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5화
잔향(13)
전격계열 고유마법이 레녹 자신보다 먼저 9레벨에 도달하려 한다·
그 말을 듣자마자 멈춰선 레녹을 바라보며 토르번이 말했다·
“술자와 술식이란 본디 하나이나 모든 순간 반드시 그 법칙이 지켜지는 것은 아니지·”
“····”
“타고난 재능이나 저주 혹은 후천적인 계기에 의해 술자와 술식의 위계가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
아켄드리아스가 저 멀리서 레녹을 노려보는 페이샤를 눈짓했다·
“완벽한 예시는 아니겠으나 저 창사가 비슷한 경우지· 창술의 이해도는 극위를 넘었으나 본신의 경지는 한참 아래에 머무르고 있지 않더냐·”
“···그건·”
레녹과 싸우는 도중 페이샤가 위계를 대가로 힘을 끌어올렸기 때문이지만 레녹은 거기까지 설명하지는 않았다·
다만 주변의 모든 일에 관심이 없어 보이던 이 벼락에 미친 노인이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느꼈을 뿐·
“마찬가지다· 네 마법이 어떠한 계기를 얻고 먼저 승천에 닿았기에 네 의지를 거스르고 폭주하려 하는 게야·”
토르번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폭주라고 말하기도 무엇하구나· 다른 술자였다면 진작 제 술식을 이기지 못하고 몸이 터져 죽었을 테니· 오히려 네 재능과 감각으로 윗단계의 술식을 어떻게든 휘두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게다·”
“····”
“피아를 가리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고? 오히려 네 마법이 너를 해치지 않는 것 자체가 기적이나 다름없다· 이러한 경우는 본노로서도 처음 보는지라 판단이 늦었군·”
레녹을 바라보는 토르번의 표정이 더할 나위 없이 진중하게 변했다·
“쿤다라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게냐?”
“나 자신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지·”
레녹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것을 내가 원래 원하지 않았다는 사실까지도 말이다·”
“····”
“하지만 그렇군··· 그 말을 들으니까 확실하게 알겠어·”
굳은 표정의 탑주를 뒤로하고 레녹이 시선을 들어 올렸다·
선종과의 결전을 앞두고 비약을 마신 레녹은 승천자의 상태이상을 손에 넣었다·
그렇게 손에 넣은 승천자의 감각으로 우로보로스를 뒤틀어 변질시키고 흑뢰(黑雷)를 휘둘렀다·
편람의 묵린과 라이프 베슬· 니백스의 해독제와 포혈공의 도움으로 레녹은 그때 손에 넣은 타락을 내려놓고 돌아왔지만·
레녹이 그때 사용했던 전격마법은 아직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승천자의 감각으로 휘둘러져 강제로 성장하여 변질되고 또 뒤틀려버린 채·
9레벨의 경계선에 올라타 넘어서기 직전에 멈춰선 그대로·
“협력해 줘서 고맙군· 덕분에 확실하게 판단이 섰다·”
레녹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일에 대해서는 반드시 사례하지·”
“되었다· 같은 벼락의 길을 걷는 동지끼리 무슨 사례를 주고받겠느냐?”
토르번이 껄껄 웃으면서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본노가 너를 보며 잊고 있던 가망(可望)을 되새기듯 너 역시 본노에게 얻어갈 것이 있다면 얼마든지 가져가면 족하다·”
“···얻어갈 것이라·”
레녹이 그렇게 반문하며 천천히 걸음을 돌렸다·
전격마법의 고점과 저점마저 조절할 수 없어진 폭주는 성장의 반동·
하지만 이러한 ‘성장’은 레녹이 원하는 방식이 아니다·
레녹의 대답은 [문]의 힘이 아니라 만화경에 기반한 가능성의 심상·
전격마법이 흑뢰를 기반으로 삼아 9레벨에 도달하면 그건 레녹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가능성이 되어버리겠지·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레녹은 오히려 해야 할 일이 명료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카바힘 왕성 지하에 존재하는 [문]을 상대로 실험하면서 마법을 조정한다·’
판데모니엄에서 문 안에 존재하는 무언가를 원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레녹이 할 일은 왕도까지 동행하여 문을 상대로 마법의 조정을 거치는 것·
그것만이 9레벨에 먼저 올라서려는 벼락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이라면·
파직 파직···!!!
