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3화
쇼다운(14)
치익 치익-
카바힘 왕도로 향하는 카지노 크루즈 선박· 여러 개의 이층침대가 놓여 있는 넓은 침실·
선원들이 근무 후 휴식을 취하는 방 안에서 기괴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킬킬····]
방 한복판에 웅크리고 앉은 매부리코의 거인이 킬킬 웃으면서 몸을 들썩인다·
여덟 개의 팔이 허공을 두들길 때마다 마력사가 실처럼 뽑혀 나와 사방에 내걸렸다·
촤라라라락-
수천 수백을 넘어 수만에 달하는 마력사가 뽑혀 나와 투명한 비단처럼 허공에 펼쳐졌다·
고요한 방 안에서 홀로 웃음을 터트리며 끊임없이 마력사를 뽑아내어 가공하는 재단사의 모습·
“아직 부족해·”
침실 문 쪽에 기대 선 레녹이 다비와 함께 재단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비축된 마력사를 토커퍼즈에서 너무 많이 소모했어· 이대로는 카바힘에 도착하기 전까지 여분을 모두 채울 수 없을 거다·”
[이 녀석 생각보다 일하는 속도가 너무 느린데요?]
조작술식은 특질계에서도 가장 난이도가 높은 술식으로 악명 높지만 술자의 역량만 된다면 모든 분야에 어떤 방식으로든 활용할 수 있는 다재다능한 능력·
하지만 술식 사용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마력사를 소모하기 때문에 스케일이 큰 술식을 사용하려면 마력사가 그만큼 많이 필요했다·
특질계 인공소환수 허수차원의 재단사는 레녹이 그러한 조작술식의 단점 아닌 단점을 해결하기 위해 만든 소환수·
허수차원에 머물며 스스로 마력사를 제작하고 비축하는 재단사의 존재는 조작술식을 보조하는 데 탁월한 성능을 지니고 있지만·
한번 소환해서 사용하고 나면 이렇게 반드시 마력사를 대량으로 제작해 비축해야 하는 공정을 거칠 필요가 있었다·
빅터의 신분으로 움직이지 않는 사이 비축분이 모자랄 일은 없었지만 토커퍼즈에서 적지 않은 마력사를 소모해 버렸던 것·
“사도와 그런 식으로 싸워본 건 처음이었으니 어쩔 수 없지· 비축분이 모자란 건 감안하고 시작해야겠군·”
교단 최고위 사도 둘과 2대2로 붙어 결착이 날때까지 싸운 건 레녹도 처음 겪는 일이었다·
재단사를 소환한 시점에서 전력을 다하는 건 예정된 일이었고 금기병장을 꺼낸 시점에서 사실상 돌이킬 수 없었으니·
“건틀렛의 힘이 강력하긴 하지만 사용할 때마다 막대한 마력을 잡아먹는다는 점에선 오히려 더 까다로운 부분이 있어·”
철컥!!
왼손을 들어올리는 것과 동시에 허공이 부서지며 유리색 건틀렛이 레녹의 손에 잡힌다·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주변의 풍경을 왜곡시키는 금기병장을 보며 레녹이 생각에 잠겼다·
“화력을 보충해 준다는 점에서는 더할 나위 없지만 앞으로는 사용할 시점을 좀 더 신중하게 정해야겠지····”
조작술식은 다재다능하지만 그렇기에 순간적으로 출력을 끌어올리는 방면에서는 레녹의 다른 마법에 비해 조금 만족스럽지 않은 부분이 있다·
그런 면에서 물리법칙을 직접 조작하는 금기병장의 능력은 빅터에게 부족한 화력을 즉시 보충해 준다는 점에서 굉장히 유용하기는 했지만·
이 능력을 사용하기 위해서 소모되는 마력은 레녹의 방대한 마력량으로도 살짝 버겁게 느껴질만큼 비대했던 것·
‘금기병장이라·’
은은하게 일렁이는 유리색 건틀렛을 레녹이 복잡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아나테마의 신전에서 손에 넣은 이 건틀렛은 반궁(叛穹)의 혈족을 ‘재료’로 삼아 만들어진 병기·
역사상 최강의 승천자라 불리는 반궁의 존재· 그의 혈족을 재료 삼아 능력을 발동하는 금술·
그리고 그 이름이 레녹 자신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
쿤다라에서 그 의미를 충분히 이해했다고 믿으면서도 여전히 흔들리고 있다·
반궁의 혈족·
그 말을 레녹 자신은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그 힘을 레녹 자신이 이런 식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것인지·
종잡을 수 없는 미혹 속에서도 레녹이 주저하는 것은 이 건틀렛이 [문]을 여는 열쇠임을 알고 있기에·
이번 공략작전에서 최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하는 열쇠이자 기준임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카바힘 왕도 지하에 숨겨져 있다는 [문]에서 레녹은 그 비밀을 다시 한번 마주할 수 있을까·
공략작전에 참가하며 그것을 기대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빅터·”
끼익···!!
