체되며 흑요석 가면과 그림자 로브가 모습을 드러냈다·
두터운 로브 안쪽에서 레녹의 기척이 완전히 소멸하고 마력 자체가 한없이 서늘하게 변했다·
‘남아 있는 마력은 절반 정도· 조작술식 사용에는 거의 문제가 없겠지·’
흑색의 로브를 깊게 눌러쓰고 가면을 고쳐 쓰면서 빠르게 컨디션을 점검했다·
마력사를 뽑아 손목에 두르고 허리춤의 소켓을 확인하면서도 레녹의 표정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론이 숨기고 있는 비밀을 조사하기에는 적당한 시간이군·’
문을 열고 죽은 신의 유해를 엿보는데 성공했음에도 아론은 성역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사실에 놀라거나 분노하지 않았다·
레녹이 성역 안에 진입하는 것 자체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듯이·
마치 지금 당장 성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 ‘정해져’ 있다는 것처럼·
레녹은 사소하면서도 지나칠 수 없는 그 위화감을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성역 안에 들어가기 위해 무언가 조건이 더 필요한 거야· 아론은 그걸 알면서도 내게 숨기고 있다·’
광대가 언급했듯이 아론이 무언가를 숨기고 이 계획을 강행하려 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진 바·
그렇다면 아론이 [문]에 대해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를 이곳에서 알아내야 했다·
레녹은 그렇게 생각하며 빠르게 상황을 정리했다·
‘일이 여기까지 흘러온 시점에서 목표는 세 가지·’
첫 번째· [문]을 조사해 그 원리를 이해하고 폭주하는 레녹의 전격마법을 통제할 방법을 찾는 것·
두 번째· [문] 너머에 존재하는 반궁의 위신권역 만다라를 회수할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
세 번째· 판데모니엄의 [문] 공략 작전을 성공시켜 죽은 신의 유해를 훔쳐 오는 것·
‘고성 내부를 순찰하는 기사들의 교대 시간은 대략 25분 전후·’
탁!!
비좁은 창틀 안쪽에 발을 걸치고 각성제와 진통제를 투여하며 몸을 풀었다·
‘그사이 고성을 탐색하고 아론이 숨기고 있는 비밀을 찾는 걸 목표로 한다·’
교단의 사도가 토커퍼즈에서부터 개입한 순간 일이 순탄하게 흘러가지 않을 건 각오한 상황·
결국 레녹이 직접 확인하고 파헤쳐야만 알아낼 수 있는 사실이 있다·
팟!!
몸을 앞으로 기울이는 것과 동시에 점멸을 사용해 공간을 뛰어넘는다·
성벽에 마력사를 걸고 몸을 튕기듯이 회전시켜 고성의 성채 안쪽 그림자를 타고 가속·
단번에 성벽에 올라탄 레녹이 쏟아지는 빗속에서 경계를 서는 기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쐐액!!
인기척을 느낀 기사가 시선을 돌리기도 전에 점멸·
육체능력자의 날카로운 기감을 완벽하게 뛰어넘어 성채 외곽 인근 첨탑으로 향했다·
쏴아아아아!!!
마력사를 첨탑 끝의 날카로운 장식물에 걸어 기댄 채 어둠 속에서 황폐한 고성의 정경을 내려다보았다·
빗물이 로브를 타고 흘러내리면서 시야를 가렸지만 레녹은 아랑곳하지 않고 황금빛의 눈동자를 꺼내 들었다·
찰칵·
라피스 팔시어가 레녹을 청의 눈에서 탈퇴시키며 선물해 주었던 유물 천혜의 눈동자·
유물의 존재 자체로 열세 번째 등대로서 기능하는 보구를 쥐고 천천히 들어 올린 그 순간·
천혜의 눈동자가 레녹의 손안에서 핑그르르 회전하며 고성 내부의 넓은 안뜰을 향했다·
“····”
흙탕물이 들끓는 안뜰에는 버려진 쓰레기나 썩은 나무 잔해를 제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눈동자가 가리키는 것은 육안으로 확인이 가능한 지상이 아니라 그 아래쪽·
아론이 레녹에게 단 한 번도 그 존재를 언급하지 않았던 고성의 지하·
파앗!!