하늘 위로 서서히 흩어지는 검푸른 뇌광을 바라보는 레녹의 시선이 깊게 가라앉았다·
* * *
토르번과의 대련이 끝난 한나절 뒤· 노을이 내려앉는 마탑 최상층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온 레녹은 눈에 익은 뒷모습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춰 섰다·
어깨 아래로 흘러내리는 흑색 단발· 눈에 보이고 있음에도 희미한 기척·
숨을 쉴 때마다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청량하고 시원한 마력까지·
“이벨린·”
소파에 쪼그리고 앉은 이벨린이 무언가를 깨작거리면서 TV를 시청하고 있었다·
“늦어서 미안하군· 오래 기다렸나?”
“일은 다 끝났어?”
“아직·”
레녹이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토르번과 싸우면서 49구역을 뒤집어놓기는 했지만 레녹이 해야 할 일은 그것만이 아니다·
당장 탑주로서 인가가 필요한 사업계획이나 기획안 여러 가지 행정 업무에 대한 서명·
그 밖에 레녹의 다른 신분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알리바이 확보까지 처리하고 온 바·
“당장 급한 일만 마무리 짓고 왔다·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수는 없으니까·”
“난 괜찮은데·”
이벨린이 TV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대답했다·
“여기 앉아 있자니 생각보다 시간이 더 잘 가더라·”
“뭘 그렇게 열심히 보고 있는 거지?”
“네 뉴스·”
이벨린이 들고 있던 채소스틱을 깨작거리면서 화면을 가리켰다·
수십 개로 분할된 화면에서 여러 명의 앵커들이 바쁘게 뉴스를 보도하고 있었다·
[중앙전선으로 떠났다 알려진 견뢰의 복귀가 완전히 확정되었습니다·]
[도착하자마자 49구역에서 대규모 파괴마법을 난사했다는 목격자들의 증언이 속출하고 있으며···]
[마탑 인근의 뇌명이 아직까지 하늘에 남아서 기상관측을 방해하고 있는 상황으로···]
[상공에서 폭발한 뇌전의 방류로 인해 현재 유의미한 수준의 기온변화가 우려되고 있습니다·]
[쿤다라 붕괴사태의 주범이 벌써부터 활동을 재개한 것을 두고 각계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
레녹이 물끄러미 스크린을 바라보던 사이 이벨린이 채소스틱을 쓱 내밀었다·
“먹을래?”
“···그러지·”
당근과 오이 파프리카를 썰어서 한 손 크기로 만든 스틱·
레녹은 그것을 눈도 깜짝하지 않고 태연하게 입에 물었다·
[으엑·]
다비가 질색하는 목소리를 냈지만 레녹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직 초인적인 마법사의 인내심으로만 가능한 망설임 없는 채식·
물끄러미 지켜보던 이벨린이 갖고 온 스틱을 더 내밀었다·
“더 먹어·”
“그래 그래·”
오랜만에 이벨린을 불러놓고 부탁한 일이 대련을 도와달라는 것이었으니·
이 정도 심술 섞인 부탁 정도는 얼마든지 받아줄 수 있다·
오이나 파프리카 정도는 건강을 생각하면 언제든지 먹을 수 있는 바·
파프리카 스틱을 다섯 개 더 밀어 넣고 나서야 이벨린이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잘 먹네·”
“····”
“이렇게 할 줄 알면서 쿤다라에서는 왜 그랬어·”
“그게 지금 일이랑 무슨 상관이지?”
“독약 같은 걸 주워 먹고 배탈이 났다며·”
이벨린이 소파에 등을 기댄 채로 나른하게 말했다·
“몸은 좀 괜찮은 거야?”
“····”
핵심을 찌르는 질문에 레녹이 순간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침묵하던 레녹이 남아 있던 채소스틱을 모두 해치우고 말했다·
“청의 눈이군·”
“라피스· 네가 중앙전선에 도착한 뒤로 널 계속 신경 쓰고 있었거든·”
이벨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쿤다라 내부 정보를 비교적 빠르게 접했어·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대충 들었지·”
“····”
말레온에 대한 정보는 그렇다 쳐도 레녹이 모종의 독을 먹었다는 정보까지 입수했던 건가·
등대의 힘을 빌린다면 아직 안정되지 않은 쿤다라 내부를 염탐하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이제 주시자 쪽으로 완전히 전향할 생각인가?”
