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8화
잔향(16)
레녹이 일어서는 것과 동시에 발아래 쌓여 있던 도박칩이 그대로 무너졌다·
와르르르!!!
파도처럼 쏟아지면서 카지노 바닥 사방으로 흘러나가는 칩더미·
주변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들의 눈빛이 탐욕에 물들었다·
“와 와···!!”
“X발 이게 모두 얼마야···!!”
“나도 나도 할래!!”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면서 칩에 손을 대려는 노름꾼·
레녹이 앉아 있던 머신을 차지하고 황급히 레버를 당기는 고객들·
“소 손님!!”
지배인으로 추정되는 장년 남성이 황급히 셔츠를 잠그면서 뛰쳐나왔다·
당황스러운 안색으로 주변을 확인한 그가 떨떠름한 듯 레녹을 바라보았다·
“잭팟? 어떻게?”
“···”
“아· 그 그게 아니지·”
빠르게 이성을 되찾은 지배인이 웃는 낯으로 양손을 비비면서 레녹에게 다가왔다·
“축하드립니다 손님· 저희 카지노에서 무려 첫 번째로 잭팟을 터트리신 행운아셨군요!!”
“····”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토커퍼즈에서 잭팟을 터트릴 경우 보상에 대해서는 카지노와 ‘조정’을 거칠 수 있게 되어 있거든요·”
지배인이 자연스럽게 레녹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일단 제 사무실로 올라가서 말씀을 나눠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분명 서로에게 유익한 시간이 될 겁니다·”
꽈악-
레녹의 팔을 붙잡은 지배인의 손에 힘줄이 튀어나와 있다·
“손님?”
실드 때문에 고통은 없지만 그가 어떤 감정을 담아 레녹의 팔을 쥐었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레녹은 굳이 지배인을 떼어내는 대신 뒤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슬롯머신이 잭팟을 터트린 것을 본 사람은 카지노의 고객과 지배인만이 아니었다·
철컹 철컹!!
묵직한 금속거인 여러 체를 앞세워 카지노로 천천히 들어오는 경찰들의 모습·
무표정한 얼굴로 레녹을 바라보고 가리키며 무어라 조용히 속삭인다·
‘다비·’
[시스템 미등록· 신원미상· 특질마력 감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레녹의 마력을 감지한 것은 경찰이 아니라 저 아머드 배럴의 기능이었나·
하지만 단순히 중무장한 로봇이 특질계 마력을 감지할 수 있을 리 없다·
아머드 배럴의 동력원에 단순한 엔진이 아닌 무언가가 들어 있는 것일까·
거기까지 생각한 레녹은 가까이 다가오는 경찰들을 두고 몸을 돌렸다·
“어 어엇?”
유령처럼 빠져나간 레녹의 신형에 지배인이 당황해서 손을 저었지만 잡히지 않는다·
사방에서 혼란스럽게 떠들어대는 카지노 고객 사이로 레녹이 걸음을 내디뎠다·
“도망친다· 잡아!”
“특질계통의 마력보유자야· 절대 놓치지 마라!”
레녹이 돌아서는 것을 보자마자 경찰들의 발걸음이 덩달아 빨라졌다·
허리춤의 권총을 움켜쥔 경찰들이 도박칩이 널브러진 카지노에 들어온 그 순간·
피잉-!!
실을 당기는 소리와 함께 벽면의 슬롯머신이 와르르 넘어지기 시작했다·
쿠구궁!!!
“우와아악!!”
“큭!! 갑자기 뭔···!”
“깔리지 마!! 몸을 피해라!!”
정신없이 레버를 당기는 데 열중하다 뒤로 나자빠진 고객과 넘어지는 슬롯머신을 피해 뛰는 경찰들·
쓰러지는 머신 사이로 등을 돌린 레녹이 혼잡한 카지노 홀을 걷고 있었다·
“저기 있다!”
“옆으로 벌려· 길을 막아!!”
“CCTV 확보해· 인적사항 바로 확인한다!”