첨탑 위에 매달려 있던 레녹의 신형이 허공에서 지워지듯 사라진다·
성채 안쪽으로 공간 이동한 레녹이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마력사를 타고 비행·
마력감지를 돌리는 것과 동시에 지하로 향하는 계단의 존재를 확인하고 방향을 틀었다·
카각···!!
점멸을 반복해 사용할 때마다 허공에서 희미한 파공음이 터져 나오며 공간을 뛰어넘는다·
성채 안에서 순찰을 돌고 있는 기사들의 기감에 잡히지 않는 절묘한 순간을 노려 술식을 사용하고·
직후 기척을 완벽하게 지우고 마력의 잔향을 죽여 그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다·
고성 내부로 향할수록 삼엄해지는 경계를 뚫고 계단을 밟지도 않고 지하층계에 도달한 그 순간·
쿠우웅!!!
레녹은 사방에서 길을 막고 봉쇄하는 녹슨 창살을 마주하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
거대한 하수도처럼 잔뜩 녹이 슬고 축축한 습기로 질척이는 복도·
그 사이로 난 모든 통로마다 창살이 빽빽하게 박혀 길을 막고 있다·
‘감옥?’
고성이나 요새가 아니라 죄인을 가두기 위한 감옥과 같이 음습하고 불길한 분위기·
창살 안쪽으로는 인간의 것으로 추정되는 뼛조각이나 썩은 살점이 떨어져 있다·
어둠에 잠긴 복도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를 뒤로하고 레녹이 걸음을 옮겼다·
“···이건·”
복도 사이 사이로 박혀 있는 창살 너머 아직 살아 있는 인간이 있다·
전신에 채찍질을 당한 것처럼 피투성이로 쓰러진 채 노폐물을 흘리는 사람들·
그제서야 레녹은 고성이 죄수들을 가두는 감옥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고성 밖에서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던 건 지하 시설 안에 이런 감옥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었나·
“으으으으····”
“아아악···!!”
“아파 아파···!!”
레녹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고 울음 섞인 비명을 지르는 죄수들· 코끝을 찌르는 피비린내와 악취·
레녹이 조용히 마력을 가라앉힌 채 복도 안쪽의 어둠을 향해 더 깊게 들어가려던 그 순간·
“···가면·”
바로 옆에 있는 감옥에서 끊어질 것처럼 희미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판데 모니엄의··· 도둑놈····”
성대가 말라 붙은 듯한 칼칼한 목소리· 하지만 분명 들어본 적 있는 거슬리는 음색·
머리가 산발이 된 채 피범벅이 된 셔츠와 바지를 입고 대자로 드러누운 남성·
“네놈이 왜··· 여기 있는 거냐·”
“···너는·”
그제서야 그 목소리와 얼굴을 기억해낸 레녹이 시선을 돌렸다·
흑요석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로브를 쓴 빅터를 ‘도둑’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
군령도시 요르타로 떠나기 전 인도자의 반지를 훔치기 위해 방문했던 거인의 성채 주인·
청의 눈 주시자이자 거신병단의 생존자· 8레벨의 육체능력자이며 카바힘 현왕의 친동생이기도 한-
카바힘의 대공 질리언이 감옥 안에 피투성이가 된 채 레녹을 노려보고 있었다·
“질리언?”
“아 그렇군··· 네놈이 여기 지하에 와 있다는 건····”
힘없이 기침을 토해낸 질리언이 히죽 웃었다·
“내 형 아론 때문에 이곳을 찾은 멍청이들 중 하나였나·”
“····”
“차라리 잘 됐군··· 멍하니 보고 있지 말고 가까이 와서 이걸 풀어봐라·”
쿠우웅!!!
오른팔에 매인 질리언 자신만큼이나 거대한 사슬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사슬을 턱짓하며 힘없이 어깨를 으쓱한 질리언이 레녹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 탈출을 도와주면 그 대가로 아론이 이 지하에 숨겨둔 것을 보여주지··· 어떠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