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6화
쇼다운(17)
카바힘의 군주와 죽은 신의 유해에 대해 논의한 다음 날·
레녹은 왕성 외곽에 위치한 기사단의 훈련을 위해 만들어진 연무장에 서 있었다·
쿵!!
툭 튀어나온 돌부리 위로 마력사가 채이면서 빠르게 수축한다·
양손으로 마력사를 쥐고 교차해 잡아당기는 것과 동시에 사방에서 빛이 번뜩이고·
레녹의 양옆에서 휘둘러진 두 기사의 검을 미끄러지듯이 빗겨내 다른 방향으로 튕겨냈다·
파아아앙!!
귀청을 찢는 파공음과 함께 레녹을 중심으로 앞뒤로 퍼져 나오는 파문·
“큭···!!”
혀를 찬 기사들이 검을 쥐고 몸을 비틀며 엄청난 속도로 레녹의 주변을 회전했다·
연무장의 흙바닥이 연달아 폭발하며 모래기둥을 일으키고 그 사이로 은빛의 검날이 번뜩인다·
매캐한 모래바람을 뚫고 연무장 외벽과 바닥 사이를 튕기듯이 뛰쳐 가속하는 기사들·
하지만 양옆에서 짓쳐드는 두 기사의 검극을 레녹은 제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모조리 흘려냈다·
퍼버버버벙!!!!
레녹과 두 기사들의 사이 허공에서 원형의 파문이 수십 번씩 겹쳐 터져 나온다·
기사들의 검이 레녹의 지근거리까지 도달하지도 못한 채 거칠게 튕겨 나왔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빠르게 교차하는 검광과 마력사의 광채 속에서 시간이 멈춘 듯하다·
느릿하게 레녹의 양 옆을 달려 가속하는 기사들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다·
“말도 안 돼· 무슨 싸움실력이···!!”
“어떻게 술식을 이리 빠르게-”
쐐애애액!!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출된 마력사가 두 기사의 뺨을 스치고 튕겨나간다·
활시위처럼 한껏 잡아당겨진 실 가닥이 허공에서 정교하게 엮여 서로 잡아당기며 순식간에 두 기사의 몸을 틀어쥐고·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기사들이 전력으로 마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마력사를 채찍처럼 휘두르는 레녹과 궤적을 피해 가속하며 검을 휘두르는 고위기사들·
맨몸으로 레녹의 마력사와 속도를 맞추면서도 그 균형감각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주변의 풍경이 희끄무레하게 보일 만큼 빠른 공방의 끝에서 두 기사가 동시에 몸을 뒤틀면서 자세를 잡았다·
철컥!!
두 걸음 뒤로 물러서는 것과 함께 납검· 전력으로 마력을 끌어올리면서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사출한다·
[삭월(削月)]
[유성(流星)]
휘두르는 순간 둥글게 휘어지며 허공을 깎아내는 검광·
전신의 무게를 포탄처럼 앞으로 밀어내며 가속하는 돌진·
번뜩이는 검광이 쏟아지듯 내리찍히면서 선명한 검선(劍線)을 지상에 새긴 그 순간·
[입천문(入天門) 개방]
역삼각형의 거대한 방패가 레녹의 앞에 펼쳐지며 그 모든 검극을 정면에서 받아냈다·
콰아아앙!!!!
검기와 입천문의 방패가 충돌한 순간 원형의 충격파가 터져 나오며 연무장이 크게 흔들렸다·
하지만 거의 동시에 검극을 받아내었음에도 방패의 표면에는 흠집조차 나지 않은 상황·
거칠게 울리는 방패를 본 기사들이 굳은 표정으로 검을 들어 올린 그 순간·
“거기까지·”
“···!!”
점멸을 사용해 순식간에 두 기사의 간극을 파고든 레녹이 손을 옆으로 내밀었다·
카가가가각!!!!