“잠깐···!!!”
우당탕탕!!
테이블 위에 산처럼 쌓여 있던 도박칩이 무너지며 경찰들을 향해 쏟아진다·
돌아보지도 않고 손가락을 까닥일 때마다 머신들이 도미노처럼 연달아 넘어졌다·
카지노 사방에 놓여 있는 원목 테이블이 자석처럼 끌어당기면서 충돌하고 길을 막았다·
레녹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카지노 사방의 지형지물이 넘어지며 길을 막는 듯한 기묘한 모습·
“우와아악!! 카지노가 사람 죽인다!!”
“이 새끼들 시설 관리를 얼마나 병신같이 한 거냐?!”
“내 카드!! 내 풀하우스! 이거 어떻게 보상할 거야!!”
넘어진 테이블 사방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손님들·
머리 위로 흩날리면서 찢겨나간 카드와 칩 파편· 부서진 술잔에서 흘러나온 위스키 냄새가 진동했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카지노 한복판에서 경찰들이 당황한 표정으로 멈춰 섰다·
“이게 무슨···!!”
“하필 지금 일이 이렇게 된다고?”
“운이 이렇게 좋을 수 있는 건가!!”
그 사이 레녹은 카지노 후문으로 향하는 입구 쪽에 멈춰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어떻게 할까····’
느닷없이 잭팟이 터지는 바람에 카지노는 물론이고 경찰의 이목까지 끌어버린 상황·
아직까지는 우연히 카지노에 난리가 났다는 핑계로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조작술식을 더 사용해 경찰들을 찍어누르면 돌이킬 수 없어질 터·
그때부터는 광대의 행적을 조용히 추적하는 일도 요원해지게 되겠지·
지금 이 상황을 해결하고 앞으로도 뒤탈이 없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하아 하아!”
“원 사람 하나 잡기가 이렇게 어려워서야···!!”
“토커퍼즈 경찰청입니다· 잠시 협조 부탁드립니다·”
쓰러진 슬롯머신과 테이블을 넘어 레녹의 바로 뒤까지 다가온 경찰들·
제복을 입은 경찰들의 눈동자가 레녹의 로브를 보고 더 미심쩍게 번뜩인다·
[마스터·]
다비가 말했다·
[그냥 때려 부수죠?]
‘····’
작게 고개를 저은 레녹이 몸을 돌려세우며 다가오는 경찰들을 보며 손을 뻗었다·
손을 펴는 것과 동시에 손가락 끝에서 검은 마력사가 팽팽하게 당겨진 그 순간·
누군가 레녹의 손목을 잡고 그대로 수갑을 채웠다·
철컥!!
“여기 있었군·”
“···?”
레녹의 바로 옆에 냉막한 인상을 지닌 남성이 서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푸른 제복을 입은 다른 경찰들과는 조금 다른 잿빛 코트를 입은 해쓱한 얼굴·
그가 레녹의 손목에 수갑을 채운 채 다른 쪽 수갑을 쥐고 서 있던 것·
“····”
갑자기 나타나 레녹에게 수갑을 채운 남자의 등장에 다른 경찰들이 걸음을 멈춰 섰다·
냉막한 인상의 남자가 다른 경찰들을 향해 돌아서며 경찰 배지를 꺼내 들었다·
“형사과 강력계 수사팀의 고든이다· 이 자는 수사팀에서 쫓던 범죄자니 이쪽에서 호송하지·”
“···미등록 신원· 특급 주의대상 마력보유자입니다·”
경찰들이 무기질적인 눈빛을 보냈다·
“수색팀에서 압송하겠습니다·”
“이 자는 카지노를 돌아다니며 확률조작 아티팩트를 사용한 혐의로 조사 중에 있다·”
냉막한 인상의 고든이 말했다·
“이 도시에서 가장 중대한 혐의가 확률조작 범죄라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