“···글쎄· 잘 모르겠어·”
이벨린이 흐릿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청의 눈이 추구하는 결말의 유예에는 공감해· 그렇지 않았다면 힘을 빌려주지도 않았겠지·”
“····”
“하지만 내가 살면서 지키고 싶은 곳은 이 도시야· 욕심 많은 괴물들이 날뛰는 중앙이 아니라·”
“아르스노바에는 아예 관심이 없는건가?”
“반· 다 알면서 자꾸 그럴래?”
이벨린이 코웃음을 쳤다·
“난 대륙 바깥에서 온 종족 태생이야· 중앙도시가 어떻게 멸망했든 나한테는 아무 상관도 없어·”
“····”
“중앙의 이권다툼보다 이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중요해· 그것 때문에 에이전트 일을 시작했었지·”
TV화면의 뉴스를 바라보며 이벨린이 조용히 말했다·
“꼭 특무기관에서 일하는 형태가 아니어도 상관없어· 하지만 내가 아직까지 복직하지 않는 건····”
“마탑 때문이겠지·”
“····”
“예전에도 이것과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던 것 같은데·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말해두지·”
레녹이 이벨린과 시선을 맞추면서 말했다·
“탑에 들어오고 싶다면 언제든지 환영이다· 나를 비롯해 제니나 펠릭스에게 말해도 좋아·”
“그건····”
“네가 만약 49구역을 넘어 외곽 구역의 치안에 신경 쓰고 싶다면 그 부분까지도 도와주지·”
레녹의 얼굴이 진지하게 변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벨린이 말문이 막힌 표정을 지었다·
“탑 안에서 가용가능한 전력이나 물자를 마음대로 사용해도 좋아· 제니도 신경 쓰지 않을 거다·”
“···그렇게까지 해주는 이유가 뭔데?”
“이유가 뭐냐고?”
조용히 반문하는 이벨린을 보며 레녹이 고개를 기울였다·
“넌 내 목숨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이니까· 그 이상의 이유가 필요한 건가?”
“····”
이벨린 마르시아는 레녹이 프리랜서로 일하기 시작한 초창기에 만난 관계자·
그녀를 모르고 지낸 시간보다 알고 지낸 시간이 훨씬 더 길만큼 오랜 인연이다·
프리랜서와 주시자의 신분으로 함께 일하면서 온갖 사선을 넘어왔으니 이제 와서 그녀를 믿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겠지·
하지만 레녹은 이벨린 마르시아가 얼마나 희귀한 선성과 재능을 지녔는지 잊어본 적이 없었다·
8레벨에 오른 뒤에도 본연 스스로의 인간성을 거의 잃지 않은 희귀한 사람이다·
그 재능도 특유의 선성과 사명감도 이 대륙에서는 보기 드문 자질이자 가치였으니·
지금까지는 에이전트에 복직하고 싶어 하는 그녀의 의지를 존중해서 권유한 적은 없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벨린의 마음이 변했다면 굳이 망설일 이유도 없었다·
마탑을 세운 뒤로는 거의 해본 적이 없던 레녹 자신이 직접 권하는 스카우트·
“하 그렇네·”
이벨린이 고개를 뒤로 젖히면서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가죽 소파에 비스듬히 기댄 그녀가 쓰게 웃었다·
“생각했던 대답은 아니지만··· 그건 그것대로 또 듣기 좋은걸·”
“····”
“적어도 우리가 같이 일했던 모든 시간이 의미 없는 건 아니었던 거지· 안 그래?”
“네가 크로켄 아실러스에게서 내 목숨을 구해준 순간부터 그랬지·”
레녹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빚을 졌다고 생각한다·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싶지는 않아·”
“아니 그건····”
이벨린이 황당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제대로 싸운 것도 아니었잖아· 난 네게 빚을 지웠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데·”
“그렇게 생각하나?”
“애초에 아실러스는 당시에····”
무어라 말하려던 이벨린이 이내 고개를 저으면서 일어섰다·
“됐다· 확실하지도 않은 정보였으니까· 굳이 말할 필요도 없겠지·”
“····”
현장에서 크로켄과 대치했던 이벨린은 당시 그에 대해 무언가를 알고 있는 건가·
하지만 정작 이벨린은 그 사실에 대해 굳이 설명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그때 만난 뒤로 이벨린은 당시 사태를 직접 언급했던 적이 거의 없었던 바·
“어쨌든 네 생각은 잘 알았어· 네가 어떤 마음으로 배려해 주려는지도 이해했고·”
레녹이 생각에 잠겨 있던 사이 이벨린이 집무실 문을 향해 돌아섰다·
“고마워· 일단 이번 일을 끝낸 다음에 차분하게 생각해 볼게·”
“이번 일이라니?”