왼팔에 감긴 흑색의 마력사가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며 레녹의 왼손을 가리고·
검은 고리 사이로 가려진 왼손으로 주먹을 쥐듯이 유리색 광채를 움켜쥔 순간·
두 기사의 신형이 각자 다른 방향으로 튕겨 나가 어마어마한 속도로 처박혔다·
콰아아아아앙!!!!
기사단의 훈련을 위해 왕성 바깥에 만들어진 연무장이 요동치는 충격·
“으아아···!”
“윽 허리가····”
흩날리는 먼지 속에서 들려오는 신음과 함께 두 기사가 끙끙대며 일어섰다·
얇은 금발을 짧게 자른 양아치 같은 인상의 청년·
허리를 부여잡은 채 끙끙대는 단단한 인상의 거한·
“잠깐 쉬었다 다시 하지·”
연무장 한복판에 서서 느릿하게 손을 턴 레녹이 말했다·
“이대로 연습을 계속하면 힘 조절을 못하고 죽여버릴 것 같군·”
“뭐?”
금발 청년이 레녹의 말에 눈썹을 꿈틀거리며 고개를 휙 돌렸다·
흙바닥에 침을 탁 뱉은 청년이 레녹을 뚱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아니 혈족 님· 그렇게 말하면 섭하지· 그쪽이 폐하의 선물을 사용해 보고 싶다고 말해서 우리가 도와주고 있던 거잖아·”
“어쩌라는 거지?”
레녹이 조소했다·
“너희들이 제대로 된 연습상대가 되어주지 못하는 게 내 잘못은 아닌 것 같은데·”
“아니 지금까지 뒤져라 두들겨 패놓고 그게 무슨···!!”
“라일 폐하의 손님이시다·”
먼지를 털고 일어선 거한이 금발 청년을 부르며 돌아섰다·
“네 버르장머리 없는 말투로는 귀인께서 오해하시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 차라리 아무 말도 하는 것이 좋겠다·”
“빌어먹을 알비언 지는 얼마나 말주변이 좋다고?”
엄살 섞인 소리를 주고받고 있지만 레녹은 방금 상대했던 두 기사가 얼마나 뛰어난 실력자인지 잘 알고 있었다·
가벼운 대련이라고는 하나 잠깐이나마 레녹을 상대로 교전다운 교전을 수행할 수 있는 기사들·
몸을 보호하는 갑주조차 없이 땅에 처박혔음에도 두 사람의 몸에는 상처 하나 없다·
카바힘의 기사들 중에서도 단연코 경험이나 재능의 측면에서 최상위에 위치한 강자·
왕도 예하 십정 7 기사단장 라일 칼베르그·
왕성 직속 십정 9 기사단장 알비언 로이스·
죽은 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뒤 아론이 레녹의 경호를 위해 배정해준 왕도의 기사단장들이다·
왕도 최강의 무인들을 개인의 경호원으로 붙여주는 호화롭다 못해 사치스럽기까지 한 대접·
하지만 레녹은 이러한 대우가 실제론 반궁의 혈족을 놓치지 않기 위한 감시의 목적을 포함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귀인께서 보여주시는 무위는 실로 감탄밖에 나오지 않는군요·”
연무장 바깥에서 대련을 지켜보고 있던 날카로운 인상의 여성이 말했다·
천천히 걸어온 4기사단장 플로리아가 레녹을 바라보며 눈웃음을 쳤다·
“고귀한 혈통께서 설마 이렇게 뛰어난 실력까지 보유하고 계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쓸데없는 소리는 그쯤하고 다시 시작하지·”
레녹이 왼팔에 두른 마력사를 회전시키며 힐끗 시선을 돌렸다·
“조금만 더 해보면 요령을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반나절 가까이 기사들과 대련을 하고 있었지만 지금 이 대련은 기사단장들이 아니라 레녹이 요청한 결과물이었다·
기사들도 난색을 표했지만 레녹이 아론에게 선물받은 방패를 사용해 보고 싶다는 명분까지는 거절하지 못했던 바·
소극적이던 기사들을 몇 번 두들겨 패고 나니 저쪽도 몸이 달아올라 적극적으로 덤벼오고 있었던 것이 직전의 대련이었던 것·
하지만 레녹이 입천문을 핑계로 대련을 요구한 건 단순히 기사들과 한번 싸워보고 싶어서만은 아니었다·
‘금기병장을 숨긴 채 능력을 사용하는 것 자체는 어떻게든 가능할 것 같군·’
철컥!!
