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1화
잔향(9)
“판데모니엄의 [문] 공략 작전이라·”
대륙 서북부에 위치한 기사들의 나라 카바힘·
카바힘의 왕성 지하에 위치한 [문]을 열기 위해 복마전이 직접 움직이는 작전·
하이레아에게 설명을 들었고 광대가 참가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문]을 여는 힘을 규명하기 위해 공략작전에 참가하는 것은 확정사항·
휴대폰 화면을 쓸어내린 레녹이 입을 열었다·
“작전 시작까지 아직 시간이 있어· 바로 합류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군·”
시간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는 이미 메시지에 모두 나와 있었다·
비밀회선을 통해 하이레아의 메시지가 도착한 것은 일주일 전·
보름 뒤까지 답을 달라고 했으니 남은 시간은 8일 정도인가·
일정을 계산해 본 다비가 즉시 답했다·
[그래도 남은 일정을 생각하면 시간에 맞추기 어렵겠는데요?]
“····”
바로 복마전과 합류할 수도 있지만 발칸에 돌아온 이상 레녹도 처리해야 할 일이 많다·
빅터의 신분으로 움직이면서 의심받지 않기 위한 알리바이를 미리 확보해 두는 것은 물론·
레녹이 이번에 얻은 마법에 대한 성취와 손실에 대해서 보다 면밀한 자문이 필요할 터·
마탑과 대학의 업무와 연구 역시 레녹이 개입해 최소한의 방향 정도는 정해주어야 한다·
무엇보다 쿤다라에서 비약을 마시고 몸에 남은 후유증이 아직까지도 심대한 상황·
최소한의 안전조치가 없다면 컨디션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저하되어도 이상하지 않다·
[생각보다 빠듯해 보이는데 어떻게 할까요?]
“간단하지·”
레녹이 그렇게 말하며 즉시 휴대폰을 들고 하이레아에게 답신했다·
[시간이 없으니 일정을 늦춰라· 아니면 나 혼자 움직이지·]
[····]
통보인지 협박인지 알 수 없는 레녹의 답신·
기가 차다는 듯 빤히 바라보는 전뇌정령을 두고 레녹이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이 신분으로 움직일 때 가장 좋은 점이지·”
구구절절 사정을 설명하느니 뻔뻔하게 통보하는 것이 오히려 빅터라는 신분을 납득시켜 줄 터·
일단 질러놓고 먹히지 않는다면 작전 도중에 합류하면 그만이다·
무엇보다 판데모니엄의 일정이 아니더라도 신경써야 할 일이 있었다·
[반· 발칸에 돌아오는대로 연락 부탁해· 논의하고 싶은 일이 있어·]
휴대폰을 켜자마자 눈에 들어왔는 제니의 메시지·
레녹이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지 알고 있는 제니가 연락을 해왔다면 가장 먼저 신경써야 할 안건임이 분명하겠지·
“···바로 가야겠군·”
쓴웃음을 지은 레녹이 엉망진창이 된 연구실을 뒤로하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 * *
거대도시 발칸 49구역·
견뢰의 마탑을 중심으로 아이템 거래 사업이 자리잡은 번화가·
양지와 음지를 가리지 않고 몰려든 판매자와 구매자로 번잡한 거리·
끼익!!
바이크를 타고 49구역 번화가 바깥에 내려선 레녹이 지팡이를 짚고 걸음을 옮겼다·
코트 안쪽에서 꾸물거리는 다비의 움직임을 빤히 바라보던 레녹이 물었다·
“아까부터 자꾸 뭘 그렇게 집중해서 보고 있는거지?”
[아 이거 말인가요?]
레녹의 코트 안쪽에 매달려 있던 다비가 찔린 듯이 살짝 움찔거렸다·
풍성한 꼬리를 휘두르며 멋쩍은 기색으로 머리를 긁적인 다비가 말했다·
[딥웹의 반응이 생각보다 너무 재밌어서··· 이제 그만 볼게요·]
“···설마 이번 일 때문인건가?”
[물론이죠· 교단 측에서 확보했다는 영상 기록이 딥웹에도 바로 유출됐거든요·]
다비가 신이나서 말했다·
[마스터의 마법이나 능력을 분석해 보겠다는 유기체들의 헛발질이 수십페이지나 쌓여 있어요· 그것들만 읽어도 3일은 배가 부를-]
“····”
중앙전선에서 교단이 확보한 말레온의 사상전역 은하용성군의 영상 기록·
딥웹의 음지 네트워크에서 해당 자료를 확보하지 못했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겠지·
9레벨의 경계선에 서 있던 두 술사가 전력을 다해 술식을 휘두르던 전투 기록이다·
초인들 간의 우열을 매기는데 미쳐 있는 딥웹에서 반응이 얼마나 격렬할지는 굳이 보지 않아도 짐작이 가는 바·
[대충 20분 정도면 보기 좋게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확인해 보실래요?]