“에이전트 쪽에서 같이 일 하나 하자고 연락이 왔어·”
이벨린이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을 흔들면서 말했다·
“어디로 취업할지 결정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도와주려고· 사실 이미 반쯤 결정했지만·”
“···에이전트 측에서 네 힘을 빌려야 할 만큼 중요한 일이 있다고?”
에이전트는 발칸 음지의 치안을 직접적으로 관리하는 시정부 직속 특무기관·
국장 그레타 위더힐드가 복귀한 이후 그 규모는 더욱 커져서 음지에서도 동향을 신경 쓰고 있다·
그레타의 성정이 괴악한 것과는 별개로 그 능력만큼은 레녹도 어느 정도는 인정하고 있을 정도·
최근에는 텐 카운츠라는 범죄조직과 53구역의 핵융합 발전소를 두고 사투를 벌였다는 소식도 있었다·
그런 일에도 외부의 조력을 요구하지 않았던 에이전트가 이벨린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일이라니·
“호위야· 그것도 꽤 간단한 일이지·”
이벨린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쪽 호위대상이 나랑 안면이 있어서 연락을 한 것 같더라·”
“···안면이라면·”
“싱클레어 마탑 최고위 마법사가 발칸으로 복귀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해·”
레녹의 말문이 막힌 사이 이벨린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것도 탑에서 생산한 엘릭서를 대량으로 싣고 온다더라· 최근 에이전트가 참가한 작전 중에는 굉장히 특수한 작전이 될 거야·”
* * *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햇살· 창문 밖으로 울려 퍼지는 새소리·
묘하게 상쾌하고 시간이 느려진 듯한 기분·
하지만 레녹은 늦잠을 잔 사람처럼 황급히 일어나는 대신 침대에 얼굴을 파묻었다·
정오를 지난 오후· 한낮에 가까운 늦은 시간·
“····”
팔을 뻗어 옆 테이블을 더듬거린 레녹이 물병을 손에 쥐었다·
미지근한 물을 몇 모금 마신 뒤에야 나른한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삑- 삑-
손목에 차고 있던 금속성 팔찌에서 울리는 알림·
[마력동조 55%· 혈액순환 정상화· 신진대사 회복율 11% 상승·]
레녹의 머리맡에 웅크리고 앉아 머리를 부비던 다비가 말했다·
[시스템 올 그린· 이대로라면 회복도 순조롭네요·]
“그건 다행이군·”
[지금처럼 이렇게 30년 정도만 요양하면 조금 괜찮아질 것 같아요!]
“····”
쿤다라의 일이 끝나고 발칸으로 복귀한 지 10일 차·
돌아오자마자 마탑에 들러 토르번과의 대련을 마친 뒤 탑의 업무를 처리하기까지 이틀·
레녹은 그 뒤로 족히 일주일이 넘는 시간을 오로지 집에서 보내면서 휴식에 전념하고 있었다·
비약에 담긴 독은 묵린과 라이프 베슬을 통해 최소한으로 억눌렀지만 그 작은 후유증조차 레녹에게는 치명적인 위험요소·
몸을 치료해 주었던 포혈공이 경고한 것처럼 안정을 취하면서 컨디션을 회복할 시간이 필요했다·
대부분의 시간을 침대와 연구실을 왕복하면서 휴식을 취하고 술식을 점검하는데 보냈던 바·
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30년이 아니라 3일이었어도 시간이 부족해·”
[사실 마스터의 건강을 생각하면 30년도 부족····]
“재수 없는 소리 할래?”
[으베베베베·]
다비의 양쪽 볼을 쭉 잡아당긴 레녹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어나자마자 찾아온 현기증에 비틀거리면서도 주방으로 나간 레녹이 리모컨을 쥐었다·
“택배가··· 아마 지금쯤이면 도착했을 것 같은데·”
위잉-
리모컨을 누르는 것과 동시에 벽면의 냉장고가 열리면서 신선한 채소들이 나타났다·
새벽에 배달시킨 야채들이 저택 바깥에서 주방 냉장고로 알아서 들어가 있던 것·
적지 않은 돈을 주고 매입한 저택에 탑재된 자동운반 시스템을 이용해 본 건 오랜만이다·
쏴아아!!