왼팔에 휘감은 마력사 다발 사이로 숨겨진 유리색 건틀렛을 바라보며 레녹이 생각에 잠겼다·
‘마력사를 감아 형상과 기척을 숨기고 인식능력을 조작하면 건틀렛을 숨기고도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지금까지는 금기병장을 기껏해야 화력투사 용도로 사용해 왔기에 신경 쓰지 않았지만·
만약 레녹이 아론의 계획에 협력할 생각이라면 금기병장의 사용법을 더 정밀하게 다듬어야 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아론에게 금기병장의 존재를 들키면 내 쪽의 선택지가 대폭 좁아지겠지·’
반궁의 혈족을 재료 삼은 금기병장은 조작술식을 개념의 영역에서 다루게 만들어주는 신기·
레녹이 [문]을 열게 된다면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금기병장을 사용할 수밖에 없지만
아론에게 금기병장을 들킨다면 레녹이 반궁의 혈족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각당하게 된다·
정체를 숨긴 채 아론과 동행하려면 그의 앞에서 금기병장을 사용하면서도 그 존재를 들키지 말아야 하는 바·
십정 기사단장은 전원이 고위계 육체능력자이며 왕도의 축복을 통해 육체능력을 몇 배로 끌어올린 괴물들·
이런 초인들을 상대로 금기병장의 기척을 감춘 채 사용할 수 있다면 아론의 앞에서도 들키지 않을 수 있겠지·
다행히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치며 어떤 식으로 건틀렛을 다뤄야 하는지는 대충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금기병장은 마력사를 대신하는 조작술식의 매개체· 인식하고 있다면 모호하거나 포괄적인 개념도 조작이 가능해·’
반궁의 혈족을 재료삼은 이 건틀렛은 그 존재 자체로 아주 강력한 조작술사이자 술식의 대행체·
그렇기에 건틀렛을 장착한 레녹은 마력사를 사용하지 않고 온갖 현상과 개념을 [쥐거나] [휘두를] 수 있다·
막대한 마력과 의념을 소모해야 한다는 것을 제외하면 실로 무궁무진한 방향으로 응용가능한 신기·
입천문을 핑계로 기사들에게 대련을 요구한 건 고위기사들의 인지능력마저 레녹이 속일 수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으나
다른 기사단장들은 작금의 대련만으로 레녹의 역량에 감탄하느라 그런 사실을 눈치채지는 못한 것 같았다·
“저렇게 육중하고 무거운 방어구를 이 정도로 능숙하게 사용하시는 건··· 정말 대단하군요·”
덩치 큰 기사 알비언이 대검을 짊어진 채 놀란 표정으로 레녹을 바라보았다·
“실전이 아닌 대련을 통해 요령이나 경험을 습득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만· 위대한 피는 저 같은 평범한 인간과는 다른 듯합니다·”
“이번에는 상대를 바꿔서 해보고 싶군·”
알비언의 말을 무시한 레녹이 연무장 바깥을 향해 눈짓했다·
“저 셋 중에서는 누가 제일 강하지?”
연무장 바깥 성채 끝에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세 명의 기사단장·
군청색 머리칼을 지닌 냉엄한 청년· 백발이 성성한 노인· 싱글벙글 웃고 있는 소년·
지금 여기 모인 이들도 그렇지만 저 기사들 역시 알현실에서 한번 얼굴을 본 적이 있었다·
저들 중 소년기사 유젤은 레녹을 왕성 병기고로 안내하는 도중 대화를 해본 적도 있었던 바·
“혈족이시여· 죄송하지만 아마 저들은 귀인이 원하시는 대련에 참여할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플로리아는 곤란한 기색으로 레녹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저들이 지휘하는 기사단은 왕도 직속이 아니라 왕궁 근처에서 검을 뽑는 것이 금지되어 있는지라·”
“걱정하지 말라고· 우리가 혈족 님이 원하는 한 그만두고 싶을 때까지 상대해 줄 테니까·”
채앵!!