“그러지· 하지만 마탑에서 밀린 일을 끝낸 다음이야·”
하지만 레녹은 다비의 말을 따라 휴대폰을 보는 대신 시선을 돌렸다·
“아무래도 쿤다라의 일에 대해 전해들은 건 딥웹뿐만이 아닌 것 같거든·”
[···아하·]
휘오오오···!!!
레녹이 49구역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방에서 서서히 말소리가 줄어든다·
아이템 사업이 번창하며 24시간 내내 조용할 일이 없는 거리에서 흔히 느낄 수 없는 고요함·
침묵 속에서 하나둘씩 이쪽을 향하는 시선이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레녹은 모르지 않았다·
“진짜다 진짜 돌아왔어····”
“완전히 미쳤군· 서부전선에 그 난리를 피워놓고 혼자서?”
애써 모른 척 하지만 숨길 수 없는 감정과 말소리·
마탑으로 향하는 길· 수천미터에 달하는 번화가 곳곳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위화감·
“중앙으로 나가서도 성질을 죽이지 못할 줄은 몰랐군· 아예 상대를 가린다는 생각을 못 하는 건가?”
“난 이해해· 미친 정도를 감안하면 진작 도시가 아니라 중앙에서 놀아야 할 마법사였지·”
“중앙 놈들도 이제 옆구리에 폭탄을 끼고 사는 게 어떤 느낌인지 이해하겠군·”
주변에서 숨죽여 수군대는 목소리가 들렸다·
서부전선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현재 발칸에서 그 소식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쿤다라가 어떻게 추락하여 붕괴했는지 그 정황이 온 대륙에 정보가 퍼진 상황·
무표정한 얼굴로 걸음을 옮기는 레녹의 모습을 보며 사람들이 속삭였다·
“쿤다라를 아작 내고 온 것치고는 멀쩡해 보이는데?”
“딥웹에서 돌고 있는 소문이 맞을지도 모르지·”
“고위계 초인들만 골라 죽인다는 그 개소리?”
“개소리라니· 위계를 쌓은 방식에 문제가 있다면 충분히 그럴 법해·”
외겁도시를 박살 내고 서부전선의 드루이드를 학살한 피에 젖은 마법사·
하지만 레녹이 돌아왔음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도망치거나 혼비백산해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견뢰의 악명 때문에 장사를 접기에는 이미 49구역의 아이템 사업이 너무나 커져 버린 상황·
눈치 빠른 이들은 레녹이 마탑 주변에서는 싸우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미 짐작하고 있다·
레녹이 프리랜서를 그만둔 이후로 저위계 초인을 죽이는 일은 대폭 줄어들었던 바·
딥웹에서는 그 시기와 레녹의 경지를 연관지어 그의 행동패턴을 추측하는 가설을 여럿 내놓고 있었던 것이다·
“살성을 채워야만 만족할 수 있을만큼 미쳤다면야 불가능한 일도 아니지·”
“직접 대화해 보면 의외로 말이 통한다고 들었어· 이번 기회에 협업 제안을····”
“X발 딥웹 병신들이 익명으로 지껄이는 개소리를 믿고 도박을 걸겠다고?”
[시끄러운 유기체들이 많은데 좀 조용하게 해줄까요?]
“아니· 됐다·”
사방에서 떠들어대는 구경꾼보다 품 안의 전뇌정령을 더 예측하기 어렵다·
레녹이 주변에서 들리는 소리를 무시하고 마탑이 보이는 거리에서 휴대폰을 꺼내든 찰나·
콰아아앙!!!
거리 저편에서 요란한 굉음과 동시에 붉은 불기둥이 솟아올랐다·
번화가 저편에서 테러라도 벌어진 듯한 뜨거운 열기와 거센 진동·
와장창!!!
동시에 건너편 가드레일을 깨부수고 나타난 장갑차가 엄청난 속도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여러 체의 건물을 정면으로 깨부수고 도망치는 듯한 우악스러운 모습·
하지만 49구역에서 한참 아이템 거래를 진행하던 사람들은 그리 놀라지 않았다·
“또 시작이군· 이번에는 테러야 방화야?”
“시체처리반이 움직이고 있어· 살인강도 같은데·”
“장갑차의 무장도가 상당히 높다· 꽤 본격적이야·”
발칸의 음지에서 이런 범죄가 하루이틀은 아니지만 최근 이런 일이 빈번했다는 듯한 묘한 반응·
행인들의 대화를 도청한 레녹은 즉시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역시 그놈의 위성도시 때문인가?”
