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7화
잔향(5)
외겁도시 쿤다라를 떠나 처음으로 도착한 이름 모를 중소도시·
서대륙 횡단열차가 경유하는 역의 인근 번화가에서 접한 중앙의 소식들·
=쿤다라의 추락· 장생종들의 대륙 진출
=중앙전선의 정세는 어디로?
=연맹과 교단의 전쟁에 새로운 변수로 작용할까
[서부전선 경계지대에 추락한 쿤다라가 조만간 공식적인 발표를 앞두고···]
[현재 주문연맹과 교단 이능개화전단의 사절단이 경계지대에 도착하고 있····]
사방에서 흩날리는 신문· 스크린을 타고 경쟁하듯 빠른 속도로 흘러나오는 뉴스·
장생종들의 대륙 진출과 그로 인한 여파를 경고하는 전문가들·
서부전선이 차후 어떤 식으로 변하게 될지를 논하는 프로그램·
하지만 그런 소식을 타고 마지막으로 흘러나오는 이름은 고정되어 있었다·
[중앙전선에 추락한 쿤다라의 붕괴에 견뢰가 핵심 관계자로 엮여 있다는 소식을 보도드립니다·]
[견뢰는 발칸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대마법사로 그간 무수한 파괴행위를 저질러온 무법자이며-]
[서부전선에서 드루이드들을 학살하고 도주한 혐의를 받고 있으나 쿤다라에서 모습을 드러내····]
“····”
중앙전선의 언론과 미디어들이 하나같이 견뢰의 이름을 보도하고 있다·
발칸에서 여러 각도로 흐릿하게 찍힌 얼굴이 없는 사진을 가져와 게시하고
레녹이 저지른 파괴행위나 싸움을 끝난 전장을 반복해서 비추어준다·
견뢰라는 마법사의 존재를 중앙전선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경고하는 듯한 반응·
레녹은 무표정한 얼굴로 사방에서 송출되는 자신의 사진과 영상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소식이 빠르다· 중앙의 환경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쿤다라의 일이 어떤 식으로든 새어나갈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설마 벌써부터 이쪽을 주시하고 있을 줄이야·
구겁을 추락시킨 시점에서 중앙에 난리가 나는 건 피할 수 없으나 레녹에게 초점이 맞춰지는 속도가 지나치게 빠르다·
팔대용왕과 원로성 혹은 말레온의 죽음이 공표된 뒤에야 레녹이 한 일이 알려지기 시작할 거라 생각했는데·
중앙전선에 이미 견뢰의 이름이 유명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손을 쓴 결과인지·
당장 파악할 수 없는 추측과 가설을 몇가지 떠올리며 레녹이 생각에 잠긴 사이·
도시의 시민들 역시 걸음을 멈추고 견뢰에 대해 보도하는 뉴스를 시청하고 있었다·
“들었어? 서부전선을 경유하는 노선이 모두 운행이 끊긴 이유가 저것 때문이라더군·”
“토커퍼즈와 엔도로즈 오토마일· 서대륙의 이름난 대도시들도 출입제한을 고려 중이라니 말 다했지·”
중앙전선은 대륙의 온갖 괴물과 초인들이 모여드는 사상 최악의 격전지
자연스럽게 전선에 새롭게 출현한 범법자의 존재는 모두의 관심사일 수밖에 없다·
말없이 고개를 돌린 레녹의 시선이 사람들이 몰려 있는 뉴스 화면 앞에서 멈추었다·
[서부전선에서 발생한 재해의 일부 자료화면을 확보했습니다· 함께 보시죠·]
삑-
데스크에 앉아 있는 앵커의 말과 동시에 화면이 전환되며 푸른 하늘이 비쳤다·
지평선 위로 펼쳐진 하늘· 그 위로 쏟아지는 수천 발의 아름다운 은빛의 유성우·
쿠구구구···!!!