고든이 말이 틀리지 않았는지 약하게 숨을 몰아쉬던 경찰들이 순간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고든은 그런 경찰들을 조용히 돌아보면서 통보하듯 말했다·
“현재 내 동료들이 후문 인근에서 대기하고 있다· 이 자는 내가 호송하지·”
경찰들은 더 이상 고든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의 뒤에 도열해 있는 금속거인을 올려다보았을 뿐·
전신을 금속 갑주로 감싼 아머드 배럴이 빤히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동시에 아머드 배럴의 내부에서 딱딱한 기계음성이 흘러나왔다·
[형사과 강력계 수사팀 경위 알렉 고든·]
[경찰청 데이터베이스 접속· 등록신원 일치·]
[수사과 BR코드 인식· 생체인증 완료·]
“···알겠습니다·”
아머드 배럴의 인증이 끝난 뒤에야 경찰들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확률조작 혐의가 사실이라면 어쩔 수 없군요·”
“조사가 끝난 뒤에는 곧바로 수색팀 쪽으로 해당 용의자의 신원을 이관하겠습니다·”
그제서야 고든이 레녹의 손목에 찬 수갑을 당기며 말했다·
“따라오도록·”
“····”
레녹은 아무 말 없이 앞서 걷기 시작한 남자의 뒤를 따랐다·
그 뒤에서 카지노의 고객들과 지배인이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럼 그렇지 사기꾼 새끼였군·”
“갑자기 잭팟이 터질 때부터 이상하다 싶었다니까·”
“난 처음부터 뭔가 수작을 부렸을 줄 알았어·”
“근데 진짜 사기꾼은 단 한 번도 잭팟이 안 터진 이 카지노 아니냐?”
“손님 잠깐 저랑 이야기 좀 하시겠습니까?”
쓸데없이 예리한 질문을 던진 고객을 끌고 사라지는 지배인의 모습·
레녹은 그들을 뒤로하고 카지노 후문을 통해 사람이 없는 뒷골목으로 걸어 나왔다·
뜯어진 포스터와 쓰레기들이 널브러진 지저분한 골목· 담배와 마약 연기가 뒤섞여서 쩐내를 풍기는 어두운 거리·
하지만 레녹을 끌고 온 남자는 아무런 말 없이 등을 돌린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여기까지 왔으면 연기는 그만해도 될 것 같은데·”
레녹이 그런 경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인간을 조작하는 건 많이 어렵지 않나?”
“어 라·”
고든이 고장 난 기계처럼 삐걱거리며 천천히 레녹을 향해 등을 돌렸다·
양쪽 눈알이 기괴한 방향으로 돌아가고 콧구멍이 벌름거리며 입은 한쪽으로 돌아가 있다·
얼굴근육이 경련하고 귀와 눈썹이 벌벌 떨리면서 귀신처럼 일그러졌다·
고든이 말했다·
“어 떻게 알 았어?”
“그 상황에서 그렇게 형편 좋게 나타날 사람은 경찰이 아닐 테니까·”
레녹이 대꾸했다·
“무엇보다 살아 있는 인간을 ‘조작’할 수 있는 능력자는 복마전에서도 많지 않지·”
“아 하·”
풀썩!
외마디 감탄사를 내뱉은 남자가 그 자리에서 힘없이 쓰러졌다·
팔다리가 기괴한 각도로 비틀린 채 벌벌 경련하는 기괴한 모습·
마치 실 끊어진 인형처럼 보인다고 레녹이 생각하며 시선을 들어 올린 순간·
머리 위에 거대한 거미 한 마리가 거꾸로 서서 레녹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그네타·”
거미의 몸체에 여성의 상반신을 지닌 고대종의 후예· 허수차원을 오가는 조작술사이자 판데모니엄의 전령·
경찰을 ‘조작’해 레녹을 그 자리에서 빼낸 것은 아그네타였던 것이다·
“빅터· 오랜만이야·”
아그네타가 바늘로 꿰맨 자신의 눈꺼풀을 어루만지며 멍하니 말했다·
“우리· 그때 봤잖아· 그때·”
“···”
“···언제더라?”