그 순간 레녹의 머리 위에서 공간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천장에 거꾸로 매달린 아그네타가 멍한 표정으로 레녹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 불렀어?”
“···아그네타·”
생각을 멈춘 레녹이 건틀렛을 집어넣고 시선을 돌렸다·
“시작하기 전에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다·”
“그래그래 말해봐·”
허리에 양손을 얹은 아그네타가 콧김을 흡 내뿜었다·
“같은 조작술사끼리는 돕고 살아야지· 빅터가 원한다면- 어라?”
멍하니 얼굴을 돌린 아그네타의 시선이 방 한복판에 자리한 재단사를 향해 멈춰섰다·
여덟 개의 팔을 기괴한 방향으로 움직이며 끊임없이 마력사를 뽑아내는 소환수의 모습·
재단사의 발 아래서 기괴하게 일렁이는 허수차원의 잔재·
“보면 바로 알겠지만 이건 네 능력을 조금 흉내내 만든 인공소환수다·”
레녹이 말했다·
“물론 네게 비할 바는 아니지만 일부분은 호환되도록 설계되어 있지·”
“····”
“이 소환수를 잠시 네게 맡기고- 왜 그러지?”
“몰라·”
아그네타의 표정이 부루퉁하게 변했다·
“누가 이런거 만들라 그랬어?”
* * *
“피곤해 보이는군·”
복도로 걸어나온 레녹의 뒤에서 들려오는 나직한 목소리·
얼굴을 쓸어내리던 레녹이 안타레스를 발견하고 가면을 고쳐썼다·
“있었나·”
“그 고대종은 원래 이 시대에 존재해서는 안되는 기적의 산물이지·”
안타레스가 말했다·
“인간의 시대를 살며 자신이 누구인지 자아를 확립하는데 무척이나 어려움을 겪었을 거야·”
“무슨 말을 하는 거지?”
“그녀에게 자신을 흉내낸 장난감을 보여주는 건 좋지 못한 선택이었어·”
“····”
레녹이 객실 안에서 아그네타를 상대로 극적인 협상을 타결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나·
차가운 한숨을 내쉰 레녹이 팔짱을 낀 채 시선을 휙 돌렸다·
“필요한 일이었다· 대가는 이쪽에서 치르기로 했으니 신경 끄도록·”
“그렇겠지· 방향성 자체는 나도 어느 정도 공감하고 있어·”
강물을 가르며 나아가는 크루즈를 바라보며 안타레스가 웃었다·
“그녀의 조작술식은 본능에 의존하는 부분이 지나치게 크니까· 위험한 전선에 나서지 않도록 배려해 주는 거겠지·”
“이런 시간에 찾아와서 할 말은 그런 게 아닐 텐데·”
가면을 만지작거린 레녹이 냉소했다·
“내게 무언가를 예지하고 싶어지기라도 한 건가?”
“····”
안타레스는 그런 레녹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순례길에서 내가 본 것은 결국 실패한 미래일 뿐이었지· 그렇기에 나 스스로 예지하지 못하는 결말도 얼마든지 있어·”
“····”
“내가 예지하지 못하는 미래도 사람도··· 어디에나 있지·”
가면 너머 레녹과 시선을 마주한 안타레스가 말했다·
“그렇기에 너를 예지할 수 없는 이유가 내가 생각하는 이유와는 다를지도 모르지· 하지만 신경 쓰지 않는다·”
“····”
“과정이 정해져 있다 해도 결과가 미답에 놓여 있다면 그건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안타레스의 머리칼이 흩날렸다·
길게 기른 흑발이 순간적으로 예지자의 표정을 가렸다·
“예전의 나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지· 그래서 운명의 양면을 볼 수 있는 존재가 정답이 되리라 믿었다·”
“···운명의 양면이라고?”