그것이 말레온의 사상전역 은하용성군(銀河龍星群)의 광채임을 레녹이 깨달은 찰나·
[지금 보여드리는 것은 쿤다라가 추락하기 직전 하늘의 풍경을 수백 킬로미터 밖에서 촬영한 영상입니다·]
앵커가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부분의 영상이 파손되어 기록을 남기지 못했으나 교단 측에서 20여 초 가까이 촬영에 성공하여 영상을 공개하였습니다·]
“····”
20초라· 스크린을 보고 있던 레녹이 표정을 찌푸렸다·
보나 마나 교단의 신도들을 갈아서 그 정도의 촬영시간을 확보해 낸 것이겠지·
레녹의 술식을 가까이서 촬영했다면 아예 통하지도 않았을 텐데 거리가 그만큼 떨어져 있었기에 가능했던 건가·
영상을 보자마자 교전의 어느 시점을 촬영해 낸 것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광라무해궁이 무너진 직후의 시점을 찍었군·’
[마스터가 파충류의 위계를 박살 내려던 뒤의 일이네요·]
다비의 첨언처럼 교단이 촬영한 영상은 레녹이 말레온의 위계를 부수기 위해 영역을 ‘쏘아낸’ 직후의 찰나·
무해궁의 영역이 소멸하고 은하용성군이 흔들리며 구겁과 같이 추락하던 당시의 영상이다·
교단 측에서 어째서 이 시점만을 촬영할 수 있었는지는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애초에 광라무해궁과 은하용성군이 멀쩡한 사이에는 그 풍경을 영상으로 담을 수 없었을 터·
[문]이 열린 뒤에는 그 순간을 육안으로 볼 수조차 없었을 테니 촬영이 가능한 순간은 그사이에 존재하는 찰나·
두 사람의 심상이 동시에 부서지며 흔들리는 찰나의 순간을 교단이 놓치지 않았던 것이겠지·
쿠과과과···!!!
무수한 별빛이 거대한 천구를 그리면서 회전하고 은색과 무색의 빛이 교차하며 들썩인다·
그때마다 검게 물든 파문이 폭발하듯 터져 나와 하늘과 지상을 세로로 관통하고 흩어졌다·
하늘에서 떨어지면서 사방으로 별빛과 무광을 흩뿌리는 거대한 천구(天球)의 형상·
은하용성군의 구체에 균열이 일면서 공명하고 이내 엄청난 빛을 내뿜은 그 순간·
뚝-
그대로 영상이 끊기면서 화면이 돌아왔다·
[····]
앵커의 옆에 앉아 있는 기자들이 숨도 쉬지 못하고 입을 벌리고 있었다·
레녹과 함께 뉴스를 시청하는 사람들조차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교단 측에서는 이 영상이 쿤다라를 추락시킨 핵심적인 원인이라 공표하였습니다·]
양손을 모은 앵커가 나직하게 말했다·
[본 영상에 사도살해자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인정하기까지 했죠·]
“····”
[물론 쿤다라의 공식적인 답변이 없는 시점에서 교단의 발표를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영상이 결코 조작되거나 거짓이 아니라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 이 사태가 얼마나 중대한 일인지 경고하기에는 충분했다·
앵커의 옆에 앉아 있던 기자들이 본격적으로 이번 일의 여파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쿤다라의 추락은 서부전선의 환경을 완전히 뒤바꿔놓을 겁니다· 어쩌면 전선을 처음부터 다시 정해야 할지도 모르겠군요·]
[이미 지형이 바뀔 정도의 충격이 있었습니다· 전선이 아니라 지도부터 다시 그려야 해요·]
[장생종들은 하나하나가 엄청난 잠재력을 지닌 생물입니다·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변혁은 피할 수 없을 겁니다·]
[이 모든 일이 단 한 사람의 마법사가 저지른 범죄라는 말입니까?]
뉴스를 시청하면서 조용히 수군거리는 시민들의 목소리·
“완전히 미쳤군··· 저런 걸 같은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 건가?”
“중앙에서 사업하는 사람이 무슨 말을 해도··· 아직도 저게 인간으로 보여?”
