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0화
쇼다운(11)
토커퍼즈 번화가 지하에 위치한 인간경매장·
얼굴을 가리는 가면과 드레스코드를 맞춘 고객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준비된 좌석을 찾아 앉거나 직원이 가져다준 술잔을 신경질적으로 집어든다·
날카롭게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조금씩 소란이 커져가던 순간·
팟!
조명이 켜지고 정장을 입은 엄숙한 인상의 노인이 단상으로 걸어 나왔다·
담담한 표정으로 고객들을 돌아본 노인이 천천히 마이크를 쥐고·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백발의 노신사가 낮은 저음을 울리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근래 토커퍼즈에 발생한 불미스러운 일로 인해 등록된 상품의 명단이 바뀌어 혼란이 있었습니다만·]
[이제서야 비로소 카탈로그의 정리가 끝나 경매를 시작할 수 있을 듯합니다·]
[다시 한번 시간이 지연된 것에 대해 사과를 드립니다·]
진행자를 맡은 노신사가 차분한 목소리로 상황을 정리하자 소란이 가라앉는다·
경매장 측에서는 일정이 지체된 것을 두고 어떠한 보상도 언급하지 않았지만 손님들 역시 그런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앞으로 시작될 경매에서 출품될 물건을 확인하고 입찰하기 위해 배부된 번호표를 바쁘게 확인하기만 할 뿐·
경매장 사방에 배치된 초인들 역시 그러한 고객들을 묵묵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기다려주신 만큼 지금부터 바로 경매를 진행하겠습니다·]
진행자가 손짓하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직원들이 카트를 끌고 단상 위로 올라왔다·
투명한 빛이 흘러나왔지만 두꺼운 천이 덮여서 내용물을 확인하는 것을 막고 있다·
[본래 금일 경매에 출품될 물건이 아니었지만 여러분께 먼저 알려드리는 것이 도리라 생각했기에· 소개해 드립니다·]
노인이 묵직한 목소리로 시선을 돌리면서 말했다·
[귀도 교단의 보구· 만신전에서 제작된 금기병장· ‘비애’입니다·]
촤악!!
천을 잡아당기는 것과 동시에 창백한 포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뒤틀린 나사처럼 길쭉한 나선형으로 꼬여 있는 독특한 형태·
매끈한 포신 위로 번뜩이며 창백하게 발광하는 새하얀 아우라·
기묘한 외형의 포신이 드러난 순간 경매장 곳곳에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아름다워····”
“저것이 인륜을 저버렸다는 배덕의 병기···!!”
“그렇다면 스타디움에서 있었던 일은 역시-”
금기병장의 외견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빠르게 시선을 교환하는 사람들·
그들 역시 스타디움에서 벌어진 테러의 내막에 대해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겠지·
진행자 역시 그러한 반응을 예상하고 있었는지 차분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반응을 보아하니 이 무구가 무엇을 ‘재료’로 삼는지는 말씀드리지 않아도 될 것 같군요·]
[이 무구의 발굴 과정에서 15명의 인부가 감정 과정에서 4명의 감정사가 사망했습니다· 하나같이 이 무구에 홀리거나 미쳐 저지른 일이었죠·]
진열대 안에 놓인 창백한 포신을 힐끗 바라본 진행자가 걸음을 옮겼다·
가벼운 흔들림만으로 포신의 빛이 요동치면서 사람들의 눈을 현혹시켰다·
[감정사들은 이 무구가 사용자의 ‘감정’을 동력으로 삼아 발동하는 보구임을 결론 내렸습니다·]