허리춤에서 길쭉한 검을 뽑아 든 라일이 씩 웃었다·
“폐하의 명이라면 하루 종일 두들겨 맞아주는 것도 할 수 있어· 죽는 건 안 되지만·”
“재밌는 대답이군·”
레녹이 피식 웃었다·
“왕실에 충성하는 기사 주제에 죽음을 두려워하는 건가?”
“뭐 그렇지· 죽을 때는 오직 폐하가 허락할 때만 죽기로 맹세했으니까·”
“····”
하루 가까이 동행하며 그들이 마냥 딱딱하기만 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런 대답을 들을 때마다 그들이 왕실에 충성하는 기사라는 사실을 되새기곤 한다·
격의 없이 구는 7기사단장 라일조차 왕실을 향한 충성은 가히 절대적인 수준·
지금에는 그런 사실이 경계가 되기보단 인간적으로도 느껴지지만-
“무엇보다 여기 있으면 귀찮은 합동 훈련도 빠질 수 있거든· 합법적으로 훈련을 빼먹을 기회잖아?”
“라일·”
“어휴····”
플로리아와 알비언이 히죽대는 라일을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폐하께서 우리에게 귀인의 경호를 부탁하신 건 그런 삿된 이유 때문이 아니었을 텐데·”
“왕도의 기사단장이라는 자가 이런 식으로 태업을 일삼아도 되는 겁니까·”
“아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두 사람이 라일을 타박하는 사이 어느새 옆에서 소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다가온 유젤이 가슴에 손을 얹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않아도 제가 이번 분기의 기사단 합동 훈련 일정을 몇 주 뒤로 연기해 두었거든요·”
“···뭐?”
“왕도의 기사단장이 합동 훈련에 불참하는 것을 신경 쓰고 있다면 업무 수행 효율이 떨어지지 않겠습니까·”
순간적으로 미묘해진 분위기 속에서 유젤이 상쾌한 미소를 지었다·
“그럴 바에는 합동 훈련 일정을 뒤로 미뤄서 이번 일이 끝난 다음에 다같이 참여하는 것이 좋겠죠·”
“····”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표정이 구겨진 라일과 알비언· 떨떠름한 표정의 플로리아까지·
라일을 타박하긴 했지만 다른 단장들도 합동 훈련 같은 귀찮은 일정을 뒤로 미뤄가면서까지 참여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겠지·
“음 유젤 경· 그게 틀린 말은 아니지만····”
“굳이 그렇게-”
“이미 궁내부에 보고를 마쳤습니다만 무언가 잘못된 일이었던 건가요?”
“····”
훈련이 싫다고 솔직하게 말하지도 못하고 내심 끙끙대는 알비언과 플로리아·
그런 두 사람의 표정을 유젤이 희열이 담긴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사이코패스 같은 새끼····”
“위대한 혈족이시여·”
레녹의 뒤에서 조용히 속삭이는 라일의 말을 못 들은 척 유젤이 레녹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가볍게 웃으면서 손을 까닥이는 순간 유젤의 허리춤에 걸려 있던 검이 역수로 뽑혀 나왔다·
철컥!!
처음부터 그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던 레녹의 감각에도 제대로 잡히지 않을 만큼 빠른 발검·
“귀인께서 연습을 원하신다면 저 역시 기꺼이 도와드릴 용의가 있습니다만·”
유젤이 웃으면서 검을 까닥였다·
“위대한 혈족과 검을 겨루는 영광을 제게 나누어주시겠습니까?”