흐르는 물에 샐러리를 씻어 먹어본 레녹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군·”
[으엑····]
다비가 질겁한 기색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스터가 그 채식 유기체에게 이상한 물이 들어버렸어요·]
“예전에도 종종 이렇게 해 먹었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레녹이 그렇게 말하며 선반에서 샐러드 소스를 꺼내 채소들을 잘라 넣기 시작했다·
“쿤다라에서는 현지 음식이나 보존식품밖에 먹지 못했으니까· 이렇게라도 영양분을 보충해 줘야지·”
[그건 마스터가 주기적으로 투약하는 농축 영양제 세트가 있으면 충분하지 않나요?]
레녹은 다비의 말을 모른 척 거실 소파에 걸터앉아 TV를 켰다·
스크린이 켜지자마자 흘러나오는 최신 뉴스들·
[라바테논 마법대학의 에반 바일런 교수가 네번째 논문의 발표를 앞두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최연소의 나이로 원소학부에 취임한 바일런 교수는 전력의 마력치환과 반중력 엔진 개발로 학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공용마법 학습장치는 현재 발칸의 모든 시민들이 간단한 마법을 사용하게 만들어준 획기적인 물건으로···]
[바일런 연구소에서 분기마다 발표하는 새로운 마법의 존재로 인해 단 하루도 검색 랭킹에서 내려오지 않는···]
에반 바일런의 네 번째 논문·
하지만 레녹은 뉴스를 보면서도 무표정한 얼굴로 채널을 돌렸다·
레녹의 무릎 위에 웅크리고 앉은 다비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벌써 이렇게 언질을 던져둬도 괜찮을까요?]
“네번째 논문은 에반 바일런의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서이기도 하니까·”
레녹이 대답했다·
“테마는 이미 정해두었어· 시기만 제대로 맞춘다면 문제는 없겠지·”
토커퍼즈로 향하기 전 알리바이를 만들어둬야 하지만 당장 에반 바일런으로 활동하겠다고 무리할 필요는 없었다·
연구자가 특정한 연구에 몰두해 몇 년을 넘게 잠적하는 건 비교적 흔한 일인 만큼 이렇게 가끔 근황을 갱신하는 정도면 족하다·
남은 일은 판데모니엄의 작전이 끝난 뒤에 이벨린이 싱클레어 마탑과 함께 발칸으로 복귀한 이후가 되어도 괜찮겠지·
에반 바일런의 신분으로 다시 움직여야 한다면 그건 아리스 리첼렌이 라바테논 대학에 복귀한 다음이었으면 한다·
“청의 눈을 탈퇴한 이후로 천번은 오히려 운신이 편해졌어· 발칸 쪽은 당분간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을 테고····”
레녹이 다양한 방식으로 이 도시에 새겨넣은 흔적을 하나씩 정리해나가면서 다음을 생각한다·
이제 남은 일정은 정해져 있었다·
“21구역에 가볼 때가 됐군· 하이레아에게 답신은 도착했나?”
[마스터가 저번에 메시지를 보낸 뒤 며칠 뒤에 답신이 왔어요·]
다비가 꼬리를 자신의 머리를 긁적였다·
[암호화된 링크를 하나 보내왔는데· 지금 확인해 볼까요?]
“암호화된 링크라고?”
[바이러스나 랜섬웨어같은 게 아니라는 건 확인했는데 아직 내용은 안 열어봤거든요·]
“링크 전송해 줘· 지금 바로 확인해 보자·”
작전계획이나 일정을 미리 보내온 거라면 21구역으로 향하기 전 미리 확인해 보는 것이 좋겠지·
다비가 즉시 암호화된 링크를 홀로그램 창 위로 전송했다·
삐빗·
기묘한 접속음과 함께 눈앞에 펼쳐지는 익숙한 디자인의 사이트·
곧바로 그 사이트의 정체를 알아본 레녹이 표정을 찌푸렸다·
“···딥웹?”
[아 여기·]
다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가 저번에 마스터한테 보여드리려던 게시물 중 하나였는데·]
“····”
다비가 재밌다면서 언급하고 하이레아가 레녹에게 답신 대신 보내온 링크라·
곧바로 스크롤을 내려 게시물의 제목을 확인한 레녹이 할 말을 잃어버렸다·
[제목 : 교전규범· 판데모니엄이 보여준 견뢰 상대법·(쿤다라 사태에 기반한 견뢰의 행동패턴 분석 첨부)] + 35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