“최근에 외부에서 유입된 유동인구가 많아지면서 부쩍 소란이 늘었단 말이지·”
“돈냄새를 맡고 기어들어온 놈이 대부분이야· 이쪽 소식에 대해 알리가 있겠어?”
“내버려 둬· 어차피 49구역을 벗어나지도 못하고 벌집이 될-”
시큰둥하게 수군대던 사람들의 안색이 순간적으로 확 변했다·
끼익!!
부아아아앙!!!
도주하던 장갑차가 느닷없이 방향을 확 틀어 이쪽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기 때문·
육중한 차체가 전력으로 가속하며 아스팔트 위로 불꽃을 튀겼다·
장갑차가 가속하는 넓은 대로 위에 서 있는 레녹을 확인한 사람들의 안색이 빠르게 창백해졌다·
“이 이런 X발!!!”
“진짜 눈이 없는 새끼들인가···!!”
“X됐다 휩쓸리기 전에 튀어!!!”
눈치 빠른 용병과 프리랜서들은 이미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고 있었다·
한발 늦게 싸한 분위기를 감지한 상인과 고객들이 욕설을 내뱉으며 부랴부랴 소지품을 챙긴다·
두두두두!!!
길을 막는 다른 차량을 장난감처럼 치어 날려 보내며 엄청난 속도로 질주하는 장갑차의 거체·
하지만 레녹은 마력을 끌어올리는 대신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입을 열었다·
“다비·”
치익-
대답 대신 레녹의 귓가에서 여러 명의 목소리가 동시에 들려오기 시작했다·
-X발 X발 X발!! 그러니까 내가 하지 말자고 했잖아!!
-됐으니까 일단 도망친 다음에 생각해!!
-저쪽에 길이 뚫려 있잖아 전속력으로 밟으라고!!!
-저 코트 입은 새끼부터 치워봐!!!
타타타타탕!!!
장갑차 밖으로 고개를 내민 누군가 레녹을 향해 미친 듯이 총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서브머신건을 양손으로 들고 아무렇게나 탄환을 흩뿌리는 형편없는 사격실력·
-X발 안 맞는다고!!
-그냥 들이받아!
“····”
레녹 주변의 행인들이 비켜서면서 길이 뚫렸기에 이쪽으로 도망치려 한 것뿐인가·
심문을 위해 차량을 멈춰 세울 생각이었는데 통신을 듣자니 그럴 가치도 없어 보였다·
[터트릴까요?]
“아니 늦었군·”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장갑차가 엄청난 속도로 레녹의 몸을 정면에서 들이박았다·
뻐어어어어엉!!!
수십 톤에 달하는 중량을 지닌 차체가 가속하여 내뿜는 충격량·
어지간한 합금 강판이나 바리게이트를 통째로 터트리고도 남을 법한 힘이다·
강렬한 충격파와 함께 아스팔트 지면이 으스러지고 뒤따른 열기에 짓물러 녹아내렸다·
하지만 레녹은 그 모습을 제대로 돌아보지도 않고 시선을 들어 올렸다·
“오늘은 하늘에 구름이 많이 꼈어·”
끼기기긱!!!!
그런 레녹의 바로 앞에 차체 앞부분이 찌그러진 장갑차가 멈춰 서 있었다·
보이지 않는 장벽에 가로막힌 것처럼 엔진을 돌려도 꿈쩍조차 하지 않는 차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강도들의 목소리가 거칠게 울려 퍼졌다·
-이 이게 뭐야!! 뭐 하는 새끼야?!!!!
-안돼 설마···!!!
무언가 눈치챈 것처럼 절규하는 목소리를 무시하고 레녹이 가볍게 발을 내디뎠다·
파앙!!
동시에 장갑차 아래서 충격파가 발생 묵직한 차체가 뒤집히며 붕 떠올랐다·
차체 앞부분 유리창을 두고 레녹과 시선을 마주치는 강도들의 모습·
그 모습을 올려다보며 레녹이 하늘을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아직 감이 잘 안 잡혀서 어쩔 수 없군·”
파직 파직···!!!
푸른 뇌전을 휘감은 손가락을 겨눈 레녹이 주변을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피해라·”
[편뢰(偏雷)]
푸화악!!