“아니· 여기까지만 하지·”
“···예?”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시간이 다 됐군·”
유젤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머쓱해지는 것을 보며 레녹이 시선을 들어 올렸다·
“아무래도 슬슬 결정을 내려야 할 것 같아서 말이다·”
* * *
쏴아아아!!!
대련을 마치고 욕실에서 몸을 씻고 나왔다·
눈이 아플 만큼 호화로운 장식으로 가득 채워진 넓은 침실·
문이 열리면서 들어온 요리사들이 음식이 가득 담긴 카트를 들여놓고 테이블을 펼쳤다·
속에 부담이 가지 않는 전채와 샐러드 위주의 식단· 입맛을 돋울 수 있도록 산미를 포함한 메뉴들·
카바힘의 군주가 레녹을 반궁의 혈족이라 공언한 뒤 왕실의 손님으로 공인받은 레녹이 받는 대접은 차원이 다른 수준으로 격변한 바·
온갖 선물과 예복 숙박시설과 소비재를 비롯해 이런 음식에 이르기까지 이제 와서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다른 요리사들이 고개를 숙인 뒤 줄지어서 방을 나가고 마지막까지 음식을 세팅하던 요리사 한 명이 남았다·
레녹을 등지고 돌아선 채 느긋한 손놀림으로 음식을 내려놓는 요리사의 모습·
“순서가 엉망진창이군·”
레녹이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티를 내고 싶다면 굳이 그딴 조악한 방식을 사용할 필요가 있는 거냐?”
“···아하·”
조용히 접시를 놓고 있던 요리사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허리를 펴고 일어선 요리사가 천천히 돌아서며 히죽 웃었다·
“아니 알고 있었으면 처음부터 말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촤악!!
얼굴을 한 손으로 쓸어내리자 새하얗게 분칠을 한 청년의 얼굴이 나타났다·
왕도 전역의 감시를 피해 나타난 환술사를 보며 레녹이 눈을 빛냈다·
“한참 늦었군· 지금까지 어디서 뭘 하고 있었지?”
“하····”
하지만 광대는 레녹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한 손을 얼굴에 얹은 채 고개를 뒤로 젖혔다·
시선을 내린 광대의 얼굴에는 정답을 맞힌 사람처럼 의기양양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내 이럴 줄 알았습니다·”
“무슨 헛소리지?”
“제가 분명 저번에 빅터의 태생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잖아요·”
광대가 자신에게 도취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승천자의 핏줄· 저주받은 반궁의 후예· 또 제가 정답을 맞혀버리고 말았군요·”
“····”
침묵하는 레녹을 보며 광대가 마구 우쭐거렸다·
“본인이 부정해도 저처럼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람은 속일 수 없지요· 애초에 빅터의 조작술식은 제가 죽여본 친구들과는 질적으로 달랐다구요·”
“금기병장 때문이라는 걸 알면서도 헛소리를 하는군· 지금 그딴 말을 지껄이고 있을 시간이 없을 텐데·”
짜증스럽게 고개를 저은 레녹이 침대에 기댄 채 광대를 바라보았다·
금기병장의 존재를 알고 있는 광대라면 지금 이 상황 자체가 어느 정도 그에 영향을 받았다는 걸 모를 리가 없을 터·
그걸 알면서도 자신의 판단이 맞았다며 우쭐대는 미친 환술사와 상종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반드시 지금 해야 하는 논의가 있었기 때문·
“아론바이거 카바힘은 나를 극진하게 대접하며 일부러 프레이야를 비롯한 기존의 일행과 떨어뜨려 놓고 있다· 알고 있겠지?”
“····”
“아마 일행 중에서 내 동료나 동행이 존재하고 있을 가능성을 상정하고 일부러 접촉을 막으려 하는 거다·”
레녹이 눈을 빛냈다·
“너도 그걸 알고 있기에 환술까지 사용해서 이쪽에게 접촉해 온 거겠지·”
“···흐음· 너무 진지한 이야기는 싫은데요·”
광대가 웃는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여기까지 몰래 들어오느라 진을 좀 뺐거든요· 기왕이면 재미있는 이야기부터 하지 않겠습니까?”