순간적으로 기시감을 느낀 레녹이 멈칫거린 찰나 안타레스가 시선을 돌렸다·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일은··· 내가 저지른 오만과 실수를 주워담기 위한 발버둥인 거야·”
부아아아앙-
크루즈 선박이 낮게 울리면서 무거운 고동소리를 내뿜었다·
거대한 선체가 서서히 속도를 줄이면서 강물을 헤치고 천천히 멈춰 선 그 순간·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 유리처럼 부숴지면서 흩어지고 그 너머로 광대한 성채의 풍경을 내비쳤다·
쿠우우웅!!!
도시 전체가 거대한 성곽이자 성채로 이루어진 거대한 왕성(王姓)·
모든 번화가와 시가지가 성채의 일부이자 성벽 그 자체다·
기사들의 나라 카바힘· 그 왕도에 도착했음을 깨달은 레녹이 시선을 들어 올린 그 순간·
뿌우우우우-!!
웅장한 나팔소리와 함께 크루즈의 위로 수십개의 깃발이 연달아 교차하며 드리워졌다·
각자 다른 기사단과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 화려한 깃발들이 나풀거리고·
뒤늦게 갑판 위로 나온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며 감탄했다·
“카바힘 왕도···!”
“기사들의 나라· 여기가 바로 성채도시인가·”
멀리 보이는 굳건한 성벽 앞에는 금속 갑옷을 입은 수십에 달하는 기사들이 정렬해 있었다·
햇빛 아래 빛나는 갑주 위로 기사단 고유의 문양이 새겨져 있고 위엄 있는 자세로 서서 이쪽을 바라본다·
얼굴을 완벽하게 가리는 두터운 투구 아래 서늘하게 가라앉은 시선이 정확하게 이쪽을 향하고 있다·
철컥!!
선두에 서 있는 기사단장으로 보이는 남성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투구를 벗고 시선을 들어올렸다·
투구 아래쪽으로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쓸어올린 남성이 우묵한 눈으로 선박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카바힘 왕도 십정 8기사단장· 자일로 스펜슨이 폐하의 손님을 뵙습니다·”
한 손으로 투구를 들고 다른 손으로 가슴에 손을 얹은 자일로가 절도 있는 동작으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거의 동시에 정렬한 수십명의 기사들이 같은 동작을 반복하며 울리는 소리를 냈다·
쿵!
“손님 여러분· 카바힘 왕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린 자일로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부터는 저희가 여러분을 왕성까지 안내하겠습니다·”
* * *
판데모니엄에서 준비한 카바힘 왕도 입성의 요결은 간단했다·
콘서트를 위해 도착한 프레이야를 앞세우고 체비엔이 조작하는 인형이 스태프와 관계자를 흉내 냈다·
아그네타가 조작술식을 사용해 표정을 움직이고 목소리를 자아내며 소류가 빙결이능으로 체온을 조절한다·
일련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자연스러운 흔적이나 매음새는 광대의 환술을 사용해 모조리 지워 버린다·
“조명이랑 무대소품들은 모두 이쪽으로 내릴게요·”
“박스 찢어지지 않게 조심해 주세요!”
“여기서부터는 소속사랑 연락 안되는거지?”
“공연장 사전 답사 신청했는데 언제부터 가능할가요?