레녹의 손끝에서 피어오른 뇌전이 마법으로 영창이 끝난 순간·
저릿한 전격의 줄기가 그 자리에서 수십 배는 넘게 증폭되며 폭발했다·
마법의 영창과 동시에 레녹이 설정한 출력의 허용량을 아득하게 넘어서는 폭주·
검푸른 벼락으로 화해 승천한 편뢰가 단숨에 장갑차를 증발시키며 솟구치고·
먹구름이 낀 하늘을 가로지르며 흑청색 뇌광을 거대도시의 상공에 흩뿌렸다·
쿠과과과과!!!!
“우 우와아아악!!!”
“살려 살려줘···!!!”
레녹의 손가락 위로 피어오른 뇌광이 회전하면서 49구역의 하늘을 빛으로 물들였다·
눈앞을 불태우는 검푸른 빛에 도망치던 사람들이 창백하게 질린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팔다리를 떨면서 주저앉거나 황급히 어딘가로 연락하고 먹통이 된 카메라를 꺼내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레녹은 자신이 터트린 마법의 잔향을 바라보며 표정을 찌푸리고 있었다·
“출력의 저점이 아예 조절이 안 되는군····”
편뢰는 레녹이 보유한 전격마법 중에서도 화력이 아니라 관통력에 특화된 술식·
성질변화를 넣어 출력을 높이지 않으면 대인전에 극단적으로 치중되어 있는 마법이다·
원래라면 장갑차와 그 안에 타고 있는 이들을 관통해 폭발하는 선에서 그쳐야 했을 터·
그런데도 장갑차를 증발시키고 순간적으로 기상관측을 방해할 정도로 위력이 커진 상황이다·
쓴웃음을 지은 레녹이 느릿하게 손을 거둬들였다·
“이대로면 전격마법은 당분간 사용불가다· 도시 안에서 사용했다가는 피아를 가리지도 못하겠어·”
술식출력의 고점이 뛰어오른 대가로 그 저점 역시 상한선이 아득하게 높아진 상황·
문제는 그 저점의 하한선을 레녹 자신의 의지대로 조절할 수 없다는 것에 있다·
파괴범위를 줄이기 위해 일부러 영창을 한정하여 편뢰를 사용했음에도 이미 주변의 반응은-
“고작 강도 하나를 죽이겠다고 저 정도 출력의 고위계 마법을 난사하다니···!!”
“미 미쳤어··· 완전히 미쳐있군····”
“역시 개소문일 줄 알았어· 그냥 완전히 맛이 가버렸잖아·”
[기가 막히네요 마스터·]
레녹의 품 안에서 다비가 감탄한 것처럼 중얼거렸다·
[이렇게 효율적으로 유기체들을 제압하고 우러러보게 만드는 기술이라니···! 저도 빨리 그 요령을 배우고 싶은데요?]
“····”
작게 한숨을 내쉰 레녹이 고개를 저으면서 걸음을 돌려세운 그 순간·
쿵!!
마탑이 위치한 방향에서부터 강렬한 마력의 공명이 거리 전역에 퍼져 나왔다·
뇌광으로 번뜩이는 하늘 아래 사람들이 밀려나며 수십 명의 초인들이 걸어 나왔다·
“탑주님·”
풍성한 붉은 머리칼을 여성이 선두에 서서 레녹을 바라보고 있었다·
입에는 굵직한 시가를 문 여성이 레녹을 향해 다가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함께 가시죠·”
“타티아나·”
블레이버 마탑의 전 염주 포화의 마녀 타티아나 치글렛·
지금은 레녹의 마탑에 소속되어 있는 염열계 성위마법사가 레녹을 여기까지 마중 나온 것인가·
레녹을 향해 고개를 숙인 타티아나가 두 사람에게만 들릴법한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하여간 여전히 생각을 종잡을 수가 없군·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
“탑으로 가자· 다들 기다리고 있어·”
타티아나가 손짓하자 마탑에 소속된 초인들이 레녹의 앞뒤로 도열했다·
떡 벌어진 어깨의 새머리 거인이 걸어 나와 레녹을 호위하듯 옆에 섰다·
거대한 해머를 짊어진 펠릭스가 레녹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반·”
“펠릭스·”
새머리 거인의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붉은 마력을 확인한 레녹이 눈을 빛냈다·
“페이샤와의 훈련에서 성과가 있었나보군·”
“자네라면 한 번에 알아볼 줄 알았지·”
펠릭스가 웃으면서 고갯짓을 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탑으로 돌아가서 하지· 여기 있다가는 상황을 통제할 수 없어질 거야·”
“····”
“이렇게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자네는 이제 그런 사람이 되어버렸네·”
“···그렇군·”
레녹은 펠릭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49구역의 마법사· 마탑의 주인 같은 거창한 이름 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번 사태로 인해 견뢰의 존재가 발칸에 국한되지 않고 대륙 전역에서 경계받고 있다는 사실·
그를 통해 다시 발칸에서도 레녹의 악명과 영향력이 통제를 벗어나고 있다는 것·
걸음을 옮기는 지금 이 순간에도 레녹의 등 뒤로 쏟아지는 무수한 감정의 편린·
두려움과 공포· 경계와 당혹· 그리고 그에 비견되는 경외·
이해할 수 없는 상대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며 자신도 모르게 떠받들게 되는·
“····”
레녹은 그런 사람들의 반응을 잊지 않고 기억해 두었다·
그것이 언젠가 레녹에게 찾아왔던 또 다른 결말의 일부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미련 없이 걸음을 돌린 레녹이 펠릭스를 따라 마탑으로 향했다·
* * *
쿵!!