[교단에서 제작한 금기병장· 그것도 중앙전선에서 관측된 적 없는 새로운 보구·]
[11대 신녀가 병기의 제작에 관여했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는 뜻이 되겠지요·]
진행자의 말이 이어질수록 경매장 사방에서 느껴지는 열기가 점차 거세진다·
고위계 초인을 재료로 삼아 제작되는 금기병장· 초인의 능력을 힘으로 삼는 무구에 대해서는 모두가 알고 있다·
대륙 전역에서 수요가 있음에도 공급이 없는 물건이니 부르는 게 값이나 다름없지만 그중에서도 교단에서 제작한 금기병장을 단연 최상품으로 치는 것은 당연한 일·
심지어 그 이름이나 외견이 새롭게 알려진 무구라 하면-
[미리 말씀드리지만 교단의 금기병장을 구매한 이후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본 경매장은 일절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진행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럼 입찰가 50억 셀에서부터 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
파앗!!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경매장 곳곳에서 고객들이 손을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번호표를 쥐고 수신호를 사용해 빠르게 가격을 입찰하는 고객들의 모습·
노인이 차분한 목소리로 사방에서 오가는 수신호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41번· 55억·]
[29번· 80억·]
[193번· 95억·]
[5번· 120억·]
경매를 시작한 지 1분도 되지 않아 입찰가의 두 배 이상으로 뛰어오르는 가격·
하지만 경쟁에 뛰어드는 고객들의 숫자는 계속해서 늘어난다·
반복되는 입찰 속에서 진행자도 오르는 가격만을 빠르게 정리하고 있을 뿐·
단상 위에서 찬연하게 빛나는 금기병장을 바라보는 고객들의 눈빛이 불타올랐다·
‘교단의 사도가 스타디움에 출현했다는 지금 저 물건이 경매장에 나왔다는 건····’
‘사도가 직접 사용할 정도의 최상급 무구· 무슨 일이 있어도 여기서 손에 넣는다·’
‘다른 상품은 모조리 포기하는 한이 있어도 입찰해야 해·’
토커퍼즈 스타디움에서 판데모니엄과 교단의 사도가 한 차례 충돌했다는 내막이 유출된 상황·
이 상황에서 교단의 금기병장이 갑작스럽게 경매장에 올라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지금 모습을 드러낸 저 창백한 포신이 교단 최고위 사도가 직접 사용하는 무구라는 증거·
금기병장 중에서도 단연코 최상품에 해당되는 지보의 보구라는 뜻이나 다름없다·
저것을 획득함으로써 감수해야 하는 교단의 보복 다른 경쟁자들의 견제를 신경 쓸 여유조차 없다·
경매장을 찾은 고객들의 생각이 일치하고 경쟁은 더욱 격렬해진다·
쉴 새 없이 가격이 오를 때마다 경매장을 비호하는 초인들의 감각이 더욱 예민해지고·
피잉-!!!
어둠 속에서 쏘아진 검은 마력사가 엄청난 속도로 그들의 관자놀이를 관통했다·
“···!!!”
무언가에 당했다는 것을 인지하고 대처할 시간조차 없었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헝클어지며 의식이 뒤집히고 사고가 격렬하게 폭주한다·
“끄르륵···!!”
사방에서 눈을 까뒤집고 거품을 문 채 제 자리에 주저앉는 경비병들의 모습·
5층 귀빈석을 지키던 초인들이 혼절하는 것과 동시에 어둠 속에서 레녹이 걸어 나왔다·
그림자로브를 펼친 레녹이 손을 까닥이자 혼절한 경비원이 뒤쪽으로 끌려나갔다·
“아주 그냥 개판이 따로 없군요·”
귀빈석 난간에 턱을 괸 광대가 아래쪽의 경매를 바라보며 웃었다·
“우리가 목숨을 걸고 얻어낸 전리품을 자기들끼리 나눠 가지려 한다니· 이거 참 웃기는 일 아닙니까?”