사방에서 시끌벅적하게 떠들면서 온갖 물품을 짊어지고 내리는 수십명의 사람들·
그 모두가 오로지 단 다섯 명의 능력자가 연기하며 흉내 내는 가짜들이다·
살아 있는 것처럼 생동감 넘치게 진짜를 연기하며 기사들의 눈을 속이는 인형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자연스러움과 위화감을 말끔하게 걷어내는 광대의 환술까지·
“저위계 환술은 마술과도 같아서 대놓고 속이려 하면 눈썰미가 좋은 사람은 종종 알아차리곤 합니다만·”
광대가 레녹에게 비어 있는 박스를 넘겨주며 속삭였다·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 매끄럽게 만드는 정도라면 고위계 육체능력자의 위화감도 속일 수 있거든요·”
“····”
“이렇게 작은 것부터 하나씩 쌓아나가다보면 현실을 속이는 일도 해낼 수 있게 되는 거랍니다·”
인형들 사이에 섞여서 콧노래를 부르며 자재들을 운반하는 광대의 모습·
하지만 레녹은 대답하지 않고 그런 광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 속이는 환술·
사소한 위화감을 건드리며 거대한 부자연스러움까지 덮어버리는 그 섬세한 솜씨·
광대는 술주의 접합술식을 가리켜 전투 이외의 분야에서 훨씬 빛을 발하는 능력이라 말했지만 그건 본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환술을 속인다는 본연의 목적으로 사용할 때 얼마나 치명적이고 위험한 방식으로 기능하는지·
의심조차 할 수 없도록 전제와 가정을 속이고 기만하는 것이 얼마나 쉽게 온갖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있게 만들어주는지·
예리한 눈빛으로 일행을 주시하면서도 어떤 이상조차 발견하지 못하는 기사들의 반응이 그것을 확실하게 증명한다·
“검문 완료· 가져오신 소지품과 무대 비품에 대한 조사가 끝났습니다·”
앞장서서 검문을 주도하던 8기사단장 자일로가 물러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부터 왕성을 향해 여러분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프레이야의 신원이 확실하기 때문인지 공연 일정 자체가 사전에 계획되어 있기 때문인지·
입국 수속 절차는 의외로 빠르게 진행되었다·
가져온 소품과 짐의 검사를 끝낸 기사들이 정중하게 물러나고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철컥 철컥!!
왕도 항구 후문에 도열해 멀리 보이는 왕성을 향해 진군하는 기사들의 모습·
움직일 때마다 금속갑주가 부딪히는 소리가 절도 있게 울려 퍼지며 중압감을 더했다·
마치 기사단에게 포위당한 듯한 압박감 속에서 레녹은 조용히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신체능력과 마력수율 자체가 괴물같은 수준이군· 인간이 아니라 마물에 가까워 보일 정도야·’
갑주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마력감지를 통해 확인한 기사들의 육체는 가히 짐승 같은 수준으로 발달되어 있다·
근육과 골밀도 체온을 비롯한 대사활성도가 비정상적인 수치임은 물론 체내보유 마력마저도 상당한 수준·
기사단 전원이 5레벨과 6레벨 근처 단장인 자일로가 7레벨로 추정되는 성취·
하지만 소류가 말했던 것처럼 축복을 받은 기사들의 육체능력은 본인의 위계를 한단계 가까이 넘어서 있었다·
‘본신위계를 철저하게 전투에 특화시켜도 이 정도는 아닐 텐데· 이게 왕도에 걸려 있다는 ‘축복’의 힘인가····’
레녹은 그제서야 광대가 왕도에 걸려 있다는 축복을 회의에서 가장 먼저 짚고 넘어갔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맹세를 통해 기아스를 걸고 왕도 전역에서 축복을 내려받는 기사들을 상대로 정면에서 싸워봤자 이쪽의 손해·
하물며 [문]을 열고 그 안을 공략해야 하는 판데모니엄 측의 입장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겠지·
철컥!!
자일로가 거대한 왕성의 문 앞에 서는 것과 동시에 성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느릿하게 열리는 성문 앞에서 일행을 향해 돌아선 자일로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부디 이쪽으로·”
“····”
프레이야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앞장서고 일행이 천천히 그 뒤를 따랐다·
열린 성문 안쪽으로 펼쳐진 광활한 복도를 걸어 붉은 카펫을 밟고 황금빛 알현실로 향했다·
정교하게 조각된 벽면과 기둥 천장에는 가문과 기사단의 문양이 새겨진 깃발이 걸려 있다·
둥! 둥! 둥!
걸음을 옮길 때마다 웅장한 굉음이 울려 퍼지며 왕도를 찾은 손님을 환영하듯 공명했다·
기사와 군인· 귀족과 관료· 알현실에 기다리고 있던 무수한 시선이 쏠렸다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그중에서도 수백 명에 달하는 관중의 가장 앞 열에 서 있는 여섯 명의 기사들·
쿠웅!!
무표정한 청년 둘과 노인 하나 날카로운 표정의 여성과 무뚝뚝한 거한· 싱글싱글 웃고 있는 소년까지·
카바힘 왕도 최정예 초인전력 십정기사단의 기사단장들·
도합 열명에 달한다는 기사단장 중 여섯이 이미 왕도에 집결해 있던 것인가·
하지만 기사들의 시선은 알현실 중앙을 가로질러 다가오는 손님을 향하고 있지 않았다·
“···야·”
“맞습니다·”
프레이야의 속삭임에 광대가 히죽 웃었다·
“저 남자예요·”
알현실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단단한 금속을 덧대어 제련한 듯한 왕좌·
수려한 외모를 지닌 남자가 왕좌에 걸터 앉아 무표정한 얼굴로 이곳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쿠구구구구!!!!