“아론바이거 카바힘은 죽은 신의 유해를 금기병장으로 가공하려 한다· 그 과정에서 내가 [문]을 직접 열어주기를 원하고 있지·”
광대의 말을 무시한 레녹이 빠르게 지금까지의 상황을 설명했다·
반궁의 혈족과 축복의 관계· 아론이 신의 힘을 원하는 이유와 그렇게 만든 금기병장으로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까지·
하지만 레녹이 아론의 계획을 바로 거절하는 대신 그와 협력하는 것을 고민하고 있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계획의 성패와는 별개로 아론과 협력하는 것이 ‘죽은 신’을 가장 빠르게 만날 수 있는 방법이라는 건 분명하겠지·”
“····”
[문] 너머에 존재하는 이계의 성역· 그 안에 죽은 채로 잠든 신의 유해·
죽은 신과 가장 빠르게 접촉하기 위한 방법이 아론의 계획이라는 사실은 틀림없다·
레녹이 고민하는 것은 아론의 계획에 어느 정도까지 협력해야 하는지의 문제·
아론과 엮이는 것이 공략작전에 있어 어떻게 작용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공략작전이 한참 진행 중인 이 시점에서 판데모니엄을 배신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
최소한 여기서는 이번 작전을 지휘하는 광대의 의견을 들어볼 필요가 있다 생각했던 것·
“아하·”
레녹의 말을 들은 광대가 고개를 갸웃거리다 말했다·
“뭐 괜찮지 않겠습니까?”
“뭐?”
“죽은 신의 유해를 금기병장으로 가공한다니· 그거 듣기만 해도 재밌을 것 같잖아요·”
광대가 낄낄 웃었다·
“다만 그렇게 만들어진 금기병장의 능력이 사도술식을 공양 없이 사용하는 힘이라는 건 좀 시시해 보이긴 합니다만·”
“시시하다···?”
“목적 자체가 거짓은 아닐지라도··· 죽은 신의 유해로 할 수 있는 일이 ‘고작’ 그것뿐일 리가 없지 않습니까·”
테이블에 놓인 카나페를 빼먹으며 광대가 느긋하게 말했다·
“뭔가 재밌는 일을 꾸미고 있는 것 같은데 적당히 어울려주다 수틀리면 엎어버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
침묵하는 레녹을 보며 광대가 히죽 웃었다·
“뭐 솔직하게 말하자면 제가 할 일도 아니니까 아무래도 상관없-”
“그렇군·”
레녹이 시선을 들어 올렸다·
“시시하다·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 역시 그쪽이 맞겠어·”
“빅터?”
“작전 준비는 너희들끼리 진행하고 있도록·”
가면 위로 위장마법을 덮어쓰며 레녹이 걸음을 옮겼다·
“아론바이거 카바힘이 이 왕도에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확인해 봐야겠다·”
“···어라·”
광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거 혹시 작전을 앞두고 핵심 실행요원을 제 손으로 하나 잃어버린 건가요?”
* * *
쏴아아아!!!
비가 내리는 어두운 밤하늘·
저녁부터 낀 먹구름을 통해 쏟아져 내리는 폭우·
레녹은 로브를 뒤집어쓴 채 비를 맞으면서 허름한 성채 앞에 서 있었다·
카바힘 왕도 후문· 왕도 바깥 지하수도를 타고 도착한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채 버려진 고성·
“왔나·”
쏟아지는 비를 피하지도 않은 채 서 있던 아론이 레녹의 기척을 느끼고 돌아섰다·
“이곳이 바로 [문]의 뒷면을 열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가 될 거다·”
“····”
폭우 속에서 천천히 걸음을 옮긴 아론이 마력을 끌어올렸다·
“지금부터 바로 ‘죽은 신’을 끌어내기 위한 준비를 시작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