“····”
[귀가 간질간질하네요·]
다비의 말을 모른 척 무시한 레녹이 힐끗 시선을 돌렸다·
주변에서 쏟아지는 소식이나 뉴스들이 워낙 많아서 정신이 없지만 그 중에서도 유독 사람이 많이 모여 있는 스크린이 있다·
레녹이 방금 보고 있던 자료화면을 송출하던 뉴스나 막 발견한 여러 패널들이 출연한 프로그램·
마탑의 고위마법사 유명한 전쟁용병 관리국 출신의 군사학자·
현장과 뒷선을 막론하고 각자의 분야에서 이름난 전문가들이 자리에 모여 앉아 있었다·
[예의 마법사가 처음으로 중앙에 모습을 드러냈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듯 사회자가 자연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견뢰라는 대마법사와 그 성정에 대해서는 중앙전선에도 굉장히 잘 알려져 있죠·]
[발칸에서 천번과의 일대일 결전을 아직까지도 분석하고 있는 이들도 많습니다·]
마탑의 마법사들이 사회자의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보탰다·
[천번의 대체영창· 두 대마법사의 술식 대결과 영역까지 화제가 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만-]
[천번과는 달리 견뢰의 마법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그렇게 많지 않았죠·]
[최근에는 천번이 첫 번째 관문에서 엄청난 전공을 세우며 견뢰의 평가가 더 올랐습니다·]
[천번같은 강대한 마법사를 패퇴시킬 정도라면 견뢰의 힘은 대체 어느 정도인지-]
발칸을 무대로 벌어진 천번과 견뢰의 격돌·
8레벨의 대마법사 두 사람이 벌인 결전은 이제 중앙에서 더 유명해진 상황·
먼저 중앙에 진출한 천번이 첫 번째 관문에서 접합술주를 쓰러뜨리며 위상을 높인 이후·
그 천번을 상대로 승리한 견뢰에 대한 평가가 덩달아 높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설마 뒤이어 중앙에 나선 견뢰가 이런 식으로 서부전선을 박살 낼 거라곤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
[중앙전선에 진출하자마자 처음으로 벌인 일이 학살과 도시 붕괴라니····]
[그의 엄청난 악명이나 피에 미쳐 있다는 소문이 외려 축소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겠군요·]
[마키나에서 벌인 파괴공작을 제외하면 외부활동이 거의 없던 거물이라 행동반경을 예측하기가 불가능했죠·]
[적어도 지금까지는 견뢰가 알려진 것 이상으로 피에 젖은 성정의 보유자라는 사실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서슴없이 견뢰의 소문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는 패널들의 모습·
정신없이 프로그램을 시청하던 다른 이들조차 그 말에 자연스럽게 수긍한다·
[이 유기체들의 발언 수위가 슬슬 선을 넘는 것 같은데요·]
다비가 레녹의 품 안에서 고개를 쏙 내밀었다·
[처리할까요 마스터?]
“···뭘 어떻게 처리할 생각인데?”
레녹이 황당한 표정으로 다비의 머리를 품 안에 집어넣으며 대꾸했다·
“내버려 둬· 이제 와서 화를 낼 이유도 없으니·”
[저건 분석도 아니고 마스터를 욕하고 있는 거잖아요· 발칸이었다면 바로 혼쭐을 내줬을 텐데····]
“····”
설마 그동안 발칸 양지 언론에서 견뢰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그렇게 크지 않았던 이유가····
문득 떠오른 생각을 레녹이 털어내고 걸음을 돌리는 사이 영상에서는 견뢰의 입장을 분석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서부전선의 드루이드 학살 [장막]의 훼손과 침입 쿤다라의 추락과 붕괴까지·]
[하나같이 대륙 전역에 추살령이 걸려도 이상하지 않은 사건들뿐입니다만-]
[의외로 중앙의 최선봉 공략파들 중에서는 견뢰를 포섭하려는 이들이 적지 않다고 하더군요·]
[예? 그런 극악무도한 마법사를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한단 말입니까?]
사회자의 적절한 질문에 전문가들의 입이 자연스럽게 열렸다·
[사천사화마경과 두 번째 관문이 각자 다른 이유로 오랫동안 교착 상태에 빠져 있지 않습니까?]
[연맹과 교단의 전쟁이 무의미한 소모전을 반복하는 지금 판세를 바꿀 수 있는 변수를 원하는 거겠죠·]
[중앙에 진출하자마자 서부전선을 박살 내고 쿤다라를 추락시킨 장본인입니다· 성품과는 별개로 능력만큼은 전례 없는 수준이 틀림없어요·]
[제가 속해 있는 ‘기관’에서는 견뢰의 이런 행보가 자신을 어필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어필 수단 말씀이십니까?]