아무런 말도 없이 왕좌에 앉아 시선을 던지는 것만으로 주변을 짓누르는 압도적인 존재감·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 시선이 무게가 되어 어깨를 짓누르는 듯 하다·
알현실을 통째로 잡아먹을 것처럼 어마어마한 기세를 뿜어내는 남자의 자태·
저 남자가 바로 카바힘의 현왕이자 군주라고 불리는 아론바이거 카바힘인가·
“····”
일행이 알현실에 들어온 순간부터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는다·
프레이야를 소개하는 말도 일행의 방문을 왕에게 고하는 말이나 안내도 없다·
왕의 앞에서 무릎을 꿇으라는 선언이나 그를 칭송하는 말도 예의를 갖추라는 전언도 없었다·
알현실에 자리한 수백 명의 사람들이 단 한 사람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을 뿐·
그 기묘하리만치 무거운 침묵 속에서 군주 아론바이거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쿵!!
걸음을 옮기며 왕좌 아래로 내려올 때마다 시선이 흔들릴 정도의 거센 중압감이 느껴진다·
자신의 존재로 알현실 전체를 짓누르고 압박하며 영혼 자체를 뒤흔드는 듯한 무게감·
하지만 알현실에 도열해 있던 귀족과 기사들은 아무 말 없이 더욱 깊이 고개를 숙일 뿐이다·
그제서야 레녹은 주변의 반응을 통해 이것이 왕을 알현하는 정당한 방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레이몬드와 광대가 언급하고 경고했던 카바힘의 군주가 지녔다는 양면성의 재능·
한가지 개념을 양면에서 관측하는 특유의 재능으로 여기 모인 일행을 ‘들여다’ 볼 생각이겠지·
이미 사전에 광대의 환술을 사용해 군주의 눈을 피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는 상황·
하지만 레녹은 저 앞에서 다가오는 군주의 눈을 본 순간 그러한 전제를 잠시 잊고 말았다·
바다처럼 깊고 푸른 군청색의 눈동자·
아론바이거의 두 눈동자는 이중동공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
일행 앞으로 내려온 군주 아론이 천천히 프레이야를 향해 다가섰다·
심연처럼 깊고 어두운 군청색의 눈동자 안에 그녀의 모습이 각자 다른 각도로 비춰졌다·
영혼 깊은 곳을 들여다보는 듯한 오싹하고도 섬뜩한 시선에 프레이야가 얼굴을 찡그린 순간·
후욱-
아무렇지도 않게 프레이야를 지나친 아론이 알현실에 도열한 일행을 훑었다·
체비엔의 인형· 아그네타의 마력사· 소류의 이능·
군주의 시선이 다시 프레이야를 돌아 레녹과 광대를 스쳐 지나간 그 순간·
무표정한 얼굴로 걷던 아론이 레녹의 바로 앞에 걸음을 멈춰 섰다·
“····”
숨 막힐 듯한 침묵이 영원토록 이어진다·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프레이야의 표정이 굳고 체비엔이 조종하는 인형들이 움찔거렸다·
웃고 있는 광대가 뒷짐을 지면서 고개를 기울이고 안타레스가 조용히 눈을 감은 그 순간·
한참동안 침묵하던 아론이 느릿하게 말했다·
“경이로운 일이로군·”
어느새 그는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러운 시선으로 레녹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영혼이 이렇게 공명하며 동조하고 있으니· 오늘의 기적을 이렇게 축복하는구나·”
“····”
양면성의 재능·
한 가지 개념을 동시에 두 가지 시점에서 관측 가능한 재능·
설마 아론은 자신의 눈과 재능을 통해 레녹이 드러내지 않은 비밀을 엿보기라도 했단 말인가·
최악의 상황을 상정한 레녹이 마력을 끌어올릴 준비를 하며 시선을 들어 올린 그 순간·
쿵!!!
아론이 엄숙한 얼굴로 레녹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와 동시에 사방에 도열해 있던 기사들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일제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알현실에서 도열한 수백 명의 사람들이 레녹 한사람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고 경외하는 압도적인 광경·
“모두 무릎을 꿇고 경배하라·”
고개를 숙인 아론이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반궁의 혈족이 돌아오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