탑의 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기다리고 있던 이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탑주님·”
“서부전선의 소식은 전해 들었습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약선께서 시간을 내어 기다리고 계십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시다면····”
“나중에·”
레녹이 고개를 저으면서 입을 열었다·
“일단 제니를 만나러 가지· 어디에 있지?”
“최상층 회의실·”
물고 있던 시가를 손바닥에 대충 비벼 끈 타티아나가 나른한 어조로 말했다·
“바로 가지· 지금쯤이면 올 사람은 다 왔을 거다·”
레녹은 타티아나의 안내를 받아 곧바로 탑의 최상층 층계로 향했다·
벌컥!!
회의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순간 사방에서 수십이 넘는 눈동자가 일제히 돌아섰다·
레녹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회의실에 앉아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반!!”
“야 대체 중앙전선에서 무슨 짓을···!!”
웨이안이나 딜런이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지만 이내 순식간에 시선을 돌리며 눈치를 본다·
레녹을 보고 반가워하던 다른 용병이나 초인들도 어색하게 움직임을 멈췄다·
“····”
회의실의 가장 안쪽 스크린 앞에 팔짱을 낀 제니가 뚱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래 이렇게 될 줄 알았어·”
레녹을 바라보던 제니가 한숨을 푹 내쉰 뒤 말했다·
“마키나 때처럼 혼자 알아서 탈출했겠지· 그러지 않고서야 소문이 나지 않을 리도 없었으니까·”
“쿤다라 측과는 다행히 이야기가 잘 풀렸다·”
레녹이 입을 열었다·
“걱정해 줘서 고맙군· 미리 연락하지 못해 미안하다·”
“이야기가 잘 풀렸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데·”
의자에 발을 턱 걸치고 앉아 있던 밀라가 어리둥절한 기색으로 물었다·
“그 보통··· 자기 도시를 박살 낸 범인이랑 이야기라는 걸 할 수 있는 건가?”
“····”
“그 부분에 대해서는 본인 입으로 직접 들어봐야 알 수 있겠지·”
제니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회의록을 정리했다·
“어쨌든 반이 돌아왔으니까 예정대로 구출 작전은 취소· 마탑 방어작전만 남기고 소각할 거야· 사전에 논의한 대로 그쪽 데이터는 전량 폐기 부탁할게·”
“방어작전?”
회의실의 풍경을 쭉 둘러본 레녹은 그제서야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스크린에 떠오른 발칸 미개발지구의 작전지도· 지도 위를 빼곡하게 가로지르는 수십 개의 화살표·
각 화살표마다 레녹이 알고 있는 동료들의 이름과 임의로 형성된 간이전선의 모형이 붙어 있다·
마치 탑의 전력을 배분하여 발칸 미개발지구 인근을 점유하기 위한 듯한 모습·
그런 레녹의 의문을 눈치챈 것처럼 뒤에 서 있던 타티아나가 대답했다·
“네 소식을 듣고 중앙전선의 정보를 있는 대로 사들이는 도중에 이쪽에서도 얻은 정보가 있었지·”
피곤한 표정으로 미간을 문지르던 그녀가 희미하게 웃으면서 레녹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쿤다라의 사태와는 별개로 중앙에서 굉장히 수상한 움직임을 포착했거든·”
“수상한 움직임이라면····”
제니가 메시지로 논의하고 싶다고 말했던 안건은 쿤다라가 아니라 이쪽이었나·
“견뢰· 마탑· 49구역· 이 세 가지 키워드가 전쟁용병들의 커뮤니티에서 활발하게 교환되고 있어·”
스크린을 바라보는 제니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반· 돌아오자마자 이런 말을 하게 돼서 미안하지만 중앙에서 네 마탑을 노리고 있어· 최악의 경우 전쟁을 준비해야 해야 할지도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