“딱히 웃기지는 않는군·”
마력사를 조작해 장애물을 치운 레녹이 서늘한 시선을 흘렸다·
“다만 한심할 뿐이다·”
“아니 뭐 이런 일로 경매장을 원망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광대가 나른한 어조로 말하며 손을 내저었다·
창백한 빛을 뿜어내는 무구를 향해 미소지은 광대가 속삭였다·
“어차피 저희가 가져갈 물건이었는데 오히려 그동안 잘 보관해 주셔서 고맙다고 해야지요·”
“그와는 별개로 술식의 발동이 굉장히 빠르군·”
복도 쪽에 기대 선 접합술주가 팔짱을 낀 채 레녹을 응시했다·
“마력사라는 매개체를 사용하면서 그만한 속도를 내는 건가? 공정을 극한까지 압축해도 이론상의 효율을 현실에서 구현하기는 어려운 일일 텐데·”
“····”
“마력조작에 한해서는 정지술주보다 더 뛰어날지도 모르겠군· 그래서 내 감응력에도 형태가 잡히지 않는 건가·”
병실에서 광대를 따라나온 뒤로 레녹을 관찰하는 일에 열중하는 술주의 언행·
타인의 술식과 능력을 해부하듯 분석하고 감상하는 성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레녹이 술주의 말을 무시하는 사이 광대가 느긋하게 몸을 뒤로 젖혔다·
“그럼 저 물건을 어떻게 회수하느냐의 문제인데····”
기지개를 쭉 켠 광대가 레녹과 술주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누가 하시겠습니까? 제가 할까요?
“내가 하지·”
“내가 한다·”
레녹과 술주가 거의 동시에 대답하고 서로 시선을 마주쳤다·
“····”
“술식성능을 끌어올리려면 실습이 더 필요해서 말이다·”
팔짱을 푼 술주가 침묵하는 레녹을 두고 나서며 말했다·
“실습에 필요한 소체를 구하기가 어려웠는데 마침 잘 됐군·”
장갑을 벗은 술주가 무심한 눈빛으로 경매장을 향해 맨손을 뻗었다·
“저 아래서 떠들어대는 모습 그대로 오브제로 만들어주지·”
“호오 접합술주의 오브제라· 저도 그건 좀 흥미가 있군요·”
광대가 턱을 괸 채 히죽 웃었다·
“인간을 살려둔 채로 박제해 예술품으로 만든다는 말은 들어봤습니다만· 그 요령을 여기서 견식해도 되겠습니까?”
“이 조악한 수술실에는 내가 사용하던 약품이나 방부제가 없어서 어렵다·”
술주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마음에 드는 소체도 없으니 공을 들이고 싶지도 않군· 감각을 잡을 정도로만 만지다 죽일 거다·”
“흠 그것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습니다만·”
“둘 다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생각이란 걸 하지 못하는 건가?”
광대와 술주 모두 인간을 가지고 노는 방면에 있어서는 전문가·
심성이 뒤틀린 술사답게 그쪽 방면으로 죽이 잘 맞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
하지만 이 자리에서 경매장의 모든 인간을 몰살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짜증스레 두 사람을 노려본 레녹이 말했다·
“왕도 공략이 끝난 뒤에는 다시 토커퍼즈를 경유해야 할 가능성이 높다· 그걸 감안하면 피해를 키워서는 안될 텐데?”
“엥 그렇습니까? 거기까지는 생각을 안 해봤는데요·”
광대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술주가 무심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작전이 끝난 뒤에 다른 멤버들이 어떻게 되던 딱히 알 바는 아니지 않습니까?”
“조작술사· 너 정도 되는 특질계가 쓸데없는 고민을 하고 있군·”
술주가 한심하다는 듯 조언했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때 가서 ‘해부’하고 빼앗으면 된다· 그것도 모르는 건가?”
“···진지하게 논의하고 있던 내 잘못이었군·”
냉소하며 레녹이 돌아선 채 몸을 뒤로 젖혔다·
“내가 알아서 하지·”
검은 로브에 휩싸인 레녹의 신형이 5층 귀빈석에서 거꾸로 떨어져 내린다·
동시에 경매장 천장의 조명이 모조리 꺼지면서 사방이 어둠에 잠겼다·
후욱!!
“뭐 뭐야!!”
“빨리 불켜! 지금 뭐하는-”
“내가 입찰할 차례였단 말이다!!”
당황한 고객들이 사방에서 벌떡 일어서고 허둥지둥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경매장 곳곳에 배치되어 있던 경호원들이 마력을 끌어올리면서 무기를 뽑아든다·
“발전기랑 동력실에 배치된 놈들에게 연락해!”