언제 보아도 영 맹한 성격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인간보다 고대종에 가깝기에 감수성 자체도 다른 이들과는 굉장히 다른 거미·
아그네타가 뒤늦게 기억해낸 듯 손뼉을 쳤다·
“아 맞아· 카바힘 변경 성채에서였구나·”
“발칸에서 하이레아와 만났을 때다·”
레녹이 심드렁하게 대꾸하며 시선을 내렸다·
“시간감각은 없어도 조작술식의 숙련도는 확실히 진일보했군·”
“끄 으극····”
발아래서 희미한 신음소리와 함께 경련하는 경찰의 모습·
얼굴의 표정근육은 뒤틀려 지을 수 없는 표정을 짓고 팔다리는 통제를 벗어나 경련한다·
“겨우 숨이 붙어 있는 정도라고 해도 살아 있는 인간을 조작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닐 텐데·”
다른 경찰들이 순순히 물러난 것은 레녹에게 수갑을 채운 남자가 틀림없는 강력계 수사팀 소속이었기 때문·
죽은 시체를 조작하거나 타인을 가져와 신분을 사칭했다면 아머드 배럴은 곧바로 눈치챘겠지·
하지만 아그네타가 살아 있는 수사과의 형사를 데려와 연기를 한 덕분에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맞아 어려워·”
아그네타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근육을 조작하는 건 너무 복잡해· 마력사로 잡기 힘들어·”
“그렇겠지· 단순히 인형처럼 조작하는 게 아니라 말을 시키려면 더 어려울 거다·”
레녹이 쓰러진 경찰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입술과 혀 성대의 움직임을 일일이 마력사로 조작해야겠지· 조금이라도 조작이나 호흡이 어긋나면 금방 어색함이 드러날 테고·”
“맞아 맞아·”
인간을 마력사로 붙잡아 조작하는 것은 레녹도 할 수 있지만·
인간을 마력사로 조작해 ‘연기’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정말 사소한 부분까지 마력사를 붙여 통제하는 것은 물론 살아 있는 인간의 의식이나 반응도 신경 써야 할 터·
그 모든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엇나가면 상대하는 사람은 위화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차라리 정신계 술식이나 아티팩트를 사용해 매혹이나 최면을 거는 것이 나을 터·
여러모로 비효율적인 짓이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레녹은 아그네타가 한 일에 감탄하고 있었다·
“순수하게 신체반응을 조작해 연기를 하니 경찰도 의심하지 못한 거지· 어떤 의미로 보면 대단하군·”
“빅터는 알아주는구나·”
아그네타가 감명받은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멤버들은 몰라· 맨날 언제 허수차원 타고 오냐고 구박만 해·”
“···”
“같은 조작술사가 좋아· 맨날 빅터랑 일하고 싶어·”
거미다리를 움직여 느릿하게 지상에 내려온 아그네타가 양손을 불끈 움켜쥐었다·
“이번에도 열심히 할게·”
“····”
아그네타는 자신의 거미줄을 마력사처럼 뽑아 다루는 조작술사·
하지만 태생 때문에 타고난 재능이나 감성이 여러모로 엇나간 부분이 있다·
레녹은 조작술사로서 그런 아그네타의 재능에 몇 차례 흥미를 보인 적이 있었는데 아그네타는 의외로 그런 대화를 굉장히 기꺼워하곤 했던 것·
아무래도 그녀로서는 자신의 술식에 대해 타인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굉장히 적었기 때문이 아닐까·
결과적으로 아그네타가 빅터를 도와주었기에 쓸데없이 소란을 피우지 않고 탈출할 수 있었다·
“광대는 어디에 있지? 네가 여기에 있다는 건 그가 이미 토커퍼즈에 도착해 있다는 뜻일 텐데·”
“아·”
멍하니 레녹의 말을 듣고 있던 아그네타가 그제서야 박수를 쳤다·
“맞아· 광대한테 안내해 줘야 했었지·”
“····”
“따라와· 길을 만들어줄게·”
“···길을 만든다고?”