사회자가 반문하자 새하얀 백발의 청년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천번이 첫 번째 관문에서 날뛴 직후 보란 듯이 중앙에 출현했으니 자신의 능력을 보이기 위해서라는 사실은 틀림없죠·]
[그건····]
[내색하지는 않아도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겁니다· 그만한 경지에 오른 초월자들이란 그러한 존재들이니까요·]
청년이 주변의 청중과 전문가들을 바라보며 투명한 미소를 지었다·
[악인이지만 그런 평가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을 만큼 유능한 마법사입니다· 분명 원하는 것이 있어요· 자신의 존재로 판을 바꾸기를 원하는 겁니다·]
[주 중앙전선을 바꾸려 한다는 말은····]
[이렇게 요란한 방식으로 자신의 능력을 증명했으니 여러 세력에서 그 힘을 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
자리에서 일어나 미련 없이 걸음을 옮기던 레녹이 힐끗 시선을 돌렸다·
스스로를 ‘기관’의 일원이라 언급한 백발의 청년· 저 곳에 모인 누구보다 이 상황에 잘 알고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레녹이 한 일로 인해 중앙전선에 미칠 여파와 그 결과에 대해·
“다비· 기관이라 했었지?”
[중앙전선 인근 네트워크를 뒤져볼게요·]
곧바로 레녹의 말을 이해한 다비가 귀를 쫑긋거렸다·
[데이터베이스를 들쑤시면 비슷한 맥락의 정보들을 AI 색인으로 걸러낼 수 있을 거예요·]
“그래· 중앙전선 심처에 그러한 조직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조사해 줘·”
주문연맹과 귀도 교단· 이능개화전단과 데드라이즈·
대륙과 중앙전선을 지배하는 초대형 세력들과는 몇 번 마주해 봤지만 그와는 별개로 전선 최심부에서 중앙도시를 직접 공략하는 조직들이 있음을 들은 적이 있다·
만약 기관이라는 이들이 전선 최심부에서 활동하는 조직을 가리키는 말이라면 레녹 역시 그들에 대한 정보를 숙지해 둘 필요가 있을 터·
[열차역 통신 시스템에 접속하면 지금 당장이라도 가능한데· 바로 시작할까요?]
“···아니· 조금 기다리지·”
레녹이 그렇게 대답하며 인적이 없는 골목 뒤편 외곽으로 향했다·
사람이 아무도 없는 외진 벤치에 앉아 조용히 시선을 돌린 순간·
“슬슬 시간이 된 것 같으니까·”
치직-
주변의 스크린과 전자기기들이 노이즈와 함께 하나둘씩 꺼지기 시작했다·
치이이익···!!
마치 보이지 않는 무형의 막이 통신을 막고 교란하며 이 공간을 차단해나가는 것 같은 위화감·
고요해진 거리 뒷골목의 거리·
도시 바깥이 바로 앞에 내다보이는 외곽 상업지구의 끝자락·
사람의 발길이 끊긴 그 적막한 벤치 끝에서 레녹이 고개를 기울인 순간·
쿵···!!
아주 무겁고 거대한 누군가가 레녹의 앞에 내려선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레녹보다 훨씬 장대한 거구· 전신을 두꺼운 검은 천으로 두른 기묘한 행색·
하지만 그 천 아래로 엿보이는 빛바랜 은색의 비늘을 레녹은 놓치지 않았다·
“모든 일을 끝내기 전에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지·”
레녹이 나직하게 말했다·
“이런 결말을 원하지 않았다 해도··· 반드시 날 찾아올 거라 생각했다·”
“····”
상대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음울하게 가라앉은 의념을 무겁게 흘렸을 뿐·
그것만으로 레녹은 그가 이 순간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스스로 기대하지 않은 마지막이기에 깔끔하지 않은 결말임을 알고 있기에·
바라지 않는 미련만이 그곳에 있다 하더라도·
“기다리고 있었다 말레온·”
“···반·”
두꺼운 천 안쪽으로 날카로운 용의 얼굴이 희미하게 엿보였다·
마치 온몸을 찢었다가 꿰매어 붙인 것처럼 너덜너덜하고 처참한 모습·
레녹을 바라보는 말레온의 눈은 한없이 음울한 빛을 품고 가라앉아 있었다·
“왜··· 내가 살아 있는 건가·”