“아니 침입자다!!!”
“전원 전투준비해· 경매장이 습격당했다!”
갑작스러운 정전 속에서도 초인의 예민한 시력은 칩입자의 존재를 정확하게 포착한다·
어둠 속에서 혼란에 빠진 고객들 사이로 걸어 단상을 향해 접근하는 그림자·
쐐애액!!
날카로운 도검을 뽑아든 경호원들이 제 자리에서 사라지듯 가속해 접근· 레녹의 양옆에서 엄청난 속도로 칼날을 찔러넣는다·
그림자 사이로 충돌한 두갈래 칼날이 불꽃을 튀기면서 교차해 로브를 관통·
하지만 그 칼날이 로브 안에 존재해야 할 살점을 꿰뚫는 일은 없었다·
“없어···!!”
“환상인가?!”
분명히 칼을 찔러 넣었는데도 마치 허공을 가르는 듯한 공허한 감촉·
쥐고 있던 냉병기를 빼내려 해도 마치 늪에 잠긴 것처럼 빠지지 않는다·
당황한 경호원들이 몸을 비틀면서 물러서려던 찰나 일렁이던 그림자 속에서 안광이 번뜩였다·
“비켜·”
촤아아악!!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흑색의 마력사가 경매장 곳곳으로 떨어져 내린다·
레녹을 중심으로 뻗어나온 마력사가 천장과 바닥 벽면과 기둥 사이를 관통한 그 순간·
사방에서 움직이던 수십 명의 초인들이 마력사에 걸려 넘어지고 묶이면서 충돌했다·
콰아앙!!
“윽···!!”
“이게 뭔!! 마력사?!!”
“꺄야아악!!”
어둠 속에서 서로 부딪히면서 뒤엉키고 마력사에 묶여서 바닥을 나뒹구는 경호원들·
당황한 고객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상품들이 전시된 진열장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스 습격이다!!”
“신디케이트는 뭘 하는 거야! 빨리 놈을 제압해!!”
“살려줘· 오늘 경매는 그냥 포기하겠어 제발!!!”
철컥!!
도망치는 사람들 사이에 홀로 서 있는 레녹을 향해 사방에서 총구가 겨누어진다·
층계 곳곳에 배치된 저격수들이 스코프를 조준하고 방아쇠를 당긴 순간·
양손을 교차한 레녹이 마력사를 뻗어 사방에서 발사된 탄환을 붙잡았다·
피이잉···!!!
“형편없는 조준 실력이군·”
음속의 속도로 발사된 수십발의 탄환에 모조리 마력사를 부착하고 회전·
동시에 잡아당기며 힘의 방향과 궤적을 바꾸어 거꾸로 쏘아낸다·
아슬아슬하게 레녹의 신형을 스치고 빗겨나간 탄환이 벽과 바닥 사방으로 도탄되어 가속한 순간·
“그대로 다시 돌려주마·”
저격수들의 라이플을 향해 거꾸로 돌아온 탄환이 총신을 박살 내고 터트렸다·
퍼버버벙!!!
“아아아악!!”
“미 미친···!!”
“괴물이다!! 괴물이···!!”
총이 폭발하며 얼굴과 손에 화상을 입고 나뒹군 저격수들이 경악 섞인 비명을 토해냈다·
“찾았다!”
냉병기를 쥐고 빠른 속도로 경매장 층계와 귀빈석을 주파해 접근하는 경호원들·
귀빈석에 기대 낄낄 웃고 있던 광대를 향해 경호원이 칼날을 찔러넣은 순간·
엿가락처럼 물렁하게 휘어진 칼날을 본 경호원이 아연실색한 표정을 지었다·
“어 어떻게 칼을···!!”
쭈와아악-!!
바닥이 고무처럼 길게 늘어나며 경호원의 신형을 5층 아래로 떨어뜨렸다·
“끄아아악!!!”