촤라락!!!
아그네타의 거미다리가 허공을 가리킨 순간 가느다란 거미줄이 쫙 펼쳐졌다·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펼쳐진 수십가닥의 마력사가 순식간에 골목 위로 드리우고·
마력사를 타고 능숙하게 골목 위로 기어오른 아그네타가 레녹을 향해 손짓했다·
“이거· 타고 가자·”
“····”
“좀 멀어· 빨리 가려면 이게 지름길이야·”
스르륵···!!
그 말과 동시에 마력사 위에 올라탄 아그네타의 모습이 서서히 사라졌다·
거미줄에 올라타는 것과 동시에 기척을 완벽하게 지우는 사냥꾼의 기예·
샤샥 소리와 함께 멀어지는 아그네타의 기척을 두고 레녹이 고개를 젖혔다·
같은 조작술사라 그런지 아그네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레녹도 당연히 할 수 있을 거라 여기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지금처럼 마력사를 거미처럼 타고 이동하는 건 마력사를 조작하는 감각과는 판이하게 다른 바·
“어쩔 수 없군····”
아그네타가 먼저 펼쳐둔 마력사를 움켜쥔 레녹이 마력을 끌어올렸다·
동시에 아그네타의 거미줄이 검게 물들면서 레녹의 마력사로 변질되고·
통제권을 가져온 레녹이 마력사 위에 아슬아슬하게 올라탔다·
피이잉···!!
마력사를 잡아당기고 늘려가며 장력과 탄성을 이용해 몸을 띄워 올린다·
레녹의 저열한 육체능력이 아니라 순수한 마력사 조작으로 몸을 미끄러뜨리는 기예·
몇 번의 도약 끝에 화려한 번화가 위로 솟구친 레녹이 천천히 거미줄 위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
휘오오오!!!
수십미터 상공 위에서 가느다란 마력사 몇 가닥에 의지해서 움직이고 있다·
떨어진다고 죽지는 않겠지만 레녹의 몸으로는 잠시 아래를 보는 것만으로 현기증이 일 정도·
보통 이런 때는 온갖 약물을 투여하곤 했지만 전투상황도 아닌데 도핑을 남발할 여유는 없었다·
[발아래가 보이지 않게 가려드릴까요?]
“···됐어·”
레녹이 그렇게 말하며 힐끗 시선을 내려보았다·
“그러지 않아도 금방 도착할 것 같으니까·”
지름길이라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이동경로가 생각보다 굉장히 짧다·
희미해졌던 아그네타의 기척이 거미줄 반대편에서 선명하게 느껴졌다·
상업지구가 모여 있던 번화가를 지나 그 안쪽에 위치한 화려한 카지노 호텔지구·
호텔 자체가 거대한 카지노로 개편된 도박을 위해 바깥으로 나갈 필요가 없는 최고급 호화시설·
광대는 이미 토커퍼즈 최심부에 위치한 호텔에 잠입해 있던 것인가·
레녹이 그렇게 생각하며 밤하늘 아래 발광하는 호텔 빌딩을 바라본 그 순간·
“···아?”
콰아아아아앙!!!!
빌딩 안쪽에서 붉은 화염이 솟구치며 카지노 호텔을 통째로 터트려 버렸다·
쿠구구구구!!!!
뜨거운 불꽃을 흩날리면서 호텔의 잔해· 비스듬히 꺾여 무너지는 거대한 고층 빌딩·
열기가 어찌나 강력한지 유리창과 벽면이 녹아내리면서 빠르게 융해되어 간다·
그 충격으로 레녹이 올라타 있던 아그네타의 마력사조차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
토커퍼즈 최고급 카지노 호텔 한복판에서 느닷없이 터져 나온 폭발·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이변에 레녹이 멍하니 시선을 내린 찰나·
다비가 재빠르게 라디오를 틀고 최신 뉴스 소식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토커퍼즈 도내 중심부에 위치한 알칸타라 카지노 호텔에서 대규모 화제가 발생했습니다·]
[알칸타라 호텔은 서대륙의 알칸타라 은행이 보유하고 있는 최고급 숙박시설이며-]
[현재 월드 투어를 위해 방문한 프레이야 칼린스가 머물고 있던 호텔로···]
더 오래 듣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촤악!!