“저 당장 할 수 있는 건 이런 장난질뿐입니다만·”
광대가 히죽 웃으면서 술주를 돌아보았다·
“그쪽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조작술사· 특질계답게 기괴한 취향을 가지고 있군·”
술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굳이 살려두고 반응을 지켜보는 걸 좋아하는 건가? 딱히 이해는 가지 않지만 그가 직접 하고 싶다면야 이번에는 양보하지·”
무표정한 얼굴로 경매장을 내려다보며 술주가 양손을 합장했다·
“술식출력 최대· 이면공간 인식· 허수차원 접합·”
우우우웅-!!!
양손을 마주한 술주가 저 멀리 보이는 단상을 향해 손을 비튼 순간·
“결계술식 분쇄·”
파아아아앙!!!!
금기병장이 보관된 진열대에 새겨진 수십종의 술법진이 거칠게 발광하더니 그대로 박살 났다·
경매장에 출품된 상품을 보호하기 위해 부여된 최상급의 결계법진을 손짓 한 번으로 깨부수는 위력·
그 충격으로 어둠에 잠긴 경매장 한복판에서 요란한 광채가 터져 나오며 사방을 거칠게 뒤흔들었다·
쿠구구구구구!!!!
“출력을 최대로 끌어올려도 고작 이 정도 위력인가·”
하지만 술주는 손짓 한 번으로 결계법진을 분쇄하고도 언짢은 듯 표정을 찌푸렸다·
“술식성능을 조정하려면 한참 걸리겠군· 여러모로 골치 아픈 작업이 되겠어·”
“으아아악!!”
혼란에 빠진 경매장이 내려다보이는 단상 위로 흑색 로브가 나풀거렸다·
아무런 방해조차 받지 않고 걸어나온 레녹이 창백한 포신 앞에 멈춰 섰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한 경매장· 사방에서 들리는 비명과 지진·
엉망진창으로 부서진 진열대 위에 놓인 금기병장을 향해 레녹이 손을 뻗은 그 순간·
“···잠깐·”
레녹은 무언가 이상을 깨닫고 무대 아래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
“····”
“····”
“····”
방금 전까지 혼란에 빠져 있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뚝 끊겨 있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우왕좌왕하던 모습 그대로 굳어버린 수백 명의 사람들·
단상 위에서 마이크를 잡은 진행자마저도 멈춰선 채 움직이지 않는다·
단 한순간에 지독할 정도로 고요한 침묵이 내려앉은 경매장·
순간 고객들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판데모니엄· 입찰가 1셀·”
단상 위에 서 있던 노신사가 삐걱대며 고개를 돌렸다·
마이크를 쥔 진행자가 멍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1셀· 입찰되었습니다·]
“입찰되었습니다·”
“입찰되었습니다·”
“입찰되었습니다·”
멍한 목소리로 복창한 직원들이 단상으로 올라와 금기병장의 보관함을 포장하기 시작했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직원들의 아래쪽에서 경매장의 고객들이 다 함께 박수를 쳤다·
“축하드립니다·”
“축하해요·”
“축하합니다·”
짝짝짝짝짝짝짝짝-
굳은 얼굴에 섬뜩한 미소를 띠고 일행을 향해 박수를 치는 수백 명의 사람들·
“푸핫· 하하하하핫!!!!”
그 모습을 바라보던 광대가 미친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방금 전까지 가지고 놀던 경비병의 멱살을 툭 내려놓은 광대가 폭소하며 몸을 돌려세웠다·
“아 죄송합니다· 저희끼리 떠드는 소리가 좀 시끄러웠죠?”