마력사를 타고 미끄러진 레녹이 부서진 창문을 타고 불타는 호텔 내부로 향했다·
뜨겁게 녹아내리는 유리창· 사방에서 폭발해 주저앉은 콘크리트 내벽·
복도와 벽 문 사이로 알 수 없는 기묘한 옷을 입은 채 죽어 있는 사람들·
무시하고 지나치려던 레녹이 순간적으로 시체들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
평범한 투숙객이나 카지노를 즐기러 온 고객이 아니다·
통일된 디자인의 기묘한 옷을 입고 양 손목에 자해라도 한 것처럼 상처가 나 있는 시체들·
이런 이들이 토커퍼즈 카지노 호텔에 이렇게나 많이 묵고 있었던 것인가·
생각에 잠겨 있던 레녹이 곧바로 아그네타의 거미줄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뚝 뚝···!!
깊은 곳으로 들어갈수록 시체가 더욱 많아진다· 천장과 복도 사방에서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온몸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 있는 무수한 인간의 시체· 팔다리가 기괴하게 꺾여 있는 흉악한 형상·
호텔 1층 카지노 홀 로비 최심부· 인간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흉측한 길·
그 길의 끝에 위치한 넓은 로비 홀 위에 새하얀 욕조가 하나 놓여 있었다·
철벅!
욕조에는 물 대신 새빨간 피가 가득 차 있고 그 안에 누군가가 힘없이 누워 있었다·
욕조 바깥으로 축 늘어진 팔에서 뚝뚝 떨어지는 핏물·
숨도 쉬지 않은 채 고개를 젖힌 얼굴에는 새하얀 분칠이 되어 있었다·
탁!
마력사를 타고 내려선 레녹이 욕조에 담겨 있는 시체를 보고 표정을 찌푸렸다·
“이건····”
얼굴을 새하얗게 칠한 분칠· 헝클어진 머리· 옷도 걸치지 않은 나신이지만 틀림없다·
숨도 쉬지 않고 핏물이 가득 담긴 욕조에 누워 있는 광대의 시체·
레녹이 그 모습을 보며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선 그 순간·
“아·”
눈을 감고 있던 광대가 번쩍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입을 연 순간 광대의 뺨이 쩍 갈라지며 피가 흘러나왔다·
눈꺼풀이 찢어지며 피가 눈물처럼 뺨을 타고 줄줄 흘렀다·
천천히 눈알을 굴린 광대가 레녹을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반갑습니다 빅터·”
“····”
“우리 이렇게 보는 것도 굉장히 오랜만이죠?”
레녹은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광대의 모습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온몸에서 피를 흘리는 광대의 모습·
그렇게 흘러나온 피가 광대가 누워있는 욕조 안에 고스란히 담기고 있었다·
“아니 이거 간만에 보는 것 치고는 반응이 너무 섭섭한 거 아닙니까?”
광대가 욕조에 드러누운 채 손을 휘적휘적 흔들었다·
“비록 태어난 날은 달라도 한날한시에 같이 이 도시를 뒤집어놓기로 약속했잖아요·”
“···그딴 징그러운 약속 따위를 한 기억은 없는데·”
레녹이 싸늘한 시선으로 광대를 바라보며 물었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농담입니다· 사실 콘서트가 열리기 전에 미리미리 청소를 좀 해둬야 할 것 같아서 말이지요·”
천천히 눈동자를 돌린 광대가 레녹을 보며 히죽 웃었다·
“그래서 일단 토커퍼즈 시장을 죽여봤습니다·”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