낄낄 웃으면서 고개를 젖힌 그가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으면서 말했다·
“이거 먼저 오신 손님께서 듣기에는 다소 불쾌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괜찮아·”
그 순간 광대의 옆에 서 있던 고객이 자연스럽게 입을 열었다·
멍한 눈빛으로 시선을 돌린 고객이 광대를 보며 공허한 미소를 지었다·
“오히려 나도 참가하고 싶을 만큼 흥미로운 대화주제였어· 특질계 술사의 정신이상에 대해서는 최근 들어 부쩍 흥미를 느끼고 있거든·”
“····”
경매장에서 도망치려던 고객들이 단상 위에 마이크를 잡은 진행자가 술잔을 나르던 직원이 한마디씩 보탠다·
마치 한 사람이 여러 명의 입을 빌려서 대답하고 있는 듯한 기묘한 현상·
레녹은 그 직후 상대가 누구인지 확신할 수 있었다·
“···마스터마인드·”
레녹이 경매장에서 마주친 적 있었던 8레벨의 정신계 초능력자·
마스터마인드 아오슈 스페로가 도중에 개입해 대화를 걸어온 것인가·
“경매에 참가한 고객들의 기억은 내가 ‘정리’할게· 문제가 될 일은 아무것도 없을 거야·”
광대의 발아래 쓰러진 직원이 멍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만 이 도시에는 나 말고도 그쪽의 개입을 불쾌하게 느낄 VIP들이 있거든·”
“····”
“당분간은 이 경매장이 무너지면 곤란해· 너무 큰 소란은 자제해 줬으면 좋겠는데·”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평탄하고 공허한 말투·
하지만 레녹은 물론이고 광대와 술주조차 흥미로운 듯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수백 명의 정신을 조작해 나팔수로 삼는 것은 물론이고 경매에 멋대로 입찰해 금기병장을 전해주는 기행·
그 이유가 단순히 판데모니엄이 이 경매장을 무너뜨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란 말인가·
과격하다 못해 우악스럽기 그지없는 방식에 비해 그 목적은 실로 온건하게 느껴진다·
“아하 이를 말이겠습니까·”
근처 빈 좌석에 걸터앉은 광대가 술잔을 들고 직원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저희의 뇌를 빼먹지 않는 것만 해도 감사를 드리고 싶은 심경이군요·”
“네가 내 정신을 이 육체에 안착할 수 있게 조정한 정신계 능력자였군·”
접합술주가 무심한 시선으로 아오슈 스페로와 시선을 맞췄다·
“덕분에 내 지능까지 이 몸에 걸맞게 멍청해지는 기분을 실시간으로 느끼고 있다· 그 부분에 대해 감사를 표해야 할까?”
“아니 괜찮아·”
스페로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따지자면 나도 박사에게 진 빚을 갚은 것뿐이니까·”
“····”
“예전에 함께 일했던 동료들에게는 마음의 빚이 있거든····”
레녹의 발아래 엎어진 경호원이 멍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오히려 아터마이어에게는 조금 미안하다고 생각해·”
“····”
아오슈 스페로는 과거 마이야 렌슬릿과 함께 집행관 일을 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존재·
승천문 계획을 주도했던 박사와 알고 지내는 것 역시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 말은 역시 접합술주의 우뇌를 이식할 계획을 세운 것이 박사였다는 뜻이겠지·
“딱히 필요 없기는 했지만 어쨌든 도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광대가 히죽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하지만 금기병장을 넘겨주는 것뿐이라면 그쪽 VIP께서 이렇게 개입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요·”
“····”
“무언가 저희에게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 겁니까?”
아오슈 스페로의 개입으로 인해 경매장에 난동을 피우지 않고도 금기병장을 회수한 상황·
하지만 스페로가 처음부터 개입할 생각이었다면 이렇게 능력을 과시하는 방식이 아니어도 더 편한 방법이 얼마든지 있었을 터·
광대는 그 사실을 지적하며 무언가 원하는 것이 있지 않느냐고 돌려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건 아닌데 이제 하고 싶은 말이 생겼어·”
스페로가 동의했다·
“VIP 중 한 명이 교단에서 몰래 빼돌리고 있던 8사도의 사체를 찾았거든·”
“···예?”
“여기 아래에 있어·”
광대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무시한 스페로가 아래를 가리켰다·
“8사도의 사도술식· 내 능력을 사용하면 어느 정도 컨트롤할 수 있을 것 같거든·”
“····”
“그쪽이 조금만 도와주면 뭔가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은데·”
레녹을 물끄러미 바라본 스페로가 고개를 기울였다·
“교단이 이번에 움직인 목적· 알고 싶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